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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살벌한 무한경쟁 시대에서, 이 분주하고 어수선한 한국 사회에서 시인은
부조화 그 자체가 아니던가. 나 역시 송경동 시인을 알게 되기 전까지 그랬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콜트콜텍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들과 함께 활동을 하던 어느 날,
홍대 앞 클럽 빵에서 그의 시가 귓속에 울려 퍼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가 특유의 느릿하고 어눌한 목소리로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그의 두 번째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의 일부분)를 낭독하는 순간,
나는 너무나 오래 동안 내 삶에서 ‘시’를 빼앗긴 채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억울했다. 욕망은 물론이고 낭만과 추억조차 수탈당해야 하는 이 살벌한 자본주의에서,
나 자신의 시를 지켜야겠다는 의지가 불쑥 솟았다.
“서정에도 계급성이 있”는 시대지만,
내 감성을 스스로 착취하는 삶을 조금은 더 경계하기로 결심했다.
송경동 시인은 인터뷰 내내 희망의 버스에서부터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에 이르기까지
투철한 계급성을 진심으로 드러냈지만,
나는 이 인터뷰를 읽은 그 누군가가 오랫동안 애써 잊고 살았던 자신의 낭만과
서정을 되돌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송경동이 시라는 동지와 함께 시대를 역행하며 살아가는 이유이며,
자본주의에 대한 우리 모두의 또 다른, 중요한 복수라고 믿기 때문이다.
“고맙고 미인한 선배, 김진숙”
이원재 최근 가장 집중하고 있는 ‘희망의 버스’부터 이야기해보자.
희망의 버스를 기획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참고로 이건 연예인들이 영화개봉 앞두고 토크쇼에 나오는 것처럼
희망의 버스를 홍보하라는 질문이다.(웃음) 물론 이 인터뷰가 나갈 때면
두 번째 희망의 버스를 마치고 난 이후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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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라는 게 있는 현실을 따르는 게 아니라 그걸 넘어서는 것을 꿈꿔보는 것이기 때문에 갔다 온 지 3일 만에 다시 2차 희망의 버스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래서 185일째 되는 날 185대의 희망의 버스를 구성해보자는 꿈과 희망을 얘기하게 되었다.
그게 사람들 마음에 잘 전달되었는지, 사회각계가 나서고 있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이하 비없세) 카페에 평범한 사람들조차
가족단위로 모이고 있다.
요청해서 만난 것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김진숙도 구하고 한진노동자들도 보호하자며,
2차 희망의 버스에 모이는 사회연대의 마음을 함께 지키겠다고 나서고 있다.
이원재 두 번째 희망의 버스를 통해서 김진숙 씨가 함께 내려올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지금 김진숙 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송경동 무엇보다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김진숙 선배는 지금 절망과 패배감, 좌절 속에서 체념 할지도 모르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지키고 있다.
또한 더 나아가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정리해고 당하고 비정규직이나
도시빈민이 되게 만드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항거하고 그것에 질문을 던지고,
그 구조조정을 막아서는 보루로서의 의미가 있다.
85호 크레인은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살다가 25세에 조선소 여성용접공이 되는 그런 삶을 살았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해방이후 수 십년 동안 겪었던 노동자의 수난사이자 저항사이다.
그런 전형적인 삶을 살아온 그가 한국사회에 그 엄청난 문제를 던지는 것이다.
김진숙 선배는 저항과 투쟁의 역사를 거쳐본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을 모두 건거다.
그렇기 때문에 그걸 결의하고 조직도 없는 상태에서도 그런 투쟁을 던지면서
흔들리지 않고 품위를 지키면서 크레인 위에서 상추씨를 뿌려서 키워 먹겠다는
그런 언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과정에 어려움이 많은 걸로 아는데 그런데도 흔들리지 않고 사람의 품위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그런 사람이기에 고맙고도 미안하다.
또한 수고하셨다는 말, 끝까지 최선을 다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말도 하고 싶다.
(과거에) 결정적인 국면에서 저들에게 이용당하거나 포기하거나
7, 8부 능선에서 무너졌던 일이 많았는데,
끝까지 존엄과 새로운 정신을 지키기 위해 굴하지 말고 지켜주셨으면 좋겠다.
▲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위의 김진숙 지도위원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
“시인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다”
이원재 본격적인 인터뷰를 시작해보자. 송경동은 시인이다.
시인으로서 시가 죽었다는 시대에 살고 있는데, 꼭 노동시나 비판적인 시까지는
아니라도 시 자체가 존재하기 힘든 시대에서 시인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송경동 시인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꿈을 꾸지만 특히나 사회적으로 민감한, 새로운 꿈을 꾸는 사람이 시인이 아니겠나.
현실에 대한 얘기는 많이 안한다. 아직 오지 않은 것, 덜 밝혀진 것,
용기나 이런 걸 얘기하는 사람이 시인이다.
시인 역시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 중 한 사람인데,
험악한 자본주의 문화 속에서 사는 한 사람일거고. 어쩌다 보니 꿈을 꾸는 시인이 되었다.
진정성이 사라진 이 시대에서 여러 문제들은 사람의 문제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 문화 때문인데,
진정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살기 힘들게 만든다.
이런 시대다 보니 꿈을 꾸는 시인으로서는 진정한 게 어떤 것인가 고민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시인도 일반노동자와 같다. 노동자가 같이 써야 할 재화나 물자를 생산해 주는 것처럼,
시인도 노동자와 같은데 물질은 아니지만 꿈과 상상력과 진지한 마음과
나를 드러내서 모순을 보여주고 보고해주는 사람이다.
사회적 노동에 포함되어 있는 한 사람이다.
노동자, 농민, 광부 모두가 소중한 것을 정성스럽게 만들듯이 시인도 물질은 아니지만
또 다른 삶에 필요한 정신과 상상력을 왜곡되지 않게 생산하는 사람 아닐까 싶다.
이원재 시는 비약의 언어다. 추상성을 특징으로 하는 장르이고.
하지만 송경동의 시는 매우 구체적이며 오히려 시적 정의를 더 강조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굳이 시를 자신의 무기로, 시인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결정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송경동 어려서는 악동이고 문제아였는데 중학교 때 여선생님이 ‘봄비’라는 주제로 시를 써봐라 했다.
학교 숙제로 시를 써서 갔는데 그 선생님이 학생들 많은데서 나를 칭찬해 주셨다.
부모님들이 힘들고 일이 많아 잘 돌봐주지 못했는데,
어려서 귀여움도 돌봄도 못 받았지만 선생님의 칭찬 한번이 굉장히 기뻤다.
그래서 시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시를 좋아했다. 관계나 상황이 시인을 만들어 줬다고나 할까...
나중에 현장 생활하고 소년원에도 갔다 오고 그 후에 건설 일용직 노동자로 살았으니까...
