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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욥기 2장 10절, 이사야 55장 6절, 마태복음 7장 7절
그러나 욥은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당신까지도 어리석은 여자들처럼 말하는구려.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 이렇게 하여, 욥은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말로 죄를 짓지 않았다. <욥기 2장 10절, 새번역>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이사야 55장 6절, 개역개정>
"구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7장 7절, 새번역>
'말로 죄를 짓지 않았다' 이 구절이 없었다면 저는 언제나 욥의 변론에 편이 되어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욥의 아내가 하는 말은 너무도 어리석은 말이었기에 3대 악처(크산티페-소크라테스, 콘스탄체-모차르트, 소피아-톨스토이)에 충분히 견줄 수 있다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말로 죄를 짓지 않았다' 라는 구절 때문에 많이 생각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구절이 1장의 이 구절과 비교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욥은,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죄를 짓지 않았으며,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욥기 1장 22절, 새번역>
이렇게 '죄를 짓지 않았다' 라고 기록이 되어야 맞는 것 아니겠습니까? 근데 욥기 2장 10절은 슬쩍 '말로' 라는 단어를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혹시 '말만' 죄를 짓고 있지 않을 뿐, 1장에서의 모습과는 무엇인가 다른 모습이 아닐까 생각이 든 것입니다.
2장은 사실 너무 화가 나는 시작을 우리에게 알립니다. 욥에게 그렇게 큰 고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욥의 고통따위는 아무런 감흥도 일으키지 않는 것일까요? 아니면 '시험'하셨으니 원래대로 복귀라도 시켜주셔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근데 너무도 태연하게 1~2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주님 앞에 서고, 사탄도 그들과 함께 주님 앞에 섰다. 주님께서 사탄에게 "어디를 갔다가 오는 길이냐?" 하고 물으셨다. 사탄은 주님께 "땅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오는 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욥기 2장 1~2절, 새번역>
1장에서의 반복이 또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왜 이리도 다정하게 질문하시는 듯 보일까요? 아니면 무슨 뜻이 있으실까요? 복잡함이 가득한 찰나 하나님은 드디어 '욥'의 이름을 언급하십니다.
주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종 욥을 잘 살펴 보았느냐? 이 세상에 그 사람만큼 흠이 없고 정직한 사람,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 없다. 네가 나를 부추겨서, 공연히 그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고 있지 않느냐?" <욥기 2장 3절, 새번역>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욥의 믿음을 인정해 주십니다. 고난 속에서도 온전함을 굳게 지켜낸 욥이 대견하셨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사탄에게 자랑 아닌 자랑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탄은 이 정도 고난이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자신의 생각이 잘 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이야기가 끝나고 욥기 42장으로 바로 가면 좋으련만 사탄은 다시금 하나님을 충동하시 시작합니다. '욥'의 믿음을 놓고 두번째 내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탄이 주님께 아뢰었다. "가죽은 가죽으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생명을 지키는 일이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립니다. 이제라도 주님께서 손을 들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시면, 그는 당장 주님 앞에서 주님을 저주하고 말 것입니다!" <욥기 2장 4~5절, 새번역>
지금 하나님의 나라에서 '나'를 두고 이런 내기가 펼쳐지고 있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겠습니까? 저는 너무도 화가 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안과 미래의 희망을 주는 분이 아니십니까? 그러니 이런 사탄의 얍삽한 내기에 동의하실 필요가 없으신대도 불구하고, 아니 이런 이야기조차 나오지 못하고 사탄의 입을 봉하셔도 좋으실텐데 계속해서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고 계십니다.
실로 뼈와 살을 치시면, 그것도 사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침을 당한다면, 그 누구가 믿음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수많은 고난 위에 이제는 몸의 고통까지 이어진다면, 바라는 것은 '죽음' 밖에 없을 것입니다. 실상 재산을 잃은 것보다, 건강을 잃은 것에 더 큰 절망이 찾아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게 '건강'이라고 다들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탄이 지금 바로 그 건강을 내기의 조건으로 걸고 있는 것입니다. 욥의 뼈와 살을 치시면, 욥은 자기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더 이상 온전함을 지키지 않고 버릴 것이라고 사탄은 예상한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도 놀랍게도, 황당하게도, 당황스럽게도 하나님은 이 내기에 응하십니다.
주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그를 너에게 맡겨 보겠다. 그러나 그의 생명만은 건드리지 말아라!" <욥기 2장 6절, 새번역>
그러자 사탄은 바로 욥을 쳐서,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에까지 악성 종기가 나서 고생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겠지만, 악성 종기는 '외로움'도 동반하게 만드는 병이기도 했습니다. 소위 저주 받은 병이었기에, 이젠 주변에 그 누구도 찾아오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고독한 가운데 놓여지게 된 욥입니다.
