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
좀처럼 소리를 내면서 열린 적이 없던 내 방 문이 열린다. 누군가에겐 시끄러운 소음이겠지만 난 반가운 마음마저 드는 소리이다.
지금 이 시간에 날 찾아올 사람은 그 친구뿐이다. 리치만! 내가 싫어하면서 참 부러워하는 친구다. 나이 차이가 꽤 났지만 그래도 나를 찾아오는 유일한 친구이기도 했다.
사실 대부분 자기 할 말이 있어서 오는 것이지만 그래도 내게는 꽤 괜찮은 만남이다. 누군들 어떤가? 혼자인거보다는 낫다. 부자인데다 좋은 부모를 만나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자란 리치만은 요즘 '영원히 사는 것'에 대해 푹 빠져 살고 있는 중이다. 지난번에는 진시황에 대한 글을 가져와서는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고 간 적이 있었다. 오늘도 그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 분명하다.
"젠장, 내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내가 뭐가 부족해? 나만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꽤나 격앙된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도 분노는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에도 리치만은 나에게 인사 따위는 하지 않는다. 난 그게 사실 늘 불만이었다. '그래도 내가 어른인데 인사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 나를 깔보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내색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난 내 자리에 앉아 달래주듯 그의 말을 받아 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던 거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치만이 한 번 더 사자후를 하는 바람에 밖에 있던 비서가 깜짝 놀라 달려왔다.
"서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아니야. 자리로 돌아가게. 오늘 이 친구가 조금 화가 난 일이 있었나 보네"
난 리치만에게 손짓을 한 후 루왁커피를 꺼내 끊일 준비를 시작하였다.
"자네, 코피 루왁이라고 알고 있나? 이번에 인도네시아에 갔던 재산세과장이 맛 좀 보라며 사왔더군. 지난번에 실수한 걸 만회해 보려는 건지. 그런데 비싸다고 해서 그런가 맛이 꽤 괜찮더군. 이거 한 잔 마시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보시게나"
하지만 리치만은 한껏 인상을 쓰며 또 나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깟 고양이 똥으로 만든 커피를 누가 먹습니까? 아저씨 같은 사람이나 드세요. 그런 싸구려는 난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그 사람 왜 그래요? 좋게 봤는데 직접 만나보니 영 불쾌한 사람이더군요"
리치만은 나를 대할 때 예의를 잊어버린 사람 같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참아야 한다.
"며칠 전에 카톡으로 영원히 사는 법을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을 만난다고 하더니 그 사람 말인가? 드디어 영원히 사는 법을 찾은 것 같다고 한껏 들떠 있더니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아 진거야? 그 사람이 너한테 뭐라고 했어?"
리치만은 다리를 벌리고 고개를 숙이며 한껏 거만한 태도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했죠. 참 쓸데없는 소리를 하더라구요. 나한테 부족한 것이 있다나 뭐라나. 그래서 내가 부족한 것이 뭐냐고 물으니까! 내 참 황당해서! 내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 게 주라는 거예요.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할거라나 뭐라나 황당무계한 말을 쏟아 내더라구요"
이야기하면서 다시 그 순간이 기억났는지 안절부절 못하며 화를 삼키고 있는 리치만을 보면서 난 왠지 기분이 좋아져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오호~~그 많은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준다면, 천국 문이 자동문이 될 수도 있겠는걸? 그렇게 하지 그랬어? 크크크"
말해 놓고도 실수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아직 덜 끊은 루왁을 재빨리 입에 가져다 대고는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아저씨 같으면 아저씨 재산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어요? 아저씨처럼 피도 눈물도 없이 서민들에게서 이자 폭리를 취한 사람들이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저는 다르잖아요. 제가 얼마나 기부도 많이 하고, 가난한 인간들을 많이 도와준 지 아시잖아요? 굳이 다 팔 필요 없이 그냥 하던 대로 일정 부분만 하라고 하면 내가 안할 거 같아요? 충분히 한다구요. 저희 부모님도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도와줘야 한다고 늘 이야기 하셨다구요. 아니 솔직히 저 같은 사람이 영원히 살지 않으면 누가 영원히 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제가 무슨 나쁜 짓을 하기를 했어요? 저는 법 없이도 살만큼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구요. 저는 세금조차도 아끼지 않고 팍팍 내는 사람이라구요!"
"알지, 알어! 넌 법 없이도 살만한 멋진 친구야. 내가 보증할게! 그나저나 영원히 살려면 재산을 다 팔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기만 하면 되는거야? 음~생각했던 것보다는 너무 쉬운데?"
"쉽다구요? 나 참! 그런데 그 다음 말이 더 황당 했다구요. 그 많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주고서 자기의 제자가 되라는 거예요. 들어보니 어디 시골 출신에 아버지가 목수 짓이나 하고 있다고 하던대. 자기가 무슨 가말리에르 선생님 정도가 된다고 생각하는지 자기의 제자가 되라는 거예요! 제자! 아저씨가 그 사람을 따라다니는 제자라는 사람들을 보면 웃기지도 않을 겁니다. 어디서 그런 어중이떠중이들을 모아 놓았는지, 근데 이런 내가 그들과 동급이 되라구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닙니까? 엄연히 다르다구요. 엄연히!"
