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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저희가 예배중에 성경을 봉독할 때 한 절만 봉독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설교자가 본문을 택할 때 한 절 만 택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로마서 1장 17절 한 절만 본문으로 택해 같이 봉독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도 ‘이렇게 해야 하나?’ 고민을 좀 했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이 중요하기 때문에. ‘로마서 1장 17절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는 마음으로 이 한 절만 본문으로 택했습니다.
사실은 설교 제목을 아예 ‘로마서 1장 17절’이라고 할까 하다가 그것은 너무하는 일인 것 같아서 1장 17절에 세 번 나오는 ‘믿음’을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성경은 66권이 모두 다 중요하지만 그래도 그 가운데서 중요한 한 권을 꼽으라면 로마서가 꼽힌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로마서는 감리교회와도 관계가 깊습니다.
감리교 창시지인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원래 영국 국교회, 성공회에서 안수를 받은 분이었습니다.
30대 중반에 여러 이유로 갈등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1738년 5월 24일 밤에 우연히 참석한 집회에서 인도자가 로마서 강해를 읽는 것을 듣고 회심을 합니다.
그 일이 웨슬리 목사님의 일기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저녁에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한 신도회에 참석하였는데 거기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 45분경에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일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따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으며,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만을 믿고 있음과, 내 죄를 아니 내 죄까지를 다 거두어 가시고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얻었다.
감리교회는 웨슬리 목사님이 체험한 이 구원의 확신 위에 서 있는 교회입니다.
감리교회는 웨슬리 목사님이 이 체험을 한 5월 24일이 들어있는 주간을 웨슬리 회심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신약과 구약 합해 모두 31,102절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제일 중요한 절이 어느 절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모든 절이 다 중요합니다.
그래도 그 가운데 한 절을 택하시라고 하면 거의 모두 요한복음 3장 16절을 택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죠?
그와 함께 중요한 절이 로마서 1장 17절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신앙에서는 요한복음 3장 16절이고 신학에서는 로마서 1장 17절이다”
또 이렇게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
“성경 66권 가운데 한 권만 남겨야 한다면 로마서를 남겨야 하고 한 절만 남겨야 한다면 로마서 1장 17절을 남겨야 한다”
성경 한 권만 남겨야 하는 일이나, 한 절만 남겨야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래도 로마서, 그 가운데에서도 1장 17절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저의 교회 옆에는 천주교회가 있습니다.
감리교, 장로교, 성결교 그밖의 여러 교파를 개신교라고 하는 데요, 천주교회와 개신교 사이에 그어져 있는 경계선이 바로 로마서 1장 17절입니다.
1517년에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켜서 개신교회가 탄생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을 붙들고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지난 주일에 담임목사님이 설교 중에 “천주교회는 성경보다 전통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고 말씀하션는데요, 개신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믿음을 제일 중요하게 여깁니다.
종교 개혁의 3대 구호가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말씀으로!“ ”오직 은총으로!“입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3장 16절을 모두 외우시는 것처럼, 로마서 1장 17절도 꼭 외우셔야 합니다
특히 뒷부분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기록된 바”는 구약에 기록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구약 어디에 이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하박국서 2장 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박국서 2장 4절의 말씀입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은 질문을 많이 한 예언자입니다.
하박국서 1장은 질문에서 질문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2절,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히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3절,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질문이 계속되다가 17절에서 “그가(바벨론을 말합니다)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 묻는 것으로 1장이 끝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을『개역개정』이라고 하는데 『개역개정』에서는 문장부호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새번역성경』이나 『공동번역성서』에는 문장부호가 들어 있는데 그 성경들을 보면 1장에 물음표가 일곱 개씩 들어 있습니다.
하박국의 그 많은 질문에 대해 하나님께서 주신 답이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입니다.
하박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질문이 많이 생깁니다.
여러분, 그 질문들 믿음으로 잘 이기시기 바랍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을 네 글자로 줄이기도 합니다.
‘이신득의(以信得義)’입니다.
‘이’는 ‘써 이’ 자로 ‘~으로써, ’~을 가지고‘ ’~으로 말미암아“’라는 뜻입니다.
이신득의,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하나님의 의” “의인”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의”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로마서 1장 17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성서에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이다."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소제목들을 따라서 한 번에 한 소제목씩 로마서를 강해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바울의 로마 방문 계획”이라는 소제목이 붙어있는 1장 8절에서 17절까지가 대상인 데요, 공동번역 성서를 보니까 16절과 17절을 “믿음을 통한 구원”이라는 소제목으로 따로 묶어 놓았습니다.
