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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참판댁 조감도 입니다
4 최치수의 어머니 윤씨 부인의 생활 공간은 안채였습니다
윤씨 부인이 어느날 불공드리려 절간에 갔다가 동학 접주인 김개주에게 겁탈당해 김환이란 자식을 낳게 되지요.
<
김환이는 신분을 속여 최참판댁에 들어와 머슴살이를 하다 별당아씨(최치수의 안해)와
짝짝꿍 눈이 맞아 도망을 치는 사건이 소설 속에 펼처 집니다
3 별당채는 최치수의 무남독녀 외동딸 최서희의 생활 공간이며, 최치수의 생활 공간은 7 사랑채 입니다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를 주 무대로 펼처지는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소설속 공간을
실제 공간으로 재현한 전통적인 한식기와집으로 꾸며진 최참판댁 관광 안내도 입니다
박경리의 토지는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를 주 무대로 펼쳐지는 대하소설 입니다.
하동군은 소설의 주인공인 최치수 및 최서희 일가를 중심으로 한 최참판댁과 그 주변 인물들의
생활공간을 508.48㎡의 건축 면적에 한식기와를 얹은 목조 건물 10동을 건립하여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습니다.
박경리의 <토지> 대하소설은 구한말 1897년 한가위부터 시작 됩니다
구한말이란 : 조선 말기에서 대한제국까지의 시기로, 1897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 존재했던
제국으로 조선을 계승한 한국사의 마지막 군주국이다. 1897년 고종황제가 대한제국 수립 선포 이후 대한제국
정부는 여러 개혁을 시도했고, 자주적 국가가 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에게
외교권이 박탈되었고, 이후 일본과 체결한 여러 조약으로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였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멸망하였다
박경리 선생은 <토지>를 집필하면서도 악양면 평사리를 답사하지 않았다 합니다. 하지만
이곳 주민들은 <토지>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
주민왈 : <볼끼 뭐 있다꼬 사램들이 시도 때도 없이 와 쌓십니더>라는
아지매의 투박하고 풋풋한 말에서 평사리가 이미 문학적 지명으로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최참판댁 진입로 입구엔 <박경리의 토지문학관> 표지석이 세워저 있습니다
<박경리토지문학비> 표지석이 최참판댁 진입로 초입에 세워저 있습니다
(2009년 5월 10일 형제봉(성제봉)에서 최참판댁으로 하산 하면서 산능선에서 카메라 앵글에 담은 사진 입니다)
구수한 입담으로 명해설을 들려 주는 해설자 없이
<토지>의 무대인 최참판댁 이곳저곳을 둘러 보는 탐방을 시작하겠습니다
매표소에서 성인 입장 요금 2,000원씩 매표하고 입장 합니다
ㅎㅎ 예로부터 개팔자 상팔자라드니
달콤하게 행복한 시간
조랑말이지요
당나귀와 조랑말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가상공간인 최참판댁을 구경하기 위해 관람로를 따라 이동하고 있습니다
야무네(오복이 할매)집
야무네(오복이 할매)집 안방에 들어 앉은 복덩이 바위~
뒤돌아 보고~
초가집들을 <토지>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민이네, 길상이네, 영팔이네, 월선이네, 칠성이네, 관수네, 용이네 등 농민들이 생활한 초가의 마을 입니다
관수네집
칠성이집
대하소설 <토지> 소설에 등장하는 영팔이네 집
박경리 문학관 뒷쪽으로 김진사집, 윤보집, 평산의집, 김훈장집이 있습니다
최참판댁은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주 무대로 펼쳐지는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 있는 전통 가옥은 소설 속 무대를 실제
공간에 재현하여
소설 토지의 명성과 함께 그 주 무대가 되었던 악양면 평사리 일대에 최참판댁을 건립하여 문화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기로 협의하고 1997년 6월 대하소설 토지, 최참판댁 건립 추진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듬해인 1998년 2월 건립 대상지를 선정하고 6월에 부지 조성 사업을 설계하였다. 같은 해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부지 조성 공사를 실시하고, 1999년 12월 건립 공사에 착공했으며
2년 뒤인 2001년 2월 총 부지 면적 9,529㎡, 건축 면적 508.48㎡로 준공하였다
하동군은 최참판댁의 본 건물 10동, 토지 세트장을 포함한 부속 건물, 주변 경관 등 조경을 위해 연간 많은 예산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2001년도 준공 이후 2010년 7월 현재까지 투자한 총사업비는 국비, 도비, 군비 교부금 등을 합산하여
약 45억 6500여 만 원이며 2009년 한 해 최참판댁을 찾은 관광객은 내국인 159만 419명, 외국인 6203명 도합 159만 6622명 입니다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는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소설속 공간이
실제 공간으로 재현한 전통적인 한옥집 최참판댁 입니다
통영에서 태어나 진주여자고등학교를 나온 박경리 선생은 1960년대의 어느날 하동군 화개면의 친척집을
방문하는 길에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들녘을 접하고는
이곳을 당시 구상하고 있던 <토지>의 무대로 삼기로 하였다 합니다.