그 삶들이 힘들었는데 글 쓰는 건 돈 없어도 종이와 펜만 있으면 되는 거더라.
그 과정에 그늘지고 힘들었는데 소외의식도 있고...
그래서 내 안에 할 이야기가 많이 쌓였다.
스스로의 해방을 위해서도 뭔가를 얘기해 보고 싶었고 자연스럽게 글을 통해서 내가 해보고 싶은 얘기,
겪었던 사람 얘기도 해보고 싶고,
노동의 쳇바퀴가 아니라 가끔 나를 돌아보고 세계와 관계에 대해 고민도 해보고 싶은 게 사람인데
그런 게 자연스럽게 모여서 시인되었다.
“시란, 현실을 넘어가는 다른 세계의 꿈을 말하는 것”
이원재 시인으로 살아가는 게 더구나 노동시인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았을 거 같은데...
송경동 외롭기는 하다. 모든 가치 기준이 자본주의인 현실에서 다른 꿈 얘기하고 이야기를
쓴다는 것이 외롭고 힘들다. 그렇지만 이럴 때 그런 게 더 필요치 않나.
시는 추상적이라고 했는데... 1980년 초중반에 박노해가 ‘노동의 새벽’ 같은 시를 썼는데,
거기에는 고도의 추상이 들어가 있다.
금기시되는 노동자라는 사회적 계급을 얘기하고 노동해방의 꿈을 이야기하는 고도의 추상성이다.
시가 어렵고 고도의 추상이라는 것은 독해가 되냐 안되냐,
혹은 멀리 있는 무언가의 이야기냐가 아니라 현실을 넘어가는 다른 세계의 꿈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렵거나 꼬여있거나 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전시대의 김수영 같은 시인은 최소한의 시민정신과 독재시대를 얘기했던 것이고,
신동엽 시인은 동학농민전쟁의 역사를 시를 통해 발굴했다. 역사에 묻혀 있던 것을 끄집어내는 것,
이게 시의 추상이지 뜬구름 잡거나 독해가 안되는 무엇,
언어가 어려운 것이 시의 추상성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나의 시도 그런 추상에 도달하고 싶다.
사회관계 속에서 인간의 꿈이 어떤 것인가를 얘기해 보고 싶다.
이원재 평화로운 시대라면 어떤 시를 쓰고 싶나?
개인적으로 낭만적인 사랑시도 잘 쓴다고 자랑했던 기억이 난다.
송경동 인간은 사랑의 마음, 연민, 연대의 마음을 갖고 있다.
기쁨과 환희, 눈물 이런 것들이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부분인데 그 모든 시를 써보고 싶다.
진정한 눈물, 환희, 살아있다는 것. 그런 것들을 쓰고 싶다.
아프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보고를 넘어서는 시를 써보고 싶다.
구로노동자문학회 때부터 근 20년 넘게 노동자 문예운동을 하고 있지만
혁명이라는 단어는 거의 쓰지 않았다.
두 번째 시집에 혁명이라는 단어가 딱 한번 시 제목에 들어갔다.
하지만 혁명에 대해서 교조적인 얘기를 한 것이 아니라 함부로 얘기하지 못했던 (혁명이라는)
아름다운 꿈에 대해 스스로 얼마나 멀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 말을 자신 있게 써볼 수 있을 때가 왔으면 좋겠다.
아직도 부족하다. 함부로 안 쓴다. 과정에 있는 나의 모순들을 쓰고 싶다.
그럴듯한 얘기가 아니라 내적 모순이나 부족한 부분,
자기 모순에 대해 솔직히 고백하고 아픔을 거쳐서 정화하고 나아가고... 그런 시들을 쓰고 싶다.
▲ 이원재 문화연대 활동가 |
송경동 다 좋은데..(웃음) 개인적으로 ‘셔터가 내려진 날’이 좋고, ‘비시적인 삶들을 위한 편파적인 노래’도 기억에 남는 시다. 힘들 때였는데 인터넷에서 붕어빵 아저씨가 새벽에 일을 나갔다가 목을 매달았다는 고 이근재 열사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고, 시를 쓰게 되었다. 나중에 보니까 사람들이 그 시를 읽고 고양시청 홈페이지를 다운시켜 버렸고, 전노련이 고양시청 정문을 뜯고 치열하게 싸웠다. 감동적이었다. 나의 호소는, 이근재 선생 영전에 바치는 것이지만 내 삶도 가난한 삶이었던 나의 마음도 같이 바쳐서 썼던 시였다. 평범한 우리들에 대한 아픔, 그런 것들이 사회적으로 힘이 되고 기억에 남는다.
뉴코아 이랜드 투쟁이 300일째 되던 집회에서 읽었던 시가 있는데,
1년이 지난 후에 이랜드 아주머니가 수첩을 보여줬는데 그 시를 받아서 쓰셨더라.
여러 사람들이 수첩에 시를 옮겨 적고 힘들 때마다 시 읽고 힘 받았다고 하더라. 그때 뭉클했다.
나는 이 시 한편을 위해 근 3년에 걸쳐 연대하고 고민했던 시간들이 배여 있어서
내게 특별하다.
기륭전자의 ‘너희는 고립되었다’, 이것도 한편의 시지만 5년 가까이 수많은 일들이
그 속에 있었다.
국회농성을 2번이나 해보고, 망루 쌓다 잡혀가고, 포클레인 두 번 올라가고,
떨어져 발도 다치고 이런 세월들이 시에 있으니 각별하다.
보수 문단에서는 시인으로 인정 안해...
좋은 시인의 삶이란 사회의 제사장 같은 역할
이원재 시인으로서 사람들이 시보다는 송경동이라는 운동가를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서운하지는 않았나?
한국 사회에서 사회참여적인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보다 운동이 먼저 인식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큰 것 같다.
하지만 송경동 시인은 그와는 다르게 현실 운동과 거리두기를 안하고 있고,
시인보다는 노동운동가나 문화운동가로 인식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송경동 어떻게 보면 그건 영광스러운 일이다. 보수문단에서는 나를 시인으로 인정 안한다.
주변에 진보적 문화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조차 나에게 시와 문학에 집중하라는 얘기를 종종 한다.
좋은 뜻으로 했겠지만 일종의 위협이라고 생각됐다.
“그렇게 살면 시인으로 안 봐준다,
적당히 해라, 찍힌다, 청탁도 못받게 된다”는 얘기들을 많이 들었다.
실제 요 근래까지 시인으로 인정을 안 해 줬다. “얘는 전문시위꾼이지...”
가까운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면 굉장히 위축된다.
문단의 흐름 속에서는 나에게 현실과 거리두기를 하라고 했지만
내가 생각하는 문학인의 삶은 그게 아니었다.
과거에 좋은 문학인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다.
