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예레미야서 두 번째 날입니다.
예레미야서의 대가 중 한 사람인 톰슨(J. A. Thompson)에 따르면,
2:1-6:30은 이스라엘의 죄악과 처벌/형벌에 관해 다루고 있는데, 그 중에서 3:19-4:4은 진정한 회개의 필요성에 대해서, 4:5-6:30은 다가올 심판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4:5-6:30을 다시 분해해 보면,
4:5-10, 경고 – 침략의 위협,
4:11-18, 맹렬하게 타오르는 심판의 뜨거운 바람,
4:19-22, 예레미야의 비통에 찬 울부짖음,
4:23-28, 다가올 멸망에 대한 환상과 신탁(vision and oracle),
4:29-31, 시온의 죽음 같은 고통,
5:1-9, 예루살렘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와 도덕적 부패,
5:10-19, 끔찍한 적을 대면하고 있는 상태에서의 거짓 안전,
5:20-31, 어리석고, 반역적/반항적이고, 자기 만족에 취한 (자기) 백성에게 경고하시는 여호와
6:1-8, 포위된 예루살렘,
6:9-15, 부패한/타락한 백성 위에 떨어지는 심판,
6:16-21, 대체할 수 없는 순종:정교한 의례/의식,
6:22-26, 북쪽으로부터의 끔찍한 적,
6:27-30, 예레미야, 그의 백성의 시금자(詩金者), 이렇게 됩니다.
우선 진정한 회개의 필요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4:1-4을 보면,
회개는 돌아가는 것인데, 하나님은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회개를 하는 것 같은데, 모양 뿐이고 형식 뿐이고 의례적인 것 뿐이라는 말씀 같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의 중심에는 항상 공의와 정의와 진실이 있습니다.
따라서 아주 작은 일에도 이 기준을 가지고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 밭이 새로운 씨앗이 자라지 못할 정도로 굳어져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갈아서 신선하게 새로운 씨앗을 맞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마음의 가죽을 베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도록 엎드려 주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할례는 내 능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후손을 이어가겠다는 표식이었습니다.
4:5-10, 경고 – 침략의 위협
8절, “이는 여호와의 맹렬한 노가 아직 너희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
혹시는 내게도 이런 부분은 없는지…
4:11-18, 맹렬하게 타오르는 심판의 뜨거운 바람
심판은 “키질하기 위함도 아니요 정결하게 하려 함도 아니며…”
매를 맞을 때는 기꺼이 맞아야 합니다. 합리화해서는 안 됩니다.
14절,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겉으로 반성만 할 것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악을 씻어내야 합니다.
우리의 회개도 또한 이 기준에 맞춰 돌아볼 일입니다.
4:19-22, 예레미야의 비통에 찬 울부짖음
19절, “슬프고 아프도다 내 마음 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영적인 전선이 계속해서 후퇴하고 있는 이 나라를 위해 이런 마음이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22절,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무지한 감각을 깨닫게 하시고, 새롭게 열어주소서
4:23-28, 다가올 멸망에 대한 환상과 신탁(vision and oracle)
4:29-31, 시온의 죽음 같은 고통
심판은 가혹한 것입니다. 쏟아지는 소나기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28절, “내가 이미 말하였으며 작정하였고 후회하지 아니하였은즉 또한 거기서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5:1-9, 예루살렘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와 도덕적 부패
1절,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롬 3:10-12(“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과 같습니다.
우리가 내세울 의는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주님께 나아갈 뿐입니다. 오늘도 그것을 깨닫게 하소서.
스스로 짊어지는 멍에와 스스로 감당하는 결박이 우리 영혼을 살립니다.
5:10-19, 끔찍한 적을 대면하고 있는 상태에서의 거짓 안전
반복되는, ‘진멸하지는 않으시겠다는 말씀’(4:27, 5:18)에 실낱 같은 희망이 엿보입니다.
그 말씀 외에 멸망에 대한 무감각과 막연한 안전 의식은 다 헛된 망상일 뿐입니다.
5:20-31, 어리석고, 반역적/반항적이고, 자기 만족에 취한 (자기) 백성에게 경고하시는 여호와
눈이 있어 보고 있나요? 귀가 있어 듣고 있나요?
