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무엘하 2장 4~7절, 누가복음 12장 6절, 누가복음 16장 10절
유다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 곳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서, 유다 사람의 왕으로 삼았다. 사울을 장사지낸 사람들이 길르앗의 야베스 사람들이라는 소식이 다윗에게 전해지니, 다윗이 길르앗의 야베스 주민에게 사절을 보내어서, 그들에게 이와 같이 전하였다. "야베스 주민 여러분이 사울 왕의 장례를 잘 치러서, 왕에게 의리를 지켰으니,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일을 하였으니, 이제는 주님께서 여러분을 친절과 성실로 대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도 여러분을 잘 대접하겠습니다. 비록 여러분의 왕 사울 임금님은 세상을 떠나셨으나, 유다 사람이 나에게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삼았으니, 여러분은 이제 낙심하지 말고, 용기를 내기를 바랍니다." <표준새번역>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개역개정>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실하고, 지극히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불의하다. <표준새번역>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때로는 좋은 뜻으로, 때로는 반대로 나쁜 뜻으로도 모두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평소에는 소심하고 부족해 보여서 잘 할 수 있을까 걱정되는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한 자리를 맡기고 보니 역량이 발휘되어 그 자리를 빛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원래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어떤 자리에 가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이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있는 '자리'가 그 '사람'을 만드는 것을 우리 그리스도인은 경계해야 합니다. 결코 자리가 나의 명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자리 때문에 달라지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좋은 뜻으로 사용되어져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리가 많은 이들을 사랑하고, 섬기고, 베풀며, 나누는 하나님의 마음의 통로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그렇게 좋은 예로 '자리가 사람을 만든' 인물이 있다면 바로 다윗입니다. 그래서 다윗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 되고 나서도 결코 왕이 되기 전에 가졌던 마음을 잊지 않습니다. 다윗은 사무엘상 후반부에 보았듯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면서, 의미없는 전쟁을 통하여 피를 두 손에 묻히며 살던 자신의 삶을 청산하고 주변을 돌아보며 긍휼을 베푸는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렇게 점점 왕이 되어갈 준비를 시키셨던 하나님이십니다. 정말 연약하고 부족했던 다윗이 어떤 자리에 앉아도 그 겸손을 잊지 않을 정도의 광야를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다윗의 고백대로입니다. 시편 23편이 바로 그 광야를 통과하면서 지은 대표적인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그렇게 광야를 통과한 다윗은 달라졌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고 존경하고 닮고 싶어하는 다윗으로 점점 변화되어 갑니다. 사무엘상이 마무리되어 가던 30장 후반부를 보니 다윗은 이제 정말 큰 인물로 변해가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함께 출전하였던 군인들 가운데서 악하고 야비한 사람들은, 거기에 남아 있던 이들이 못마땅하여, 자기들과 함께 출전하지 않았던 군인들에게는 되찾은 물건을 하나도 돌려 주지 말고, 다만 각자의 아내와 자식들만 데리고 가게 하자고 우겼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을 달랬다. "동지들,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우리에게 쳐들어온 습격자들을 우리의 손에 넘겨 주셨소.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을 가지고, 우리가 그렇게 처리해서는 안 되오. 또 동지들이 제안한 이 말을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소. 전쟁에 나갔던 사람의 몫이나, 남아서 물건을 지킨 사람의 몫이나, 똑같아야 하오. 모두 똑같은 몫으로 나누어야 하오." 다윗이 이 때에 이스라엘에서 정한 것이 율례와 규례가 되어, 그 때부터 오늘날까지 지켜지고 있다. 시글락으로 돌아온 다윗은 전리품 가운데서 얼마를 떼어, 그의 친구들 곧 유다의 장로들에게 보내면서, 그것이 주님의 원수들에게서 약탈한 전리품 가운데서 떼어내어 선물로 보내는 것이라고 밝혔다. 베델과 라못네겝과 얏딜과 아로엘과 십못과 에스드모아와 라갈과 여라므엘 사람의 성읍들과 겐 사람의 성읍들과 호르마와 고라산과 아닥과 헤브론과, 다윗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드나들던 모든 지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는 그 선물을 보냈다. <사무엘상 30장 22~31절, 표준새번역>
그리고 오늘 사무엘하 2장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에게까지 다윗의 마음은 이어지게 됩니다. 사울왕이 죽자 자신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블레셋에 들어가 사울의 시신을 가지고 돌아와 장사를 지내준 이들, 사울에게 큰 도움을 받았던 그들이었기에 당연히 은혜를 갚은 것 뿐이었지만 오히려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은 다윗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에 두려워했을 수도 있습니다. 사울을 도와준 자신들을 다윗이 충분히 미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니까? 사무엘상 25장에 등장하는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던 '나발'을 다윗이 어떻게 대했는지? 그런데 그 때의 다윗이 아닙니다. 다윗은 달라졌습니다.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까지도 품어내는 모습을 보입니다.
