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시사뉴스에서는 늘 독도문제를 다뤄왔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중점으로 알찬 내용을 독자여러분께 바르게 알리기 위해서 노력 하던 중 이번에 전 국민에게 애국심을 심기위해 새롭게 말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이런사람’을 통해서 애국자(독립운동가)를 소개해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특별기획 독립운동가 두 번째 이야기
이봉창 독립운동가의 희생정신을 본 받자.
이봉창 의사(李奉昌, 1901. 8. 10~1932.10.10)는 1901년 8월 10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2가에서 효녕대군(孝寧大君) 후손인 부친 이진규(李鎭奎)씨와 모친 밀양 손씨(密陽孫氏)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과점 종업원으로 취직했으나 주인으로부터 가혹한 학대를 받았고, 만주로 옮겨 남만(南滿) 철도회사 용산정거장에서 운전견습을 했으나 역시 일본인 직원들로부터 “조센징”이라는 굴욕적인 수모와 설움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선생은 부모나 이웃 그리고 자신이 받은 민족적인 수모와 설움이 모두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각했습니다.
그는 ‘적을 이기기 위해선 적을 알아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남만에서 철도원 생활을 그만 두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나고야, 도쿄, 요코하마 등을 전전하며 일본어를 익히는 한편, 상점 점원이나 철공소 직공․잡역부․날품팔이 등으로 직업을 바꾸면서 일인 생활을 익혔습니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도쿄에서 궁성 돌아가던 일본 왕에게 폭탄 던져
일본인을 가장하고 12월17일 일본으로 건너간 선생은 이듬해 1월 8일 일왕(日王) 히로히토가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상하이의 백범에게 ‘물품은 1월 8일 방매하겠다’는 암호 전보를 보냈습니다.
이날 거사를 치르겠다는 뜻이었습니다. 1932년 1월 8일. 선생은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히로히토를 겨냥하여 사쿠라다문(櫻田門)에서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말이 다치고, 궁내대신(宮內大臣)의 마차가 뒤집어 졌으나 히로히토는 다치지 않아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선생은 1932년 9월 30일 오전 9시 350명의 경찰이 겹겹이 둘러싼 가운데 일본 도쿄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선생은 10월 10일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았습니다. 당시 미혼이었으며 처자식이 없는 순국이었습니다. 광복 후 귀국한 백범은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돌려받아 1946년 서울 효창공원에 윤봉길 백정기와 함께 안장했습니다.
이봉창 선생의 의를 우리 후손들이 본 받아서 민족의 정기가 꼭 필요한 이때 의협과 정신이 개인주의에 빠진 오늘날의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이봉창 선생의 의를 우리 후손들이 본 받아서 민족의 정기가 꼭 필요한 이때 의협과 정신이 개인주의에 빠진 오늘날의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자료발췌
[네이버 지식백과] 이봉창 [李奉昌] - 일왕에게 던진 폭탄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제공처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