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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CEP, CPTPP, 인태경제프레임워크(IPEF) : 지역질서의 분절화·진영화 우려와 대응과제
(김양희, 국립외교원 경제통상개발 연구부장)
발행일 2022-02-08 조회수 1228
1. RCEP 발효의 지경학과 지정학
2. 새로운 경제협력 모델 ‘IPEF’
3. 지역통합을 위한 정책 과제
1. RCEP 발효의 지경학과 지정학
한국에서 2022년 2월 1일 최초의 메가 FTA인 역내경제동반자협정(RCEP, 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Agreement)이 발효되었다. 1월 1일 ASEAN 6개국(브루나이, 캄보디아, 라오스,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과 비ASEAN 4개국(호주, 중국, 일본, 뉴질랜드)에서 발효된 뒤 한 달 만이다. RCEP 협정문 20.6조(발효)에 따르면 RCEP은 총 15개 서명국 중 ASEAN 6개국과 비ASEAN 3개국이 협정을 비준하고 비준서를 ASEAN 사무총장에 기탁하면 60일 뒤 발효된다. 2013년 ASEAN 10개국(위 6개국 및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미얀마, 필리핀)과 비ASEAN 6개국(위 5개국 및 인도)이 협상을 개시하였으나 인도는 2019년 이탈했다.
RCEP은 2020년 기준 세계 GDP, 인구, 무역 각각의 30.8%, 29.7%, 31.9%를 점하는 세계 최대 메가 FTA다. 그러나 RCEP의 가장 주목되는 특징은 무한한 성장 잠재력이라는 지경학적 기회요인이다(김양희, 2021). RCEP은 세계경제를 견인하는 지역에서 인접국간에 형성된 지역가치사슬(RVC)이 제도적 통합으로 발전한 것이다. 더욱이 RCEP-RVC의 중핵인 제조 강국이자 세계 2위, 3위, 10위 경제대국 중국, 일본, 한국이 함께 한다.
RCEP의 공통 원산지규정(RoO, Rules of Origin)은 RCEP 최대 성과물로 꼽힌다. 이는 재료누적(diagonal cumulation), 원산지 자율증명, 공통 ‘품목별 원산지기준(PSR)’이 핵심이며 공산품 PSR은 대부분 세번변경기준(4단위/5단위)과 부가가치기준(40%) 중 택일 가능하다. 단, ‘완전누적(full cumulation, 공정 및 부가가치 누적)’ 적용은 전 회원국 발효 후 검토를 개시해 5년 내에 완료해야 한다. RCEP-GVC는 EU나 미국의 그것에 비해 단순 GVC(1회 국경 통과)보다 복잡한 GVC(2회 이상 국경 통과) 비중이 높은 점을 감안할 때, 공통 RoO 도입은 역내 무역·투자 확대를 촉진해 RVC의 효율성과 생산성 제고에 기여할 전망이다. 그러나 RCEP-RVC에는 과도한 중국 의존성이라는 지경학적 위험요인도 있다. 중국은 2018년 기준 RCEP 12개국의 최대 수입국이자 8개국의 최대 수출국이다. 단, RCEP RVC는 GVC와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 정작 역내 최대 수출국 중국의 최대 수출국이 미국이다.
RCEP에는 회원국 간 발전 격차와 전략 경쟁이라는 지정학적 위험 요인도 엄존해 중간 수준의 자유화로 귀착되었고 역내 저개발국(주로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을 배려해 이행 일정도 차등화 했다(김양희, 2021). RCEP의 20년 이내 관세철폐 비중(품목수 기준)은 평균 91.5%이나 이 중 83%는 기존 FTA에서 양허된 것이다. 중국·일본·한국 간 양허 수준도 수세적이다. 한국의 경우, 평균 양허수준은 88%인데, 이는 한·ASEAN FTA에 비해 다소 높아졌을 뿐 한중 FTA와 별 차이가 없고 한·호주 및 한·뉴질랜드 FTA보다는 낮다. RCEP을 매개로 최초의 FTA를 맺은 한일 간 양허율은 각기 83.0%이나 농산물의 경우는 한국의 대일 양허율과 일본의 대한 양허율이 각각 46.2%, 54.1%에 그친다. RCEP의 서비스, 투자, 전자상거래, 기타 무역규범의 자유화 수준도 ASEAN+1 FTA보다 높으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보다 낮고 CPTPP에 포함된 노동, 환경, 국영기업 관련 규범은 없다. CPTPP는 미국 주도 반중연대협정인 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정작 트럼프 대통령이 2017년 탈퇴한 뒤, 일본 주도로 RCEP 7개국(호주, 브루나이, 일본, 말레이시아, 뉴질랜드, 싱가포르, 베트남)과 캐나다, 칠레, 멕시코, 페루 등 총 11개국이 2018년 발효시킨 또 하나의 역내 메가 FTA다.
