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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밥 미카엘
by. 얼음빙수
늦가을 추위가 박재정의 개량한복을 파고들었다. 박재정의 체온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절밥을 많이 팔아서 롱패딩을 사야겠다.”
일행도 겉옷도 없이 걷는 박재정이 큰소리로 중얼댔다. 박재정은 관종이었다.
밤 바람은 끊임없이 가혹했다. 이 정도면 나 얼어죽으라는 거지. 박재정은 서러운 마음에 찻길로 뛰어들 뻔했다.
박재정이 달 밝은 공원을 지나고 있을 무렵이었다. 박재정은 그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소년을 발견했다.
교복쟁이가 저기 쪼그려 앉은 채 냄비밥을 지어먹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연기의 정체는 분명 그것일 테다.
박재정은 자기부상열차처럼 스르륵 소년에게 다가갔다. 쥐도 새도 모르게 도착한 박재정이 다짜고짜 소년의 어깨를 붙잡아 돌렸다.
화들짝 놀란 소년이 박재정을 돌아봤다. 소년의 흡연을 확신하던 박재정은 일순간 숙연해졌다.
교복쟁이는 담배가 아닌 서러움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찹쌀떡을 씹으며 우는 교복쟁이에게서 구름 같은 찬숨이 피어올랐다.
절밥 미카엘
by. 얼음빙수
“그 어쩐지 날이 심하게 춥다 했어요.”
때마침 매서운 바람이 불어와 둘의 살갗을 베어갔다.
“오늘이 수능이었군요.”
수능날에는 언제나 살 떨리고 맘 떨리는 한파가 찾아오곤 했다.
“수능이 뭐라고........”
박재정이 황토로 천연염색한 개량한복 상의를 한껏 여몄다.
“그대를 울게 하고......”
반만 베어 문 찹쌀떡이 바닥을 나동굴었다. 교복쟁이는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수능이 잘못했네. 솔직히 이렇게 추울 것까진 없었다고.”
“저는... 저는 이제...”
“바람아, 제발 그만해! 내가 진짜로 죽었으면 좋겠어?”
“흑흑... 예?”
“우리 집이 식당을 해요.”
“아아...”
“인생이란 원래”
“.......”
“반만 베어문 찹쌀떡 같은 겁니다. 깨물고 보니 팥앙금이 누락된 불량 찹쌀떡이었어도 어쩔 수 없죠. 이미 당신의 입가는 흰 가루 범벅인걸요. 사람들은 당신의 입가만 보고 ‘저 녀석 아주 멋진 찹쌀떡을 즐겼나본데?’ 할 겁니다. 세상은 참 엿 같아요. 아, 엿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혹시 지금 가진 엿이 있나요?”
“여기요......”
“고맙습니다. 제가 이 은혜를 꼭 갚고 싶은데 시간 있으면 우리 집에 가서 밥이나 한 끼 하지 않을래요?”
교복쟁이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어안이 벙벙해졌다. 당황한 소년의 눈동자로 달빛이 종종걸음쳐 왔다.
“슬픈 그대. 제가 유괴범 같아 보여요?”
“추워 보여요.”
“바로 그겁니다.”
달이 일찍이 눈에 들어차는 게 온통 밤 같아도 지금은 오후 6시, 딱 밥 때였다. 소년과 박재정이 주체할 수 없는 콧물을 힘껏 들이켰다.
원샷이었다.
절밥 미카엘
by. 얼음빙수
박재정과 박재정의 부모님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모태신앙 박재정의 세례명은 미카엘.
안타깝게도 성모마리아님을 향한 믿음이 미카엘 일가에게 밥을 먹여주지는 않았다.
박재정의 부모님은 생계를 위해 후미진 골목 상가에서 사찰음식전문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사찰음식 전문점
민간인 사찰
(절밥을 팔지만 불교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한 상호)
현재 재정이네 절밥집은 재정이 파탄날 지경이었다. 천벌을 받는 것인지 장사가 잘 안 됐다.
박재정은 폐업의 그늘이 턱밑까지 드리웠음에도 별로 괘념치 않았다. 박재정의 부모님은 플로리다에서 골드키위농장을 운영하다 망한 전적이 있었다.