이발소마다 있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푸쉬킨은 러시아 짜르 체제를 물리치기 위해
한 때는 노농적위대로 죽창도 들었던, 농민군에 서서 전투적인 시를 썼던 사람이다.
세계적인 시인들이 그런 삶을 살았다.
160개 언어로 번역될 정도로 유명한 시인이었다.
그 사람도 칠레와 중남미에서 혁명운동에 동참했고, 칠레 공산당 당원이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탄광노동자 앞에서 시를 읽고 독재에 맞선 전사가 되기도 한 실천적 문학인이 있다.
음풍농월, 유유자적하는 언어기술자가 되는 삶을 쫓지 않았다.
시인도 한명의 노동자로 생각했을 뿐, 시인이 노동자보다 더 그럴듯한 것은 아니다.
좋은 시인의 삶이란 사회의 제사장 같은 역할,
당대 삶에 동참해서 사랑이든, 투쟁이든 뭐든 구체적으로 참여하면서
시대의 꿈과 위로받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해야 한다.
그걸 시라는 형식으로 보고해주고 그걸 통해 사회의 사람들과 함께 고민을 나누거나
진전시키는 촉매역할을 해야 한다.
그걸 하려면 그 사람들의 삶과 투쟁에 자기 몸이 가 있어야 한다.
시인의 역할이 노동자에 비해 존중받으려면 그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
그게 전형이고 정답이라는 건 아니지만,
다른 표현양식도 있겠지만, 이 길을 선택했고 지금도 (문단에서)
배제 당하거나 소외당해도 그건 나의 영광이고 기쁨이다. 서운해 할 건 아니다.
이원재 최근 평택, 용산 등을 경험하면서 문화운동이 다양한 측면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본다.
누구보다 열심히 움직였는데, 어떻게 평가하나? 성과와 아쉬움을 말한다면?
송경동 평택에서 문화예술 단위의 독자적인 자기실천과 사회연대를 하게 되어 기뻤다.
그 전에도 있었지만 사회적 전선이 되는 곳에 문화예술인이 참여해서 도구처럼 쓰임을 당하는
게 아니라 독자적인 조직력과 의지와 마음을 가지고 했던 평택이 좋았다.
스스로도 돌아보게 되고. 운동들이 딱딱해지면서 확장될 수 없을 때인데 문화예술인들이
자기역할을 하면서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시각으로 풀 수 있는지,
사회와 어떤 관계가 필요한지 그런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문화예술운동과 예술이 각자를 위해서 굉장히 소중한 공간이 되었던 과정이 평택이다.
그것을 통해 각자의 상상력과 꿈을 얻게 되었다.
그런 흐름이 다행스럽게 한미FTA반대투쟁, 기륭전자 노동자와의 연대,
용산이라는 작은 꼬뮌을 만들었던 일,
아픔을 딛고 사회에 대한 꿈을 만들어 보는 경험 등에서 함께 연대하고 많은 일들을 해본 게
소중하게 이어져 두리반까지 간 것이고,
희망의 버스 전에 거제도 대우조선과 한진중공업에서 문화예술인들의
자발적인 연대가 희망의 버스로 이어졌다.
풍요롭게 느끼며 참여할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되기도 했다.
참여하는 문화예술인들도 자긍심을 갖고 본인의 문화예술 활동방향에 대한 고민도 하게 돼서 좋았다.
문화예술계 전체로 보면 작은 문화예술인들일 수 도 있지만 평택 대추리,
기륭, 용산, 콜트콜텍 등 다양한 실험과 헌신 등이 일상적인 문화예술진영에도
소중한 질문을 보태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원재 그런 활동 과정에서 아쉬운 점은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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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에 의해 일상이 도구화되고 자본의 문화 우위가 대세인
사회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전면화 되고,
사소한 일상 속에 그런 기조와 가치관들이 폭넓게 깔려 있다 보니,
그런 공간들에서 생산한 호소, 질문, 노력, 헌신 등이
더 넓은 저변으로 형성되기가 쉽지 않다.
어쩔 수 없이 현 단계 운동의 한계,
세계 진보운동의 한계와 맞닿아 있다.
사람들의 조건과 한계에 같이 있는 거고 지난 몇 년간
노력 했어도 그 주체들과 사회문화연대운동의
저변이 넓어지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다.
만족하고 꺾이지 않고 잘 가다보면 사회변화의
지점과 물리면서 폭발적으로 대중화되고 저변이 넓어지는
시점이 올 것이다. 점점 많아지고 있다.
두리반에서 초동단계지만 자율문학가협회도 구성되고, 사진 쪽에서는 변화를 바라는
사진가 모임으로 가고, 어린이 동화작가들에서는 사회연대의 선이 되어서
비정규노동자들을 위한 동화집을 기획단 꾸려서 비없세와 사업을 할 계획이다.
잡지형태의 동화책을 만들 것이다. ‘더 작가’라는 어린이책 작가모임도 350여명의 작가들이 모여 있다.
문학 쪽도 두리반연대, 강정마을 연대, 2차 희망버스 등 김대중 노무현 시대에 실종되었던
사회연대 문화운동도 살아나고 있다. 미술도 파견미술가 모임 주체들이 많은 일을 하고 있다.
과거에는 부탁해야 했던 관계였지만 지금은 그들 스스로가 움직이고 있다.
조금씩 주체가 늘어나고 그런 측면이 큰 성과라고 본다.
“진일보한 사회에 대한 꿈...반자본 의식과 정신, 실천들이 서야
20년간 단절된 대중과의 간극이 좁혀질 것”
이원재 도발적인 질문을 하나 해보면, 오히려 문화운동 자체에 대한
고민과 질문은 질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것 아닌가?
평택, 용산 등에서 문화예술이 많은 역할 했다는데 동의하지만 최근 문화운동 자체는 얼마나
진화 했는지 묻고 싶다. 기존 단체는 많이 약해지거나
제도화 되고, 반면 자율적 개인이나 소그룹 모임이 많이 생겼지만 얼마만큼
사회적인 차원에서 힘차게 진행되고 있는가라고 질문한다면 쉽게 “그렇다”라고
답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송경동 80년대에 노동자 민중문화운동은 굉장했다.
구로만 해도 16개 지역에 지역 노동문학회가 있었다.
90년대 들어서 문화연대 등이 역할을 많이 했다.
대중 속에서 진보적 담론을 형성하고,
네트워크 가지고 정부정책에 대한 견제를 해 나갈 정도로 문화운동이 저력이 있었으나
지금은 많이 깨졌다.
의제, 전선, 일상문화 속에서 대응 주체, 네트워크 등이 많이 깨져있다.
그게 우리의 한계라고 본다.
