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몽(九雲夢)>:깨달음의 길
<구운몽(九雲夢)>은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이 그의 어머니를 위해서 하룻밤에 지은 소설이라 한다. 장편의 소설을 하룻밤에 짓는 것은 어렵지만, 하룻밤에 구상(構想)을 마쳤든가, 소설에 담을 인생의 원리에 대한 깨달음은 있을 수 있다. 그것도 어머니를 위해서 하룻밤에 지었다는 것은 아마도 삶에 대한 교훈의 의미가 더 크리라 본다.
그렇다면 구운몽에는 어떤 삶의 원리가 담겼을까? 먼저 그 줄거리부터 보기로 하자.
천축국(天竺國)에서 온 고승(高僧)인 육관대사(六觀大師) 밑에서 수행을 하는 성진(性眞)이라는 스님이 있었다. 어느 날 성진은 스승인 육관대사의 명을 받고 용궁으로 심부름을 간다. 용궁에 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팔선녀(八仙女)를 만난다. 팔선녀는 선녀(仙女) 위부인(魏夫人)의 제자인데, 위부인이 육관대사에게 팔선녀를 심부름 보냈다. 성진과 팔선녀는 우연히 석교(石橋)에서 만나 서로 희롱하고 헤어졌다. 성진은 팔선녀와 헤어진 후 온 마음이 팔선녀뿐이었다. 육관대사는 성진을 불러 성진의 죄과를 말하며 염라왕이 있는 풍도지옥으로 가라한다. 팔선녀 또한 성진과 희롱한 죄로 풍도지옥에 떨어진다. 성진과 팔선녀는 염라왕의 심판으로 죄과를 씻기 위해 인간계에 환생한다. 성진은 신선 양처사의 자식으로 태어나고 팔선녀도 각각 흩어져 인간계로 태어났다. 성진은 양처사의 아들로 태어나 양소유(楊少游: 하늘에서 인간세계로 잠시 놀러 온다는 뜻임)라 이름 하였다. 양소유는 나면서부터 모든 재능을 타고 났다. 천재에 풍채에 문장에 필법에 지략에 음률에 무예까지 갖추지 아니함이 없었다. 양소유는 15세가 되자 과거길에 오른다. 과거길에서 전생의 팔선녀가 환생한 진채봉과 계섬월 적경홍 정경패 가춘운 이소화 심요연 백능파를 만나고, 16세에 장원급제를 해서 한림을 제수 받는다. 이후 양소유는 나가면 장수요, 들어오면 승상이 되어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다. 2부인 6첩도 서로 다투는 일이 없고 서로 위하면서 오로지 양소유의 삶을 위해서 존재한다. 아울러 대단한 재주의 소유자들이다. 이들은 자식들도 골고루 낳았고, 자식들은 모두 높은 벼슬을 하거나 왕비가 되는 등 그야말로 더 바랄 것이 없는 삶을 영위한다. 양 승상이 노쇠하자, 인간의 삶이 덧없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벼슬을 사직하고 불도를 닦고자 한다. 이때 육관대사가 지팡이를 끌면서 올라 와 양 승상을 꿈에서 깨게 한다. 그동안 누렸던 부귀영화가 모두 일장춘몽(一場春夢)이었음을 깨닫는다. 그 후 육관대사가 금강경을 강론하여 성진과 팔선녀를 깨우치게 하고, 성진과 팔선녀는 불법에 정진하여 모두 극락세계로 갔다. ♡
이 소설은 한글로 씌어졌다가 한문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등 아주 많은 독자를 확보한 조선조의 대표적인 소설이다. 그 명칭도 보는 이에 따라, 양반소설, 귀족소설, 몽자소설, 몽환소설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진다.
이 소설에서 가장 논란이 된 것은 소설이 내포하고 있는 배경사상에 있었다. 어떤 이는 불교소설이라 하고, 어떤 이는 유불도(儒佛道)를 모두 포함한 삼교습합소설이라 하고, 어떤 이는 일부다처제를 옹호하는 소설이라 하기도 한다. 이렇게 많은 의견들이 나오는 것은 이러한 사상이 이 작품 속에 내포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떤 이는 불교사상 중에서도 <금강경>의 “공(空)”사상을 특별히 나타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 사상은 모두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이 중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불교사상이고, 그 중에 공사상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이 작품에서 불교의 공사상을 나타내고자 했으며, 또 공사상은 무엇을 뜻하는가?