그러나 소설을 집필하는 동안 평사리를 직접 답사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소설 속 동네 구조와 실제의 평사리의 모습이 같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라 하지요
1969년 6월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1994년에야 완성된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
1부(1~4권, 1897~1908)는
1897년 구한말부터 한일합방까지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라는 마을을 무대로 최참판 일가와 그 마을 농민들의 생활상를 다루고 있습니다.
최참판댁의 비극이 1부에서 펼처 집니다
최지수의 죽음, 윤씨부인(최치수의 모친)의 죽음, 최씨집안의 재산을 탐내는 조준구의 음모,
조준구에게 전재산을 빼았겨 몰락한 최씨집안의 서희는 임이네와 용정(간도)으로 이주를 하는 등
우리 근대사의 암울했던 시기를 파노라마식으로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다
제1부는 1969년 9월부터 <현대문학>에 연재 하였습니다
제2부(5~8권, 1911~1917)는
조준구에게 집안의 재산을 모두 빼앗긴 서희는 가문을 되찾으려는 일념을 가지고 간도로 이주하여 길상의 도움을 받아 토지 거래를 통해 큰 재산을 모으게 됩니다
1911년부터 6~7년간 간도의 용정지방을 배경으로 최서희‧김길상‧이용‧김영팔‧월선이‧임이네‧김훈장‧이상현 등의
간도생활이 서술되며 이에 맞서는 항일투쟁의 역사적 배경이 전개되는
제2부는 1972년부터 <문학사상>에 연재 되었습니다
토지 3부(9~12권, 1919~1929)는
최서희 일행이 간도로부터 고향으로 돌아간 다음 1919년 가을부터 1929년 광주학생운동까지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 서술대상은 크게 네 부류인데 첫째, 평사리와 진주를 중심무대로 삼고 있는 최서희와 그 주변 인물의 삶,
둘째, 이상현과 교우관계에 있는 서울을 무대로 삼고 있는 지식인들의 삶,
셋째, 김환‧혜관스님 주축으로 지리산 이남에서 활약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생활,
마지막으로 넷째, 길상이와 공노인의 활동무대인 간도와 만주 망명객들의 생활상 입니다
이러한 글줄기 3부는 1978년 <주부생활>에 연재된바 있습니다
토지 4부<13~15권, 1930~1938>는
1930년에서 1938년까지 항일 독립운동이 조직적으로 가열되고 일본군국주의의 식민지 지배가 노골화되던 시기를 배경으로 엮어 집니다
제4부는 1978년 <월간경향>과 1983년 <정경문화> 및 <마당>에 연재하였지요
토지 5부(16~20권, 1940~1945)는
1940년부터 1945년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서울‧간도‧진주‧일본‧하동 등지를 무대로 펼쳐진다.
일제말기 징병과 학병, 정신대 등의 일제의 폭압적 상황과 패망의 조짐이 짙어가는
가운데 벌어지는 인물들의 좌절과 극복, 절망과 승화, 한과 희망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5부는 1992년 9월 1일부터 <문화일보>에 연재하였으며 장장 25년에 걸쳐 완성한 작품 입니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압하여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은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이
조약은 명목상으로는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라고 하나 사실상으론 일본의 식민지가 시작되여
36년간 일본의 압제가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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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참판 댁의 정신적 지주인 윤씨 부인(최치수의 모친)은 젊어서 남편을 잃고, 동학당 접주로 사형을 당한
김개주와의 관계에서 환이라는 아들을 낳게 된다. 그 후,
환은 동학당이 되어서 몸을 피하다가 구천이라는 가명으로 최참판 댁에 숨어든다.
별당 아씨(최치수의 안해)와의 애정 관계로 갈등하던 환은 결국 자신의 형 최치수의 부인인 별당 아씨와
함께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어머니 윤씨부인의 비밀을 캐내려던 최치수는 외가 먼친척 뻘인 조준구와 어울려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성불구자가 된다.
그 후 최치수는 아내(별당 아씨)와 구천(환)을 찾기 위해 총을 들고 지리산을 뒤진다.
별당 아씨가 자기의 품에서 숨을 거두 자, 환은 연곡사 우관 스님에게로 간다
어느 날, 대(代)를 잃은 최씨 집안의 재산을 탐내고 있던 조준구가 찾아온다.
호열자(
마을 사람들과 함께 윤씨 부인이 죽자, 조준구는 최씨 집안을 독차지하게 된다.