경제통합사에 유례없는 RCEP의 독특성은 전략적 경쟁자간의 경제통합이라는 지정학적 위험요인에 있다. 인접국 간에 뿌리 깊은 상호 불신은 복잡한 갈등과 대립의 역사와 세력전이의 산물이다. 대표적인 중일 관계에 더해, 모리슨 호주 총리의 코로나19 기원 조사 요구로 촉발된 중국·호주관계도 심상치 않다. 국경충돌로까지 비화한 중국·인도 갈등은 인도의 RCEP 탈퇴의 한 요인이다. 전략적 경쟁 관계는 아니나 한일관계도 심각하기는 마찬가지다. 아울러, 미중 전략경쟁의 최대 각축장인 동 지역에서 발효된 RCEP은 중국이라는 구심력과 미국이라는 원심력이 강한 길항작용을 일으키는 태생적인 불안정성을 지닌다. 이에 중국은 미국의 TPP 탈퇴로 원심력이 약화된 사이 자국의 구심력 강화에 기여할 중국 최초의 메가 FTA 체결이 절실했다. Park, Petri and Plummer(2021)에 따르면 2030년 중국 GDP에 미칠 미중 전략경쟁의 악영향(-1.85%)을 RCEP 체결(0.46%)이 만회하는 형국이다.
일본은 중국의 역내 자장 확대를 우려해 RCEP 체결에 소극적이었고 대중 견제에 힘을 보탤 인도의 탈퇴 후에는 인도의 조속한 복귀를 위한 예외조항 도입을 주도했다. 그런 일본이 15개국 중 세 번째 비준국이 된 배경이 뭘까. RCEP의 기대효과에 관한 최근 연구는 대체로 상대적 고관세의 한국·중국과 처음 FTA를 맺는 일본을 위시해 경제규모가 큰 삼국에 이익이 집중된다는 공통의 결론을 도출한다. 熊谷聡·早川和伸(2021)는 2030년 각국의 GDP 증가율을 일본(0.66%), 한국(0.24%), 중국(0.13%) 순으로 추산한다. Park, Petri and Plummer(2021)도 2030년 RCEP의 GDP는 0.6% 증가하나 한국(1.27%)과 일본(1.22%)의 증가율이 가장 높다고 본다. Banga, Gallagher and Sharma(2021)도 유사한 결론에 이른다. 호주도 세계경제의 성장 엔진에 합류해 고립을 해소할 필요성이 중국과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비준을 결단했다. 일본과 호주는 국제규범에 기반을 두어 중국을 규율하는 매우 중요한 수단으로 RCEP을 자리매김한다.
2. 새로운 경제협력 모델 ‘IPEF’
RCEP의 역사적 발효에도 불구하고, 지역통합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중국은 2020년 RCEP 서명에 고무되어 2021년 9월 CPTPP 가입신청이라는 정면 돌파 전략으로 CPTPP에 맞서며 장차 양자를 애초 미국이 제안했던 아시아태평양FTA(FTAAP)로 수렴시키자는 지역통합 청사진을 제시하였다.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Indo-Pacific Economic Framework)’라는 새 변수의 등장으로 지역통합 전망은 한층 흐려졌다. RCEP에도, CPTPP에도 부재해 아태지역 경제질서의 주도권을 중국에 내 줄 위기에 처한 미국은 2021년 11월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서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 2.0 혹은 인태전략의 경제 버전격인 IPEF 구상을 내놓았다. 동 지역의 원심력이 아닌 구심력이 되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다. 백악관은 2021년 10월 27일자 보도 자료에서 향후 협력 파트너들과 IPEF 목표를 확정할 것이라고 말했고 최근 여러 경로를 통해 3월말까지, 이르면 수 주 내에 구체안을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지금까지 간헐적으로 드러난 IPEF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먼저 내용적 측면이다. 첫째, IPEF의 목표는 “글로벌 경제현안에 대응한 인태지역과의 경제 연대 심화”로 모아진다. 둘째, 핵심 의제로는 기술한 27일자 보도 자료에서 무역원활화, 디지털 경제·기술 표준, 공급망, 탈탄소·친환경 에너지, 인프라, 노동 표준의 6개를 꼽았고 일부에서는 ‘경제적 강제(economic coercion)’도 내비쳤다. 이후 반중 색채를 다소 완화한 다음의 7대 의제로 조정된다. 공정하고 회복력 있는 노동자 중시 무역 원활화(디지털 경제와 노동표준 포함), 공급망 회복력, 인프라, 탈탄소 및 클린 에너지, 수출통제 및 투자 심사, 조세 및 반부패다.