오염된 환경 속에서 우리는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는 여유 있는 마음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좋으신 하나님이시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대할 때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태도는 두려워하며 떠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 경외라는 말의 기본 뜻이니까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들리기를 바랍니다.
25절,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애초에 인간은 그런 길을 걷기 시작했고, 아직도 하나님의 선하심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다음과 비교할 때 어느 정도일까요?
30절,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저는 98% 정도라고 생각하는데, 너무 지나친 평가일까요?
6:1-8, 포위된 예루살렘
6:9-15, 부패한/타락한 백성 위에 떨어지는 심판
엎드려 다음의 말씀이 나를 향한, 우리 한국 교회를 향한 말씀이 아닌지 두려운 마음으로 듣습니다.
13-15a,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 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오늘날의 우리 한국 교회의 현실은 우리가 자초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공감마저 어려운 지경으로 가고 있네요…
하늘을 우러러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6:16-21, 순종을 대체할 수 없는 의례/의식
20절,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제물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6:22-26, 북쪽으로부터의 끔찍한 적
시대를 분별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26절, “딸 내 백성이 굵은 베를 두르고 재에서 구르며 독자를 잃음 같이 슬퍼하며 통곡할지어다 멸망시킬 자가 갑자기 우리에게 올 것임이라”
분위기에 휩쓸리면 내가 어느 시대 어느 상황에 있는지조차 잊어버리게 됩니다.
깨어 있는 자라면 적어도 최소한의 것은 분별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6:27-30, 예레미야, 그의 백성의 시금자(詩金者)
기껏 선택하셨는데, 기껏 사랑하고 은혜를 베풀셨는데…
버림받는 자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 일이 간단치 만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날마다의 영성이 필요합니다. 주님께로 더 가까이 가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모두에게 하나님의 평강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첫댓글 하나님을 떠난 유다는 하나님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 하나님이 세운 파수꾼의 나팔소리를 무시하는 자입니다. 반면에 우상을 섬기는데 부지런하며 지도자와 백성들이 불의와 포악을 저지르는 일에는 한마음으로 움직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시행하기에 앞서 심판의 엄중함과 참혹한 결과를 계속해서 말씀하시고 그것이 그들의 악한 생각과 죄악때문임도 분명히 하십니다.
경외감을 자아내는 바다와 거센 파도도 하나님께 순종하여 정하신 경계를 지키는데, 힘도 자원도 보잘 것 없는 유다는 하나님을 대적하면서도 그들의 행위에 부끄러움도 거리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따라 유다를 심판하러 오는 군대는 강대하고 무자비한 사자와 이리, 표범에 비유됩니다. 이 구절을 읽다보니, 문득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에 들어갈 때 하나님이 아모리족속을 쫓아내며 이스라엘을 위한 길을 터주는데 사용된 왕벌이 생각납니다.(수24:12) 우리가 매일 나아가는 길에서 마주치는 것이 나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알려주는 사나운 짐승이 아니라, 그 길이 옳다고 길을 열어주는 왕벌같은 도움의 손길이기를 기대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오늘도 눈과 귀와 마음을 활짝 열어봅니다.
들을 수 있음이 은혜입니다. 볼 수 있음이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충만하시길 빕니다.
진정한 회개의 출발점은 죄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용서를 구하는 대상을 바로 아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의 여러가지 유혹에 마음을 내준다면 그것이 배덕한 범죄임이 분명합니다.
하나님 아닌 것에 대한 의존과 숭배를 떨쳐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회심이 필요한 때가 유다백성의 시절이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로 여겨집니다.
거짓이 아닌 진실을 향한 마음, 위선이 아닌 순수한 신앙의 길을 회복할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시지만 또한 한량없는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시길 바라고, 그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 아래 평강을 누리시기를 빕니다.
마음의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네 마음의 악을 씻어버리라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살피는 날들이기를 원합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세, 하나님 만을 의지하는 자세, 그 자세가 아름답고 선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셨는데~ 때로 '엄한 것'을 보고 들으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정신을 흐렸었네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보고, 듣고 행할 수 있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겸손히 하나님을 바라고, 그분의 음성 들으시기를 빕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겉으로 반성만 것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악을 씻어내야 한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마음의 할례... 예레미야를 읽는 기간 내내 그 의미를 깊이 묵상하며... 꼭 이루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으로 덮으시고, 그 능력 그 사랑으로 충만하여지고 또한 지혜가 충만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