속으로 한 번 더 고양이 똥 같은 놈이라고 욕을 했다. 당장이라도 방에서 내쫓고 싶었지만 을의 입장이 그런 것 아니겠는가? 이 때 필요한 건 사회생활의 노하우뿐이다.
"거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구만. 자네가 더 이상 배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해외 유학까지 마치고 온 엘리트인 자네가 시골뜨기의 제자가 된다면 사람들도 비웃을 거야! 혹시 자네의 재산을 탐내고 그런 말을 한 거 아닐까? 정말 올 해 들은 말 중에 가장 황당한 말이군 그래"
나 역시 ‘적당히’ 가 참 안 되는 사람이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할 필요는 없는데, 오히려 그 사람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은 심정인데 말이다. 그래서 내가 친구가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행히 리치만이 루왁 커피를 한 잔 달라는 손짓을 한다. 이제야 진정이 좀 되는가 보다.
"그렇죠? 아저씨 같은 사람이나 그들이랑 어울릴만 하지! 저는 아니죠. 엄연히 살아온 길이 다른데 말입니다. 어디서 감히 제자가 되라마라 참내!"
하마터면 당장 나가라고 소리를 지를 뻔 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리치만은 원래 그런 친구니까 버릇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차분히 말을 이어가는데 성공했다.
"그래. 그 사람은 분명히 영원히 사는 법을 모르는 게 분명해. 그러니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거지. 시대가 어느 때인데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분명히 돌팔이 사이비 교주일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차나 들게"
그런데 이상하게도 커피를 마시는 리치만의 얼굴은 진정되었지만 아쉬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똥 밟았다고 생각하고 나랑 J호텔에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구. 거기 새로 온 쉐프가 음식을 정말 잘 한다고 하더군. 그거나 먹고 기분 좀 풀게나"
"사실 저도 그래서 당장 돌아왔죠. 그런데 등 뒤에서 이런 말이 들리는 거예요. '재물을 가진 사람은 영원히 사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영원히 사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이상하게 그 말이 제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네요. 그래서 기분이 찝찝합니다. 어디라고 하셨죠? J호텔이요? 거기 가서 기분이나 풀어야 겠네요"
순간 나도 기분이 찝찝해졌다. '부자가 영원히 사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그렇다면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내 그런 생각조차 하기 싫었기에 비서에게 차를 대라고 연락을 했다. 그리고 리치만이 앞장섰고, 난 뒤따라 문을 나섰다.
"리치만,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구라고 했지? 카톡에서 이름을 본 거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를 않는구만!"
"아저씨는 기억력도 별로군요. 헤수스요. 크리스트 헤수스! 왜 요즘 장안을 떠들썩하게 하는 사람인데 못 들어보셨어요?"
"헤수스라...아...헤수스? 크리스트 헤수스? 들어 봤네. 들어 봤어"
그 사람이었다. 얼마 전 매튜라고 아끼던 부하 녀석이 세무서를 뛰쳐나갔는데, 그 이유가 바로 크리스트 헤수스 때문이라고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에게 그 사람을 소개시켜준다며 초대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호기심 때문에 막상 식사 자리에 가보았는데 우리 직원들이 잔뜩 있었고, 술집에서 일하던 여자들과 외국인만 가득해서 도저히 끼고 싶지 않아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그 사람의 이름이 헤수스였구나. 크리스트 헤수스!
"아저씨, 뭐해요? 빨리 갑시다. 배가 고프니 배를 채우고 나서 전 다시 또 영원히 사는 법에 대해서 찾아봐야겠어요. 분명히 어딘가 방법이 있지 않겠어요? 어서 갑시다"
리치만이 차에 오르자 나는 문을 닫아주고는 운전석으로 향했다. 저 멀리서 비서가 나를 보고 있었다. 부끄러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오늘 점심도 나 혼자 먹게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싫든 좋든 혼자 먹는 밥보다는 나으니 그런 눈초리를 한다고 해도 난 상관이 없다.
"어서 갑시다. 소리를 질렀더니 배가 고프네요. 얼마정도 걸리죠? 난 그동안 좀 자야겠어요. 운전 똑바로 하시구요. 도착하면 깨우세요"
"어 그래, 눈 좀 붙이게. 도착하면 깨워주지"
아직 점심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었기에 차는 막히지 않았고 다행히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긴 시간 운전하고 싶지 않았다. 난 대리운전 기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리치만은 귀찮은 듯 하품을 하며 일어났고, 문을 박차고 먼저 호텔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덩그러니 열려있는 문을 닫고 최대한 천천히 로비에 들어섰다. 다행히 밝은 미소를 하며 나를 반겨준 이 때문에 그나마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돈이 좋다. 이렇게 나를 웃으며 반겨주니 말이다. 돈마저 없었다면 내가 이런 대접이나 받을 수 있을까 쓸데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거울에 비친 땅딸막한 모습은 내가 봐도 참 싫다.
"어서오세요. J호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예약하셨습니까?"
"네, VIP실로 두명 예약했습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스크루지, 자캐오 스크루지요"
에필로그
리치만 - 부자 청년(마태복음 19장 16~25절, 마가복음 10장 17~25절, 누가복음 18장 18~25절)
자캐오 스크루지 - 삭개오(누가복음 19장 1~10절)
가말리에르 - 가말리엘
크리스트 헤수스 - 예수 그리스도
매튜 - 마태(마태복음 9장 9절)
J호텔 - 예루살렘 호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