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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역사
1. 식민지 미국(Colonial America) 1492-1763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영토를 넓히기 위해 미대륙으로 왔다. 스페인은 이 신대륙을 탐험한 최초의 유럽인이었으며 또한 최초로 정착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1607년 영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Virginia의 Jamestown에 정착하면서 영국 최초의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1620년 종교의 자유를 찾아 영국에서 Mayflower호를 타고 지금의 Massachusetts에 상륙한 이주민들이 Plymouth 식민지를 세웠다. 당시 원주민들의 도움으로 이 두 곳의 이주민들은 옥수수와 담배 등의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1700년 대에는 아프리카로부터 흑인 노예들을 사들여 왔고, 1770년경에는 이백만이 넘는 정착민들이 13개의 식민지를 만들었다. 이들 식민지들은 종교, 이주 동기, 정착 시기가 다른 독립된 단체들이었다.
2. 독립 전쟁 시기(Revolutionary Period) 1764-1789 이들 식민지를 놓고 벌인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에서 결국 영국이 승리하였고, 영국은 식민지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높은 세금을 내게 했다. 1765년의 Stamp Act는 모든 공문서와 신문 등에 세금을 내게 했고 이 일로 정착민들의 반발이 크게 일어났다. 1766년에 이 세금 제도는 철회되었지만 식민지와 영국 간의 마찰은 계속 되었다. 1773년의 Boston Tea Party는 이러한 갈등이 표출된 양상이었다. 마침내 1776년 독립 선언(Declaration of Independence)을 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독립 혁명(American Revolution)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전쟁인 동시에 식민지 내부에서의 민주주의의 확립을 위한 혁명이었다. 1781년 10월 19일 영국이 항복하고 미국의 각 식민지는 주(State)로 명명되고 이들이 연합하여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이 되었다.
3. 새로운 국가(The New Nation) 1790-1828 이 시기에 미국에는 두 개의 정당 즉, 연방당(the Federalists)과 공화당(the Republicans)이 출현했다. 미국은 독립 혁명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많은 세금을 거둬야 했다. 당시의 대통령 Thomas Jefferson의 권한 아래 미국은 서부로 그 영토를 확장하여 Louisiana와 Lewis and Clark등의 땅을 사들였다. 1812년 영국에 대항한 제 2차 독립 전쟁(War of 1812)이 발발하여 3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이 전쟁 이후 미국이 하나의 국가라는 국가주의(nationalism)가 성장했으나 노예제도를 둘러 싼 갈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4. 서부 개척과 개혁(Western Expansion &Reform) 1829-1859 이 시기의 대통령들은 미합중국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 서부로 개척해 나갔다. 물리적으로 영토를 넓히는 한편, 이념적으로 ‘자유(Liberty)’의 의미를 넓혀 가는데도 힘썼다.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여성들의 사회 참여권에 대한 목소리도 높아갔다.
5. 남북 전쟁(Civil War) 1860-1865 식민지 건설 때부터 종교, 경제를 달리하던 남부와 북부는 연방 정부의 권한과 통치권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북부는 서부 유럽 및 북부 유럽의 이민을 받아들여 혼합 인종의 새로운 미국 민족을 형성하였으나, 남부는 여전히 보수적이면서 영국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었다. 1808년 이후 노예의 수입이 연방 헌법에 의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부에서는 여전히 노예 매매가 성행하여 북부의 인도주의자들로부터 강력한 비난을 받았다. 특히 남부에서 성행한 면화 재배에서 흑인 노예들은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였다. 이 노예제도를 인정하느냐, 안하는냐의 권한은 대통령이나 연방 의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정부의 권한이라는 것이 남부의 주장이었다. 노예제도는 계속 정치 문제로 대두되었는데, 1860년 Abraham Lincoln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남부의 11개주는 합중국의 연방 정부에서 탈퇴하고 자치 정부를 세우겠다고 선언했다. 이 일로 남북전쟁 즉 Civil War가 발발했다. 이 전쟁은 4년간 지속되면서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결과적으로 북부가 승리하고 모든 흑인 노예들은 법적으로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었다.