고아가 된 어린 서희는 집안을 지키기 위해 조준구와 맞서 싸운다. 노일전쟁과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대세는 친일파인 조준구에게 더 유리해진다. 그러나 조준구에 대한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마을 사람들이
의병을 일으켜 최참판 댁으로 쳐들어오지만
조준구는 찾지 못한다. 서희와 길상은 재물을 챙겨 간도(間島)로 떠난다.
간도에 정착한 서희는 가문 되찾는 것을 목표로, 길상과 공 노인의 도움을 얻어 노력한 끝에 거부(巨富)가 된다.
서희는 광산 사업에 실패한 조준구에게서 빼앗긴 토지와 재산 문서를 되찾은 후
독립 운동을 위해 떠난 길상과 환(구천)과 헤어져 귀향길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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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토지 1부는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라는 마을을 무대로 최참판 일가와 마을 농민들의 생활상이
다루어지는데, 조준구의 음모로 전재산을 빼앗겨 몰락한 최씨집안의
서희(최지수의 딸)는 임이네와 간도(용정) 이주하게 되지요
최씨집안의 몰락으로 최서희가 임이네와 용정(간도)으로 이주한
만주 간도의 지도를 여기에 옮겨 참고 자료로 할려고 합니다
(천안 독립기념관 자료실에서 촬영)
조선과 청나라 국경선은 압록강과 토문강을 경계로 하여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확정하였다
1712년(숙종 38)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定界碑)의 비문에
조선과 청(淸)나라의 국경은 ‘서쪽은 압록강으로, 동쪽은 토문강으로서 분계선을 삼는다’고 되어 있다.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 勒石爲記
서쪽은 압록으로 하고 동쪽은 토문강으로 하니 두 강의 분수령에 비석을 세워 적노라
간도는 중국 동북 3성의 하나인 길림성 동남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현재 길림성에 속하는 연변조선인자치주에 해당되는 지역. 간도는 읍루와 옥저의 땅이었으나
고구려에 의해 복속된 후 오랫동안 고구려 지배하에 있었다. 신라 통일 시대에는
발해 왕국이 200여년간 이 땅을 지배했다. 고려시대로부터 조선 전기에 걸쳐서는 여진족들이
각지에 흩어져 살았다. 우리 동포들의 간도 이주는 조선 초부터 시작되었다.
세조 14년(1468년)의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빈 땅에 백성들이 들어가 토지를 개간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여진족이 세를 결집해 후금을 세우기 전까지 조선 백성의 간도 개간은 공공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중국측이 간도에 대한 자신들의 역사적 연고를 주장하면서 우리나라와 귀속 문제를 둘러싸고
분쟁이 있어 왔다.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는 장백산(백두산) 일대를 성역으로 여기고
봉금(封禁)정책을 썼으며, 그후 청은 우리나라에 대해 국경선을 확정하기 위한 절충을 요구했다.
1712년 양국대표 일행이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이 비문에 “동은 토문강, 서는 압록강”으로 국경을 정하기로 하고 뚜렷히 새겨 놓았다.
백두산 정계비는 정상이 아닌 해발 2,2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고 인적이 드문 곳에 설치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졌다. 그 후에 러시아와 일본 등이 이 일대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자,
청나라와 조선도 비석의 내용을 다시 관찰하게 되었다.
양측은 1883년(고종 20) 비석을 다시 조사했는데, 비석 내용의
‘토문’이라는 말을 놓고 조선과 청나라는 의견이 엇갈렸다.
청나라 측에서는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여겨 북간도 지역을 청나라 땅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토문이라는
지명은 두만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며 만주용어로 지금의 쑹화강 지류를 가르키는 용어였다.
서로의 의견이 달라 합의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백두산 북쪽 지역에 우리 민족이 많이 이주해 있어 현실적으로는 조선 영토로 인정이 되었다.
당시 서북경략사였던 어윤중이 청나라와 국경분쟁에서 북간도일대를 조선의 땅임을 재차확인하였으나,
1909년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청나라와 간도 협약을 맺어 일본이 청나라로 부터
만주(안동-봉천 간)철도부설권을 획득하면서 간도지역을 청나라
땅이라고 불법적으로
인정해버렸다. 비석도 1931년 만주 사변 당시 일제가 철거해 버렸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가 1909년 청·일 간도협약을 통해 청나라에 넘겨준 뒤로 간도는
우리에게 잊혀진 영토가 되었다.평안남도 지사와 경성제국대학 총장을 지낸 국제법학자
시노다 지사쿠(條田治策·1872~1946)가 30여년간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지은 책인 '간도는
조선땅이다.'는 간도가 우리 영토임을 입증한 일종의 역사서다.