문화연대를 중심으로 정부나 국가에 대해 개입하면서
“문화사회 전체적인 변화를 추구했던 그런 힘이 왜 약화될 수밖에 없을까?”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유연한 탄압,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장 속에서 전투적 민주주의의 상상력과
그런 문화운동을 잃어버렸던 반성도 필요하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탄압에 의해서 깨진 것보다도 꿈, 전망을 상실한 것 아니냐고 본다.
조금씩의 진전도 큰 의미는 없어 보이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진일보한 사회에 대한 꿈을 다시 꿔야 한다.
반자본의 의식과 정신, 실천들이 서야 스스로도 어떤 걸 넘어설 수 있다고 본다.
그 전망들이 상실되면서 일상적으로 생존을 위한 수준에서 대응이 이루어지다
보니 탄압도 탄압이지만 스스로의 꿈도 약해진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꿈, 현실 한국사회에 만연된 신자유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는 꿈과 의지,
주체들을 만들어 내야,
그런 네트워크가 세워지지 않는 한 과거와 같은 힘 있는 문화운동이 활성화 되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싶다.
문화도 과거엔 좋은 의미로 문화노동자 개념으로 썼지만
수많은 문화예술인 자체가 자본주의에 포획된 노동자에 가깝다.
문학 쪽만 하더라도 거대 출판자본의 힘이나 입김에 자유롭지 못해서
생계를 위한 글쓰기를 하고 있고 다른 장르도 마찬가지지 아닌가 싶다.
이원재 송경동 시인과 함께하는 예술인, 문화운동가들은 대부분 리얼리즘에 기반한 작업을 한다.
물론 나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들이고, 어쩌면 오히려 시대역행적이어서
더욱 더 가치있는 작가들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좀 더 동시대적이고 실험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아쉬움을 느끼지는 않나?
특히 대중성이라는 측면에서.
송경동 리얼리즘에 대한 정신은 형식미학에 갇혀 있는 게 아니다.
리얼리즘의 개념은 현실을 단순히 모사하는 단계를 넘어 묻혀 있는 현실과 막혀 있는
부분을 폭로하고 고발해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꿈과 상상력을 포현하는 것이다.
그게 없으면 리얼리즘이 아닌 것이다.
시대 정서에 대해서 예민하고 긴밀히 소통할 수 있는 소통양식에 열려 있어야 하고,
당대성을 획득해야 한다고 본다. 그걸 못하면 리얼리즘이 아니라 보수주의에 다름 아니다.
이원재 리얼리즘이라는 것이 형식을 넘어 태도의 문제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80년대식 현장 문예운동의 다른 버전이 아니냐는 비판을 이야기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진정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중성의 부재를 자주 지적하지 않나.
송경동 서서히 이루어져 갈 거다. 약간은 고답적이고 더디고 세련되지 못하게 보이지만
분명히 시대의 본질에 접근해 있는 진정성이 확인이 되면 어떤 시대든
양심적인 사람들에게 존중받고 그 사람들의 문화생산물로 조금씩 인정받게 될 것이다.
분단이후에 민족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키고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을 가져왔다.
그걸 넘어서기 위한 사회적 주체로는 70년대 민중문화운동, 탈춤 같은
민중개념에 대한 발견이 있었고 저변을 만들어 갔다.
그 당시도 모더니티한 문화양식도 많았지만 어찌 보면
구태의연한 민중적 개념이 발굴되면서 큰 사회적 힘이 되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질문이 이어져 계급사회에서 노동계급에 주목하고
사회적 주체를 호명해 가기 시작했던 거다.
계급문화운동까지 해봤으나 거기서 단절되고 막혔던 것이다.
십 수년간 그 경험과 실천이 단절되었다. 전체로서 계급,
자본문제는 90년대 초반까지 달성했다면 거기서 나아가서 개인의 해방들을 고민하고
주체들이 단단해지고,
나아가 계급이 머릿수로만 되는 게 아니라 개개인이 발전하는 단계로 넘어가야 했다.
기본적인 계급의식을 넘어 인간해방의 정신이나 개개인의 삶에 대한
존중과 존엄으로 나아가는 식으로 가야 하는데,
사회주의 붕괴라는 전 세계적인 단절과 전망의 상실 등으로 인해
더 이상의 사회적 진전이 막혔다. 근 20년을 까먹은 셈이다. 그
걸 다시 이으려니 힘든 것이다.
단절없이 잘 이어졌으면 풍요롭고 풍부하고 다양한 것을 획득 했겠지만 한번 꺾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다시 그걸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모방하는 듯이 보이고 유아적인 단계에 머문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역사적 진전의 맥을 다시 이어보려는 과정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들에게만 왜 투박하냐는 질문을 던지기 보다는
단절의 시간을 왜 방기 했는지에 대해 반성하고 더 치열한 고민들이 필요할 것이라고 본다.
▲ 15일 종로구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열린 '희망의 버스' 탄압 규탄 기자회견에서 송경동 시인이 2차 희망의 버스 185대를 제안하고 있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
“나는 느린 사람, 잘 지르지 못한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해 느리지만 계속 가겠다.“
이원재 송경동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 불같은 실천력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답게 말해서 실천력이지 정확하게 표현하면 “저지르는”거다.(웃음)
저지르기로 치자면 달인의 경지라고 본다. 일단 저질러서 사람들이 모이고 함께하게 만드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 놀라울 정도로(웃음) 앞으로 뭘 저지를 계획인가? 뭘 저지르고 싶나?
송경동 비없세 상근자로 있다. 희망의 버스도 그 과정에서 하게 된 거고.
그걸로 모인 사회연대의 힘과 꿈을 모아서 비정규노동체제에 대해 균열을
내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진숙을 구출하기 위한 투쟁을 넘어 전체 900만의 비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될까 두려워
자본의 노예가 되어가는 정규직의 삶이 해방으로 진전하기 위해서는
비정규노동체제에 균열을 내는 게 필요하다. 실제로 물러날 곳도 없다.
쌍용차 노동자 15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죽어 가는데 이건 일종의 경고다.
무한 착취 속에서 수탈 속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경고.
거기에 맞춰 한걸음 더 진전을 위해 내년 연말까지 한국사회에서도
비정규노동체제에 균열을 내는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
매주 금요일 촛불문화제,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100만 행진,
비정규직없는세상 사회협약제정 운동을 내년 연말까지 진행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알고 보면 나는 사실 잘 못 저지른다.(웃음) 다 몇 년씩 한 사업이다.
파견미술팀과는 평택 대추리 전에 쌀 개방 반대 농민들 싸움 때부터 시작해서
6년 가까이 일을 하고 있는데 신뢰를 쌓기 까지 수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저질러서 되는 시간이 아니다.
하나하나에 대해 최선을 다해야 했고 한발 나가기 위해 많은 것을 같이 해야 했다.
저지르는 스타일이 아니라 조금씩 얘기해서 만나가는 사람이다.(웃음)
인터뷰/정리_이원재 문화연대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상상력과 지구력의 힘을 믿는다
. “새로운 시대를 겨누어 변함없이 날카로운 질문과 실천을 던지는 노장을 꿈꾼다.