구조면에서는 첫째, IPEF는 목표와 원칙 등을 담은 포괄적인(overarching) 프레임 협정과, 규제 수준과 추진 속도가 제각각인 의제별 모듈로 구성된다. 둘째, IPEF는 의회비준을 요하는 조약(treaty)이 아닌 행정협정(executive agreement)이다. 셋째, 백악관 총괄하에 USTR과 상무부가 공동주관하되 전자는 무역 관련, 후자는 나머지 모듈을 담당한다. 넷째, 참여국은 프레임 협정과 모듈 모두에 참여하거나 양자택일한다. 핵심 참여국은 일본, 한국, 싱가포르, 호주, 뉴질랜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중국을 뺀 RCEP 주요국이 거론된다.
미 정부는 당분간 CPTPP 가입보다 IPEF에 주력할 뜻을 거듭 밝혔다. 그 이유는 첫째, 전자보다 후자가 대중견제에 효과적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2018년 발효된 CPTPP에는 IPEF의 핵심 의제 관련 규범이 미흡하거나 아예 없다. 미 정부는 CPTPP가 노동 및 환경 보호 규범이 미흡할 뿐 아니라, 최대 관심사인 디지털 관련 규범도 이후 발효된 미일디지털무역협정(USJDTA)이나 USMCA보다 낡았다며 CPTPP+ 수준의 USMCA를 IPEF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예컨대, 러몬도 상무부 장관은 IPEF의 ‘디지털 경제’는 중소기업의 디지털 전환과 수출시장 접근성 제고로 중소기업, 여성, 사회적 약자의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는 노동자 중심 무역정책으로, 협소한 디지털 통상 규범에 머무르는 CPTPP보다 강력하다(robust)고 강변한다. 미국은 이 취지에 부합한다며 종종 싱가포르, 호주, 칠레가 맺은 디지털경제협정(DEPA, 한국은 2022년 1월 1차 가입 협상 완료) 가입 의사도 밝혔다. DEPA도 일종의 모듈형으로, 구속 조항과 비구속 조항이 섞여 있다. 중국이 DEPA 가입 의사를 밝히자 일각에서는 미국이 먼저 가입해 중국이 DEPA 수준을 낮추지 못하게 막자고 주장한다. IPEF를 선호하는 두 번째 이유는, 미 정부가 의회에서 한시적으로 위임받은 ‘무역촉진권한(TPA)’이 작년 6월 만료되어 많은 의제를 많은 협상국이 일괄타결(single undertaking)하는 CPTPP 가입은 신속한 의회비준이 힘들기 때문이다.
미국의 IPEF 경도는 두 가지 현실적 제약에서 출발하는 임시방편일 뿐이라는 비판적 시선도 있다. 11월 중간 선거를 앞두고 ‘노동자 중시 무역정책’ 기조의 민주당은 미국시장 개방을 포함하는 CPTPP에 대한 노동계의 반발 기류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모듈형은 미국 시민사회와 재계의 결이 다른 관심사를 다루는 동시에 해외 참여국별 이행 수준의 차이도 감안하고자 고안된 듯한데, 그로 인해 모호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미국이 IPEF라는 화두를 던지자 미국 내외에서는 그 의도와 내용, 구조 등을 둘러싸고 적잖은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에 주요 쟁점을 토대로 향후 IPEF가 고려해야 할 사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내용면에서는 우선 IPEF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한다. 미국 시민사회의 주 관심사는 고용, 환경, 인권 등이나 재계와 의회 일부는 시장 접근은 빠진 IPEF가 CPTPP의 대안이 되기 힘들다며 미 정부의 조속한 CPTPP 가입을 촉구한다. 양자의 조율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공급망, 인프라 등 규범화가 쉽지 않은 분야에서의 규범화 및 이행 방안의 구체적 제시도 핵심 관건이다.
