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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말하지 않은 진실, 그들이 말한 거짓
팩션(faction)형 사모펀드 투쟁기
6조8천억은 어디로 증발했나
제2회 – 낯선 공간, 낯선 인연
○ 끝나지 않을 시작, 데모 합시다
2020. 3. 27 이정섭 대표는 아침부터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애써 자제하면서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대충 정리해 놓고, 오후에 안산 시내 한정식 ‘미담’ 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 부리부리한 눈매에 유도 선수 보다 탄탄한 근육질의 정섭은 목소리가 커서 사람들에게 늘 화난 것처럼 오해를 받곤 한다. 애써 부드럽고 낮은 톤으로 대화를 하다가도 어느샌가 흥분을 하면, 함께 있는 공간이 쩌렁쩌렁 울린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때 마음 같아서는 잘못한 놈들을 흠씬 두들겨 패주고, 한명씩 엎어치기 해주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그런식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정섭의 후일담이다. 정섭은 젊은 시절 코스피 상장 기업인 정신제강의 영업총괄팀에서 잘 나가던 영업사원이었다. 성균관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공채로 입사한 후, ‘남들보다 한발 더 뛰자’ 생각으로 늘 부지런히 거래처 개척에 매진한 결과 입사 초기부터 두각을 나타냈고, 영업부 매출의 절반 이상을 혼자 감당할 만큼 우수 사원으로 능력을 인정 받았다. 성공비결이 뭐냐고 묻자 터프한 외모에 안맞게 수줍어하며 “부모님이 물려주신 탄탄한 근육과 건강 덕분에 이룬 결과였지요” 겸손한 답이 돌아왔다.
진급이 자꾸 누락되어 실망한 후 7년전 사표를 던지고 나와, 금속가공품 총판점을 개업하면서 바닥부터 다시 쌓아 올려야 했다. 특유의 성실함으로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젠 매출액이 늘어 꽤 탄탄하게 성장하였다.
사업 성공하기까지 기업은행의 대출과 도움이 큰 힘이 되었지만, 어느덧 대출규모가 커진 만큼, 거래량도 많아 기업은행에서 VIP고객이라며 금박 명함을 제작해줄 정도로 대접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젊은시절 주식거래를 조금해 보았지만, 수익을 내지 못하고, 긴요한 사업자금으로 위험한 투자를 했다가 손실을 볼 수 없어, 기업은행 ‘중금채’라고 해서 중소기업금융채권 등 안전한 채권에 장기투자를 해 왔다.
“전 천성적으로 낯선 사람을 만나면 경계심을 갖게 되요.” 거래처 사람들에게 여러차례 물품대금을 떼어먹힌 경험 때문에 처음부터 사람을 쉽게 신뢰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한번 신뢰가 쌓이면 간이라도 빼줄 듯이 서로 믿지요” 업종의 특성 때문에 생긴 습관이다. 그런데, 오늘은 같은 피해자라는 마음에 경계심이 누그러지고 마음을 열게 된다.
“자본시장법상 방문 판매하면 안되는데, 바쁜 사업장에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 절대 손실이 나지 않는다고 다그치듯 형광펜으로 표시한 곳에 볼펜으로 싸인해달라고 하더군요” 정섭의 펀드 가입당시 설명이다. “사모펀드인 줄도 모르고 오랜 거래를 하면서 실수하지 않았으니 믿고 거래한거죠.” 자본시장법에는 부당권유를 금지하도록 정해 놓았다. 거짓의 내용을 알리거나, 고객의 요청을 받지 않고, 방문, 전화 등 실시간 대화의 방법으로 투자권유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 정섭은 은행에 맡겨둔 2억의 손실을 통보 받고, 환매 중단 원인을 알아보려고, 여기저기 수소문 해 보았지만, 은행직원들이 속시원하게 대답을 해주지 않자, 친구의 소개로 변호사와 문제 파악을 하고 있었다.