녹취_민중언론 참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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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체포하라, 나는 가지 않겠다
[기고] 용산참사 장례식 건으로 다시 소환장을 받으며
송경동(시인) 2010.04.19 09:29
▲ 2010년 1월9일 치러진 용산참사 범국민장의 모습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
내용은, ‘2010. 1. 9. 서울역에서 남일당까지 도로에서 용산화재 사망자 장례 관련 질서유지 근무자에게 폭력행사, 경찰관의 공무집행 방해’ 건이었다. 왜 당시 남일당 앞 도로를 무단 점거하고 추도시 낭송을 하며, “무너져야 할 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3자 연대가 아니라 / 저 자본의 카르텔, 저 권력 담합 / 광화문 네거리 저 독재자의 파란 집일 뿐”이라고 “저 저항의 망루 투쟁의 망루 연대의 망루 / 해방의 망루”를 우리가 다시 쌓아 올리자고 반사회적 궐기를 선전 선동한 죄는 걸지 않는가. 일반 공무집행 방해를 넘어, 이 불량한 자본의 체재를 무너뜨리고 다른 세계를 꿈꾸자고 내놓고 선전 선동하는 나의 시집은 왜 탄압하지 않는가.
보낸 곳은 그 대단한 용산경찰서다. 2009년 1월 20일 새벽. 이해할 수 없으리만치 전격적인 진압 작전 와중에 자신의 동료 1명과 철거민 5명을 불태워 죽인 그 경찰서다. 그러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단 한 번의 사과도 없이 그 가족들과 사제들과 문화예술인들과 무수한 시민들을 지난 1년 내내 짓밟고, 끌고 갔던 그 경찰서다. 늘 맨 먼저 출동해 작전에 나서는 것은 용역 깡패들이었고, 신고를 하면 태연히 와서 용역들 건너편에서 서서 지켜만 보고 있다가 불법을 저지르면 연행하겠다고, 힘없는 철거민들과 시민들에게 엄포를 놓던 그 용역 깡패들의 견실한 2중대였던 용산경찰서다. 사제들과 가끔 들리는 의원나리들에게는 사과를 해도, 정작 나라의 주인인 철거민들과 시민들 알기는 무슨 버러지들이나 불가촉천민들이라도 보듯 하던 그 용산경찰서다. 종교인들이 오시고, 의원 나리들이 걸음을 하기 시작하고, 각계의 지식인들이 나서며 다시 범국민적인 연대의 물결이 생기기 전까지는 치사하게 간이 화장실마저 치워가고, 분향소 앞 영정과 추모탑을 강탈해 가고, 고성능 스피커 차를 세워두곤 매일 밤마다 ‘연행’만을 되뇌며, 추모문화제를 방해하던 그 용산경찰서다. 그들 앞에서 우린 매번 내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나는 이 나라의 국민이 아닐 수도 있다는 모욕을 전달받아야 했다.
그것도 다른 날도 아닌 장례식 날 건이라니.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 사과는 하겠지, 양심은 있겠지,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지나 1년이 되었었다. 다섯 구의 시신을 차가운 냉동고에 가둬둔 채 유가족들을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날을 보내야 했다. 1년 내내 우리 사회 모든 양심있는 이들이 죄책감과 부채감과 미안함에 시달려야 했다. 그 와중에 수백명의 사람들이 다시 경찰서로 끌려갔다 와야 했다. 수 만개의 양초들이 심지 끝까지 타들어갔고, 수백만 개의 발걸음들이 ‘용산참사역’에서 내려야 했다. 반성하지 않는 소수의 권력 때문에 다수의 양심들이 안타까워 종종걸음을 쳐야 했다.
끝내 우리는 이기지도 못했지만 지지도 않았다. ‘사인들 간의 분쟁’이므로 국가와 정부는 관여할 수 없다던 이명박 정부의 옹고집은 이 무수한 연대의 물결 앞에 꺾일 수밖에 없었다. 충분치 않은 것이었지만 비로소 국무총리가 대통령과 정부를 대신해 ‘유감’의 뜻을 표하고, 유가족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용산4가 철거민들에게 역시 최소한의 보상을 해주는 선에서 우선 합의하고 ‘장례’를 치러드리게 되었다.
사실 안타까웠다. 압력밭솥 안에 갇힌 증기처럼 가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무엇도 시원찮게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수십 년은 끄떡없이 멀쩡할 도시 서민들의 공동체 주거 공간을 재개발/재건축/뉴타운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투기 건설자본들에게 내주는 ‘살인 개발의 중단’도, 관련 법 제도 정비도, 현대판 사제용병에 다름 아닌 용역깡패 폐지도, 투기 개발이 아닌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공동체 사회 건설에 대한 논의도, 자신들의 논리대로라면 ‘사인들 간의 분쟁’에 개입해 가난한 자국민을 상대로 대테러전을 수행함으로서 일부 권력층과 자본의 용병들로 전락한 국가공권력에 대한 책임도 물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법정에서 철거민들은 이웃을 불태워 죽인 ‘과실치사’의 중범죄자고, 사회 불안을 획책하고 법질서를 무너뜨린 극렬 좌경분자였다. 여전히 법정에서 우리는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개입한 제3자였다.
그러다보니 바랄 수도 없는 일이었겠지만 누구나 어느 순간 갑자기 ‘도심 테러리스트’가 되고, ‘사회 불온세력’이 되고, ‘불평불만자’가 되고, 효율성 없는 군더더기 인생, 쓰레기 인생, 기생 인생들이 될 수밖에 없는 이 흉폭한 사회 체재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수의 자본가들과 이들과 과실의 일부를 나눠먹는 기생족들 외에 이 사회의 대다수 사람들은 기실 사람이 아니지 않는가. 국민이 아니지 않는가. 모멸 속에서 생존의 벼랑으로 내몰린 860만 비정규직들이 사람인가. 평생을 일해 이 사회 모든 이들의 먹거리를 생산해 주었던 ‘농부’들이 사람인가. 자기 가족 명의의 집 한 채, 가게 한 채를 가지기 위해 평생을 일하고도 전세/월세에 사는 사람들이 이 나라의 국민인가. ‘아직은’이라고 당신은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당신이 갑자기 철거민이 되었을 때, 정리해고자가 되었을 때, 3개월짜리 6개월짜리 길어야 2년 이내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고, 갑자기 문자로 계약해지를 당했을 때도 ‘아직은’이라는 부사를 사용할 수 있을까. 경찰청에 쫒아가 봐도, 법정엘 쫒아가 봐도, 노동청엘 쫒아가 봐도 모두가 정작은 당신의 편이 아니라 소유하고 쫓아낸 자들의 편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을 때도 당신은 ‘아직은’이라는 부사를 쓸 수 있을까.