6. 재건의 시기(Reconstruction) 1866-1889 남북 전쟁이 끝나자 정치가들은 다시 남부와 북부를 하나로 회복하는데 주력하였다. 수정 헌법 14조(The 14th Amendment)(1867)에서는 노예들의 시민권을 보장했고, 수정 헌법 15조(The 15th Amendment)에서는 노예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였다. 이러한 노력들은 미국 연방을 민주주의의 단일 국가로 만드는데 공헌하였다. 남북전쟁 이후 공화당의 군사적 독재에 의한 정치적, 사회적 개혁은 상당한 성과를 올렸고, 미국의 산업 역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철강산업이 발달하고 서부의 목재, 금, 은 등의 자원 수송을 위한 수단이 필요하게 되어 대대적인 철도 건설에 착수하였다. 이 시기에 이러한 사업으로 재산가가 된 사람으로 석유왕 John D. Rockefeller와 철강왕 Andrew Carnegie가 있다. 북부 산업자본의 발전을 방조하는 공화당이 전후 오랫동안 정권을 유지하면서 산업자본에 간섭하지 않았던 것도 산업자본이 거대해진 이유의 하나로 들 수 있다. 그러나 거대한 독점에 대항하여 형성된 것이 Guild였다. 서부를 중심으로 하는 농민의 조직과 대도시에서 발달한 노동조합들이 있다. 또한 이 시기에 필요한 노동력을 위해 외국 이민이 많이 늘었다. 특히 아일랜드와 독일에서부터 이주해 온 노동자들이 많았다.
7. 진보의 시기(Progressive Era) 1890-1913 1890년대에 들면서 미국은 급속한 경제적, 사회적 성장에 기인하여 세계의 중심 국가가 되었고 따라서 다른 나라의 일에 전혀 무관심할 수가 없게 되었다. 1895년 쿠바에서 스페인의 독재에 대한 항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하게 되었다. 그 전쟁은 단기간에 끝났지만 미국은 필리핀, 하와이에 대한 주권을 확보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이민이 더욱 급증하였고, 이들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종래의 이민들과 다른 면이 많아서 여러 문제가 대두되기도 한다.
8. 세계 대전과 공황(Great War &Depression) 1914-1945 Woodrow Wilson대통령 재임 시 1914년, 유럽에서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멕시코에서는 멕시코 혁명이 일어났다. 처음에 미국은 엄정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1917년에는 미국도 연합군을 파송했고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은 1918년 베르사유 평화 협정(the Treaty of Versailles)을 맺고 종전하였다. 승리국으로는 미국, 영국, 일본,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벨기에 등이 있었다. 전쟁 후 미국은 다시 공화당의 시대로 바뀌어 외교적으로는 고립주의, 국내적으로는 자유방임주의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라디오, 자동차, 영화, 섬유 산업이 발전하고 미국은 번영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계속된 호경기 속에서 주식 투자가 성행하고 과대 투기가 유행하였다. 이러한 번영은 균형되지 못하였다. 1929년 10월 뉴욕 주식시장의 주가 폭락을 계기로 대공황(Great Depression)이 일어났으며 이것은 즉시 유럽에 파급되어 세계공황으로 번졌다. 1932년 대통령으로 선출된 Roosevelt는 New Deal 정책을 시작했고, 이 정책은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수정과 함께 연방 정부의 권한을 대폭적으로 확대하였다. 또한 여러 사회복지적인 정책도 채택하였다. 대공황의 확실한 종식은 1941년 미국이 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면서 가능할 수 있었다. 미국은 독일, 일본, 이탈리아에 대항하는 영국, 소련, 프랑스와 함께 연합군에 가담하였다. 1945년 독일의 항복과 Hiroshima와 Nagasaki에 원자 폭탄을 투하한 후 일본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전쟁은 미국을 포함한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9. 냉전 시기 이후(Modern Era) 1946-present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은 전쟁으로 황폐화된 유럽을 복구하기 위한 사업을 하면서 계속적인 성장과 번영의 시기를 가졌다. 또한 베트남과 한국전쟁 등에 가담하면서 냉전시대의 대표적인 영향력을 가진 국가가 되었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우주 탐사에 나섰고, 여성을 비롯한 시민들의 인권 운동이 계속 되었다. 러시아와 동유럽의 공산권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 보았다.