3. 27 미담 한정식에 6명의 사람들이 예약된 방에 앉아 정섭을 맞이한다. 낯선 분들이 젊잖게 앉아 있어, 이런 분들이 어떻게 피해를 당했나 싶어 의아하기까지 했다. 모임을 주도한 최창석이 먼저 참석자 명단을 작성한 후, “오늘 이렇게 자리에 모였으니, 서로 인사부터 나누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얘기합시다.”
6명의 피해자가 모여, 각자 자기 소개와 함께 어떻게 가입하게 되었는지 어디 지점 계약인지 확인하고, “작년 그러니까 2019. 4 기준 기업은행 시가총액이 8조원이 넘습니다. 이런 은행이 더구나 정부 투자 공기업이 뭐가 아쉬워서, 왜 우리한테 이런 피해를 안겼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3. 23 본점에서 내려온 김용석 팀장이나 엊그제 만났던 임찬희 부행장이나 핑계만 대고, 자기들도 사기피해자라고 엉뚱한 소리만 잔뜩 늘어 놓고, 어떻게 해주겠다는 말도 없이 가버렸습니다.”
최창석의 간략한 경과 설명을 듣고 난 후, “허 참, 이 놈들이 말이야, 아직 정신을 덜 차렸어 그게 어떤 돈 들인데 말이지, 기업하는 사람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이런 피해를 떠 넘기면, 아 글쎄 우리보고 어떻하라는 말이냐구” 가장 연로한 박정환 회장의 말이다.
“26년 동안 기업은행만 거래했어요, 사옥 건립을 위해 기업은행에 맡겨둔 11억원이 묶여서 당장 차질이 생겨 버렸네요. 우리 회사는 중금채만 거래했어요. 미국이 망하지 않는 한 안전하다고, 6개월이면 된다고 해놓고 어째 이럴 수 있는지 원, 처음에는 그냥 정기적금인 것처럼 애기해 놓고 벌써 1년 반이 지나도록 참 답답하네요.” 26년째 점착제 등 화학제품 제조업으로 탄탄기반을 갖고 꽤 알려진 중견기업의 오명환 대표가 한 말이다.
“저도 그 얘기 들었어요. 미국이 망해도 6개월 후 만기 때, 원금회수 확실히되니까 걱정말라고. 남편이 받은 퇴직금과 시골 땅을 팔아서, 새로 노후를 위해 집을 지으려고 준비한 돈 10억을 기업은행이 날려먹었어요. 이젠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요” 70세라고 하기에는 젊고, 품격있어 보이는 어명숙은 말쑥한 정장차림과 달리 몇 일간 잠을 못자고 고민한 듯 초췌하고 피곤한 표정이 역력하다.
각자의 사연을 풀어놓고, 기업은행 성토 분위기가 한 순배 돌자 박정환 회장이 먼저 나선다.
“자자, 일단 우리가 여기에서 그런 얘기 해봤자 당장 해결책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 자초지종은 이쯤에서 정리하고,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더 알아보고, 피해자들 명단을 파악하고, 대책위를 만들어 집단으로 대응합시다”
박정환 회장은 명우산업의 명예회장이다. 명우산업은 플라스틱 수지 제조업체이고, 연매출 1,900억의 코스닥 상장기업이다. 몇 년전부터 부동산 개발, 플라스틱 창틀 제조 가공업으로 사업을 다각화 하던 중 건강상 이유로 2019. 12 아들에게 대표직을 이양하고 명예 회장으로 물러나 있다. 회장 재직시절 아들과 딸과 본인 명의로 가입한 펀드가입금액 49억은 법인자금과 별개로 평소 아껴서 모아 놓은 개인자금이었다. 기업은행을 믿고 맡겨 두었다가 몽땅 잃어 버리고, 속 앓이를 하다가 얼마전부터 전립선 암으로 병원을 오가면서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 병원 방문 일정을 미루고 오늘 모임에 참석했다.
“자식에게 상속세 재원으로 주려고 따로 갖고 있던 돈이었어. 짜식들이 말야, 두 번이나 지점장 WM센터장, 부팀장이 찾아와 브리핑도 하더니 아니 이런 놈들이 도데체 어디 있냐구” 어떻게 가입하셨느냐고 묻자 대뜸 나온 말이다.