이렇게 정작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물음들에 대한 답이 이루어지 않았기에 현실의 용산은 끊임없이 되풀이 된다. 수십 년 일했던 공장 옥상을 최후의 망루 삼아 올라간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돌아 온 것은 용산 하늘에 떴던 그 작전용 헬리콥터들과 곤봉들과 군홧발이었다. 용산 열사들의 장례도 지내지 못했을 때 용산5가의 철거민이 다시 더 오를 곳 없는 생존의 망루에서 목을 매달았고, 무엇도 흔쾌히 풀리지 않은 용산 상황에 절망한 수원 신동의 또 한 철거민은 점거해 들어간 빈집에서 돌연사하고 말았다. 또 다시 강제 철거에 맞서 홍대 앞 두리반 건물로 들어간 유채림 씨 부부의 외로운 점거농성이 벌써 100일이 넘었다. 철거 현장이 아닌 생계 터전에서 퇴출당한 노동자들의 형편은 더 극악해 몇 년 넘게 투쟁하는 곳만 해도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이런 쓰라린 현실도 분노스러운데 이제 다시 출두하라고 한다.
최소한의 양심이나 결자해지의 마음도 없다. 1년 동안 온갖 사회적 출혈을 겪다 비로소 안타까운 장례를 치룬 날이었다. 백번 양보해 비좁은 서울역에서 영결식을 치루면서 어느 누구나 삼가 마음을 여미는 날이었다. 떠나는 날만큼은 조용히, 엄숙하게 보내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정부와 경찰은 그날마저 최소한의 예의를 저버렸다. 명동성당에 갇혀 있던 상주들이 먼발치에서나마 잠깐 장례의 예를 갖추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으면서 마찰을 유도했다. 중무장한 전경들을 배치해 추도객들을 자극하고, 영정도와 만장이 장례길 떠나는 것을 막아섰다. 무리하게 차선을 줄이며 장례 행렬을 자극했다. 노제에 쓸 엠프 차량을 한강대교 변에 억류하고, 중무장한 병력이 장례 행렬을 막아섰다. ‘마지막 가는 날까지 이게 뭔 짓이냐고, 너무하지 않냐고’ 누구나 항의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 용산서 정보과장과 그 무리들이 나타났다. 불쌍한 전의경들이 무슨 죄일까 싶어, 말도 듣지 않고 가버리려는 그들을 붙잡고 반은 절규로, 반은 애원으로 말했다. ‘이게 무슨 짓들이냐고, 빨리 길을 터라고.’ 생각해 보니 그 정도가 ‘폭력’이고, ‘공무집행 방해’다.
어릴적, 시골 읍내에 살다보니 상여 나가는 풍경을 자주 접하곤 했다. 상여는 몇 번이고 가다가 도로 중간에 주저앉곤 했다. 고인이 이곳에 사연이 있어 쉬었다 가잔다고도 했고, 이곳에 얽힌 미련이 떨쳐지지 않아 못가겠다고 한다고도 했다. 까닭 없이 앉아버릴 때도 많아 난감하기도 했다. 주로 다리 위에서 자주 주저앉곤 했다. 요령꾼이 염을 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시간이 한정없이 가고, 하지만 그러한 때 어떤 이들도, 어떤 차량도, 어떤 경찰/공무원들도 따져 묻거나, 비키라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가와 가난한 호주머니를 열어 노잣돈을 꽂아주며 명복을 빌어주었다. 혹 장례 과정에서 분쟁이 생겨도 그게 다 해원의 일들이려니 했다. 그게 우리의 미풍양속이었다. 이 나라 정부와 경찰은 그런 예의와 미풍양속에 대한 고려의 마음조차 없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죽어도 이번 소환에 응할 수 없다. 내 발로 순순히 출두할 수 없다. 립서비스에 지나지 않는 줄 알지만, 정부를 대표해 국무총리가 사과를 하고 간신히 치룰 수 있었던 1년만의 장례식이었다. 해당 작전 수행 담당자였던 용산경찰서는 이 시대 앞에 백배사죄를 해도 그 죗값이 적지 않다. 작년 한해 용산 남일당 앞에서 있었던 무수한 충돌을 생각해 보면 그날 잠깐의 마찰이란 사실 아무것도 아닌 헤프닝이거나, 살풀이 정도였을 것이다. 공무집행이 현저히 방해될만한 정황도, 자리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괘심죄인가? 단 한번도 저희들에게 굴하지 않고 싸웠던 내가 미웠던가? 사실 내가 봐도 한없이 무모하곤 했다. 몇 달 동안은 내내 오늘 잡혀가나 내일 잡혀가나 하는 생각이었다. 정신없이 싸우거나 발언하다 보면 어느새 유가족들과 철거민 분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송경동이 연행해.’라는 무전 소리를 들었다며 몇 번이고 저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편들에게 연행(?)되어 남일당 분향소 안이나, 레아 건물로 끌려가기도 했다. “송경동이 뒷빽이 누구야. 왜 안 잡혀가는지 이해가 안돼.”라고 문정현 신부님이 핀잔을 놓기도 했다. 그렇기도 한 게 내가 마이크만 잡으면 용산경찰서장도, 이명박 대통령도 모두 ‘이 개새끼들아.’였다.
이런 경우가 전에도 있었다. 2006년 포항에서 공권력에 맞아 뒷머리가 열려 죽었던 비정규건설일용노동자 하중근 열사 추도제 때의 일이다. 당시 불법 추모제에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라>라는 추모시를 통해 폭력집회를 선전선동했다는 명목으로 소환장을 받았다. 하지만 하중근 열사의 죽음이 명백한 공권력 타살임에도 불구하고 의문사로 남아있는 동안에는 나는 죽어도 출두할 수 없다고 했다. 4차례까지 소환장을 받고도, 장례가 치러지고도,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을 비롯해 지도부들 모두 출두하고 갔다는 달콤한 회유의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갈 수 없었다. 가기 싫었다. 잡아 갈테면 잡아가라고 했다. 이제 와 말하지만 너무 멀기도 했다. 몇 푼 되지 않는 차비가 궁하기도 했다.
당시엔 하중근 열사 한 분이기도 했다. 이번엔 자그마치 그 안타까운 죽음이 다섯 분이다. 하중근 열사 역시 의문사로 남겨진 채 치러진 안타까운 장례였지만, 용산 열사들의 죽음 역시 어떤 진상규명도 이뤄지지 않은 채로 치러진 원통한 장례였다. 그렇게 용산 열사들을, 나를, 우리를, 이 시대를 다시 어둔 땅 속에 묻는 것만으로도 서럽고 분통해 어디로 갈지 모르는 외로운 마음과 몸이 망가질 데로 망가져 있는데, 이제 출두까지 하라니. 난 도저히 나를, 이런 경우를 용납할 수 없다.