유다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 곳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서, 유다 사람의 왕으로 삼았다. 사울을 장사지낸 사람들이 길르앗의 야베스 사람들이라는 소식이 다윗에게 전해지니, 다윗이 길르앗의 야베스 주민에게 사절을 보내어서, 그들에게 이와 같이 전하였다. "야베스 주민 여러분이 사울 왕의 장례를 잘 치러서, 왕에게 의리를 지켰으니,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일을 하였으니, 이제는 주님께서 여러분을 친절과 성실로 대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도 여러분을 잘 대접하겠습니다. 비록 여러분의 왕 사울 임금님은 세상을 떠나셨으나, 유다 사람이 나에게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삼았으니, 여러분은 이제 낙심하지 말고, 용기를 내기를 바랍니다." <사무엘하 2장 4~7절, 표준새번역>
솔직히 다윗 입장에서는 그냥 아무말도 하지 않고, 참아주면서 넘어가 주는 것만으로도 큰 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을 오히려 축복합니다. 그들이 한 용감한 행동, 의리있는 행동을 칭찬해 줍니다. 그리고 다윗 자신도 그들을 잘 대접하겠노라고 약속까지 합니다. 그냥 잊혀지고, 소외되도록 내버려 두어도 됩니다. 왕이라면 큰 물에서 놀 줄 알아야지, 자잘한 일은 아래 사람들이 처리하게 두면 됩니다. 작은 일 하나하나 어떻게 다 해결하겠습니까? 시간도 부족하고, 중요하지도 않은 일이니 왕은 손을 좀 떼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한 좋은 행동이 잊혀지지 않도록, 소외되지 않도록 작은 일부터, 작은 자로부터 모든 일을 시작합니다. 자신의 과거 경험이 바탕이 된 행동이었습니다. 누구보다 잊혀지고, 소외되어 있었던 자신을 하나님은 잊지 않고 계셨음을 다윗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작은 일, 작은 자는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일, 작은 자로부터 우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작은 자, 작은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그것을 삶으로 실천해야 한다고 결심한 다윗입니다.
이런 다윗을 보면서 거울을 바라보듯 이런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혹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는 주변의 작은 일, 작은 자가 잊혀지도록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크고 좋은 것들만 바라보다가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교회가 부흥만을 위하여, 성장만을 위하여 발버둥치면서 작은 일, 작은 자들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주 작은 예로 어른들이 편하게 예배드리기 위하여 아이들의 공간을 줄이고 있지는 않을까요? 아이들이 먹는 간식은 불량식품이고, 담임목사가 먹는 것은 최고급 소고기는 아닐까요? 설교 마이크를 더 좋은 것으로 바꾸기 위하여 교육부서 재정을 줄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께 드린 헌금이 구제비보다 건축비용으로 더 많이 쓰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교회가 추구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그 일 때문에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이들을 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반드시 우리는 우리 주변이나 교회 안에 가난하고, 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외면한 채 방치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에게도 최선을 다해 보답합니다. 조금 더 지나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도 최선을 다해 보답합니다. 그냥 무시해도 되고, 모른척해도 됩니다. 이제 다윗 왕에게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사람들 앞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이 서 있음을 깨달았기에 작은 일, 작은 자에게서부터 최선을 다해 나갑니다. 마치 하나님을 대하듯!Coram Deo!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는 소외된 이들의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잊혀져가는 이들의 기억이 되어야 합니다. 작은 자들의 희망이 되어야 하고, 작은 일들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참새 한 마리까지 기억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닮아 소외되고, 잊혀져가고, 너무나도 작다 하여도, 바로 거기서부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결코 높은 곳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마태복음 10장 42절, 표준새번역>
그래서 우리는,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은 냉수 한 그릇이라도 줄 줄 아는 이가 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냉수'같은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위 구절뿐만이 아니라 성경 곳곳에서 작은 일, 작은 자로부터 최선을 다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시작이 그러했고, 룻이 그랬고,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그랬고, 남은 자 7000명 그랬고, 당연히 예수님이 그것을 온전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최선을 다했던 '선한 사마리아인'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우리는 반드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다윗입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미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의 이 후반전을 닮아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왕의 자리만 바라보고 달려온 다윗이 아니라 이젠 모든 백성들을, 작은 자로부터, 작은 일로부터 시선이 시작되는 다윗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가 이 시선을 닮아야 할 때입니다. 그 시선을 통하여 '이래서 다윗이구나'라는 말처럼 '이래서 그리스도인이구나', '이래서 교회구나'라는 칭찬도 듣는 우리가 모두가 되기를 꿈꿔 봅니다.
진실로 간구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을 만들기를..! 교회라는 자리가 그리스도인들을 만들기를..!
https://www.youtube.com/watch?v=KBsEJY1IvsY&list=PLc2Aj5a1rCgHxjrRSfmhuTAVshJh5MSmT
https://www.youtube.com/watch?v=jhN4qm7RQ9I&list=PLAogYRb61YMjbtMSvP2pv77vLZkONHYaD&index=9
https://www.youtube.com/watch?v=3HKUATU2y6s&list=PLAogYRb61YMj-l052u_69aXn4-9VM4lbz&index=2
https://www.youtube.com/watch?v=rNfdyAiecOg
https://www.youtube.com/watch?v=kdj879q7oDQ
https://www.youtube.com/watch?v=iSxGgw1pxVA
https://www.youtube.com/watch?v=NwHiAa7yD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