저는 이 때 욥이 반드시 했어야 할 행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물어야 했습니다. "왜, 제게,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까?" 이건 불평도 불만도, 짜증도, 원망도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실 때까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 때까지, 하나님께 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욥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욥은 잿더미에 앉아서, 옹기 조각을 가지고 자기 몸을 긁고 있었다. <욥기 2장 8절, 새번역>
저라도 동일한 상황이었다면 이렇게 했을 것이기에, 절대 욥을 판단하거나 가르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3자의 입장에서 보니,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저 잿더미에 앉아서, 옹기 조각을 가지고 자기 몸을 긁고 있는 그 이상의 행동을 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절망의 순간이 찾아올 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을 만났을 때,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우선의 행동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호세아의 고백이 힌트가 되어 주는 것 아닐까요?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 주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이틀 뒤에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니, 우리가 주님 앞에서 살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알자. 애써 주님을 알자.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주님께서도 그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해마다 쏟아지는 가을비처럼 오시고,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신다. <호세아 6장 1~3절, 새번역>
성경은 수도 없이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행위'를 하라고 우리를 권면합니다. '인내'라는 침묵으로 가만히 있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지만, 뜻 모를 일이 다가왔을 때 하나님과 소통하며 '뜻'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 행위를 하는 '믿음'이라는 질문이 필요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시편 27편 8절, 개역개정>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이사야 55장 6절, 개역개정>
"나는 내 백성의 기도에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내 백성은 아직도 내게 요청하지 않았다. 누구든지 나를 찾으면, 언제든지 만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던 나라에게, 나는 '보아라, 나 여기 있다. 보아라, 나 여기 있다' 하고 말하였다. <이사야 65장 1절, 새번역>
"나 주가 이스라엘 가문에 선고한다. 너희는 나를 찾아라. 그러면 산다. 너희는 베델을 찾지 말고, 길갈로 들어가지 말고, 브엘세바로 넘어가지 말아라. 길갈 주민들은 반드시 사로잡혀 가고, 베델은 폐허가 될 것이다." 너희는 주님을 찾아라. 그러면 산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요셉의 집에 불같이 달려드시어 베델을 살라버리실 것이니, 그 때에는 아무도 그 불을 끄지 못할 것이다. <아모스 5장 4~6절, 새번역>
묘성과 삼성을 만드신 분, 어둠을 여명으로 바꾸시며, 낮을 캄캄한 밤으로 바꾸시며, 바닷물을 불러 올려서 땅 위에 쏟으시는 그분을 찾아라. 그분의 이름 '주님'이시다. <아모스 5장 8절, 새번역>
너희가 나를 부르고, 나에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호소를 들어주겠다.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기만 하면,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예레미야 29장 12~14절A, 새번역>
"구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7장 7절, 새번역>
이 외에도 수많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다 찾으려면 성경 전체를 기록해야 할 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기록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찾음으로 회복되어지는 이야기들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찾음'의 행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너무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이 이렇게 해야 했습니다. 그의 인내에 박수를 쳐 주고 싶지만, 그의 무기력한 모습에는 권면을 하고 싶습니다. 잿더미에 앉아 몸을 긁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행위' 그 자체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던 그 성실성이 바로 지금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내의 말이 바로 우리의 마음을 담은 선포입니다. 누군가는 욥의 아내의 고백이 잘못되었다고 표현할 지 모르겠지만, 저는 욥의 아내의 말이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렸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그에게 말하였다. "이래도 당신은 여전히 신실함을 지킬 겁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서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욥기 2장 9절, 새번역>
우리가 잊고 있었던 존재가 있었습니다. 이런 고통과 절망 속에서 '욥'만 생각했었지, 그 누구보다도 힘들었을, 사실 욥보다 몇 배나 힘들었을 욥의 아내에게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녀 역시 엄청난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직접 낳은 아이들의 죽음을 어떻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의 가장 큰 고통이 자녀의 죽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지만 욥의 아내는 살아내고 있습니다. 욥을 위해 어떻게든 살아내고자 했습니다. 강한 아내였고, 강한 어머니였습니다. 저는 욥의 아내가 믿음이 없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욥보다 훨씬 더 큰 믿음의 동역자로 욥 곁에 있었기에 욥의 회복이 가능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읽는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욥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 하나를 70인역으로부터 가져올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욥의 아내는 말하였다. '구원의 소망을 바라는 당신 조금 더 기다리라고 하는데 정녕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보십시오. 내가 수고하여 낳은 아이들은 이 땅에서 기억도 없이 사라졌어요. 당신은 바깥에서 밤을 지세우며 악창(종기)로 고생하고, 나는 이곳 저곳, 집집마다 일거리를 찾아 돌아다닙니다. 하루 종일 일하면서도 언제가 해가 떨어져서 이러한 수고에서 벗어나 쉬려나 기다립니다. 당신도 하느님께 무슨 말이나 한번 하고 죽으십시오.'" (욥기 2장 9절 / 70인역 성경)
욥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기다리기만 합니다. 하지만 욥의 아내는 많은 시간동안 일거리를 찾아 돌아다니며 욥을 위해서 살았던 것입니다. 도망치지 않았고, 끝까지 남편을 위해서 수고했던 욥의 아내였습니다. 고대 문헌 중 욥의 아내의 이름이 '시티스'로 명시되어 있기도 하니, 정확하진 않더라도 우린 그녀의 이름도 함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녀 역시 이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를 돌파해 나가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욥에게 이런 아내가 있었다는 것이 가장 큰 복이었습니다.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곁에서 옳은 말로 욥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욥은 아직 그녀의 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당신까지도 어리석은 여자들처럼 말하는구려.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 이렇게 하여, 욥은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말로 죄를 짓지 않았다. <욥기 2장 10절, 새번역>
하나님은 가장 좋은 동역자이자 함께 고통의 터널을 지나고 있던 아내의 말을 듣고 있지 않은 욥을 위해 이제 욥의 친구들을 등장시키십니다. 그리고 3장부터 이 친구들의 등장과 함께,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욥 안에 감추어져 있던 이야기들, 진짜 마음들이 드디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굳게 닫힌 입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과연 욥의 선택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계속해서 '인내'라는 침묵일까요? 아니면 '믿음'이라는 질문일까요? 욥기 3장에서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2ez9bIT3e_U
https://www.youtube.com/watch?v=-1jIy533-OM
https://www.youtube.com/watch?v=8BenX0g4BYM&list=PLVbVhDrpd5BfwFUzCYS-5-pZLF5BQ5gKF&index=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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