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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임애월 편집주간
벼랑 끝 절망이 담쟁이의 희망이다
-강상기 시인-
나뭇잎들이 유난히 싱그러운 오월 어느 날, 조계사 경내에서 강상기 선생님을 만나 뵈었다.
강상기 선생님은 1980년대 ‘오송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시는 등 평탄치 않는 시대의 거친 산맥을 넘어오셨다. 소문으로만 듣던 선생님의 굴곡진 삶의 이야기를 직접 육성으로 듣게 되어 조금은 긴장이 되었다.
임애월 - 강상기 선생님, 안녕하세요?
정말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신록이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이렇게 싱그러운 날 서울도심의 사찰 경내를 걸어보는 것도 참 좋네요. 이렇게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966년에 월간지 『세대』, 1971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셨으니 이제 문단생활이 반세기가 다 되어가고 있네요. 선생님께서는 전주에서 신석정 선생님께 사사 받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 신석정 선생님과의 인연 등 당시 이야기들을 들려주실 수 있으세요?
강상기 - 네 그렇게 하죠. 그 분에 관한 이야기라면 저의 기쁨입니다.
신석정 시인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제가 중학교 일학년 때입니다. 겨울방학을 시골 조부모 집에서 지낼 때 고종사촌형이 『촛불』, 『슬픈 목가』 라는 신석정시인의 시집을 읽어주기도 하고 또 읽어보라고 해서 탐독한 일이 있는데 그때 매료되었습니다. 그 시인을 만나보고 싶었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시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지내다가 고동학교 3학년 봄에 교내 백일장이 있었습니다. 참가하고 싶은 학생을 대상으로 방과 후에 야외에서 실시했습니다. 나는 백일장에 참여한 친구의 가방을 지켜주려고 남아 있었는데 그 친구가 나보고도 한 번 써보라고 용지를 가져다주어서 기다리기 지루해 썼습니다. 나는 제출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 친구가 내가 쓴 시를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가 장원으로 뽑혔어요. 입시에 전념해야할 시기에 사단이 벌어진 것입니다. 나는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다가 몇 편의 시를 써서 신석정시인을 찾아뵙기로 했습니다. 석정시인은 당시 전주상고에서 근무하고 계셨는데 제가 원고를 들고 학교로 찾아간 거예요. 선생님은 내 용건을 알고 집으로 가서 이야기하자고 하시었습니다. 선생님 댁에 갔는데 한옥집에 정원도 아주 잘 가꿔 놓았어요. 시집에서 읽던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선생님은 시에 관한 말씀은 하시지 않고 술상을 내오도록 해서 저에게 술을 권하면서 이런저런 시국에 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작은 주전자로 세 주전자의 술을 마셨습니다. 선생님은 너무 술맛들이지 말라고 충고하시면서, 그러나 시는 열심히 써보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이후로 입시공부는 등한시하고 시 쓰는 일에만 재미를 붙여 시작품이 모아지면 석정시인을 찾아뵙곤 했어요. 그 인품이 대단해서 시인이라면 저래야겠구나 싶었습니다.
임애월 – 그러셨다면 그때 혹시 신석정 시인께서 문단에 등단시켜 주신다는 말씀은 없으셨나요?
강상기 - 있었죠. 1965년 대학 1학년 때인 오월에 5편정도 시를 써 가지고 석정 선생님 댁에 갔었어요. 시를 보시더니 네 시를 『문학춘추』에 추천하시겠다고 해서 추천받으면 어떻게 되냐고 했더니 시인이 된다는 거예요. 깜짝 놀랐죠. 그런데 제 작품이 나온다는 달, 아마 7월호일 텐데 통권 15호로 자진 폐간했습니다. 아마 재정난이었다는 것 같아요.
임애월 –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때 추천 받으셨다면 아마도 <세대> 신인상 수상이나 신춘문예 당선도 없었겠는데요.
강상기 - 아마 그랬을 겁니다.(웃음)
임애월 - 비켜갈 수 없는 질문 하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강상기 시인’하면 오송회 사건이 생각나는데요. 그 사건이 있었다는 것은 알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문단에서도 잘 모르고 있어요. 분단국가인 우리들만의 비극인데요. 김지하 님의 시 <오적> 낭송을 했다는 이유로 교사들을 간첩으로 내몰았던 1982년 오송회 사건 때문에 선생님께서는 고문과 옥고를 치르시는 등 고생을 많이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다시 생각하시는 게 괴로우시겠지만 괜찮으시다면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육성으로 직접 듣고 싶습니다.
