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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13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다시 예배! 다시 교회로부터!
본문 : 역대하 29장 35절
제사장들은, 제물을 다 태워 바치는 번제물도 바쳐야 할 뿐 아니라, 이 밖에도 화목제물로 바치는 기름기도 태워 바쳐야 하였다. 번제와 함께 드리는, 부어 드리는 제사도 제사장들이 맡아서 하였다. 이렇게 하여, 주님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일이 다시 시작되었다. <역대하 29장 35절, 새번역>
11월 두 번째 주간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평안하게 보내셨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이름으로 문안 인사를 전합니다. 샬롬! 오늘도 말씀 속에서 성령님의 채워주심을 경험하는 귀한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지난 주일부터 ‘당신의 예배는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주제로 시리즈 설교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으로 함께 읽은 역대하 29장 말씀을 본문으로 ‘다시 예배! 다시 교회로부터!’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삶의 예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삶이 곧 예배이고,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예배여야 한다는 아주 멋진 표현입니다. 정말 쓰면 쓸수록 은혜가 되고, 정말 공감이 가면서 추구하고 싶은 삶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의 예배의 시작 지점이 어디인지 알고 계십니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예배’를 드리며 살고 있지만, 그 삶의 예배가 시작되는 시작점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 그 시작점이 매우 중요한 포인트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 시작점은 바로 오늘 현재 지금 저희가 드리고 있는 ‘교회에서의 예배’입니다. ‘삶의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성전 예배’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린 이 예배들의 순서를 뒤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이들은 사적인 삶의 예배를 존중받기 원하며 소중하게 생각한 나머지 상대적으로 공적이라고 여겨지는 성전 예배를 소홀하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삶의 예배에서 예배보다 삶이라는 단어가 앞서면, 즉 자신의 삶이 우선이기에 공동체의 예배를 차선으로 미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건 한국 교회가 가진 고질적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예배가 성스럽고 거룩한 예식이라고 하면서 교회의 예배는 너무도 딱딱해졌고, 지루해졌고, 적막하고, 집중하기 어려운 예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성전예배에 관심을 둘 이유가 사라져 가도록 방치해 버렸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성전 예배보다는 개인의 ‘삶의 예배’로 눈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무언가 교회에서 드려지는 성전예배는 답답합니다. 그런데 삶의 예배는 상대적으로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러니 점점 삶의 예배에 집중하게 되고, 성전예배는 뒷전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순서가 바뀐 채로 방치하게 되면 위험한 점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신앙이 점점 '개인화' 되어갑니다. 신앙생활이 점점 '자기합리화' 되어 갑니다. 여러모로 우리의 신앙생활에 아주 커다란 구멍이 생긴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예배도 예배라면 예배인데 도대체 어떤 커다란 구멍이 생기는 것일까요?
첫째, 신앙생활이 ‘공동체’ 중심인 것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는 너무도 명확했습니다. 당연히 아브라함이란 개인의 구원이기도 했지만, 아브라함을 통해 공동체를 다시 일으키고, 인도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창세기 12장 2절, 새번역>
무려 430년 동안이나 하나님을 잊고 지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습니다. 그 때 모세라는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레위인 부모에 의해 신앙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그러면 그 당시 환경 속에서 모세만 하나님을 믿게 만드시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굳이 이집트 땅으로 보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입니다. 굳이 출애굽 시키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100만명이 넘었습니다. 다함께 출애굽한다는 것 그 자체로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굳이 광야를 걷게 하십니다. 40년 동안이나 만나와 메추라기를 그 많은 인원에게 직접 먹이셨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불순종하고 죄악 가득한 이스라엘 백성을 굳이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공동체를 너무도 귀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를 유지해 가기 위한 시스템으로 바로 ‘성막’을 만드셨고, 그 성막 안 지성소를 통해 공동체와 소통하며 지내셨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 아니면 그 누구이든 한 명과만 교제하기 원하셨다면, 사사 한 명, 믿음의 사람 한 명과만 교제하기 원하셨다면 결코 만들지 않아도 되는 시스템입니다. 수많은 이들이 자리를 옮길 때마다 성막을 지어야 했는데, 그 수고로움까지 감수하면서 하나님은 ‘성막’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성막에 나와야 했습니다. 그 성막에서 대표자인 대제사장을 통해 모든 백성의 죄를 사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갈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통해 미리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의 법칙을 모든 공동체가 깨닫게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성막에서 모두가 동일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모두에게 동일한 은혜가 임합니다. 모두에게 동일합니다. 그리고 그 음성이, 은혜가, 그 동일함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말씀대로 살게 만들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각 자 생각하는 대로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가 되는 공동체입니다.