잘 한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이것은 중간에 잠깐 들어가는 말인데요, 한자의 ‘옳을 의 ’자가 참 기묘하게 되어 있습니다.
‘양 양’ 자(羊) 밑에 ‘나 아’ 자(我) 자가 있습니다.
義=羊+我
어린 양이신 예수님 밑에 내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풀이할 수가 있습니다.
한자에는 이렇게 성서적인 뜻이 들어 있는 글자들이 참 많습니다.
한 가지만 더 예를 들면 ‘사내 남(男)’ 자는 ‘밭 전(田)자’ 밑에 ‘힘 력(力)’자가 있습니다.
男=田+力
창세기 3장 18절과 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고 하셨는데 ’사내 남‘ 자는 이런 뜻을 담아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냐고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성서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고 여겨지는 한자들을 모아 풀어놓은 책들이 몇 권 있어서 흥미 있게 읽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아까 이신득의라는 말을 알려드렸는데 같은 뜻을 가진 말들이 여럿 있습니다.
‘이신득구(以信得救)’ ‘의인(義認)’ ‘칭의(稱義)’ 'Faith Alone' 'Sola Fide'...
로마서에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씀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3장 28절,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유대교인들은 율법의 행위를 중요하게 여겼는데 바울은 그것이 아니고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4장 5절,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5장 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9장 30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그밖에 로마서 여러 곳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 믿음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로마서뿐만이 아니고 바울서신 성경 여러 곳에서 이 점이 강조되고 있는데 특히 갈라디아서가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좋은 본보기가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기 어려운 것을 믿었습니다.
나이가 많았는데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기른 사람,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니라고,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네 자손이 하늘의 뭇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믿기 어려운 것,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내 지식으로는 믿기 어려운 것,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지난 주 수요일 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사순절 첫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절로 가는 통로입니다.
부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 상식적으로는 믿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잘 믿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정 받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아버지’라는 명예로운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로마서에는 이 사실이 여러 번 강조되고 있습니다.
로마서 4장 9절에서는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하였습니다.
4장 16절에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4장에는 아예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로 말미암은 언약”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보여준 모범을 잘 본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신자, 믿는 자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인데 믿음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믿음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무엇이기에 믿음을 가장 소중하게 여깁니까?
담임목사님께서 연초에 믿음에 대해 연속 설교를 해 주셨는데 그 설교들을 되살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도 중간에 잠깐 들어가는 말인데 특히 그 가운데 1월 15일 설교를 들으면서 저는 수첩에 “2월에 믿음에 대해 설교할 때 오늘 말씀을 참고할 것”이라고 메모해 놓았습니다.
그 설교를 참고하려고 지난 주일에 한문재 목사님께 “유튜브에서 지난 설교를 다시 보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여쭤보았더니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됩니다”라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대로 했는데 최근 서너 주일 것만 나와서 1월 15일 설교는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믿음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말을 바꾸면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9절에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믿음의 결국”을 “믿음의 결과”라고 번역한 성경도 있습니다.
믿음의 결과는 구원입니다.
“믿음의 결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결론도 구원입니다.
제가 어느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면서 중간에 베드로전서 1장 9절의 말씀을 인용한 일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저 필요해서 인용했을 뿐인데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 이 성경말씀에 정신이 번쩍 들은 것 같습니다.
제 설교가 끝난 다음에 담임목사님이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하면서 길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그 교회 성도들은 설교를 두 번 들은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은 그 교회 예배가 좀 늦게 끝났습니다.
아까 사순절은 부활절로 가는 통로라고 하였는데요, 믿음은 구원으로 가는 통로입니다.
이 길 말고는 다른 통로가 없습니다.
유일한 통로입니다.
바울 사도가 빌립보에 가서 전도하다가 고발을 당해 갇혔습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죄수들은 들었습니다.
갑자기 큰 지진이 났습니다. .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고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풀렸습니다.
간수가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서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고 했습니다.
당시는 죄수들이 도망하면 그에 대한 처벌이 아주 엄했거든요.
바울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우리가 다 여기 있다고 했습니다.
간수가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행 16:30)이라고 했습니다.
간수가 평소에 이런 질문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겪으면서 ‘아, 이분들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는 분들이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질문이 튀어 나욌던 것 같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습니다.
정답입니다.