강상기 - <오적> 시 낭송을 한 것이 아니고 당시 일본에서 간행된 『오적』 시집을 문규현 신부님이 소지하고 있었어요. 그 시집을 복사해서 국어선생님들이 나눠가졌어요. 그러나 그게 큰 문제가 된 것이 아니고 오장환의 『병든 서울』이라는 시집이 문제가 되었어요. 『병든 서울』은 신석정 시인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빌려다 필사한 시집을 이광웅 시인이 보관하고 있었고 이것을 복사해서 국어과 선생님들 몇 분이 소지하고 있었어요. 국어과 선생님 한 분이 이 시집을 제자에게 빌려주었는데 버스에 두고 내린 거예요. 이를 버스 안내양이 동무라는 단어도 있고 좀 이상하다 싶어 경찰에 신고해서 사건화 된 거죠. 최초로 필사를 했던 이광웅 시인이 주범이 되고 다른 선생님들도 불온문서 소지와 탐독을 했다고 해서 종범으로 잡아들인 거지요.
임애월 - 그러면 오송회라는 단체는 정말 있었습니까?
강상기 - 있기는 뭐가 있어요. 그것은 수사기관에서 조작해서 만든 것입니다. 처음에는 오성회라고 만들었어요. 남성고 출신들의 모임이라는 식으로 했는데 그 중 한 분이 남성고 출신이 아니니까 다시 명칭을 오송회라고 만들었죠. 이들이 소나무 밑에서 막걸리를 마시면서 당시 군부파쇼정권이 4.19기념식을 폐지한 것에 대하여 분개해서 성토한 일이 있는데 여기에 착안한 것이죠.
임애월 - 우리를 놀라게 했던 역사적 사건 가운데는 조작된 사건들도 많다고 들었어요. 그렇게 조작을 주동한 사람들은 부와 권력을 얻어 영화를 누리는데, 피해자들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도 씻을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강상기 - 물론이죠. 이런 야만적인 일은 우리 역사에서 더 이상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지금도 잘못된 정책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을 종북세력으로 몰아 부치는 경우도 있잖습니까. 이래가지고는 민주주의가 성숙할 수 없죠. 진보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이런 일방통행이 지속되면 걷잡을 수 없도록 부정부패가 만연하게 됩니다.
임애월 - 이쯤 되면 80년대 당시 문학과 이데올로기의 관계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이 궁금해집니다.
강상기 - 80년대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역할이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이미 상식이 된 이야기지만 군부정권을 지지하는 미국이 5.18광주민주항쟁을 진압하도록 군대이동을 허락한 것 아닙니까? 군사 작전권을 미국이 쥐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용인 없이는 그렇게 이동할 수 없어요. 박정희 군부정권이 붕괴하고 민주주의 정부가 탄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은 전두환 군부 세력은 민주주의의 염원을 짓밟았습니다. 자국의 백성들 세금으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할 군대가 자국의 백성을 엄청난 피로 물들이는 대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이런 배경 아래에서 과연 문학의 역할은 무엇이겠습니까? 사실 무력하기 짝이 없었지요. 그러나 시인의 양심으로서 군부독재의 파쇼에 대한 저항을 해야했지요. 백성이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면서 자유를 외쳐야 했지요. 하지만 구호가 앞서는 시는 예술영역에서 소홀하게 취급된다는 것도 염두에 둬야 했다고 봐요.
임애월 – 이제 화제를 바꿔 선생님의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죠.
집회장에 도착하기 전에
멀리서
와와
함성이 들려왔다
가까이 가서
똑똑히 보고 들을 수 있었다
바다에 다다르기 전에
멀리서
쏴쏴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 가서
다 보고 들을 수 있었다
호수를 버리고
날아오르는 백조도
와와 쏴쏴일 뿐이었다
- 「와와 쏴쏴」 전문
이 시에서 ‘쏴쏴’가 파도소리로 묘사되어 있는데 혹시 다른 의미로 읽어도 되는지요?