‘삶의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하면 바로 이 점을 간과할 수 있습니다. 나 혼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내 관계만 좋으면 아무런 문제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성전예배를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한 주간도 그 말씀을 묵상하며 살아가는 ‘삶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각 자가 생각하고 추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삶의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 되는 공동체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삶의 예배’를 드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공동체를 통해 서로 사랑을 배우고, 서로 용서를 배우고, 서로 나눔을 배우고, 나 외에 타인을 존중하고 이해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삶을 배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결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단어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단어는 혼자가 아닌 공동체를 일컫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신앙생활의 목표가 희미해집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사실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먹고 마시고, 죽고, 살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성전예배로 모이면 ‘영광과 찬양과 존귀’를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Worship’의 행동들이 있는 것입니다. 모두 함께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그래서 주일에 드려지는 찬양은 사실 복음성가나 CCM 등의 개인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만 높여 드리는 찬양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두 함께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동일한 은혜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로 동일한 말씀을 듣습니다.
하지만 ‘삶의 예배’가 우선시되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각 자의 삶에 더 많은 목표를 두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길이 아니라 나의 뜻, 나의 생각, 나의 말, 나의 길이 마치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인 것처럼 생각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잠언 16장 9절, 새번역>
신앙생활은 결코 편안한 삶이나 심리적 안정감, 개인의 만족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모조리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히려 먼저 구해야 할 것들을 구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6장 33절, 새번역>
‘성전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방법을 배워가야 합니다. 그리고 삶의 예배를 통해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셋째, 성전, 즉 교회에 대한 중요함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너무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전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 성전에 계시다고 믿었기에 사실은 하나님 중심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전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니 당연히 중요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세상 어디에든 계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향해 특별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주님의 성전과 왕궁 짓는 일과, 자기가 이루고 싶어 한 모든 것을 끝마치니, 주님께서는, 기브온에서 나타나신 것과 같이, 두 번째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나에게 한 기도와 간구를 내가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네가 내 이름을 영원토록 기리려고 지은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였다. 따라서 내 눈길과 마음이 항상 이 곳에 있을 것이다. <열왕기상 9장 1~3절, 새번역>
그래서 성전에서 모든 이스라엘의 중요한 일들을 행하게 됩니다. 정해진 시간과 절기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했습니다. 이렇게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의 삶에서 뗄래야 뗄 수 없는 공간이 된 것입니다.
현재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교회’라는 장소가 동일한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 어디든 거하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걸어 다니는 성전이 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께서 가장 눈 여겨 보시는 장소가 바로 ‘교회’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배워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성전들이 한 곳에 모여 특별한 날인 ‘주일’을 지키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각 자가 각 자의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부활하심을 기념하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대하며 ‘주님의 날’에 한 자리에 모인다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도 중요한 의식입니다. 그 중요한 의식을 위해 필요한 ‘교회’라는 공간은 그래서 주님의 날에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려고 친히 좌정하사 다스리시는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삶의 예배’를 드리던 모든 예배자들이 함께 모여 ‘성전 예배’를 통해 하나가 되는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계속해서 무너진 성전을 그렇게도 열심히 재건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보며 눈물 흘린 것입니다. 자기는 잘 먹고 잘 살았지만 성전이 무너졌다는 소식에 수많은 날들을 슬퍼했던 느헤미야를 포함하여, 이스라엘의 왕들은 계속해서 무너진 성전과 예배를 재건하고자 합니다. 또한 신약에서도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가는 곳곳마다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다시 예배를 드리기 위해, 다시 성전으로부터, 다시 교회로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었던 역대하 29장의 본문이 바로 ‘성전 예배’로부터 ‘삶의 예배’로 이어져야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가장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이 ‘성전 회복’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깨달은 히스기야 왕은 놀라운 행보를 시작하게 됩니다. 히스기야 왕 자신만 신앙을 지키려고 했다면, 이런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자신만 하나님만 잘 믿으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축복을 받아 오랜 시간동안 왕의 자리에 있으면 됩니다. 하지만 히스기야 왕은 공동체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자신의 인생 목표와 왕으로 세우신 이유가 무엇인지 뚜렷하게 알았고, 성전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왕이었습니다. 사실 손대면 손댈수록 너무도 많은 문제점이 있었기에 망설여 질 수 있었지만 그저 모른 채 방치해 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모든 노력을 기울여 다시 예배로! 다시 성전으로부터! 시작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제 나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그 맹렬한 진노를 우리에게서 거두시기를 바라며,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기로 결심하였소. 여러분,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하시오.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선택하셔서, 주님께 분향하게 하시고, 백성을 인도하여 주님께 예배드리게 하셨소. <역대하 29장 10~11절, 새번역>
이 말을 들은 레위인들은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이들이 동료 레위 사람들을 모아 성결 예식을 하고, 왕이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주님의 율법에 따라 주님의 성전을 깨끗하게 하였다. 제사장들이 주님의 성전을 깨끗하게 하려고 그 안으로 들어가서, 주님의 성전 안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들을 주님의 성전의 뜰로 끌어내어 놓으면, 레위 사람들이 그것들을 성 밖 기드론 골짜기로 가져다 버렸다. <역대하 29장 15~16절, 새번역>
그리고 결국에는 깨끗해진 성전에서 다시 예배가 드려지기 시작합니다.