박재정은 어렸을 때부터 공룡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박재정은 멸망을 동경하는 경향이 있었다.
나락을 즐기는 자에겐 약도 없다. 박재정은 하루 종일 베짱이처럼 통기타를 튕기며 유흥을 즐겼다.
그때 민간인 사찰에서 식사 중이던 유일한 손님이 나무 수저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이것 참 흥겨워서 밥을 못 먹겠네.”
나무 수저를 고쳐 잡은 손님이 식탁을 두드리며 감각적인 비트를 찍어내기 시작했다.
빈틈 없는 메트로놈이 절밥집을 수놓았다. 박재정과 손님의 즉석 합주가 시작됐다.
십자수반 에이스가 만든 열쇠고리 마냥 정갈한 리듬을 듣고 있노라면, 지나가던 로봇청소기도 로봇춤을 추고 싶어졌다.
‘제법이십니다.’
박재정의 감미로운 기타선율이 손님의 산채비빔밥적 리듬을 따라가지 못하고 뒤쳐지기 시작했다. 늘어지던 멜로디가 기어이 엇박을 탔다.
예술의 화신이 박재정의 귓가에 도발했다.
아직 무엇도 무너지지 않았어. 이것 밖에 못해? 겨우 이것이 전부인가?
불꽃 같은 예술이 유독가스를 내뿜으며 타올랐다. 클라이맥스에는 두 사람의 손틈 새로 신기루가 보였다.
이윽고 나무 수저가 부서짐과 동시에 기타 줄이 끊어졌다. 유일한 손님과 박재정이 얼얼한 손목을 스트레칭하며 이마 위로 흐르는 땀방울을 훔쳤다.
“손님, 다음에 한 번 더 방문해주셔야겠는데요?”
“그땐 이쯤에서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박재정이 스윗하게 웃었다. 좋죠.
“밥값은 그대의 열띤 연주. 단지 그것뿐이에요.”
절밥 미카엘
by. 얼음빙수
“늦었네?”
절밥집에 있던 동그란 손님이 주인장 행세를 하며 박재정을 맞았다.
“가게 문 열어두고 어딜 다녀와? 그러다 일일 매상을 다 도적질 당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번 게 없어서 잃을 것도 없어요.”
“번 거 없이도 잃을 수 있어. 예를 들면 목숨.”
박재정은 라디에이터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소년을 앉혀두고 절밥을 차리러 떠났다. 박재정이 사라지자, 동그란 손님이 동그란 소년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수능이 잘못했네.”
동그란 소년이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교복소매를 살폈다. 미처 증발하지 못한 눈물이 묻어있기라도 한 걸까?
그러는 사이 동그란 손님이 독백과도 같은 대화를 이어갔다.
“이곳엔 메뉴가 하나밖에 없어. 고기도 없어. 절밥엔 원래 고기가 없지.”
“아......”
“그런데 이곳엔 절 다니는 사람도 없어.”
저 친구는 천주교 신자야. 세례명은 미카엘. 모태신앙이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동그란 손님이 숨도 못 쉬며 웃었다.
박재정이 들고 나오던 나물 그릇을 놓치며 말했다.
“현실에 타협한 삶이 우스운가요?”
“누구랑 타협을 했는데. 신이랑?”
“경수 씨는 종교가 없으신가 보네요.”
“아니, 나도 신을 믿어. 예를 들면 당신?”
“아.......”
“왜, 소년아. 감명 받았니?”
박재정이 반찬을 다시 내오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갔다. 소년은 손님이 조금 두려워졌다.
“소년은 꿈이 뭐야?”
갑작스런 질문에 꿈을 접은 동그라미가 말을 더듬으며 반문했다.
“그럼 손, 손님의 꿈은 뭡니까?”
“나를 꿈꾸는 어른으로 봐준 청소년은 네가 처음이야. 그러니 네게만 말해줄게. 내 꿈은 시인이야.”
“어쩐지.”
“어쩐지?”
“잘 어울리세요.”
“소년아, 너도 잘 어울려. 네 꿈이랑.”