정답일뿐만 아니라 유일한 답입니다.
이것 말고는 다른 답이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습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줄여서 수능고사에서 아주 가끔, 한 문제에 정답이 둘인 경우가 나와서 물의가 일어나는 일이 있는 데요,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하는 질문에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정답은 “주 예수를 믿으라” 하나입니다.
아무리 검토해도 그 하나뿐입니다.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말은 신약에 많이 나옵니다.
신약에서 ‘믿음’이라는 말을 찾아보다가 예수님이 믿음이 적은 것을 꾸짖으신 기록이 많은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가슴이 뜨끔해지기도 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믿음이라는 말은 마태복음 6장 30절에 제일 먼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보배와 같은 교훈을 우리에게 주시는 가운데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 6:28~29)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6:28~29)라고 하셨습니다.
요즘 경제적인 어려움이 많이 이야기 되고 있는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문제로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알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8장에도 믿음이 작은 자들을 꾸짖으신 일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배에 오르셨습니다.
제자들이 따랐습니다.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에 물결에 덮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마 8: 25)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셨지요?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하셨습니다.
베드로도 이런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서 예수님께 가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간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으시며 무엇이라고 하셨지요?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1)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살고있는 세상도 풍랑이 심합니다.
바람도 심하게 붑니다.
무서워하며 흔들리지 말아야합니다.
무서워 할 때,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꾸짖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는 꾸지람을 듣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반대로 성경에는 믿음으로 칭찬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여럿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백부장이 종의 병을 고쳐 달라고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백부장의 집으로 가시려고 했습니다.
백부장은 벗들을 보내어 그저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게서 무엇이라고 그 백부장을 칭찬하셨지요?
누가복음 7장 :9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여러분, 예수님을 잘 믿어 이렇게 칭찬 받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들려드리는 것으로 오늘의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아프리카에 간 선교사가 그 부족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는데 큰 문제를 만났습니다.
그 부족의 언어에는 ‘믿음’이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 경우들이 있지요.
우리나라에 커피가 처음 들어왔을 때 우리나라에는 ‘커피라는 말이 없어서 '양탕국’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서양에서 들어온 탕국’이라는 뜻이지요.
이름을 ‘양탕국집’이라고 한 카페들이 여럿 있는 것을 인터넷에서 보았습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감리교 선교사 한 분이 아시아 어느 섬에 가서 전도를 하는데 그 섬 주민드이 쓰는 말에는 ‘회개’라는 말이 없다고 합니다.
이 선교사님은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가 그 섬 주민들이 깨끗한 것을 좋아해서 빨래를 자주하는 것을 보고 회개를 ‘마음의 빨래’라고 돌려서 번역한 일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에 간 이 선교사님, 그 부족의 말에 ‘믿음’이라는 말이 없으니 성경을 제대로 번역할 수 없었지요.
성경에 믿음이라는 말이 233번이나 나오고 “믿으니” “믿노라” 이런 말까지 포함하면 그 몇 배가 되니 말입니다.
어느날 원주민과 함께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왔는데 그 원주민이 ‘아, 피곤하다 드러누워 쉬워야겠다’ 하면서 나무밑에 가서 눕더랍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드러누워 쉬어야겠다’라는 말이 ‘믿음’이라는 말과 뜻이 통하는 것처럼 느껴지더랍니다.
이 선교사님은 얼른 서재로 가서 성경을 번역하다가 중단한 원고를 펼쳤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 밑에 드러눕는 자마다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주 예수 밑에 드러누우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롭 1: 17b)
⇒오직 의인은 주 예수 밑에 드러눕는 것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렇게 해서 성경을 그 부족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을 잘 끝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 밑에 드러누우시기 바랍니다.
그곳이 편안히 쉬는 곳이 되고, 피난처가 되고, 평화를 누리는 곳이 되고, 참된 기쁨이 있는 곳이 되고 나가서 영원한 안식을 얻는 곳이 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는 믿음으로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만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만 살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붙들고 믿음만을 가지고, 믿음 위에 서서 걸어가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주님, 부족한 저희에게 믿음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내가 가진 것들 가운데에서 이 믿음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의 뿌리가 더욱 튼튼해지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믿음의 나무가 잘 자라고 열매를 많이 맺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으로만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진리가 더욱 넓게 퍼지게 하여 주옵소서.
용산감리교회가 모범적인 믿음의 공동체의 모습을 변함없이 보일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을 가지고, 믿음 위에 서서 걸어나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