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천 강릉 강원 개성 거창 경산 경성 경주 계림 고령 고부 공주 광산 금산 금영 기장 김해 나성 나주 남원 대구 대전 보성 부안 부여 상주 서울 선산 성산 성주 수원 순천 안동 안성 여주 영월 예천 옥산 옥천 온양 완산 용궁 원주 의성 인왕 전의 전주 정선 죽산 진안 진주 창원 천안 청주 청풍 충주 파평 팔거 평강 평산 평양 한양 함창 함평 해주 황간
총 66개의 본관과 430,055명이 있다.(1985년) 전씨는 문헌에 178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 중 18본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의 시조 및 유래는 전해오지 않는다. 모든 전씨의 도시조는 백제 개국공신 전섭이다.
전씨세보에 따르면 그는 고구려 동명왕(주몽)의 세째 아들 온조(溫祚)가 10인의 막료를 이끌고 남쪽 부여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건국할때 오간(烏干), 을음(乙音)등과 함께 온조를 도운 10명의 공신(십제공신)중의 한사람으로 후에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삼국통일의 전란속에 전섭의 후손에 관한 기록은 7세에 걸쳐 소멸되었다. 신라통일 이후 8세손 전선이 성덕왕 22년 당나라에 입국하여 중국의 문물을 국내에 소개한 인물로 후에 벼슬이 전법(典法)판서에 오르고 정선군(旌善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전섭을 시조로 하고 전선을 득관중시조로하고 있다. 전씨문중은 정선,천안,성산 등 18본으로 분관되지만 모든 전씨는 전섭을 도시조로 하고 정선을 대종으로 한다. 전국 전씨대동보를 편찬하여 정선파, 천안파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정선 전씨(旌善 全氏)
우리나라의 모든 전씨는 시조 전섭을 유일조로 받들고 있다. 그는 고구려 동명왕의 세째 아들 온조(溫祚)가 부여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건국할때 오간(烏干), 을음(乙音)등과 함께 온조를 도운 10명의 공신중의 한 사람으로 후에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다.
그로부터 전씨혈통이 면면히 이어져 왔다. 그러나 삼국통일의 전란속에 전섭의 후손에 관한 기록은 7세에 걸쳐 소멸되었다.
신라통일 이후 8세손 전선이 성덕왕 22년 당나라에 입국하여 중국의 문물을 국내에 소개한 인물로 후에 벼슬이 전법(典法)판서에 오르고 정선군(旌善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전섭을 시조로 하고 전선을 득관중시조로하고 있다. 전씨문중은 정선,천안,성산 등 18본으로 분관되지만 모든 전씨는 전섭을 도시조로 하고 정선을 대종으로 한다. 모든 전씨는 한 할아버지의 혈통이라는 신념으로 대동단합 전국전씨대동보를 편찬하고 정선파 천안파 등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대표적 인물 ]
전씨는 역사깊은 명문벌족으로 신라, 고려시대를 통틀어 군(君)에 봉해진 사람이 35명, 정승 12명, 판서 43명을 배출했으며 조선시대에는 문과급제자만 57명을 배출했다. 이러한 전씨 문중에서 특히 고려개국 삼충공(三忠公)인 전이갑(全以甲), 전락(全樂)등 3형제를 빼놓을수 없다. 이들은 후삼국 통일의 야망을 키우던 왕건이 팔공산 오동숲에서 후백제 견훤의 군사와 일대 접전을 벌이다 적에게 포위를 당하자 전이갑이 왕건으로 가장하여 적의 주력부대를 유인하여 왕건을 탈출시키고 3형제는 최후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 한다.
조선말기의 녹두장군 전봉준은 이 땅에 최초로 자유민주주의의 싹을 트게한 동학혁명의 지도자이다. 그는 삼충공의 한 사람인 전락의 후손으로 그의 아버지가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되자 사회개혁을 결심하고 30세때 동학에 입문하여 고부접주(古阜接主)가 된다.
그리고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학정에 백성의 고통 받자 보다 못해 동학혁명을 일으켜 백성이 나라의 주인임을 일깨워준다.
처음에는 계속 승전하여 전주를 점령하고 크게 전세를 떨쳤으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이 들어오고, 천진조약(天津條約)을 빙자해 일본군도 입국하자 이천, 목천, 공주의 혈전에서 패배하고, 현상금을 탐낸 한신현(韓信賢)등의 지방민에 의해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당했다.
이러한 동학혁명에서 불붙기 시작한 민중혼은 일제의 암흑기에 이르러 숱한 독립투사를 배출한다. 안창호선생과 신민회를 조직,적극적으로 배일(排日)운동을 벌였던 전덕기와 의병장 전덕원 등이 그들이다.