박정환은 자수성가로 성공한 사업가이다. 젊은 시절 외국계 회사와 손잡고 플라스틱 수지제조 가공업에 뛰어들어 혼자 힘으로 오늘의 성공을 이룬 보기 드문 케이스이다. 자수성가형 기업가들은 쓸데없는 권위나 격식보다 직설적이고 실무적이다. 박회장의 소탈한 성품이 사람들을 편하게도 하지만 지나치게 검소한 성품이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한다. 스스로 그런 검소함과 철저함이 기업 성장의 발판이었다고 믿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법인 자금으로 후원금이나 장학재단 운영에는 척척 아끼지 않고 기부하지만, 직원이나 가족들이 만원짜리 한 장이라도 함부로 낭비하는걸 싫어한다.
“기업은행이 피해자 명단을 제대로 제공할까요?” 조순익 대표가 개인정보 보호 수집문제를 제기하자,
“지점장에게 내 번호를 피해자들에게 전달하고, 다른 피해자들이 나한테 연락하라고 하지 뭐” 칼칼한 목소리의 박회장은 능히 그 정도 요구를 해도 손색이 없을 위치다. 본인도 신중하고 실수를 하지 않는 만큼, 누구든 실수를 하면 위 아래 격식 따지지 않고, 욕설도 아끼지 않는 불같은 성격이어서 , 실수를 한 후, 부하직원이나 은행 지점장 직원들은 박회장 앞에 서면 쩔쩔매곤 한다. 평소에는 온화하지만 누구라도 실수를 하면 당장 큰 소리부터 나오는 박회장의 권위에 함부로 대들기도 어렵다.
“그거 좋겠네요, 박회장님께서 명단을 확보하시면 일단 피해자 단체를 만들고, 당장 기업은행 본점 앞에서 데모부터 합시다. 놈들에게 본떼를 보여줘야지요” 오명환 대표가 한마디 던지자, “그렇게 하시죠 그동안 제가 이 자료를 조사해서 왜 우리가 이렇게 당했는지 따져보고, 필요하면 소송도 할 수 있게 준비해보겠습니다.” 이정섭 대표가 임시 총무를 맡기로 하고, 집회 준비는 조순익과 이정섭이 함께 준비하기로 하고 그날 모임이 마무리 될 즈음,
“그런데 우리 모임 이름하고 대책위 임원도 뽑아야 하지 않나요?” 어명숙이 모임을 마치기 전 던진 말이다.
“아 그렇지, 오늘 모임을 만든 사람이 최창석 대표니까 그냥 최대표가 임시위원장으로 당분간 이 모임을 이끌어 가고 나중에 다시 결정합시다. 나중에 사람들이 더 모이면, 대책위 이름도 위원장이 총무님과 알아서 정하도록 하고” 박회장이 의견을 물어 볼 것도 없이 제안을 하자, 모두가 찬성 의사 표시를 하며 박수를 치자 얼떨결에 최창석 대표가 임시위원장으로 선출되고, 조순익 대표가 부위원장, 이정섭 대표가 총무로 선출되고 말았다. 그렇게 임시라고 생각했던 모임이 대책위가 끝날 때 까지 수년간 계속 이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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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에서 첫 모임을 갖던 날 은평구의 기업은행 응암동지점 앞에서는 또 한명의 피해자가 꽃샘추위를 이기며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했다. 70대 초로의 여성 피해자 박정인은, 재개발 정비구역의 조합원으로 관리처분과 철거 계획에 맞춰 준비해온 세입자 임대 보증금을 은행에 맡겨 두었다가, 얼마전 통장계좌가 깡통이 되어버렸다는 소식에 화가나고 답답해서, 생전 처음 손글씨로 피켓을 만들어 기업은행 앞에 선 것이다.
“평소 텔레비전에서 집회나 시위하는 장면을 보면서 딴 세상 일인줄 알았지, 정작 내가 이렇게 할 줄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부끄러움이요 주눅은 좀 들었지만 그런거 없었어요” 1인 피켓시위 첫날 박정인의 소감이다.
