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2장1절-13절
욥기 1장에서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말에 이어 무대는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로 장면으로 옮겨집니다. 하나님은 욥의 신앙의 진정성을 보셨지만, 사탄은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이유가 되는 부분만 없어지면 분명히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며 욥에 대한 테스트를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은 목숨에는 손을 대지 말라는 말과 함께 테스트를 허용하셨습니다.
그러자, 사탄은 욥에게 속한 모든 소유를 다 빼앗았습니다. 그에게 속한 가축, 종, 심지어 자녀까지도 다 빼앗아 가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자 사탄은 두 번째 하나님께 욥의 신앙을 테스트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번에도 하나님은 생명에는 손을 대지 말라는 말과 함께 허용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사탄은 욥의 육신에 고통을 주었습니다. 과연 욥의 고통이 어떠했을까요?
자신이 그동안 정성껏 키워온 가축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한꺼번에 잃은 고통은 그 자체만으로도 헤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이 채 가시기도 전에 들이닥친 그의 육신 적 고통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상실감을 가져오지 않았을까요?
욥의 육신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8절에 보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라는 말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사회로부터 냉대받아 쓰레기 더미에 앉아서 살갗이 벗겨서 피가 남에도 긁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하는 한 사람의 외롭고 힘든 장면이 머릿속에 연상되지 않습니까?
여기에, 욥의 아내는, 온전함을 굳게 지키고 있는 욥의 모습을 비난하며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며 심한 절망감을 토로했고, 이것은 오히려 욥에게 더 큰 고통만 가중할 뿐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욥을 찾아온 세 친구의 행동 또한 욥이 겪는 고통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11절 이하에 보면,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욥이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위로하기 위해서 각 지역에서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욥을 본 그 세 친구는 오히려 소리 질러 울고, 자신들의 겉옷을 찢고 밤낮 칠일 동안 욥과 함께 있으면서 그에게 어떤 한마디로 꺼낼 수 없을 정도로 욥의 모습은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욥이 받는 고통의 정도가 어떠했는지 살펴본 것은, 이런 혹독한 고통과 고난 중에서 욥이 취한 그 한마디 말이 바로 우리에게 큰 도전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상황속에 놓여있든지 우리가 궁극적으로 취해야 할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10절을 보실까요? 아내가 욥을 향하여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하는 말에 대해 욥은 이같이 말합니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욥이 인정한 것은 이 세상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생사 화복의 모든 주권이 바로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모든 것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개입이 있고, 분명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있다는 것을 인지한 고백입니다. 따라서 그가 겪는 그 고난에도 분명한 하나님의 개입과 계획과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1:2도, 베드로전서1:6도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고난, 즉 영어 성경으로 보면 온갖 종류의 고난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그 고난의 지향점은 단순히 인간에게 주어지는 고통에 있지 않습니다. 야고보서에서는 고난이 인내를 만들어 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로마서5:3, 4에서 말하는 것처럼 고난은 인내를 통해 연단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더 큰 소망을 이루게 됩니다.
베드로전서에서는 고난이 믿음과 결합한 모든 불순물을 제거해서 결국 칭찬과 영광과 존귀로 이어지게 한다고 말합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고난의 지향점은 고통과 좌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단을 통한 소망과 영광으로 이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난 그 자체가 유익한 것도 아니고, 고난 그 자체가 유익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고난 그자체는 인간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 욥이 고백한 것처럼, 고난속에서 주님을 붙들 때, 다시 말해, 고난의 주권조차도 하나님께 있으며, 분명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할 때, 비로소 피폐하게 만들 것처럼 보이는 그 고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궁극적인 지향점을 향해 가게 되고, 궁극적인 유익을 향해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난 그 자체만을 묵상하게 되면, 인생을 피폐하게 만드는 그 피폐성에 분노와 좌절만을 경험하게 되지만, 고난속에서 시선을 돌려 예수그리스도를 묵상하게 되면, 고난 가운데 피어 오르는 산 소망이 세상이 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기쁨과 평안을 경험하게 합니다.
여러분, 오늘의 삶 가운데서도 어떠한 어려움에 처하게 될지라도, 오늘 본문의 욥의 고백과 함께 히브리서 2:18-3:1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모든 상황 가운데서 주님의 주권을 믿음으로 인정하게 되면, 비록 인내와 연단의 시간이 필요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받는 그 어떠한 고난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며 능히 도우시는 예수님께서 반드시 궁극적인 유익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오늘도 어떤 상황 가운데 놓이든 그 예수님을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아버지...
인생을 살면서, 우리에게 마주치는 작고,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때론 그 상황이 주는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고통스럽기도 하고,
또 때론 그것이 주는 의미를 찾지 못해 절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때 주님을 향한 나의 믿음을 작동시켜 주셔서,
모든 상황을 다스리시는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하시고,
주님의 깊은 목적과 계획에 나의 고통마저도 던져 버릴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 믿음으로 인해 더 큰 소망,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 평안이
우리 안에 넘쳐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하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