시조 전언(全彦)은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의 10대 공신중의 하나인 도시조 전섭의 30세손이다. 전언은 고려 충숙왕 때 밀직부사 판전농사사(判典農寺事)를 역임했다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감천(안동에 속한 현으로 현재의 예천)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정선 전씨에서 분관하여 본관을 감천으로 하였다.
[ 대표적 인물]
2세손인 전숭간(全宗幹)은 고려시대에 도순문출척사(都巡問黜陟使)를 지냈고,그의 아들인 전사안(全思安)은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냈으며 전온(全穩)은 개성소윤(開城少尹)을 지냈다.
조선시대의 전처정(全處貞)은 별좌(別坐), 전세적(全世積)은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 전백옥(全伯玉)은 군수, 전련은 현감, 전순필(全舜弼)은 목사 전오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전신철(全愼喆)은 장례원판결사(掌隸院判決 전의혁(全義赫)은 부총관 전종우(全鐘佑)는 부호군(副護軍) 전대득(全大得)은 병조참판, 전태후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조선시대의 전천신(全千辛)은 판관(判官), 전득신(全得辛)은 첨사 전세원(全世元)은 도사(都事)를 역임하였다. 전백영(全伯英)은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우왕 때 간관(諫官)으로서 이인임(李仁任)을 탄핵하다가 유배되었다. 석방 후 1390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고,조선이 개국된 뒤 대련을 거쳐 1397년 병조전서로서 서북면선위사(西北面宣慰使)가 되고 이듬해 풍해도 도관찰출사(豊海道 都觀察黜陟使)가 되었다. 그리고 선조 때의 전경창(全慶昌)은 이황의 문인으로 1573년 문과에 급제, 헌납(獻納)을 거쳐 대도호부판관(大都護府判官)에 이르렀다.
항렬
23세 치(致)/ 24세 선(銑)/ 25세 홍(洪)/ 26세 식(植)/ 27세 제(濟)
경주(계림) 전씨(慶州 鷄林 全氏)
시조 전공식(全公植)은 도시조 환성군 전섭의 27세손이다. 그는 고려 고종 때 안염사(按廉使)로 있으면서 몽고군이 침입하자 공을 세워 계림(현 경주)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정선 전씨에서 분관해서 경주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 대표적 인물]
2세손인 전민(全敏)은 고려시대에 중랑장을 지냈고, 그의 아들인 전인적(全仁迪)은산원랑(散員郞), 전석(全碩)은 전객령(典客令)을 지냈다. 조선시대의 전세(全世)는 공조전서(工部典書), 전인우(全仁祐)는 부호군(副護軍)을지냈고, 전수준(全秀俊)은 판관(判官), 전수만(全壽萬)은 군수를 지냈으며 전흡(全洽)은 검교의 관직을 지냈다.
시조 전경(全卿)은 도시조 전섭의 30세손이다. 고려 충렬왕 때 국자제주(國子祭酒)를 역임하고 1341년(충혜왕 복위 2년) 조적의 난에 공을 세워 나성(羅城, 나주의 별호)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정선 전씨에서 분관하여 나주를 본관으로 해서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 대표적 인물]
나주 전씨 가문은 고려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의 관직에 오른 전보초(全輔初)를비롯하여 사간(司諫) 전유(全瑜)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직장(直長)을 지낸 전엄시(全儼始), 부사(府使) 전사맹(全師孟), 별시(別提) 치일(全致逸) 부호군 전천수(全千壽), 그리고 병조좌랑을 지낸 전성준(全聖準), 부호군을 지낸 전사정(全士亨)과 현감 전성택(全聖澤), 전성신(全聖臣), 오위장(五衛將) 전경회(全慶會)를 비롯, 감찰(監察) 전상원(全尙源), 참봉(參奉) 등의 관직자를 배출 하였다.
시조 전흥(全興)은 도시조 전섭의 26세손이며 도순사(都巡使) 전수용(全守龍)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고려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1231년 몽고의 철례탑(撒禮塔, 살리타이)이 침입할 때 공을 세워 대광(大匡)에 오르고 성산(성주)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정선 전씨에서 분관하여 성산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경기도 강화군 양도면 인산리에 있는 원모제에서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향사한다.
[ 대표적 인물]
고려시대에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역임한 전대평(全大平)을 비롯하여 사평(司評) 전인(全仁), 이부상서 전지(全智)와 조선시대에 판관을 지낸 전진,목사(牧使) 전지덕(全之德), 참의 전복례(全福禮), 직장(直長) 전휴(全休),장령(掌令) 전효명(全孝明), 상호군 전송(全松), 절제사(節制使) 전봉성(全鳳城), 부사 전기선(全起先), 참의 전전(全詮),그리고 공조참의전흥신(全興信), 현감 전재석(全在奭), 판관 전재봉(全在鳳) 등의 관직자를 배출하여 가문의 번성을 누렸다.