“이 펀드는 나 같은 사람은 가입하면 안되는 상품이었어요. 위험등급 6등급 중 최고로 위험한 상품이고, 전 안정추구형이었는데 왜 이걸 가입시켰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환매가 중단된 후 계약 당시 서류를 복사해 달라고 해서 받아보고 깜짝 놀랐다면서, 털어 놓은 말이다.
사모펀드를 고객에게 판매할 때는 상품의 위험도를 6개 등급으로 나눠서 가장 위험한 상품을 1등급, 비교적 가장 안전한 상품은 6등급으로 분류해야 한다.
투자자의 경우에도 개인별로 투자성향을 확인해야 한다. 투자자들을 공격투자형, 적극투자형, 위험중립형, 안정추구형, 안정형의 5단계로 나누고, 고객의 자산과 수입 규모를 따져보고 투자 손실 감내 능력과 고객의 연령과 과거 투자경험, 상품 이해능력을 파악하기 위해, 개인별로 고객이 직접 객관식 문항에 체크를 해주면, 은행 직원이 전산으로 점수를 메겨 투자자 성향을 분류해야 한다. 그렇게 고객의 투자성향에 맞게 펀드를 권유하고, 상품 위험도에 맞게 가입시켜야 한다. 디스커버리 펀드는 스코어링 결과 투자자 성향이 공격투자형인 고객만 가입할 수 있는 최고위험 1등급 상품이었다.
그런데 은행과 증권사 판매 직원들은 그런 절차를 생락하거나 상품에 대한 설명도 제대로 하지 않고, 고객에게 “여기 여기 성함하고 싸인만 해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하면서 서류 하단에 서명만 받고 나머지 문향의 체크는 은행직원이 제멋대로 작성했다. 예를들어 수입이 높고, 과거 투자경험이 있고, 재산이 많은 것처럼 체크를 하면 공격투자형으로 점수가 나온다. 그렇게 많은 고객들은 영문도 모른채 위험한 상품에 가입하게 되었다.
“난 안정추구형이이라서 위험등급 5등급 상품만 권유할 수 있었는데 위험등급 1등급 상품에 가입된 것을 알고 너무 놀랐죠. 물론 사모펀드인줄도 몰랐어요.” 박정인은 사고가 터진 후 은행직원이 억지로 이 상품에 가입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된 것이다. “깨알같이 쓰여있는 글씨가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뭔소린 줄 하나도 모르겠어요.”
각 금융사들은 위험이 큰 사모펀드를 판매하려면, 법에 따라 ‘펀드권유준칙’을 제정 준수해야 한다. 그런데 판매 직원이 임의로 서류를 조작해도 투자성향이 공격투자형으로 나오지 않으면 본사에서 임의로 제공한 서류를 동원해서, 마치 고객이 상품 가입을 간절하게 원한 것처럼, 추가 서류를 작성한 후 계약서류에 서명을 하게 한 것이다.
“35년간 기업은행만 거래했어요, 내 나이가 이제 70인데 이렇게 위험한 상품인줄 알았으면, 난 절대 가입하지 않았을거예요. 재개발 세입자 전세보증금 3억을 당장 내줘야 하는데 누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상품에 가입하겠어요, 그날도 위험하면 안된다고 했어요.” 9개월 후에 보증금 만기일이 돌아오기 때문에 안전하게 은행에 맡겨두려고 했었다.
“은행과 PB팀장에 대한 배신감으로 몇 일동안 밤잠을 설쳤어요. 그랬더니 머리가 아프고, 몸살을 앓았어요. 아무리 끙끙대며 생각해봐도, 답이 없었어요.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사기쳐서 가져간 내돈 내놓아라’ 손글씨로 엉성하지만 피켓을 만들어서 은행앞으로 갔지요”
얼마전까지 은행을 찾아가면,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친절하게 맞이했는데, 오늘은 안쪽에서 눈치만 살피고 경계하는 은행직원들이 얄밉고 야속하다.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고 처참하다고 생각했다. 지나가는 어떤 할아버지는 “요즘은 늙은이들도 데모를 하네, 말세야 말세” 혀를 끌끌차며 지나간다. 화가 나서 쫓아가 다투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잠시 후 지점안에서 지점장과 차미혜 PB팀장이 다가와서 미안하다면서 머리를 조아린다. 커피를 건네면서 “추우신데 안에서 잠시 쉬어 가면서 하셔요. 저 때문에 정말 죄송해요.”