저자는 "학자적 입장에서 볼 때 간도는 마땅히 조선땅이어야 공평타당하며 일본이 만주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 간도를 청국에 넘겨준 것은 잘못한 것으로 분통한 일"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1907년 일본 통감부 간도파출소 총무과장으로 간도에 발을 들여 놓은 이후 1938년
이 책을 출간할때까지 현지 조사는 물론 조선과 청국간에 오간 조회문(照會文)과 복조문(覆照文)
조선왕조실록은 물론 조선 및 청국의 많은 관련 기록과 문헌들을 뒤져
간도가 한국 영토이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저자는 이 책에 조선과 청간의 국경담판으로 유명한 을유 감계담판과 정해 감계담판에서
양국대표 사이에 논전을 벌인 대담실록을 자세히 싣고 있다.
이 담판에서 청국 대표는 대국의 유세를 부리며 협박과 공갈로 나왔으나 조선 대표 이중하는
이에 굴하지 않고 '내 목을 자를지언정 우리 국경을 축소할 수 없다'고 강하게 대처하였다
간도를 빼앗긴 지 2020년 현재 111년이되었다
천안 독립기념관 자료실에서 촬영
1907년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에서 제작한 <백두산 부근 약도>
백두산정계비에 나오는 압록강 ㅡ 토문강의 조선 청나라 국경 중
토문강이 두만강과 별개의 강으로 표시돼 있어
간도가 조선 땅이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간도성(間島省)
간도 지역
왜놈XX들은 36년간 조선인을 납치하여 굴욕적인 생활을 강요하기도 하였으며, 36년간 유적지(왕릉) 발굴 조사란
명목을 내세워 조선의 문물을 약탈해 간 뻔뻔스런 국제적인 도둑 개망나니 일본놈 개시끼들 남의 영토까지~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로 29 전쟁기념관 전시관에서 촬영한 사진 입니다)
백두산 오른쪽으로 <엔벤조선족자치주>를 찾아보세요
조준구에게 전재산을 빼았긴 최참판댁 외동딸 서희가 이주한 엔벤조선족자치주에 간도 용정이 있답니다
한국인이 많이 찾는 곳에 지명을 표기 하여보았습니다
오녀산성(환인, 고구려의 첫 도읍지) ㅡ 집안(고구려 광개토왕비, 광개토왕릉, 장수왕릉<광개토대왕 아들>) ㅡ 송강하 ㅡ 이두백하 ㅡ 화룡시 ㅡ 간도 용정시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義士)는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義士)는
해이기도 합니다. 오늘 ‘책 밖의 역사’에서는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교도소에 갇힌 안중근 의사에게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가 쓴
마지막 편지를 전해드립니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가 도착했습니다.
러시아 재무장관을 만나 회담하기 위해서였죠.
일본의 초대 총리 이토 히로부미는
제국주의에 의한 아시아 침략과 조선 식민지화를 주도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쏜 총탄은 이토를 쓰러트렸습니다.
그리고 안 의사는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들고 외쳤죠.
“코레아 우라”
러시아말로 “대한 만세”입니다.
안 의사는 당당했습니다.
현장에서 체포된 안 의사는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뤼순 감옥에 수감됐습니다.
이후 여섯 차례 형식적인 공판이 이어졌죠.
그리고 1910년 2월 14일의 공판에서
안 의사는 사형을 선고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죠.
안중근 의사는 자신이
‘대한의군의 참모 중장 자격’으로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기 때문에
‘형사범’이 아닌 ‘전쟁포로’로 대우해 줄 것을
당당하게 주장했습니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동양 평화를 위한 의로운 전쟁’이라고 선언했죠.
안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아들의 사형선고 소식을 접하고 편지와 손수 지은
수의를 보냅니다.
[편지내용]
장한 아들 보아라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안중근 의사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항소하지 않고
사형집행 직전까지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했습니다.
의거를 일으킨 진정한 이유를
후손에게 남기기 위해서였죠.
그리고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서른 한 살의 나이로 순국했습니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유언 中)
순국선열의 날
순국선열’은 일제의 국권침탈 전, 후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을 위해 항거하다가 순국한 분을 일컫는다
1939년 11월 2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제31회 임시총회에서 지청천, 차이석 등 6인의 제안에 따라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을사늑약(1905년 11월 17일)을 잊지 않기 위해 11월 17일을 ‘순국선열공동기념일’로 정하고 이후 추모행사를
거행하였다. 1997년 5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의해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제정하였다.
(서울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서~)
간도는 중국 동북 3성의 하나인 길림성 동남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죠
현재 길림성에 속하는 연변조선인자치주에 해당되는 지역 입니다
오른쪽 옌볜조선족자치주 아래 용정시(龙=용 룡, 井=우물 정 市)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로 승격된 올해(2019년)가 67년째라 합니다
한때는 조선족이 100만이 넘었던 인구가 지금은 80만 명으로 줄었다고 하는군요.