물론 한번쯤 고개 숙이고 들어가, 모르는 사이들도 아니니 적당히 하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선수들끼리 왜 그러냐고, 다 끝났으니 좋게 좋게 정리하자고 은근히 엄포를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별일 아닌 듯 불구속으로 벌금 얼마나, 집행유예 한 10월 쯤 받으면 되기도 할 것이다. 늘 미안한 조영선 변호사님 말을 따라 빨리빨리 진행시켜서 이미 진행 중으로 4월 23일이면 1심 결심이 나오는 지난 해 3월 7일 용산 건과 이것도 병합시키면 될지도 모른다. 작년 6월까지 두 차례 받아 둔 미결 소환장 건도 아예 정리하고 넘어가도 될 것이다. 그럼 기륭 관련 두 건과 더불어 총 댓 건이 병합되는 건가. 어차피 한 번에 털어야 하니 신경 꺼버려도 될 것이다.
하지만 난 갈 수 없다. 이런 무식한 법의 전용과 남용을 인정할 수 없다. 당신들에게만 그토록 넘쳐나는 권력의 힘에 승복할 수 없다. 지난 1년 국민들이 용산에 모아준 연대의 간곡함을 이런 식으로 희화화해버리고 마는 이 정부의 불순한 작태에 순순히 응해 줄 수 없다. 아직 용산 학살은 끝나지 않았다는 당신들의 투철함에 경의를 표하지만, 그릇된 당신들의 무대에 아무 생각없이 지나가는 행인 1이 되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더욱 소환자가 나만이 아니라, 용산 범대위 일꾼으로 대정부 협상 담당자였던 천주교 인권위 김덕진과, 당일 질서유지원으로 일했던 전국철거민연합 회원 몇도 포함되어 있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더더욱 갈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단순한 보복을 넘어 이건 기획 수사다. 용산경찰서만의 기획이 아니다. 장례 지난 지도 벌써 석달여. 우리가 용산을 까맣게 잊어가던 그 시간동안 그들은 우리를 잊지 않고 추적해 왔다. 그러고 보니 요 근래 있었던 몇 가지 용산 관련 사업들이 기억난다. 장례가 끝나고도 여전히 끝나지 않는 용산을 문제 삼는 사업들이 있었다. 용산 파견미술인(그들은 스스로를 그렇게 부른다.)들이 진행한 <미영씨가 시킨 전2-끝나지 않는 미술제>가 그것이다. 이들은 용산 장례식 당시 장투닷컴에서 실사 출력으로 뽑아주겠다는 만장을 극구 사양하고, 밤새워 160장의 만장을 손수 쓴 이들이다. 2월 첫주부터 매주 금요일을 <용산과 함께 하는 날>로 정하고, 이어 레아 호프에서 25회에 이르는 <끝나지 않는 전시전>을 열었던 불굴의 예술가들이다.
이 바보스런 인간들은 정세 판단이란 게 무엇인지를 잘 모르거나, 알려고 하지 않아 용산 문제가 장례 이후 잠잠해지고 난 뒤에도 용산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끝나지 않는 전시전>을 계속해서 이어나가겠다는 무모한 사람들이다. 지난 1년은 용산 현장으로 사람들을 부르기 위해 했다면 이젠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우리가 용산 문제를 가지고 찾아가겠다는 사람들이다. 나도 그 천진난만함에 혀를 내두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지난 1년 동안 용산에서 무슨 일을 했던가를 알고 싶은 사람들은, 우리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미술 관련 에세이집이자 창작 및 미술 정신의 지침서가 될 <끝나지 않는 전시-용산 파견미술가 추모집>(삶이 보이는 창 펴냄)을 보면 될 것이다. 나는 이렇게 평범하면서도 유쾌하고 숭고한 책을 많이 보지 못했다.
또 열사 평전 형식의 만화책 <내가 살던 용산>(보리출판사 펴냄)을 펴낸 만화가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9개월에 걸쳐 남들이 거리에서 양껏 분노를 표출하고 있을 때 골방에 갇혀 우리가 더 깊이 들어가야 할 용산의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만화로 그려야 했던 이들이다. 우리 시대가 유배 보낸 이들이다. 가까스로 작업을 마치고 딱 1년이 되던 지난 1월 20일 헌정만화집을 내준 이들 역시 용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이젠 행동으로 나서겠다고 뒤늦게(?) 나선 이들이다. 매달 1회씩 용산을 기억하는 북콘서트를 열겠다고 했고, 그 첫 회를 얼마전 홍대 앞 대안문화터인 <클럽 빵>에서 성대히 치뤘다.
이 모든 일들이 아직도 쉬고 있는 중이라 전혀 내가 관여한 일들이 아님에도 어떤 연관성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만약 그 때문이라면 번지수가 틀렸으니 다시 찾아보길 바란다. 어쩌다보니 용산 관련한 문화예술 사업들을 맡아하게 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내가 아니다. 가르쳐준다면 그건 전미영이고, 이윤엽이고, 신유아이고, 나규환이고, 이윤정이고, 전진경이고, 전윤희고, 김종도이고, 이철재고, 김기호 등이다. 김홍도와 여섯 명의 만화가들이고, 금세 홍대 두리반 철거 현장으로 옮겨가 있는 조약골이다. 4대강 사업을 막으려고 서서히 기지개를 켜며 봄나들이를 준비하고 있는 한국작가회의와 작가선언6.9의 젊은 문학인들이다. 내가 아니다. 난 그들 앞에 부끄러운 사람일 뿐이다.
그럼에도 끝내 소환하고 싶다면, 내 발로는 못 가니 체포하라. 아직 끝나지 않은 용산을 체포하라. 작은 한 몸이지만 너희들의 치졸함이, 극악함이 어떤 것인지를 묶여서 증거하겠다. 너무 빨리 마음을 놓아버렸던 것을 반성하고, 다시 전의를 불태우겠다. 860만 비정규 사회 전체가 감옥이고, 모든 이들의 삶이 소수의 이윤을 위해 무슨 가공육처럼 다뤄지는 이 사회 전체가 강제 노역장 아닌 곳이 따로 없으니 들어가 살던, 나와 살던 별반 차이도 없고, 더 두려워 할 것도 없으니, 차라리 너희들의 뜻대로 잡아 가둬라. 하지만 너희가 가둔다고 해도 나의 꿈만은, 의지만은 가두지 못할 것이다. 얼마 전 펴낸 시집의 졸시에서도 얘기했듯 ‘이미 나의 꿈은 이 세상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돌이켜 실제 소환되어야 하는 이들은 여전히 당신들임을 명심하라. 현실의 법은 당신들이 쥐고 있을지 모르지만 역사의 법, 민중의 법은 언제고 광주 학살의 주범인 전두환을 법정에 세우듯 다시 용산 참극의 악행을 물어 당신들을 소환하고 말 것이다.
