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1장12절-30절
빌립보서를 쓰는 바울의 상황은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어 옴짝달싹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13절)
그러나 바울의 매임은 빌립보교회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전도의 열기를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전도의 동기는 달랐습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습니다.(15절)
지금도 그렇지만 순수한 뜻을 가진 자들이야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진짜 문제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시기와 경쟁심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불순한 동기는 교회에 다툼과 분란을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불순한 동기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자들에 관하여 듣고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무슨 상관이냐”(개역개정에는 “그러면 무엇이냐”로 번역되어 있으나 NIV에서는 원문의 의미를 살려 “But What does it matter?"로 번역하고 있습니다)하면서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라 하며 자신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전파된다는 측면에서 불순한 동기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자들을 품어 준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사랑의 반올림이었습니다. 내 눈에 부족한 모습을 가진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보인다면 어떻게 하십니까. 정죄의 날카로움보다 신앙의 넉넉함 속에서 사랑의 반올림을 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상황은 넉넉하지 못했지만 영혼만은 넉넉했던 바울을 닮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겨집니다.
살든지 죽든지 자신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소망한 바울에게 삶과 죽음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21절)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내게 사는 한, 죽음도 삶과 매한가지임을 바울은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원했지만, 굳이 바울이 육신을 입고 계속 살고자 했던 것은 믿음의 형제·자매들의 유익을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믿음의 형제·자매들에게 믿음의 발전과 기쁨을 주고자 삶을 이어갔습니다. 이를 살짝 뒤집어보면 믿음의 형제·자매들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바울은 자신의 삶을 줄 수도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살아 그리스도와 함께 할 수 있고, 죽어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할 수 있다면 삶과 죽음은 바울에게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해 바울에게 있어 삶의 반올림은 죽음이었고, 역으로 죽음의 반올림은 삶이었습니다. 이를 알았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을 받았으며, 빌립보 교우들에게도 이를 감당해갈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반올림은 무엇이겠습니까?
미워 보이는 사람, 조금만 반올림해주면 내 마음도 넉넉해지고 그 사람도 깨닫는 바가 있지 않겠습니까. 사랑의 반올림은 항상 생명과 회복의 강이 흘러 넘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를 포기해야 할 이유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반올림은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위해 내 삶을 나누어 준다면 의미 없는 삶 속에서 죽어가는 저들의 영혼이 반올림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한, 내 삶이 죽음으로 끝난다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삶을 살아갈 텐데. 참되게 살아 죽음을 반올림할 수 있다면, 참되게 죽어 삶을 반올림할 수 있다면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될 터인데 무엇이 꺼려지겠습니까.
하나님...
내게 사는 것이 내가 아닌 그리스도이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나를 옭아매는 상황 속에서도 넉넉한 사랑으로 내게 오는 모든 이들을 반올림해 주는 삶을 살게 해주시옵소서. 육신으로 있어 함께 하는 이들을 유익하게 하는 인생이게 하시고, 그 인생 속에 나를 반올림해주는 그리스도를 가득 품게 해주시옵소서. 고난도 반올림하면 은혜인 것을, 삶과 죽음 속에서 은혜의 꽃을 피우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