주요 사건
1. 독립 선언(The Decalaration of Independence) 1776년 7월 4일 미합중국 독립을 내외에 선언한 일이다. 1775년 영국 본국군과 아메리카 식민지군 사이에 무력충돌이 발생하여 식민지의 반영항쟁은 무력항쟁 단계로 접어들었으나, 그때에도 식민지측은 본국으로부터 독립할 것은 생각하지 않고 영제국의 일환으로서 머무를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외국원조를 받아야 할 필요, 더불어 내부적으로는 급진파 대두, Thomas Paine의 공화제 독립을 호소하는 정치 팜플렛 《커먼센스, common sense》 등의 영향으로 독립의 기운이 고조되었고, 제2차 대륙회의(The second continental congress)는 76년 5월 각 식민지에 대하여 새정부의 수립을 권고하여, 각 식민지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사실상 독립 상태로 들어갔다. 한편 대륙회의에서 버지니아 대표 R.H.Lee의 독립의 결의 제안에 따라 6월 7일에 다섯 명의 기초위원이 임명되었다. 원안은 위원의 한 사람인 Thomas Jefferson이 기초하였고, 역시 위원인 Benjamin Franklin과 John Adams가 약간 가필하여 대륙회의에 제출하여 7월 4일 전원일치로 가결, 공포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독립선언문이다. 이 독립선언문은 간단한 전문과 독립선언을 한 결문을 제외하면 대체로 2부로 나누어져 있다. 모두가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한 것이지만 전반은 일반적인 자연권사상을 전개한 것이고 후반은 구체적으로 영국 국왕의 압정에 대한 사실을 열거한 것이다. 기초자 Jefferson은, 독립 선언은 독창성을 가진 것이 아니고 미국인의 마음의 표현이라고 하며, 그것은John Locke의 사상이며, 또 오랜 세월 동안 본국과의 항쟁을 통하여 배양해온 이념을 정착시킨 것이라고 했다.
2. 남북전쟁(Civil War) 1861년에서 65년까지 미합중국의 북부와 남부가 벌인 내전이었다. 연방 정부(federal government)가 다른 주들의 산업, 무역, 특히 노예 제도 등에 대해 가지는 권한에 대한 갈등이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1860년에 Abraham Lincoln이 대통령에 선출된 후, 11개의 남부지방의 주들은 연방 정부에서 철회하고 각각 독립된 정부를 세우기 시작했다. 이 일들로 인해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남부가 패배하고 노예제도를 폐지하게 됨으로써 이 전쟁은 끝났다. 이 전쟁으로 인해 남북 쌍방이 입은 인명피해는 막대하였다. 특히 남부는 여러 면에서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남부의 대부분은 황폐화되고, 1863년 1월 1일 발표된 노예해방선언으로 그 전통적 경제구조는 근본적으로 무너졌으며, 공업면에서 앞선 북부의 식민지적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종전 직후인 4월 14일 링컨이 흉탄에 쓰러지자 그가 주장하던 관대한 남부 재건안은 묵살되었기 때문에 남부는 군정하에 놓이게 되고, 북부의 억압 밑에 놓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1877년까지는 차례로 연방복귀가 완료되었으나, 자부심이 강한 남부기질로서는 견딜 수 없는 굴욕적 경험이 북부의 공화당을 용납할 수 없어 민주당을 무조건 지지하는 솔리드 사우스(solid south:결속한 남부)를 탄생하게 하였다.