강상기 - '쏴쏴' 를 파도소리의 의성어로 볼 수도 있고, 명령어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가 민주주의 성취에 이르기까지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집회와 시위를 통해서 여론을 분출하는 과정을 겪습니다. 그러는 과정에 한쪽은 와와 집회 시위를 하고 한쪽은 집회 시위를 금지 방해하고 최루탄이나 총을 쏘아 진압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이래서 호수를 버려야만 하늘을 얻는 백조도 같은 양상으로 보았고요, 다른 의미로 보자면 우리가 진리의 본체를 가리키는 경전은 '와와' '쏴쏴' 라고 생각해요.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와와' '쏴쏴'라고 말입니다.
임애월 - 위의 시집 『와와 쏴쏴』 에 실려 있는 「담쟁이」란 시에서 ‘담쟁이’와 ‘벽’의 관계에 대해 작가의 생각을 직접 듣고 싶습니다.
강상기 -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작품을 먼저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담쟁이는 벽을 평지로 알고 산다
담쟁이는 벽을 넘는 것이 아니라
평지 끝 절망의 벼랑과 만난다
벽을 놓지 못한 채
제 한 몸 던져
끝끝내 매달려 있는
담쟁이의 벽
하늘에 목숨을 맡긴 채
평지 끝 절망의 벼랑에서
고공 투쟁하는
벼랑 끝 절망이
담쟁이의 희망이다
-「담쟁이」 전문
담쟁이는 임금노예를 말할 수 있겠고요. 벽은 자본에 짓눌린 그야말로 임금노예를 벗어날 수 없는 한계상황이겠죠. 인간은 빵을 얻는 과정에서 순수함을 잃고 비굴한 노예가 됩니다. 자본주의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너무 힘들게 합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무언가를 열망하는데 그것을 성취하기에는 빵 문제 해결이 급선무이지만 평생 일해도 아니, 몇 대에 걸쳐 뼈 빠지게 일해도 그 뼈 빠지는 일을 벗어날 수 없는 참혹한 구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확대하자면 인간이 주어진 한계상활을 벗어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기에 벽을 평지로 알면서 평지 끝 절망의 벼랑에 매달린 채 살아갈 뿐이라는 것을 말하고도 싶었죠. 우리 마음속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기쁨이 넘쳐흘러야 하는데......
임애월 – 절망적인 상황을 일상으로 묵묵히 살아내는 서민들의 애환...... 그 벽이 너무 높고 견고해서 가슴이 저립니다.
바다에서 물방울 하나 건져 올렸다 / 이게 바다란 말이지 / 바다를 거처로 삼은 빗방울이었단 말이지 // 빗방울들이 죽어 유골의 하얀 뼛가루가 / 뿌옇게 바다 위로 뛰어 내린다 / 저렇게 바다 위로 겁도 없이 뛰어드는 것은 / 속 깊고 넓은 벗임을 알기에 / 함께 출렁이며 흘러 다니던 벗임을 알기에 // 저 유골의 뼛가루가 아름다운 것은 / 바다에서 일어서는 하얀 파도가 되었기에 / 전체 속에 뛰어들어 내가 없기에 // 나는 바다에서 건져 올린 물방울 하나 / 다시 전체 안에서 용해되는 바다
- 「물방울 하나」 전문
저는 선생님의 시 「물방울 하나」가 기억에 오래 남는데요, ‘바다’라는 전체와 ‘물방울’이라는 개인의 관계에서 ‘용해’라는 시어를 통해 전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느껴집니다.
전체는 그렇게 ‘물방울’이 용해되어도 좋을 만큼 믿을 수 있는 대상일까요? 아니면 제가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오해인가요?
강상기 - 부분은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한 방울의 피가 한 대야의 물을 물들입니다. 우리 생애도 이와 같아서 작은 진실이 우리 생명의 빛깔을 결정할 수도 있고 한 방울의 피 같은 내가 세상의 무늬를 바꿀 수도 있습니다.
임애월 시인께서 묻고자하시는 말씀은 개인이 사회공동체를 믿을 수 있겠는가? 개인을 지우고 공동체와 하나가 되었을 때 나의 자주성, 나의 정체성이 소멸하는 것 아니냐 하는 질문으로 들립니다. 물론 그런 관점에서 생각하면 사회적 평등문제라든지 불평등문제라든지가 야기되어서 갈등을 일으키지요. 그러나 대자연속의 나 하나, 진실을 감춘 거대한 바다가 비밀스럽게 누워 있는 속에 물방울 하나인 내가 오히려 바다 전체가 되는 생각이 요동쳐서 쓴 것이 이 시라는 것을 말하고 싶네요. 내가 곧 온 세상이다, 내가 곧 이 사회다 그러므로 나는 너고, 너는 나다 서로의 경계를 나누지 않고 통일체로 생각하다보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지지 않을까요? 세상은 아름다움이 널려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찾아 굳이 테마여행을 떠날 필요가 없어요.