출산율이 갈수록 낮아지고, 젊은이들은 도회지로 떠나기 때문이라 합니다
조선족 인구점유율은 현재 32%로 자치주 유지 기준이 용정시 주민의 30%라 합니다
만주벌판인 북간도는 일제시대에 한민족이 거주하며,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던 용정촌(龙井村)은
가곡 선구자로 애창되고 있는 일송정이 항일독립투쟁 본거지로 알려진 곳이며, 용정중학교는 시인 윤동주의 모교라 하지요
동북3성 교통도 입니다
중국 유적지 탐방 갔을 때 얻어왔던 지도 입니다
통화시에서 ▶ 고구려의 첫번째 도읍지인 졸본성에 있는 오녀산성을 견학 후 ▶ 집안시로 이동하는 것이 탐방코스 입니다
(광개토 대왕릉과 호태왕비 유적지가 있는 집안시)
하동군에서는 소설 토지의 명성과 함께 그 주 무대가 되었던 악양면 평사리 일대에 최참판댁을 건립하여 문화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기로 협의하고 1997년 6월 대하소설 토지 최참판댁 건립 추진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듬해인 1998년 2월 건립 대상지를 선정하고 6월에 부지 조성 사업을 설계하였다.
같은 해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부지 조성 공사를 실시하고
1999년 12월 건립 공사에 착공했으며, 2년 뒤인 2001년 2월 총 부지 면적 9,529㎡, 건축 면적 508.48㎡로 준공하였다.
문간채와 행랑체의 대문간을 지나
토지의 가상공간인 최참판댁 안채로 갈 수 있습니다
최참판댁은 지상 1층 건물로, 주 건축물로는 최서희의 조모 윤씨 부인의 생활공간인 안채[90.03㎡] 최서희의 공간인
별당채[43.2㎡], 최치수의 사랑채[82.62㎡]를 비롯하여, 문간채[19.44㎡], 행랑채[129.82㎡], 중문채[72.9㎡]
사당[8.91㎡], 초당[15.12㎡], 사주문[3.6㎡], 뒷채[42.84㎡] 등 10개 동으로 되어 있으며, 건물 내에는 별당채 입구의
우물과 별당채 경내 작은 연못과 수목들도 여러 건축물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외에도
읍내 장터와 화장실, 용이네와 강청댁, 물레방아 등 드라마 토지의 세트장으로 사용된 시설물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최참판댁 행랑채
대하소설 <토지>에 등장하는 최서희(최지수의 외동딸)가 생활했던 별당채 입니다
최서희의 조모 윤씨 부인의 생활공간인 안채(90.03㎡) 입니다
최참판댁 안채 대청마루 입니다
최치수의 어머니 윤씨 부인의 생활 공간이죠
윤씨 부인
최 참판가의 안주인. 최치수의 어머니로, 굳은 성정을 지닌 최 참판가의 실질적인 가장.
동학당의 당주 김개주에게 겁탈당해 환이를 낳고. 그 죄책감으로 평생을 벌을 받는 심정으로 살아간다.
호열자로 죽기 전. 서희에게 은괴를 남겨 서희 재기의 발판을 만들어 준다.
최치수의 생활 공간인 사랑채(82.62㎡)와 누마루 입니다
최치수
최서희의 아버지. 최 참판가의 당주.
머리가 좋고 학문은 깊으나 매사에 냉소적이고 신경질적이며, 여자를 믿지 않는다.
별당아씨가 김환과 도망가자 추적한다. 귀녀의 음모로 평산에게 살해된다.
최치수의 생활 공간인 사랑채 누마루에서
담장 넘어로 토지의 무대가된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들판 83만평이 내려다 보인답니다
사랑채 누마루와 앞 마당~
사랑채 누마루와 앞 뜨락~
사랑채 누마루에서 조망되는 평사리 들판과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
사랑채 누마루에서 담장 넘어로 내려다 보이는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들판 83만평 이곳은
박경리 선생이 당시 구상하고 있던 <토지>의 무대로 삼기로 하였다 합니다.
평사리 들판 83만평
평사리 들판 83만평
평사리 들판 83만평은 박경리 선생이 구상하던 장편소설 <토지>의 무대가 되었다 합니다
만석꾼, 만석꾼 하면
우린 경주의 최진사댁 만선꾼을 떠올리지요
만석꾼이란 한 해에 일만 석(섬)의 쌀 수확을 거둘 수 있는 농지를 뜻하지요
만석꾼의 뜻은 쌀 한 섬(석)은 2가마니로서 160kg이라 합니다.