3. 경제 대공황(Great Depression) 1929년에 시작된 미국의 사상 최대의 경제 공황을 일컫는 말로 'Depression of 1929'또는 'Slump of 1929'라고도 한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 월가의 ‘뉴욕주식거래소’에서 주가가 대폭락한 데서 발단된 공황은 가장 전형적인 세계공황으로서 1933년 말까지 거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이 여기에 말려들었으며, 여파는 1939년까지 이어졌다. 그 때까지의 어떤 공황보다도 파급범위와 지속기간, 정도가 심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배후에는 만성적 과잉생산과 실업자의 존재가 현재화되고 있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10월의 주가 대폭락은 경제적 연쇄를 통하여 각 부문에 급속도로 파급되어, 체화의 격증, 제반 물가의 폭락, 생산의 축소, 경제활동의 마비상태를 야기시켰다. 기업도산이 속출하고 실업자가 늘어나, 1933년에는 전체 근로자의 약 30 %에 해당하는 1,500만 명 이상에 달하였다. 공황의 영향은 공업, 농업, 금융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이고 세계적인 공황이었다. 이 공황으로 자본주의 각국 경제는 자동적 회복력을 잃고 1930년대를 통하여 불황을 만성화시켰으며, 미국은 뉴딜정책 등 불황극복정책에 의존해야 하였다. 10여 년 동안의 대불황에 허덕인 미국은 정부의 강력한 뉴딜정책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경기를 회복, 대전 중에는 실질소득이 거의 2배로 증가하였다.
주요 대통령과 정책
1. George Washington(1732~1799) 미국 버지니아주 출생으로‘건국의 아버지’로 불린다. 1752년 버지니아 민병대의 부대장직을 시작으로, 7년 전쟁 즉 French-Indian전쟁에 참가하였다. 1774년 제1회 대륙회의에, 1775년 제2회 대륙회의에 버지니아의 대표로 참석하고, 이 회의에서 무력항쟁이 결의되자 그는 독립혁명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피로에 지친 식민지군을 격려, 역경을 극복해나갔다. 1781년 10월 프랑스군의 원조를 받아 요크타운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독립전쟁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1783년 강화조약이 체결되자 군대를 해산시킨 뒤 연합회의에 군의 통수권을 반환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연합회의가 무력하여 미국의 독립이 다시 위기에 처하게 되자 1787년 헌법제정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 그는 의장직을 맡아 새로운 연방헌법을 제정하고 중앙정부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이 헌법에 의하여 1789년 대통령에 당선되고 같은 해 4월 30일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는 국내 여러 세력의 단합에 노력하고, 헌법을 실제 정치에 반영시키는 한편, 여러 나라와의 국교를 조정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정견을 달리한 A.Hamilton과 T.Jefferson을 각각 재무장관과 국무장관으로 기용하여 국내 재정정책의 수립과 외교정책의 정비를 담당하게 하였다. 1793년에 발발한 프랑스와 영국과의 전쟁에 대해서는 Hamilton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중립을 선언하고, 유럽의 분쟁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전통적인 고립주의 외교정책을 수립하였다. 1796년 3선 대통령으로 추대되었으나 민주주의 전통을 세워야 한다는 이유로 끝내 사양하였다. 신생 미국의 기반을 굳게 다진 데 대한 그의 공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2. Thomas Jefferson(1743~1826) 미국의 정치가이자 교육자이며 철학자이다. 