전신(全信)은 고려말 관직이 병부상서에 올랐으나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은거하였다. 후에 태종이 즉위하여 徵命하였으나 나가지 않아 곧은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조선시대 의사(義士)인 전기업(全起業)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대검과 죽창으로 호군과 싸우다가 전사 한 충의의 인물이다.
성주 전씨의 시조인 전순(全順)은 도시조 전섭의 28세손이다 그는 고려 공민왕 때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 공조판서를 지내고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정선전씨에서 분관해서 성주를 본관으로 하고 있다.
[ 대표적 인물]
조선시대 형조참의를 지낸 전전중(全殿中)을 비롯하여 부사의 관직에 오른 전환(全煥), 현감 전형(全炯), 이조참판 전찬(全燦), 도사(都事) 전영기(全永期), 의관 전형택(全炳宅), 군자감정 전성달(全聲達), 대호군(大護軍) 전황,판사 전문립(全文立), 별제(別提) 전영담 부호군 전도흥(全道興)좌승지 전진량(全進良),판관에 이른 전효관(全孝寬)과 의금부사 전충관(全忠寬), 대호군 전윤영(全胤榮), 오위장(五衛將) 전영완(全永完), 사복사정(司僕寺正) 전진수(全進壽) 그리고 동지중추(同知中樞)를 지낸 전영학(全永學), 부호군 전영필(全永弼) 등은 당대 가문을 빛낸 인물들이었다.
시조 전영령(全永齡)은 도시조 전섭의 27세손이며 고려 때 신호위대장군 옥산 전씨는 경산 전씨와 같음 전(全)씨의 유래 옥천 전씨(沃川 全氏) 시조 전학준(全學俊)은 도시조 전섭의 23세손이다 그는 영동정(領同正)을 역임했으며, 그의 5세손 전유(全侑)가 고려에서 밀직부사(密直副使), 판도판서(版圖判書), 상호군(上護軍) 등을 지내고 관성군(管城君, 현재의 옥천)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정선에서 분관하여 옥천을 본관으로 해서 대를 계승하고 있다.
[ 대표적 인물]
고려조 대호군(大護軍)을 지낸 전필(全弼)을 비롯하여 판도판서를 지낸 전유(全侑)이부전서(吏部典書)의 전광운(全光韻), 진의부위(進義副尉)의 전의(全義), 그리고 부제학을 지낸 전지(全智) 등을 배출하였다. 한편 전명룡(全命龍)은 조선 인조 때의 인물로서 1627년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거쳐 대사헌에 올랐다.
그는 도학과 문장이 뛰어나 후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옥천의 봉양서원, 영주의 방산사(方山祠)에 제향되고 있다. 또 전익희(全益禧)는 1624년 문과에 급제, 정언(正言)을 거쳐 1641년 지평(持平)을역임, 선산부사로서 선정을 베풀었다. 전희철(全希哲)은 단종 때 벼슬이 상장군에 올랐으나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 임종 때 아들에게 1 년에 한번씩 영월에 찾아가 단종능에 참배하도록 당부했다.
선조대의 인물인 전식(全湜)은 1589년 진사가 되고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많은 왜적을 죽이고, 강원도 찰방이 되었다.
1603년 문과에 급제, 병조참지를 거쳐 이조참의, 대사간에 올랐으며, 1642년 지중추부사, 동지경연사, 동지춘추관사에 이르렀다. 전극항(全克恒)은 어려서부터 문장이 뛰어나 이름을 떨쳤고 1624년 문과에 급제, 운문관 검열(芸文館 檢閱)을 거쳐 예조정랑에 올랐으며 병자호란 때 순절했다.
항렬
23세 치(致)/ 24세 선(銑)/ 25세 홍(洪)/ 26세 식(植)/ 27세 제(濟)
옥천전씨(沃川全氏)
시조 전학준(全學俊)은 도시조 전섭의 23세손으로 영동정(領同正)을 역임했으며, 그의 5세손 전유(全侑)가 고려에서 밀직부사(密直副使), 판도판서(版圖判書), 상호군(上護軍) 등을 지내고 관성군(管城君, 현재의 옥천)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정선에서 분관하여 옥천을 본관으로 해서 대를 계승하고 있다.