제사장들은, 제물을 다 태워 바치는 번제물도 바쳐야 할 뿐 아니라, 이 밖에도 화목제물로 바치는 기름기도 태워 바쳐야 하였다. 번제와 함께 드리는, 부어 드리는 제사도 제사장들이 맡아서 하였다. 이렇게 하여, 주님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일이 다시 시작되었다. <역대하 29장 35절, 새번역>
사실 너무도 촉박한 시간에 너무도 많은 일을 한 것이라 부작용이 생길 법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아시고 친히 도우셨습니다.
일이 이렇듯이 갑작스럽게 되었어도, 하나님이 백성을 도우셔서 잘 되도록 하셨으므로, 히스기야와 백성이 함께 기뻐하였다. <역대하 29장 36절, 새번역>
이렇게 성전 예배가 회복되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찬양이 끊어졌던 삶에 찬양 소리가 넘쳐납니다. 감사를 잃어버린 세대가 다시 감사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던 중심이 하나님으로 충만한 삶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니 성전 예배가 회복되면서부터 삶의 예배도 온전하게 회복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역대하 29장에서의 기록의 결과가 바로 이렇게 드러나게 됩니다.
거기에 있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각각 유다의 여러 성읍으로 돌아다니며 기둥 석상을 산산이 부수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 버리고,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과 므낫세 온 땅에서 산당과 제단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없앤 다음에, 각자의 고향, 자기들의 유산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역대하 31장 1절, 새번역>
다시 예배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성전으로부터 회복이 일어나야 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여 길을 잃어버리고, 정확한 위치를 잃어버린 우리의 ‘삶의 예배’라면 다시금 오늘 주일 성전에서 드려지는 ‘성전예배’로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합니다. 결코 삶의 예배로만 우리의 예배를 지탱해 갈 수 없습니다. 성전예배로 시작되지 않은 삶의 예배는 곧 그저 ‘삶’으로 전락해 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당신의 예배는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그 예배는 어디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예배는 ‘삶의 예배’로부터 시작됩니까? 아니면 ‘성전예배’로부터 시작됩니까?
우리 모두의 예배의 출발점은 공동체입니까? 개인입니까? 우리 신앙생활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까? 개인의 여정 속 평안입니까? 함께 모일 그 날을 기대하며 함께 할 수 있는 장소 하나님의 성전에 관심을 두고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나라는 성전에만 관심이 있으십니까?
다시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다시 ‘성전예배’로부터 시작하고자 합니다. 다시 교회로부터 시작되어 ‘삶의 예배’로 이어가고자 합니다. 혼자만의 신앙생활이 아닌 더불어 함께하는 ‘공동체’로 회복되길 소망합니다. 개인의 여정 속 평안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신앙생활의 목표를 회복하길 기대합니다. 초대교회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역사들의 중심이었던 교회로부터, ‘성전예배’로부터 우리의 예배가 회복되길 기도해 봅니다.
마지막으로 ‘성전 예배’를 통해 교회의 부흥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증거가 되는 구절을 함께 나누며 짧은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사도행전 2장 46~47절, 새번역>
BGM - 거룩한 성전에 거하시며 / 연주 : 송은정 by 음악세계
결단 찬양 - 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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