미국 독립선언문(Declaration of Independence) 작성의 기초위원이었으며 제 3, 4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는 College of William and Mary를 졸업하고, 1767년 변호사가 되었지만, 정치에 관심이 많아 정계로 진출, 1769년 버지니아 식민지의회 하원의원이 되었다. 1775년 버지니아대표로서 제1·2차 대륙회의에 참가하였고, 1776년 독립선언문 기초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자유와 평등을 외쳐 미국 건국의 이상이 되었던 그 해 7월 4일의 독립선언문은 주로 그가 기초한 것이다. 그 후 버지니아로 돌아와 주의회 의원, 주지사 등을 역임하였고, 봉건적인 장자상속제의 폐지와 정교분리를 위한 신교자유법의 제정에 노력하였다. 1783년 연방의회 의원이 되자 달러를 단위로 하는 통화제도와 오하이오강 북서부지역에 관한 정부안을 입안하여 신생공화국의 기초를 닦는 데 공헌하였다. 1785년 프랑스 주재공사에 임명되고, 1790년 G.Washington 행정부의 초대 국무장관에 취임하였으나, 강력한 중앙정부제를 주장하는 재무장관 A.Hamilton과의 정책대립으로 1793년 사임하였다. Hamilton이 주도하는 연방파에 대하여 민주공화당을 결성하여 그 지도자가 되었는데, 이것이 현재의 민주당의 기원이다. 1796년 부통령, 1800년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새 수도 워싱턴에서 취임식을 거행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재임 중 소수의견의 존중, 종교·언론·출판 자유의 확립 등에 주력하고, 1803년 캐나다 국경에서 멕시코만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프랑스로부터 구입하여 영토를 거의 배가하는 한편, 나폴레옹전쟁에 의하여 국제긴장에 휩쓸리지 않도록 고립주의 외교정책을 유지하면서 중립을 지켰다. 1804년 재선되고, 1809년 4월에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그 후 고향인 버지니아의 몬티셀로에 돌아가 1919년 버지니아대학을 설립하고 스스로 학장에 취임하여 민주적 교육의 보급에 노력하였다. 또한 철학, 자연과학, 건축학, 농학, 언어학 등 다방면에 걸쳐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 ‘몬티셀로의 성인’으로 불리었다. 그의 저서들은 민주주의사상의 고전으로 간주되고 있다. 생전에 자신이 직접 정해 놓았다는 묘비명 “미국독립선언의 기초자, 버지니아 신교자유법의 기초자, 버지니아대학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 여기에 잠들다(HERE WAS BURIED THOMAS JEFFERSON, AUTHOR OF THE DECLARATION OF AMERICAN INDEPENDENCE, OF THE STATUTE OF VIRGINIA FOR RELIGIOUS FREEDOM, AND FATHER OF THE UNIVERSITY OF VIRGINIA)”라는 글귀가 유명하다.
3. Franklin D. Roosevelt(1882~1945) 미국의 제32대 대통령으로 재임 기간은 1933년에서 1945년이다. 뉴욕주 하이드파크 출생. 1910년 뉴욕주의 민주당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진출하였다. 1913∼1919년 Wilson 정부의 해군차관보로 임명되어 제1차세계대전을 통하여 활약하였고, 베르사유회의에 수행하였다. 1921년 39세의 나이에 소아마비에 걸렸으나, 치료 후 체력이 회복되자 1924년 정계로 복귀하였다. 1928년 뉴욕 주지사로 활약하였다. 1932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었고, ‘뉴딜(New Deal)’을 선언하였다. 1929년 이래 몰아닥친 대공황으로 수백만에 달하는 실업자를 배출하고 있던 당시 미국의 사정으로서는 뉴딜을 대환영하였고 마침내 H.C.Hoover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대통령 취임 후에는 강력한 내각을 조직하고 경제공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뉴딜정책을 추진하였다. 통화금융제도의 재건과 통제, 산업 특히 상공업의 통제, 농업의 구제와 통제, 구제사업과 공공사업의 촉진, 정부재정의 절약 및 행정의 과감한 개혁 등으로 성공을 거두어, 국민생활은 점차 안정되어 갔다. 외교면에서는 소련의 승인, 필리핀의 독립과 함께 호혜통상법을 제정하게 하고 공황의 원인이 되었던 국제무역의 불균형을 시정하였고 라틴아메리카 제국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선린외교정책을 추진하였으며, 먼로주의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후에 적극적으로 영국과 프랑스를 원조하였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참전하였다. 