임애월 – 네, 그렇게 거시적인 관점에서 읽으니 이 작품의 진가가 드러나는군요. 해석은 독자의 몫이라고는 하지만 잘못 이해하는 데서 오는 오류도 만만치 않겠습니다.(웃음)
대상과 인식의 간극에서 생명력을 건져 올리는 게 문학이라면 지금 시대는 인식의 변환점에 도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요즘 시인들의 인식체계에서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강상기 - 이 나라는 자본주의 사회이고 분단 상황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여러 병적인 문제라든가 자유가 짓눌린 억압상황에 놓여 있는 원인을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고 있어요. 이런 태도는 악화된 상황을 개선하기보다는 더욱 공고하게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할 뿐이거든요. 종교도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서 발언하는 게 아니고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고 사람들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있어요. 여기에 시인들까지 가담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힘든 것은 네 탓이니 시를 읽고 마약과 같은 위안이나 받아라, 아니면 인간 잠재된 병적인 의식을 마치 개인이 극복 못해서 그런양하면서 구조적인 문제는 외면하는 식이지요. 이번 세월호 참사에 관한 시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당연히 슬픈 일이지만 어디 슬픔만 노래할 일입니까?
구조적인 비리가 그 죽음 뒤에 가려져 있습니다. 이것을 바라보고 분노해야 하는데 언론이나 시인들은 추모의 정만 나타내고 있습니다. 총체적인 사회비리를 고발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분단상황을 들먹이며 우리 사회의 분열세력으로 몰고 가려는 경향이 있지요.
시인들이라면 현재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시작(詩作)의 바탕에 깔려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임애월 – 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비슷비슷하게 쓰는 영혼 없는 추모시 등은 이제 진력이 납니다.
‘나는 분명 존재계와 나를 분리해 생각함으로서 존재계가 나를 억압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나를 고요히 명상 속에 비워버리면 존재계와 분리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저 허망함과 덧없음이 자연이고 나 또한 그렇다. 미혹의 잠에서 깨어나도록 나를 일깨우는 것, 내가 시를 쓰는 행위는 곧 바로 여기에 있다’고 시 쓰기에 대해 피력하시면서, ‘허망함과 덧없음’의 ‘나’를 일깨우는 작업이 곧 시 쓰기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선생님, 후배들에게 시 쓰기의 가장 기본이 되는 지침을 하나 정도 일러주시겠습니까?
강상기 -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사물 그 자체입니다. 이 아름다움을 찾아 시인은 도를 닦듯이 시를 써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시도(詩道)는 가시밭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빵이 되지 않는 시를 쓰고 있는 것은 참으로 고난을 자초하는 것이지요. 가난하고 힘들어도 끊임없이 허망한 존재의 덧없음을 극복함으로써 존재감과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지요. 가난해서 오히려 충만하다면 그 길을 가는 것이죠. 그걸 감내할 자신이 없이 그저 명예만을 추구하고 싶다면 시를 생산하는 자영업에서 손을 놓아야죠.
임애월 - 근래에 큰 수술을 받으셨다고 들었어요. 그런데도 시작활동은 왕성하게 하시고 계시는데......
강상기 - 그동안 술을 너무 마시고 살았어요. 삶을 지탱하는 데 활력도 되었지만 그 후유증이 큽니다. 이제는 술을 한 잔도 하지 못합니다. 가끔 술을 마시고 싶은 충동이 일지만 삼가하고 있어요. 더구나 위를 절재했는데 처음 시술 때 암세포를 제거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절재하는 의료사고가 생긴 겁니다. 7개월 후에 꿰맨 상처에서 암세포가 발견되어 재수술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의사의 실수로 위 천공이 생겨 무척 고생했습니다. 두 번 다 의사한테는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실수를 솔직히 시인하기에 그래, 실수하면서 명의가 되겠지 싶어 이해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이 되어가지만 삶의 질은 예전 같지 않습니다. 모임이나 개인적 만남이 줄었습니다. 척박한 환경에 위기를 느끼는 나무가 열매를 많이 맺는 것처럼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생각이 깊어지고, 그래서 시작에 시혼이 집중하는 것이겠지요.