구조면에서는 첫째, 모듈형의 맹점 보완이 시급하다. 6~7개 모듈은 상호 긴밀히 연계되어 있는데 각각의 규제 수준과 범위, 참여국도 상이하면 규범 간 파편화가 우려된다. 예컨대 기후변화 대응은 무역원활화, 인프라, 탈탄소·클린 에너지에 모두 포함된다. 디지털 전환도 마찬가지다. IPEF의 모듈별 상호정합성과 일관성 유지 시 DEPA, TTC, G7 등 IPEF 외부에서의 유사한 규범 제정과도 조화를 도모해야 한다. 둘째, 국제법적 안정성과 신속성 사이에 내재된 딜레마를 풀어야 한다. IPEF가 행정협정인 이상 추가 양허나 신규 규범 도입에 따른 의회 내 국내법 개정을 동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규범 이행의 국제법적 구속성과 정권교체 뒤 지속 가능성을 위태롭게 한다. 미 정부는 이를 막고자 신뢰할 만한 핵심 참여국을 강조하며 필요시 의회와 협의하겠다고 하나 이것이 의회 비준을 뜻하는 것인지, 그 경우 신속성은 어찌 담보할지 분명히 해야 한다.
IPEF가 안정적인 경제협력 모델이 되기 위해서는 대외적인 측면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IPEF의 이해당사자는 미국뿐 아니라 해외에도 있어 호혜주의에 입각한 IPEF를 설계해야 한다. IPEF가 참여국에도 분명한 혜택이 있어야 한다는 자국 전직 관료 Matt Goodman & William Reinsch(2022)의 지적에 미 정부는 귀 기울여야 한다. 미국의 전 방위 대중 보호주의 조치로 중국과 근접한 미 우방은 이미 거대 중국시장을 잃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만회할 시장을 제공해야 우방의 참여유인이 제고되는 동시에 대중 의존도도 완화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둘째, IPEF와 RCEP 및 CPTPP와의 관계 설정에 기반을 둔 미래 지역통합 청사진에 대한 공론화가 필요하다. 미국이 IPEF에 경도된 나머지 ASEAN이 주도한 RCEP을 결과적으로 흔들고자 한다면 이는 바이든 정부의 동맹중시 노선에도, ‘ASEAN 중심성’ 존중 기조에도 배치된다. 만일 가뜩이나 분절화 양상이 심한 역내 디지털 규범이 IPEF의 대두로 더욱 분절화·진영화되면 RCEP에 따른 시장통합 효과는 반감하고 역내 투자 유입 유인도 감소한다. 셋째, IPEF는 반중연대가 아닌, 환경 변화에 부합하는 새로운 규범 창출의 요람이어야 한다. 누구도 미중 사이에서 일방에 줄서기를 강요받는 상황을 원치 않는다. 이는 미 재계조차 우려하는 바다. 미국이 이를 의식해 의제를 일부수정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 앞으로도 이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
3. 지역통합을 위한 정책 과제
RCEP에는 기회요인과 위험요인이 위태롭게 공존하고 있어 중간 수준의 FTA로 귀결되었다. 앞으로도 중국이라는 구심력과 미국이라는 원심력 간에 팽팽한 길항작용이 예고된다. RCEP 발효원년부터 지역 질서의 분절화·파편화에 RCEP의 형해화 가능성이 우려되고 RCEP 무용론마저 제기되는 이유다.
그러나 RCEP은 지역경제통합의 역사적인 출발점임이 분명하다. 통일 RoO 도입은 가장 귀중한 결실이다. 아울러 지정학적 갈등 관계의 역내국들이 대등한 국제법적 권리와 의무를 지니는 지역질서의 태동이라는 RCEP의 의의를 간과해선 안 된다. 다른 FTA에는 찾아볼 수 없는 RCEP 상설 사무국(secretariat) 설치를 지역 거버넌스의 중심축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향후 RCEP 고도화가 불가피하다. 이는 RCEP이 협정문에 명시한 ‘현대적·포괄적 양질의 호혜적 경제동반자 틀 수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전 세계가 코로나 이후 디지털 전환과 그린 전환, 공급망 안정화, 격차 완화, 경제안보에 사활을 건 지금, RCEP이 이를 외면한다면 내부로부터 도태될 것이다. RCEP 고도화는 지경학적 기회요인의 최대화와 지정학적 위험요인의 최소화로 귀결되나 상충 가능성이 내제된 양자의 병행은 녹록하지 않다. 미중 전략경쟁의 각축장이 된 지역의 숙명이나 스스로 풀어야 발전 가능하다. IPEF의 핵심 의제 중 노동, 인권, 첨단 이중용도 기술의 공급망 등은 다분히 회원국 간에 상반된 가치와 규범에 기반을 둔 것인 반면, 무역원활화, 탈탄소와 녹색전환, 요소수와 같은 민용 품목의 공급망 등은 시대변화에 따라 누구든 수용이 불가피하다.