한 섬을 쌀 <두 가마니>이지요
금액으로 치면 쌀 한 가마니를 18만원 정도로 계산한다면
180,000 X 2(함 섬은 쌀 두 가마니) X 10,000(일만 석) 이니까 약 36억원 정도로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매년 36억을 벌었던 것입니다
면적으로 환산하다면, 논의 경우 200평을 밭의 경우 300평을 한 마지기로 볼때
보통 한 마지기의 논에서 쌀 한 섬(석)인 쌀 두 가마니가 생산된다고 합니다
(쌀 한 가마니는 80kg)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논은 200X3.3(한평)=660제곱미터니깐
가로 20m x 세로 33m 정도의 넓이이고요
밭은 300X3.3=990 따라서 가로 30m x 세로 33m 정도의 넓이 입니다.
이 기준을 따르면 만석이라 하면 만 마지기의 넓이가 되니깐
논은 200 X 3.3 X 10,000=6,600,000제곱미터이다.
가로 2,000m x 세로 3,300m 정도의 넓이로 볼 수 있으며, 평수로는 2,000,000평 입니다
밭은 300*3.3*10,000=9,900,000 제곱미터 입니다.
가로 3,000m x 세로 3,300m 정도의 넓이로 볼 수 있다.
2만석 쌀을 생산할려면
논은 가로 4,000m x 세로 3,300m
밭은 가로 6,000m x 세로 3,300m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들판은 83만평이라 합니다
일만 석의 쌀을 거둘려면 가로 2.0km 세로 3.3km 크기의 논으로, 평수론 2백만평이 있어야 한답니다
한
사랑채 누마루에서 담장넘어로 조망되는 평사리 들판 83만평과 섬진강
평사리 들판 83만평
사랑채 누마루에서 마당의 담장 넘어로 내려다 보이는 악양면 평사리 들판의 부부송 입니다
최참판댁 사랑채 누마루에서 조망되는 전남 광양에서 제일 높는 산으로 알려진
백운산과 산 능선에 암봉인 신선대 입니다
사랑채 누마루에서 조망되는 광양 백운산과 신선대와 그리고 억불봉
토지에 등장하는 장터와 주막거리~
악양중학교 미술부 화가들이 그린 평사리들판과 섬진강
박경리 작가의 생애
1969년부터 26년에 걸처 5부작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한 소설가 박경리 선생은 1926년 10월 28일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토지]는 최참판댁의 가족사를 중심축으로 19세기 말에서 시작해 해방 공간까지 끌어안고, 경상도 하동의 평사리에서
시작하여 통영, 진주, 만주(간도)와 서울 · 도쿄 등지로 공간적 배경으로 펼처지는 소설이다
<작가의 출생은 스스로 털어놓은 바대로 불합리하다고 했다. 이 허무한 세상에 왜 내가 태어났으랴 하는 따위의 뜻은
물론 아니다. 그것은 부모들의 관계에서 온 나의 견해였다. 아버지는 죽는 날까지 어머니에 대하여 타인이라기보다
오히려적의에 찬 감정으로 시종일관했다. 어찌하여 사랑하지도 않고 그렇게 미워한 여인에게 나를 낳게 했는가 싶다.
어머니는 말하기를 산신에게 빌어 꿈에 흰 용을 보고 너를 낳았으니 비록 여자일망정 너는 큰 사람이 될 것이라고,
나는 그 이야기를 시시하게 들었을 뿐만 아니라 산신에게 증오하고 학대하던 남자의 자식을 낳게 해줍시사고 애원을
한 어머니를 경멸했었다. 그것은 사랑의 강요였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그러한 모습은 내게다가 결코 남성 앞에 무릎을
꿇지 않으리라는 굳은 신념을 못박아 주고야 말았다. 그 신념을 무릇 강한 힘에 대한 반항이 되었고 그러한 반항 정신이
문학을 하게 한 중요한 소지가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인생에 있어서 나를 고립시키고 말았다. 나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아버지에 대한 증오, 그런 극단적인 감정 속에서 고독을 만들었고 책과 더불어 공상의 세계를 쌓았다 한다>
열네 살 되던해 아버지는 혼인한 조강지처 네살 연상의 어머니를 버린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어머니의 그늘 속에서
소녀는 성장기를 보낸다. 아버지는 새 장가를 가고, 박경리는 홀어미나 다름없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으로 가득한 학창시절에 아버지가 학비를 대주지 않자 분노한 나머지 여학교에 다니다 말고 고향
마을에 돌아온 그는 좁은 길에서 아버지와 마주치게 되면 "목을 꼿꼿하게 세우고 외면"을 하였다 한다.
나중에 임종조차 외면할 만큼 아버지에 대한 그의 증오심과 반항심은 뿌리가 깊은 것이었다.