대서양 헌장의 발표를 비롯하여 카사블랑카, 카이로, 테헤란, 얄타 등의 연합국 회의에서 전쟁의 결정적 지도권을 장악하여 영국의 총리 W.L.S.처칠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지도적 역할을 다하고 전쟁 종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44년 대통령에 4선 되고 국제연합 구상을 구체화하는 데 노력하였으나, 1945년 4월 세계대전의 종결을 보지 못하고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4. New Deal 정책 미국 제32대 대통령 F.D.Roosevelt의 지도 아래 대공황 극복을 위하여 추진하였던 제반 정책이다. 1929년 10월 24일에 뉴욕 주식시장의 주가 대폭락을 계기로 시작된 경제 불황은 미국 전역에 파급되고, 그것이 연쇄적으로 세계적인 대공황으로 확대되었다. 당시의 대통령 H.Hoover(재임 1929∼1933)의 필사적인 방지 대책에도 불구하고 물가는 계속 폭락, 1932년까지 국민총생산(GNP)을 1929년 수준의 56%로 떨어뜨리고, 파산자가 속출하였다. 이에 따라 실업자가 날로 늘어나 1,300만 명에 이르렀다. 이 때, 1932년의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지명된 Roosevelt는 경제사회의 재건, 빈궁과 불안에 떠는 국민의 구제 등을 목적으로 한 새로운 정책, 즉 ‘잊혀진 사람들을 위한 New Deal(신정책)’을 약속함으로써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선 후 1933년 3월 Roosevelt는 특별의회를 소집하여 6월 16일까지의 100일 동안, ‘백일의회’라고 불리는 특별회기내에 적극적인 불황대책을 정부 제안의 중요 법안으로서 입법화하였다. 뉴딜 제법안의 작성에 대통령 측근의 경제·법률 분야에서 진보적인 학자와 전문가 그룹, 즉 브레인 트러스트(brain trust)가 기용된 사실은 유명하다. 이렇게 하여 1933년에 입법화된 주요 정책은 다음과 같다. ① 긴급은행법을 제정하여 재기 가능한 은행에는 대폭적인 대부를 해줌으로써 금융공황으로부터 은행을 구출하여 은행업무의 정상화를 도모하였다. ② 금본위제를 폐지하고 관리통화법을 도입하여 통화에 대한 정부의 규제력을 강화하였다. ③ 농업조정법을 제정하여 농업의 구제를 도모하였다. 이것은 주요 농산물의 생산제한으로 과잉생산을 없애고 농산물가격의 하락을 방지하여 균형가격을 회복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또, 농민에게 자금원조를 해줌으로써 농업구제에 대한 시도를 하였다. ④ 전국 산업부흥법을 제정하였다. 이것은 각 산업부문마다 공정경쟁규약을 작성하게 하여 지나친 경쟁을 억제시켰으며, 생산제한·가격협정을 인정하고 적정한 이윤을 확보시키는 한편 노동자의 단결권·단체교섭권을 인정하는 동시에 최저임금과 최고노동시간의 규정을 약속하여 노동자에 대한 안정된 고용과 임금을 확보하게 하려는 데에 그 뜻이 있었다. ⑤ 테네시강유역 개발공사를 설립하였다. 이것은 이 지역의 발전과 치수관개용의 다목적댐을 건설하여 종합적인 지역개발을 실행하려는 것으로서, 정부에 의한 전력생산사업이라는 점에서도 획기적인 정책이었다. ⑥ 자원보존봉사단과 연방임시구제국을 설립하였다. 이것은 정부자금에 의한 실업자와 궁핍자의 구제책으로서 설립한 것으로, 지방자치단체의 구제활동을 연방정부가 원조하려는 시도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뉴딜정책은 “구제, 부흥, 개혁” 등을 목적으로 하고 연방정부의 기능과 대통령의 권한확대를 실현하면서 적극적으로 구제정책을 전개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또한 뉴딜은 대공황으로 마비상태에 빠진 미국의 자본주의와 혼란해진 사회의 재건을 위하여 새로운 정책을 잇달아 실험하였다. 미국의 전통적인 자유방임주의가 포기되고, 정부권력에 의한 통제가 행하여졌으며, J.M.케인스의 경제학을 받아들여 미국 자본주의를 수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7년의 장기간에 걸친 뉴딜은 단순한 경제정책에 그치지 않고, 정치·사회 전체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쳐 미국의 항구적인 제도로서 확립되었기 때문에 그 역사적 의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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