RCEP이나 CPTPP와 같이 다수국이 시장접근을 포함해 여러 분야에서 일괄 타결하는 기존 FTA 모델은 대내외 이해관계 조정의 난점으로 신속한 제정이 곤란하다. 반면 IPEF와 같이 소수국이 특정 규범 분야에 한정해 타결하는 모듈형은 환경변화에 따른 신속한 개정이 용이하며 시장개방이 빠져 국내 이해조정이 수월해지는 현실적인 장점도 있다. 캐서린 타이 USTR 대표는 모듈형이 미국·EU 무역기술위원회(TTC)의 10개 작업반과 유사하다며 미국이 현재 영국, 케냐와 각기 추진 중인 무역협정도 이 모델이 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를 통해 미국이 모듈 형을 기존 FTA 모델을 대체하는 새로운 모델로 삼을 가능성도 엿보인다. 이는 급변하는 환경을 배경으로 기존 메가 FTA 모델의 수명이 다해가고 있음도 시사해 주목된다.
한편, RCEP 최종 규정 20.4조(개정)에 따르면 회원국 합의에 의한 협정 개정이 가능하며, 개정안은 절차 완료의 서면 통보 후 60일후 발효된다. 20.8조(일반 검토)에 따르면, 당면 현안에 대응해 협정이 적절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발효일 후 5년째에, 그리고 그 후 5년마다 협정의 일반 검토가 가능하다고 규정한다. 다른 한편, 이미 RCEP은 회원국별로 시장접근과 규범의 수준 및 이행을 차등적용하고 있어 이를 고도화에도 응용 가능하다.
우리는 RCEP, CPTPP와 IPEF를 모두 시야에 두고 지역질서의 분절화·진영화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지역통합의 청사진을 모색해야 한다. RCEP 고도화도 이와 정합성을 지녀야 한다. 이렇듯 RCEP 개정 조항을 활용해 CPTPP와 IPEF를 RCEP의 형해화가 아닌 고도화 수단으로 활용하는 역발상이 필요하다. 가령 RCEP 내 CPTPP 7개국 및 CPTPP 가입희망국(한국, 중국 등)은 CPTPP나 IPEF 규범을 가능한 수준에서 유연하고 신속하게 RCEP에 반영하는 개정을 통해 역내 FTA간 분절화를 최소화할 수 있다. 예를 들면, RCEP 내 위 7개국은 선제적으로 CPTPP 수준의 디지털, 노동, 환경, 국영기업 규정을 적용하며, IPEF의 디지털 경제 관련 규범도 함께 혹은 단계적으로 시도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RCEP 고도화와 CPTPP 가입의 병행추진도 가능하다. CPTPP 가입희망국이라면 RCEP에서부터 CPTPP 가입역량을 강화시켜 실제 가입을 촉진시킬 수 있다. 경제적 강제 금지 규범은 그로 인한 대가를 치른 나라라면 필요성을 공감할 것이며 CPTPP 참여국이라면 규범 기반 국제질서 엄수 의지와 역량의 실험대가 될 것이다. 어떤 경제협력이든 특정국 배제가 능사가 아니라, 모두가 규범 기반 국제질서를 준수할 수 있는 제도 설계가 핵심이다.
지역통합의 장대한 여정에서 한국 앞에 놓인 당면 과제는 무엇인가? 한국은 TPP 협상 당시 제반 국내 여건상 새로운 다양한 통상 규범 제정 과정에 참여하지 못한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이에 한국은 향후 개정 여지도 있고 당분간 미국은 가입 의사가 없으며 한국의 주도적 역할 여지가 거의 없는 CPTPP 가입보다 미국이 한국을 핵심 참여국으로 간주하고 설계 과정에서 긴밀히 소통하고자 하는 IPEF에 우선순위를 두고 IPEF의 바람직한 설계를 위한 지적 공헌에 나서야 한다. 이때도 한미 양국이 공감했듯이 한미FTA(KORUS) 개정 규정을 적극 활용해 KORUS를 IPEF의 인큐베이터로 삼아야 한다. 아울러 역내국과 긴밀한 협의와 소통으로 특히 신남방정책의 핵심 파트너인 ASEAN의 중심성 견지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높은 수준의 지역통합은 한국에 기회와 도전 양날의 검이다. 높은 수준의 자유화는 그에 따른 이득을 증가시키는 동시에 그 이득의 국내 배분 시 비대칭성을 증폭시킬 수 있다. 그럼에도 이를 추진하려면 지속 가능한 미래 성장 동력 확보와 잠재 성장률 제고, 일자리 창출, 양극화 완화, 경제안보 강화 등 국내 정책목표 실현에 기여하도록 내부 여건 마련이 전제되어야 하다. 미국이 그렇듯 내부 이해관계자와의 꾸준한 소통과 대화도 긴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높은 수준의 지역통합 참여는 요원하고 공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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