“내가 여기 놀러온 줄 알아요. 당신들이 나를 배신했으니, 나도 당신들을 이제 믿지 않기로 했어요. 그때 안전하다고 했으니, 이자는 필요 없고 약속대로 원금이라도 돌려줘요”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얘기했다.
몇일 간 점심시간에 맞춰, 그렇게 피켓시위를 했지만 은행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다. 집에 돌아오니 재개발 조합에서 추가 분담금 납부 통지서가 왔다. 갑자기 가슴이 쿵 내려앉고 눈물이 난다. 작년에 환매가 중단되어 당장 급한 돈을 조합에 부탁해서, 대출을 받아 전세 보증금을 내주고 나니, 이자 갚기도 빠듯한데 추가 분담금을 또 내려면 당장 어디서 또 돈을 융통해야 할지 정말 난감하다. 지난번 추가 분담금도 딸이 적금을 깨서 빌려줬는데, 남편에게 미안하고 두려워서 말도 못한다. 꼼짝도 않고 서서 피켓시위를 했더니 다리에 피가 몰리고 어깨와 허리 여기저기 온 몸이 쑤시고 아프기 시작한다. 몸살약을 먹고 누웠다.
잠시 후 휴대폰의 벨이 울린다. 차미혜 팀장이다. 길을 걷다가도 기업은행 간판, TV에서 은행CF 광고만 나와도 가슴이 내려앉고 화가 난다. 직원의 목소리는 더 듣기 싫고 꼴도 보기 싫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연결해 본다.
“여보세요, 왜요 어쩐일로....” 퉁명하게 묻자.
“네 사모님 어디 아프셔요. 목소리가 안좋으신거 같네요..다 저희 때문에.... 죄송해요. ”
“죄송하면 은행장한테 내 돈 돌려주라고 해줘요. 그리고 내 돈 돌려줄거 아니면 전화하지 마요”
“네 사모님, 일전에 혹 피해자 단체 있으면 알려달라고 하셨잖아요. 저기, 피해자모임 중 한분이 저희에게 번호를 주셔서 연락처를 받아 놓았어요. 그래서 번호를 알려드릴게요 거기로 연락해 보셔요”
은행 직원이 알려준 번호를 눌렀다. 그렇게 박정환 회장과 연결되었고, 디시 대책위 이정섭 대표라는 분에게 피해자 접수를 하고 난 후, 같은 피해자들이 모였다는 사실에 너무나 반갑고 위로가 된다.
“4월 8일 집회가 있다고요? 저는 당연히 가야지요. 꼭 가겠습니다. 참가비가 얼마인가요, 얼마든지 낼게요” 너무 반가왔다 혼자 공룡같은 기업은행에 맞서려니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함께 모여 데모한다니 잘 됐다.
평생 남들한테 아쉬운 소리 안하고 자존심 지키면서 살았는데, 이제 내가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데모를 해야한다니 피식 헛 웃음이 나왔지만 이내 마음 한켠에서, 사람들이 왜 데모를 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렇게라도 돌려 받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껏 기대가 부풀었다. 가만 4월 8일 시댁 제삿날인데 어쩌지 몸이 부서져도 일찍 다녀와서 서둘러 준비하면 되겠지, 일단 무조건 그날은 기업은행에 가서 가슴에 담아두었던 소리 좀 실컷 지르고 싶었다. 박정인은 그렇게 시작된 투쟁이 4년이 넘게 이어질 줄 알았을까.
그렇게 전국적으로 여기 저기에서 하나 둘 피해자들의 실망과 상처가 도지고 있었고, 분노의 목소리가 하나둘 대책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음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