[ 대표적 인물]
고려조 대호군(大護軍)을 지낸 전필(全弼)을 비롯하여 판도판서를 지낸 전유(全侑), 이부전서(吏部典書)의 전광운(全光韻), 진의부위(進義副尉)의 전의(全義), 그리고 부제학을 지낸 전지(全智) 등을 배출하였다.
한편 전명룡(全命龍)은 조선 인조 때의 인물로서 1627년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대사헌에 올랐다. 그는 도학과 문장이 뛰어나 후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옥천의 봉양서원, 영주의 방산사(方山祠)에 제향되고 있다.
또 전익희(全益禧)는 1624년 문과에 급제, 정언(正言)을 거쳐 1641년 지평(持平)을 역임, 선산부사로서 선정을 베풀었다.
전희철(全希哲)은 단종 때 벼슬이 상장군에 올랐으나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 임종 때 아들에게 1 년에 한번씩 영월에 찾아가 단종능에 참배하도록 당부했다.
선조대의 인물인 전식(全湜)은 1589년 진사가 되고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많은 왜적을 죽이고, 강원도 찰방이 되었다. 1603년 문과에 급제, 병조참지를 거쳐 이조참의, 대사간에 올랐으며, 1642년 지중추부사, 동지경연사, 동지춘추관사에 이르렀다.
전극항(全克恒)은 어려서부터 문장이 뛰어나 이름을 떨쳤고 1624년 문과에 급제, 운문관 검열(芸文館 檢閱)을 거쳐 예조정랑에 올랐으며 병자호란 때 순절했다. 37,380명이 있다.(1985년)
시조 전방숙(全邦淑, 시호는 문정)은 도시조 전섭의 28세손으로 전공렬(全公烈)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고려 충렬왕 때 한림학사, 문하시중평장사를 역임하고, 용성( 용궁)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정선 전씨에서 분관하여 용궁을 본관으로 해서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묘소는 강원도 평창군 동도산에 있다. [ 대표적 인물 ] 고려시대에 태사(太師)를 지낸 전정민(全正敏)을 비롯하여, 전법총랑을 지낸 전충경(全忠敬),등 많은 관직자를 배출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정언(正言)을 지낸 전영귀(全永貴),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낸 전찬(全纘) 등이 발전을 이룩하였다. 전원발(全元發)은 고려 말엽 원나라에 가서 문과에 장원하고 병부상서, 집현전 태학사에 오른후 귀국하여 조선 태조 때 입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용궁의 소천서원에 제향되고 있다.
그리고 전명삼(全命三)은 현감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민심을 샀고, 전삼달(全三達)은 병마절제사를 지내면서 나라에 공을 많이 세웠다.
항렬
24세 환(煥)/ 25세 재(載)/ 26세 호(鎬)/ 27세 홍(洪)/ 28세 식(植)
죽산 전씨(竹山 全氏)
시조 전한은 도시조 전섭의 28세손이다.
고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밀직부사로서 1231년 몽고군이 침입할 때 공을 세워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죽산군에 봉해졌다. 그 후 후손들이 정선전씨에서 분관하여 죽산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 대표적 인물]
2세손인 전학기(全學基)는 현감, 그의 아들인 전득문(全得文)은 국자감(國子監)을 지내면서 가문의 기틀을 잡았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직장(直長)을 지낸 전팔원(全八元), 부호군을 지낸 전성옥(全性玉),전응경(全應慶)은 수군절도사를 지냈고 전의존(全義存)은 사정(寺正)을 지냈으며, 전의화(全義和)는 현감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전민태(全敏泰)와 전팔급(全八及)은 학자로서 이름을 떨쳤으며 전수옥(全守玉)은 효성이 지극하였다.
시조 전섭은 온조왕이 백제를 개국할 때 오간(烏干), 마경(馬?),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간(屹干), 곽충(郭忠), 한세기(韓世奇) 등 9사람과 함께 개국에 공을 세운 십제공신(十濟功臣)이다 환성(歡城, 천안의 별호)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천안으로 하고 16세손 전낙을 중시조로 한다.
천원군 풍세면 삼대리에 단(壇)을 만들고 음력10월 1일 향사한다.
[ 대표적 인물]
고려 충숙왕때의 전신(全信)은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지냈다 조선 선조36년 무과에 급제한 전상의(全尙毅)는 여러 벼슬을 거쳐 인조 5년 정묘호란 때 구성부사로서 안주성(安州城)을 지키다가 순절했다.
전동흘(全東屹)은 효종 때 무과에 급제해 특히 용병에 능하여 이상진(李尙眞), 소두산(蘇斗山)과 함께 삼걸(三傑)이라 불렀으며 현종때 7도의 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숙종때는 훈련대장(訓鍊大將)등을 지냈는데 통영(統營)에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지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