<김동리의 부인이 진주여고 선배여서, 박경리는 자신이 써둔 시작 원고를 김동리에게 보일 기회가 생긴다. 습작 원고를
읽고 나서 한동안 반응이 없던 김동리는 얼마 뒤 작품을 갖고 '문예살롱'으로 나오라는 전갈을 보낸다. 낯가림이 심했던
그는 친구를 앞세운 채 문예살롱에 드나들며 김동리에게 습작품을 보인다. 김동리는 시를 주로 쓰던 박경리에게 소설을
써보라고 권유한다. 이미 일본어로 소설을 써본 적이 있던 그는 곧 소설 습작으로 방향을 튼다. 그러던 중 문예살롱에서
누가 그의 얼굴을 스케치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돌리는 일이 벌어진다.
이 일로 그는 모욕감에 떨며 다시는 문예살롱에 나가지 않는다. 그는 곧 김동리에게 넘어가 있던 습작 원고 뭉치도
친구를 통해 돌려받는다. 그런데 어느 날 박경리는 김동리의 큰아들로부터 현대문학에 작품이 추천되었으니 원고료를
받아가라는 얘기를 듣는다. 박경리에게 습작품을 돌려줄 때 빼놓은 작품을 김동리가 <현대문학>에 추천한 것이다>
이로써 박경리의 단편 '계산'이 <현대문학> 1955년 8월호에 발표된다. 첫 추천을 받고 1년이 지난 뒤
흑흑 백백(黑黑白白)으로 추천이 완료되어 박경리는 비로소 한국 문단에 얼굴을 내민다.
1945년 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46년 결혼하고 1950년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 가정과(현 서울 세종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50년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에 근무하였으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편 김행도( ? ~ 1950년)는
당시에 좌익으로 몰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고 한국전쟁 중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죽음으로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그는
연이어 세 살짜리 아들을 수술대 위에서 잃는 슬픔과 고난의 운명을 겪는다
이를 묘사하듯
<불신 시대> 내용은 9.28 서울수복 전야에 유엔군의 폭격으로 남편을 잃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타락과 폭력으로 치닫는
현실 속에서 시달리는 한 전쟁 과부의 체험과 치료약의 함량을 속이는 병원,
의사의 무관심으로 <도수장 속의 망아지처럼> 목숨을 잃는 외아들~
1964년 발표한 단편 소설<불신 시대>로 제3회 <현대문학 신인상>을 받는다
작가는 <토지>를 쓰게 된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토지는 한국전쟁 이전부터 내 마음 언저리에 자리를 잡은 이야기예요. 외할머니가 어린 나에게 들려주던 얘기가
그렇게 선명하게 나를 졸라대고 있었거든요.그것은 빛깔로 남아 있어요. 외갓집은 거제도에 있었어요 거제도 어느 곳에
끝도 없는 넓은 땅에 누렇게 익은 벼가 그냥 땅으로 떨어져 내릴 때까지 거둘 사람을 기다렸는데, 이미 호열자가 그들을
죽음으로 데리고 갔지요. 외가에 사람들이 다죽고 딸 하나가 남아 집을 지켰다고 해요. 나중에 어떤 사내가 나타나 그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는데,객명을 나타내는 벼의 노란색과 호열자가 번져오는 죽음의 핏빛이 젊은 시절 내내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어요. [토지]는 원래 1부로 끝낼 요량이었지요 그런데, 이제 5부까지 나오게 되었으니‥
마흔여섯부터 지금까지니까,
스물네 해를 토지와 더불어 살아왔던 것 같아요. 삶이 지속되는 한 토지는 끝나지 않을 거에요>
1997년 8월 15일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에 기공식을 한 토지문학관이 1999년에 완공된다.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는 2008년 5월 5일 타계했다.
2007년 7월말 폐암이 발견됐으나 고령을 이유로 치료를 거부하였다. 병세가 악화되어 2008년 4월 4일 뇌졸증 증세까지 나타나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하였다.
2008년 5월 5일 향년 83세로 사망하였으며, 사망 직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 되었다
박경리가 1980년 서울을 떠나 <토지>의 4부와 5부를 완결한 단구동의 옛집이 1989년 토지개발계획으로 없어질 위기에
처하자 한국토지공사에서 공원부지로 전환하여 1997년 9월 착공하여 1999년 5월 완공하였다.
박경리의 옛집과 정원을 모두 원형대로 보존하였고 공원은 소설 토지의 배경에서 따온 용두레벌, 평사리 마당, 홍이동산 등
3개의 테마공원으로 지어졌다
박경리가 2008년 폐암으로 생을 마감하기 전 마지막까지 썼던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담은 39편의 시가
유고시집으로 발간되었습니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책 표지 뒷면
박경리 선생은 1960년대의 가을 어느날 하동군 화개면의 친척집을 방문하는 길에
곡식들이 누렇게 익은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들녘을 먼발치에서 스쳐지나칠 때
이곳을 당시 구상하고 있던 <토지>의 무대로 삼기로 하였다 합니다.
