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놓아야 하며, 이것은 오직 설교를 통해서만 실현됩니다.
위대한 청교도 목회자, 리처드 백스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교회는 재산이나 세상적인 화려함에 의해 흥하거나 망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 가운데 지식과 열정 그리고 사역에 대한 능력의 여부에 따라 흥하거나 망한다."
1)저는 목회자의 역할과 목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고린도 교회가 처한 상황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사도 바울이 애써 일군 목회 현장을 거짓 교사들이 망치고 있었습니다. 이런 위기는 바울의 핵심적 주장을 야기시켰으며, 목사의 역할에 대해 깊이 숙고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고린도전서 4장을 통해 진정한 목회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리펴보고자 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목회자와 협잡꾼인 거짓 교사 간의 첨예한 대립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참된 목자가 지니는 세 가지 특징을 열거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변론합니다.
참된 목사의 첫 번째 특징 : 십자가 중심의 설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마땅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2)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가 바로 진정한 사역자가 겆춰야 할 모습입니다. 바울은 이런 이유로 고린도 성도들이 참된 복음의 사역자나 전도자에게 경쟁적으로 충성하여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에 성도들을 모은 것이 정말로 복음이라면, 그들은 같은 복음을 섬기는 여러 사역자 가운데서 서로 분리되기보다는 연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의 사역자를 최종적으로 판단할 지위에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고린도의 이런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중요한 원칙을 얻게 됩니다. 즉,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역자를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한 특권이라는 사실입니다. 복음 사역자는 특별히 하나님의 신비와 비밀 즉, 복음을 맡은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이 아니라 타인의 재산을 대신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목회자는 일한 기간에 상관없이 사역하는 교회가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모든 교회는 주님의 교회이며 하나님은 자신의 종에게,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를 맡기셨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목회자와 전도자는 주님께 충성하였는가를 기준으로 판단받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고린도 성도들이 이해하기를 바랐습니다. 복음 사역자의 주인은 고린도 교회의 회중이 아니며 사역자들을 제어할 것 같은 세상적인 기준도 아닙니다. 1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사도 역시 주인이 아닌 섬기는 자였습니다! 사도들은 근본적으로 고린도 교인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이었습니다. 메튜 헨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가진 권한은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데 있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전파하는 데 있었다.3) 사도들은 주님의 보내심을 받아 복음을 전파했고 그리하여 교회가 시작됐습니다. 우편 제도는 왜 필요합니까? 대가를 지불하면서 배달부에게 바라는 바는 무엇입니까? 배달부가 우리에게 편지를 써서 우편함에 넣어 주기 바라면서 돈을 내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누군가가 보낸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합니다. 사역자와 사역 역시 같은 성질입니다. 우리는 메시지를 고안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메시지를 백성에게 신실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소명입니다. 즉 하나님의 메시지를 백성에게 전달하는 의미에서만 우리는 사역자라고 부리는 것입니다. 교회를 소유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잣니의 백성을 창조하십니다.
어느 환영회에 참석한 저는 천주교 신자와 함께 최근에 출판된 책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책에 대한 그의 생각을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주 훌륭한 책입니다. 한 가지 흠이라면 저자가 성경이 교횔르 창설하였다고 주장하는 옛날 프로테스탄트의 실수를 반복하고 있더군요." 그는 확신하며 말을 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교회가 성경을 만들었다고 알고 있는데도 말이죠." 저는 정말 당혹스러웠습니다. 제가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뭐라고 말해야 합니까? 저는 아주 솔직하게 부정적인 견해를 말한 그 친구처럼 저 역시 원하는 만큼 솔직하게 반대 의견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최대한 상냥하게 말을 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문자 그대로 하나님이 말씀으로 만물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약속의 말씀으로 아브라함을 우르 지방에서 불러내십니다. 에스겔 37장에서는, 바벨론에 사로잡혀 있는 이스라엘에게 전하도록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도래할 위대한 부활 사건에 대해 환상을 줍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한 초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것을 발견합니다. 로마서 10장은 믿음과 신령한 삶은 말씀으로 말미암으며 하나님은 항상 말씀으로 자기 백성을 창조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외에 다른 방식은 없었습니다!