임애월 – 의료사고를 그냥 덮어두셨다니, 저로서는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그런 좋은 마음이셨으니 앞으로는 더욱 건강해지시리라 믿습니다.
선생님께서 제일 아끼시는 작품, 제일 특별한 작품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고요, 왜 그러 하신지도 말씀해 주세요.
강상기 -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잔솔밭에 타오르는 연기
갈대며
가시덤불이며
저 모조리 타버리고 남은 잿바닥을 갈아
나는 새 씨앗을 뿌리려 왔다
- 「화전민」 전문
제가 살고파 가슴이 뛸 때마다 이 작품이 생각나요. 너는 이 세상에 와서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다 가고 싶었냐고 누가 묻는 다면 나는 화전민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다른 모습으로 바꾸고 싶어 괴로워했다고 말하고 싶어요. 제가 시를 쓰는 사상적 배경이나 이유를 이 시가 어느 정도 답해준다고 봐요.
임애월 – 「화전민」을 듣고 나니 왜 그런지 가슴이 싸아합니다.
선생님의 뿌린 ‘새 씨앗’이 발아하여 가시덤불을 제치고 창창한 숲으로 우거지는 날들이 보입니다.
이제 입하도 지나고 절기로나 체감으로나 여름이 왔다고 느껴집니다.
여름과 관련이 있는 작품 있으시면 한 편 소개해 주세요. 창작배경도요.
강상기 -
모래톱에 얹혀 있는 목선 곁에 누워
나는 물에 젖은 몸을 말렸다
물위로 솟아오를 때마다
너의, 젖가슴은 풍선처럼 출렁거렸다
모래장판위에 누워 내가 몸을 태우는 동안
목선은 시원한 지붕을 만들어 주었다
어깨 위로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의 물을 털며
바다를 걸어 나오는 너의 온몸에 달라붙은 물방울이
태양빛에 반짝이며 흘러내리는 그냥 그대로
너는 말없이 나의 곁에 누웠다
태양 불빛 아래 너와 나는 파도 정원을 바라보며
열린 하늘 창으로 시원하게 들어오는 바닷바람의 애무에
자칫 호흡을 잊을 뻔했다
- 「어떤 침실」 전문
여름에 관한 시는 제가 격렬하지 못해서 그런지 몰라도 이 작품 하나에요. 사이판에 여행을 갔을 때 현지에 여행 온 어떤 여인을 만났어요. 전날 밤에 바닷가에서 작은 축제가 있었어요. 이때 현지인의 민속춤을 잘 따라하는 남녀 한사람을 뽑아 상을 주는 프로가 있었는데 나와 그녀가 뽑혔어요. 그런 이유로 친해져 수영도 같이 하고 두 사람 사이 판이 좋았죠. 그걸 써본 거예요.
임애월 - 바닷가에서, 더구나 외국의 섬에서 낭만적이고 멋진 여름날의 추억을 만드셨네요.(웃음)
몸도 불편하신데 이렇게 긴 시간 대담에 응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강상기 - 오히려 제가 감사할 일이지요. 『한국시학』을 잘 이끌어 가시는 임애월 시인께서도 건강하시고 문운이 충만하시길 빕니다.
대담을 마친 후 선생님께서는 조계사 앞에 있는 소박한 사찰음식점으로 필자를 안내 하셨다. 박해전 시인님과 셋이서 부담 없는 분위기의 조촐한 오찬을 마치고 근처의 아주 작은 찻집에 들렀다. 그곳에서 아주 귀한 보이차 등을 세 잔이나 얻어마셨다.
지나는 객들에게 차 값을 받지 않는다는 그 집 주인도 대단한 분인 것 같다.
어쩌면 보이는 재물에만 눈이 어두워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사는 현대인들의 무지몽매를 차 한 잔으로 깨우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모두가 깨어있다면 강상기 선생님의 바람처럼 언젠가는 모두가 평등하게, 아름답게 사는 세상이 반드시 도래하리라 믿는다.
오월 어느 날 인사동 거리엔 푸르른 햇살, 눈부시게 내리고 있었다.
강상기 시인 프로필
1946년 전북 임실출생
1966년 월간종합지 『세대』
197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 『이색풍토』(공저), 『철새들도 집을 짓는다』, 『민박촌』, 『와와 쏴쏴』
산문집 : 『빗속에는 햇빛이 숨어 있다』,『『자신을 흔들어라』
『역사의 심판은 끝나지 않았다』(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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