물론, 내가 아무 죄도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많다. 생각해보면 당신들은 지금 훌륭하게 공무를 수행하고 있는 모범 공무원들이다. 법 질서를 확립해가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을 적절하게 수행하고 있다. 대상도 잘 잡았다. 맞다. 나는 당신들의 ‘공무 집행’을 한사코 반대하고 싶은 사람이다. 이전에도 그랬고, 이후에도 그럴 것이니 싹을 철저히 잘라버려야 하고, 개전의 정이 전혀 없으니 용서가 없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돌아보라. 당신들이 집행하는 공무가 누구의 편에 철저히 편파적으로 선 것인지를. 나는 그런 당신들의 공무를 ‘공무’로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진정한 공동체사회의 평화와 평등을 저해하는 위험한 반사회적 범죄 행위로 여긴다. 이렇게 아예 당신들이 집행하는 ‘공무’ 그 자체의 뿌리를 부정하는 사람이니, 당신들의 세계에서는 처벌받아 마땅할 만큼 죄가 많을 것이다.
그래서 소환장을 받아들고, 오히려 미운 것은 당연한 일을 주도면밀하게 하는 당신들이 아닌, 우리 내부다. 너무 착하고 순박하기만한 우리 시대의 가난함이다. 적당함이다. 불철저함이다. 아니 그렇게 새로운 사회에 대한 꿈이, 용기가 작아져가는 나일뿐이다. 체포하라. 이런 나의 반성과 쓸쓸함을. 이 여유와 멈칫거림을.
송경동의 꿈은 이미 세상의 것이 아니다
[새책] 송경동 시인 두 번째 시집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오도엽(작가) / 2009년12월28일 13시58분
송경동 시인하면 저 구로동 기륭전자 비정규직 농성 천막이 떠오른다. 용산 참사가 일어난 남일당 건물이 떠오른다. 언제부턴가 그의 창작실은 거리가 되었고, 그의 시에는 ‘투쟁시’, ‘추모시’라는 말이 붙었다. 그의 시들은 서점 시집 코너에 꽂혀있는 대신 머리띠, 현수막, 깃발들이 가득 찬 곳에서 함께 나부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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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송경동 시인은 그저 친구다.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낭만이 무엇인지를 아는 진정한 리얼리스트. 벗이 아플 때 기꺼이 고통을 함께 나누고 벗이 슬플 때 함께 펑펑 울 줄 아는. 술에 취하면 웃통을 벗고 거리를 활보하며 노래를 부를 줄 아는, 그저 그렇고 그런 친구.
그런 그를 ‘데모꾼’이라고 경찰서에 가둔다. 송경동 시인은 ‘알아서 불어라’며 조서를 꾸미는 형사 앞에서 ‘무엇을, 불까’ 생각한다. ‘풍선이나 불었으면 좋겠다 / 풀피리나 불었으면 좋겠다 / 하품이나 늘어지게 불었으면 좋겠다 / 트럼펫이나 아코디언도 좋겠지’ 바로 이런 인간이 송경동이다.
시인은 생각한다. 기껏 휴대전화 통화기록으로 자신을 평가하려는 이 세상의 사소한 물음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내 과거를 캐려면
최소한 저 사막 모래산맥에 새겨진 호모싸피엔스의
유전자 정보 정도는 검색해와야지
저 바닷가 퇴적층 몇천 미터는 채증해놓고 얘기해야지
저 새들의 울음
저 서늘한 바람결 정도는 압수해놓고 얘기해야지
그렇게 나를 알고 싶으면 사랑한다고 얘기해야지
이게 뭐냐고
- 시 ‘혜화경찰에서’ 가운데서
경찰만 이런 사소한 물음을 던지는 건 아니다. 그를 투쟁 현장에서 만나는 이들도 좌파가 아니냐고도 묻고, 학생출신 아니냐고도 묻는다. 송경동 시인은 이리 답했다.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사상의 잣대로 송경동 시인과 ‘동지’나 ‘조직원’이고 싶은 이들에게 말한다.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닷물결에 밀리고 있고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무너진 담벼락
걷어차인 좌판과 목 잘린 구두,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
비천한 모든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없는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다고
- 시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가운데서
송경동 시인의 첫 시집 <꿀잠>에 이어 두 번째 시집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창비)이 나왔다. 송경동 시인이 투사나 전사이기보다는 내 벗이자 시인이기를 바라는 나로서는 무척 기쁘고 행복한 일이다. 저 물대포가 쏟아지는 거리에서도, 찬 겨울바람에 펄럭이는 농성천막에서도 시를 쓸 수 있는 송경동 시인이 너무 부럽기도 하다. 인쇄소에서 책이 나오던 날, 우연찮게 그를 만나 잉크도 마르지 않은 시집을 선물 받았다. 일 년 동안 입술만 적시던 술을 그날은 밤이 새도록 마셨다.
송경동 시인은 세상의 사소한 물음에 대해 어느 물음도 무시하지 않고 친절하게 답하고 있다. 붕어빵 노점상 아저씨 이근재 씨의 추모시를 쓰는 송경동은 자신의 시에 대해 성찰을 한다.
이런 민주주의가 판치는 세상을
어떻게 그럴듯하게 문학적으로 미학적으로 그려줄까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읊어줄까
국화꽃 같은 누이로 그려줄까
어떤 존엄한 시어를 찾아줄까
그러면 나의 시도 어느 연인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까
그러면 나의 시도 평론가들로부터 상찬받을 수 있을까
- 시 ‘비시적인 삶들을 위한 편파적인 노래’ 가운데서
▲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송경동, 창비 |
세계 산재노동자 추모의 날에는 ‘나의 모든 시는 산재시다’라는 시를, 포항건설 일용노동자 하중근 영전에서 ‘안녕’, 기륭전자 농성장에서는 ‘너희는 고립되었다’, 콜트 콜텍 노동자에는 ‘꿈의 공장을 찾아서’, 택시 운전사 허세욱 열사에게는 ‘별나라로 가신 택시운전사께’, 용산 참사 해결을 위해 ‘이 냉동고를 열어라’라고 때론 분노하고 때론 울부짖는다.
별수 없는 인간이 송경동 시인이기도 하다. 시인의 첫 해외여행은 멕시코 깐꾼에서 열린 더블유티오 반대 시위였다. 그곳에서 한 농민이 할복으로 항거하였고, 시인은 이국땅에서 추모시를 써야 했다.
아무튼 이번 시집이 많이 팔렸으면 한다. 거리를 떠도는 시인에게 차비라도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독자들이 알았으면 한다. 송경동 시인이 누구인지를. 그리고 그의 꿈이 무엇인지를.
나의 꿈은 이미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 시 ‘미행자’ 가운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