이후의 대화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언급한 대화 내용은 말씀의 절대적인 중요성에 대한 제 자신의 이해를 구체화하는 데 확실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말하는 이해는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해 오셨는지에 대한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목회의 우선순위에 실제적인 영향을주는 구체적인 것이었습니다. 목사들이 받는 광고 우편물을 생각해 보십시오. 광고문은 특정한 물품을 구입하면 목회가 성공한다고 약속합니다. 오디오 장비, 음악, 교육 과정, 콘퍼런스, 주차장 등 무엇이든 돈을 투자하면 목회의 성공과 실패에 변화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목회자 자신이 불충분하고 준비되지 못한 죄책감을 느끼도록 합니다. 이런 함정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말씀 사역의 우선순위와 말씀 사역 자체가 충분한 것임을 확신해야 하며 모든 사역을 말씀에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백성의 선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셨습니까? 그렇게 많은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해 나가는 사람을 찾기 힘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회중 가운데 공개적으로 죄를 회개하지 않고 증거를 희석시키며 교제를 와해하는 사람을 용납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왜 우리는 이렇게도 교회 권징을 무시하는 것입니까? 교회 권징을 효과적으로 실천하는 데 필요한 성경 지침을 회중을 지도하는 데 적용하지도 않고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을 경시하였기 때문이 아닙니까? 왜 우리는 권징을 등한시했습니까? 교히 구성원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먼저 분명하게 정의내리지 않았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어째서 그럴 수 있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왜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설교하는 데 헌신하기 전에 세상에 있는 많은 것에 자신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비록 선한 의도를 가졌더라도 말입니다. 성경보다는 메일을 읽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씁니다. 우리는 삶 가운데 성경의 능력을 적게 체험하면서 그런 체험을 상회하여 성경의 권위를 옹호합니다.
마크 데버 /워싱턴 DC 의 케피톨 힐 침례교 (Capitol Hill Baptist Church) 담임목사
출처 : 십자가를 설교하라 (마크 데버 외 6인 공저, 이심주 옮김 / 부흥과 개혁사), p. 25~35.
----------
1) Marcus Loane, Makers of Puritan History (Grand Rapids, MI: Baker, 1961), p. 188. 2) 본장에서 다른 말이 없으면 성경 본문은 NIV 성경에서 인용한다. 3) Matthew Henry's Commentary on the Whole Bible, 6권: Acts to Revelation (재판. McLean, VA: MacDonald, 발행년도 불명), p. 522.
교회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놓아야 하며, 이것은 오직 설교를 통해서만 실현됩니다.
위대한 청교도 목회자, 리처드 백스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교회는 재산이나 세상적인 화려함에 의해 흥하거나 망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 가운데 지식과 열정 그리고 사역에 대한 능력의 여부에 따라 흥하거나 망한다."
1)저는 목회자의 역할과 목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고린도 교회가 처한 상황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사도 바울이 애써 일군 목회 현장을 거짓 교사들이 망치고 있었습니다. 이런 위기는 바울의 핵심적 주장을 야기시켰으며, 목사의 역할에 대해 깊이 숙고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고린도전서 4장을 통해 진정한 목회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리펴보고자 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목회자와 협잡꾼인 거짓 교사 간의 첨예한 대립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참된 목자가 지니는 세 가지 특징을 열거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변론합니다.
참된 목사의 첫 번째 특징 : 십자가 중심의 설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마땅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2)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가 바로 진정한 사역자가 겆춰야 할 모습입니다. 바울은 이런 이유로 고린도 성도들이 참된 복음의 사역자나 전도자에게 경쟁적으로 충성하여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에 성도들을 모은 것이 정말로 복음이라면, 그들은 같은 복음을 섬기는 여러 사역자 가운데서 서로 분리되기보다는 연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의 사역자를 최종적으로 판단할 지위에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고린도의 이런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중요한 원칙을 얻게 됩니다. 즉,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역자를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한 특권이라는 사실입니다. 복음 사역자는 특별히 하나님의 신비와 비밀 즉, 복음을 맡은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이 아니라 타인의 재산을 대신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목회자는 일한 기간에 상관없이 사역하는 교회가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모든 교회는 주님의 교회이며 하나님은 자신의 종에게,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를 맡기셨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목회자와 전도자는 주님께 충성하였는가를 기준으로 판단받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고린도 성도들이 이해하기를 바랐습니다. 복음 사역자의 주인은 고린도 교회의 회중이 아니며 사역자들을 제어할 것 같은 세상적인 기준도 아닙니다. 1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사도 역시 주인이 아닌 섬기는 자였습니다! 사도들은 근본적으로 고린도 교인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이었습니다. 메튜 헨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가진 권한은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데 있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전파하는 데 있었다.3) 사도들은 주님의 보내심을 받아 복음을 전파했고 그리하여 교회가 시작됐습니다. 우편 제도는 왜 필요합니까? 대가를 지불하면서 배달부에게 바라는 바는 무엇입니까? 배달부가 우리에게 편지를 써서 우편함에 넣어 주기 바라면서 돈을 내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누군가가 보낸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합니다. 사역자와 사역 역시 같은 성질입니다. 우리는 메시지를 고안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의 메시지를 백성에게 신실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소명입니다. 즉 하나님의 메시지를 백성에게 전달하는 의미에서만 우리는 사역자라고 부리는 것입니다. 교회를 소유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잣니의 백성을 창조하십니다.