“제 꿈은 돌고래예요.”
“그게 무슨 소리죠?”
미역줄기볶음을 내오던 박재정이 그릇을 재차 놓치며 눈을 빛냈다. 돌고래요?
절밥 미카엘
by. 얼음빙수
도경수는 등단할 생각이 없는 시인이었다.
도경수는 카페가 아닌 절밥집에 상주하며 시를 썼다.
매일 민간인 사찰을 찾아와 절밥을 시켜놓고 온종일 작업하는 도경수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박재정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박재정은 도경수의 예술을 열렬히 응원했다.
“창작은 큰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니 식사를 꼭꼭 챙겨드세요. 무한리필 해드릴게요. 아, 밥값은 그대의 시 한 편으로 해도 좋습니다.”
“저기, 주인장.”
“네.”
“내 시가 고작 오천 원 남짓 할 것 같아?”
“그럼 시의 값어치만큼 와서 밥을 먹고 가세요.”
“내가 남은 생의 끼니를 모두 여기서 해결하길 바라는 모양이군.”
“보통 이럴 땐 ‘내 시는 값을 매길 수 없어!’ 라고 말하지 않나요?”
“주인장, 아주 고정관념으로 가득 찬 사람이네.”
“제가요? 저는 참신한 사람입니다.”
“내 시는 비싸. 그래서 심사위원들에게도 안 보여주지. 그리고 나는 내가 쓴 시보다도 비싼 사람이야.”
“와”
도경수는 재벌 3세였다. 도경수가 정갈한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참신하고 싶으면 고정관념부터 버려.”
“그럼 오늘의 밥값은 돈보다 비싼 시인의 이름 석 자로 할까요?”
“정말 고정관념으로 가득 찬 사람이네. 내 이름이 외자거나, 성이 두 글자면 어쩌려고 성명을 석 자라 규정했나.”
“못 듣는 거죠. 뭐.”
“도경수. 그런데 내 이름은 오늘의 밥값보다도 비싸. 그러니까 난 주인장의 구구절절한 사연까지 들을래. 그대의 이름은?”
절밥 미카엘
by. 얼음빙수
“미카엘, 돌고래 좋아해? 내가 보여줘?”
“꼭 친하게 지내는 돌고래가 있는 분처럼 말씀하시네요.”
“한 마리 있어. 8살 땐가 할아버지께 어린이날 선물로 받았지.”
“우와...!”
“아, 이 사람들 돌고래 좋아해? 나돈데.”
박재정이 아련한 눈빛을 하고 읊조렸다.
“바다를 가진 게 아니라면 놓아주지 그래요. 돌고래......”
“이런.”
도경수가 수첩을 꺼내 무언가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박재정은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도경수의 수첩을 흘끔댔다.
“그건 오늘의 밥값인가요?”
“내가 누누이 말했지. 난 시와 밥을 퉁칠 생각이 없다고. 미카엘, 밥값 받기 싫어? 오천원은 돈 같지가 않아서?”
“궁금해서 그래요. 궁금해서. 아, 더 궁금한 건 그대의 꿈이 돌고래인 이유.”
“돌고래는 귀엽잖아요.”
“세상에”
교복쟁이는 이미 꿈을 이뤘다. 교복쟁이는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귀여웠다.
“저는 어렸을 때 제가 세상에서 제일 귀여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돌고래가 돼야겠다고... 그것 말고는 꿈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수첩을 내려다보던 도경수가 빙그레 웃었다. 도경수는 방금의 장을 찢어내어 박재정에게 쥐여줬다.
“돌고래 좋아한다며. 보러 오라고.”
수첩엔 짤막한 시가 적혀 있다.
“소년아, 내가 너 돌고래 되게 해줄게.”
“정말요? 어떻게요?”
“돌고래랑 놀면 너도 돌고래지.”
박재정네 절밥집에 도경수의 시가 걸렸다.
바다도 아닌 곳에 살게 해서 미안해
살게 해서 미안해 오늘도
보러 갈게
바다를 데리고 갈게
경수 아쿠아리움
010 0000 0000
절밥 미카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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