<금강경>에서는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이라 했다. 곧, 온갖 함이 있는 법은 꿈과 환과 물거품과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또한 번개 같아서 마땅히 지어도 이 같음을 볼 것이니라. 또한 “불고수보리(佛告須菩提)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라 했다. 곧,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하기를 무릇 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 만약 모든 상을 상 아니라고 본다면 곧 여래를 본 것이다.
말이 상당히 어려운데, 한마디로 요약하면 인간이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모든 것들은 ‘공(空)’이라는 것이다. 이를 깨달아 불법에 정진하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 본다. 여기서 공은 영원한 것은 없고, 삶은 계속 변화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 변화의 주체가 자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눈에 보이는 현상에 집착하게 된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하듯이 물건을 봐야 마음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것들을 좇으면서 한평생을 보내게 된다. 필자인 나부터 현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상 밖에는 새로운 세계가 있어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데도 이 현상을 벗어나면 모든 게 끝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참 세계를 볼 수 있다.
아울러 사람들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굴레도 벗어날 수 없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인지상정이거늘, 삶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기 힘들다. 김만중의 노모도 그랬으리라. 그래서 김만중은 늙은 어머니를 위해서 <금강경>을 모방하여 <구운몽>을 지었다고 했다. 이것은 다름 아닌 김만중이 그의 어머니께 <금강경>을 쉽게 이해하게 하고자 한 것이리라. 어머니가 겪는 일들이 곧 깨달음의 세계로 가기 위한 길이라는 것을 소설을 통하여 보여준 것이다. 양소유처럼 그렇게 화려한 삶도 한낱 헛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곧, 참 세계를 찾으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화려한 세계가 고정되어 영원하지 않고, 변하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 "영원할 것이라는 집착을 버려라. 돌고 도는 것이 인생이니라."는 진리이다.
<구운몽>에서 성진이 막 꿈에서 깬 후 육관대사가 성진을 향해 “꿈과 세상을 나누어 둘이라 하니, 이는 아직도 네가 꿈을 깨지 못하였느니라.”라는 말을 한다. 그 후에 성진은 깨달은 바가 있어 더욱 불도에 정진하여 성불하고 극락세계로 가게 된다. 여기서 둘이 아니라 함은 다양한 삶을 나타내는 것으로, 누구나 하느님이나 부처님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마음을 그곳에 두면 모두 하느님이나 부처님처럼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나타낸다. 곧 동학의 인내천(人乃天)처럼 사람이 곧 하늘이고 하늘이 곧 사람임을 뜻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미각(未覺)한 성진과 각성(覺醒)한 성진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곧 0°와 360°는 같은 점이지만 결코 같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성진이 미혹(迷惑)한 상황에서 환몽(幻夢)을 통하여 각성(覺醒)한 성진이 된 것은 0°에서 360°까지 진행된 부귀영화를 맘껏 누린 유교적 삶을 통해서였다. 성진에게 양소유의 삶이 없었다면 결코 깨달음을 얻은 성진으로 될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극락세계로 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변하고자 경험하고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소설 <구운몽>의 양소유처럼 그야말로 환상적인 삶을 누구나 살 수는 없다. 각양각색의 사람이 있듯이 그들의 삶도 각양각색이다. 어느 삶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모두 각자의 기준에 따라 삶을 누리고 행불행을 맛보며 한평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을 주어진 대로 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위의 <금강경>과 <구운몽>에서 보듯이 깨달음을 향한 끝없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현상은 공(空)이지만 노력하면 참 세계를 볼 수 있는 혜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성불하십시오.
첫댓글 심오합니다. 큰 공부됩니다. 잘 읽고 저의 삶도 성불하겠습니다. 이학주 선생님 늘 고맙고 감사드립니다. -최종환 올림.
선생님,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