어느 환영회에 참석한 저는 천주교 신자와 함께 최근에 출판된 책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책에 대한 그의 생각을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주 훌륭한 책입니다. 한 가지 흠이라면 저자가 성경이 교횔르 창설하였다고 주장하는 옛날 프로테스탄트의 실수를 반복하고 있더군요." 그는 확신하며 말을 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교회가 성경을 만들었다고 알고 있는데도 말이죠." 저는 정말 당혹스러웠습니다. 제가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뭐라고 말해야 합니까? 저는 아주 솔직하게 부정적인 견해를 말한 그 친구처럼 저 역시 원하는 만큼 솔직하게 반대 의견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최대한 상냥하게 말을 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문자 그대로 하나님이 말씀으로 만물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약속의 말씀으로 아브라함을 우르 지방에서 불러내십니다. 에스겔 37장에서는, 바벨론에 사로잡혀 있는 이스라엘에게 전하도록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도래할 위대한 부활 사건에 대해 환상을 줍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한 초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것을 발견합니다. 로마서 10장은 믿음과 신령한 삶은 말씀으로 말미암으며 하나님은 항상 말씀으로 자기 백성을 창조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외에 다른 방식은 없었습니다!
이후의 대화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언급한 대화 내용은 말씀의 절대적인 중요성에 대한 제 자신의 이해를 구체화하는 데 확실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말하는 이해는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해 오셨는지에 대한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목회의 우선순위에 실제적인 영향을주는 구체적인 것이었습니다. 목사들이 받는 광고 우편물을 생각해 보십시오. 광고문은 특정한 물품을 구입하면 목회가 성공한다고 약속합니다. 오디오 장비, 음악, 교육 과정, 콘퍼런스, 주차장 등 무엇이든 돈을 투자하면 목회의 성공과 실패에 변화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목회자 자신이 불충분하고 준비되지 못한 죄책감을 느끼도록 합니다. 이런 함정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말씀 사역의 우선순위와 말씀 사역 자체가 충분한 것임을 확신해야 하며 모든 사역을 말씀에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백성의 선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셨습니까? 그렇게 많은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해 나가는 사람을 찾기 힘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회중 가운데 공개적으로 죄를 회개하지 않고 증거를 희석시키며 교제를 와해하는 사람을 용납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왜 우리는 이렇게도 교회 권징을 무시하는 것입니까? 교회 권징을 효과적으로 실천하는 데 필요한 성경 지침을 회중을 지도하는 데 적용하지도 않고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을 경시하였기 때문이 아닙니까? 왜 우리는 권징을 등한시했습니까? 교히 구성원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먼저 분명하게 정의내리지 않았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어째서 그럴 수 있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왜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설교하는 데 헌신하기 전에 세상에 있는 많은 것에 자신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비록 선한 의도를 가졌더라도 말입니다. 성경보다는 메일을 읽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씁니다. 우리는 삶 가운데 성경의 능력을 적게 체험하면서 그런 체험을 상회하여 성경의 권위를 옹호합니다.
마크 데버 /워싱턴 DC 의 케피톨 힐 침례교 (Capitol Hill Baptist Church) 담임목사
출처 : 십자가를 설교하라 (마크 데버 외 6인 공저, 이심주 옮김 / 부흥과 개혁사), p. 25~35.
----------
1) Marcus Loane, Makers of Puritan History (Grand Rapids, MI: Baker, 1961), p. 188. 2) 본장에서 다른 말이 없으면 성경 본문은 NIV 성경에서 인용한다. 3) Matthew Henry's Commentary on the Whole Bible, 6권: Acts to Revelation (재판. McLean, VA: MacDonald, 발행년도 불명), p. 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