평사리가 <토지> 소설의 주요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집필하는 도중 정작 평사리를 직접 답사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소설 속 동네 구조와 실제의 평사리의 모습이 같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라 하지요
다만, 토지의 주무대로 삼게된 배경은 당시 큰 부잣집이 인근에 있었는데, 역병으로 가솔들을 잃어 넓은 들판의 곡식을
추수하지도 못한 채 버려두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는데
어릴적 외할머니가 들려주던 얘기가 그렇게 선명하게 떠올랐다 합니다
외갓집 거제도 어느 곳에 끝도 업는 넓은 땅에 누렇게 익은 벼가 그냥 땅으로 떨어저 내릴 때가 되어도 곡식을 거둘
사람들은 호열자가 그들은 죽음으로 이미 데리고 갔다는 그때의 외할머니의 얘기가 연상되었다 합니다
<토지> 1부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구한말 하동의 만석꾼 최참판댁의 외동 손녀 서희는 어머니 별당아씨가 머슴 구천이와 정을 맺어 도망가는 비극을 당한다.
구천이는 할머니 윤씨 부인과 동학당의 중심 인물 사이에 태어난 혈육이다. 이 비밀을 눈치챈 아버지 최치수는 두 남녀를
응징하는 과정에서 그의 재산을 노리는 김평산과 귀녀에게 살해당한다. 윤씨 부인 역시 돌림병에 걸려죽고 만다.
집안의 기둥인 할머니와 아버지가 죽고 나자 친척 조준구가 최참판댁의 재산을 차지한다. 재산을 빼앗긴 서희는 조준구에게
맞서지만 역부족이다. 조준구의 행패에 불만이 쌓인 마을사람들은 목수 윤보를 앞세워 의병을 일으키고 조준구를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도리어 고향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만다.
1부에서는 최참판댁의 몰락이 중점적으로 묘사된다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를 주 무대로 펼처지는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소설속 공간을
실제 공간으로 재현한 전통적인 한식기와집으로 꾸며진 최참판댁
박경리의 유일한 혈육인 딸 김영주(1946년 ~ 2019년 9월 26일)는 1973년 4월 서울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 주례로 오적을 쓴 김지하 시인과 결혼을 합니다.
1974년 4월 3일 김지하 시인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어 사형 선고를 받자
내핍 생활에 시댁의 도움을 받기 위해 아들을 데리고 시댁이 있는 원주로 이주하게 되지요
토지의 작가는 1945년 진주여고를 졸업한 뒤 1946년 결혼 합니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남편 김행도는 좌익으로 몰려
6.25전쟁중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세살 난 아들은 병원 수술대에서 떠나 보내지요
세상에 오직 두사람만 의지하며 살아온 하나뿐인 핏줄인 딸을 위해 가까이에서 힘이 되어 주는 울타리가
되기 위해 서울 성북구 돈암동 생활을 정리하고 1980년 원주 단구동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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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는 1941년 2월 4일 전남 목포시 대안동에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는 전기 기술자였다고 한다.
지하는 필명이고, 본명은 영일(英一)이다
1953년 3월 김지하는 목포의 산정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중학교에 진학한다. 같은 해 7월 27일 정전(停戰)이
되고, 이듬해 3월 강원도 원주의 한 영화관의 기사로 취업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그의 가족은 목포를 떠나 낯선 땅 원주로 이주한다.
1956년 봄, 원주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로 올라와 중동고등학교에 입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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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부터 1994년 8월 15일까지 10년 동안 단구동 이곳에서 토지 4부와 5부를 집필하며
토지의 대단원의 막을 내린 단구동 옛집은 박경리문학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원주시 단구동 박경리 문학공원
1998년부터 타계한 2008년까지 10년은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 토지문화관에 거주하며
전 21권의 대하소설 토지를 완성하였습니다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 <박경리토지문화관>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가상공간인 최참판댁 탐방 다음으로 들릴곳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아우려며 굽이굽이
흐르는 섬진강변의 화개장터에서 풋풋하게 옛 정취가 흠뻑 느껴지는 5일장에서 국밥에 막걸리 한 잔 크으~
그리고, 화개장터에서 6km 정도 떨어진 쌍계사 작은 암자에 들러 불경소리 들으며 고즈넉하게 시간을 보내고
오늘의 마지막 일정으로 <이순신 순국공원>에 머무르며 잠시 순국의 얼을 돼새겨 보고,
남해 행복마을 리조트 숙소에서 하루 일정을 마무리할 예정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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