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종 (제2장)
가이샤라 빌립보의 사탄 (마16:23)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수납하시고 이 같은 신앙고백위에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며 사도들에게 천국의 열쇠를 넘겨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통해 자신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힌 예수께서는 이제 구체적인 십자가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그런데 이 예고는 제자들을 혼란과 당혹감으로 몰아 넣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목격한 예수님의 왕적 권능에 압도되어 틀림없이 예수께서 지상의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조금 전의 반석이 한 시각도 지나지 않아 사단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말씀하신 자리입니다. 고난을 설교하시는 고난의 강단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자리에 사단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베드로가 사단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1. 왜 신앙고백을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시니이다”
주 예수에 대한 고백 중 가장 완벽한 것 가운데 하나로 이 신앙고백은 기독교 신조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고백 가운데에는 예수의 인성(그리스도) 과 신성(하나님의 아들) 뿐 아니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예수의 본질적 신분 등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이 고백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처음부터 이 고백을 하였습니다.
*요1: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요1: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그러나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그동안 크게 부각시키지 않음에 따라 메시야의 신분, 사역의 특성을 잘못 이해한데 대하여 바로 잡아야 될 시점에 이르렀기 때문에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확인한 것입니다.
베드로 신앙고백의 중요한 점은 “그리스도”란 말과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 앞에 관사 “호”가 붙어있어 이는 예수 바로 그 분이 일반적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이 아니라 오랫동안 대망해 오든 구원자, 곧 메시야임을 힘주어 증거 한 것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절대 유일성, 초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 보냄을 받으신 분이요 하나님과 하나 되신 하나님의 본체시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해 주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어 “바”는 아들이라는 뜻이요, “요나”는 “요하난” “요한” 으로 불리는 비둘기 라는 뜻입니다. 즉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렇게 그의 옛 이름을 부르신 것은 갈릴리 바다의 어부로서 이 엄청난 신앙고백을 한 것은 그의 지혜, 신분, 지식이 아니라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깨닫게 한 것입니다.
시몬에게 임한 복은 무엇입니까? 신, 구약을 통 털어 한 개인에게 주신 이 놀라운 축복은 물질적인 것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친히 특별한 계시의 은총을 누린 것입니다.
2. 사탄의 도구로
시몬은 유대인 입니다. 그는 복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이름이 페트로스(petros), 반석(petra) 으로 불리웠습니다. 이런 베드로를 예수님은 어찌 사단이라 불러야 했습니까? 두 말 할 것 없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막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위한 베드로의 인간적인 열정은 대단했습니다.
*본문22절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
“붙들고”(헬)프로스라보메노스 는 마치 자기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사명이 있는 것처럼 강압적으로 붙들고 강권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수리아 시내 사본에는 본 장면을 “그가 마치 예수를 불쌍히 여기거나 하듯이” 라고 표현하여 베드로의 인간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간하여”(헬) 에피티마오는 꾸짓다. 견책하다. 강력히 책망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헬) 히레오스 소이 퀴리에 는 결코 그 일이 당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금하실 것입니다. 등의 뜻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바른 신앙고백을 한후 예수의 수난과 죽으심에 대한 말씀을 듣자 책망조로 예수의 뜻을 가로막고 어떻게든 그 뜻을 돌이키려고 훈육함으로 예수를 인류 구속을 위한 고난의 종으로 이해하는 데는 실패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을 인간적으로 평가하면 예수에 대한 열정적이고 직선적인 사랑을 나타낸 것이고 영적으로 평가하면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왜곡하고 구속사의 큰 흐름을 거스리는 사탄 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 --마치 베드로 자신이 그 일을 결정할 수 있는 자처럼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참 신앙은 신비요 축복입니다. 베드로의 메시야 고백은 분명히 축복이었습니다. 신비로운 체험을 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산이 높을수록 골짜기가 깊은 법입니다. 신비한 축복 다음에 온 것은 사탄의 도구 노릇을 하여 주님을 근심하게 한 것입니다. 이에 주께서 베드로를 책망하시기 위해 그를 향하여 돌이키셨습니다.
주님의 책망은 세 가지로 나타나는데,
a.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이것은 사탄이 베드로를 통하여 예수를 넘어뜨리기 위해 가까이 왔음을 뜻합니다. 베드로의 헛된 생각을 즉시 제거하여 주셨습니다.
b.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직역하면 “너는 나의 갈 길에 장애물이다.” 의 뜻 입니다. 이것은 사단이 예수를 넘어뜨릴 수는 없으나 사역을 방해하고 훼방하기 위하여 베드로를 통해 덫을 놓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벧전2:8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교회를 세워야할 반석이 순간적으로 장애물의 반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c. 네가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 하는도다.
우리는 조개처럼 속에 숨어있는 천하에 하나뿐인 “자기”라는 이기주의적 욕망에 자극을 받습니다. 이런 모습을 간직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일을 알 수도, 깨달을 수 도 없습니다.
시몬은 메시야를 발견하였습니다. 실로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가 임하는 복된 체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감당키 어려운 칭찬과 축복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를 연발하며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준엄한 경고를 받고 그는 자신의 본 위치로 되돌아 가야하는 그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리스도 아래의 제자의 길을 다시 배웁니다.
나의 현 주소는 어디입니까? 제자의 길입니까? 아니면 사탄의 도구입니까?
사탄은 구약 적 표현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전의 표현입니다.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는 것은 신약 적 표현입니다. 베드로처럼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면서도 성령을 근심케 하는 일이 종종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베드로는 3년을 주께 배웠으나 역시 사탄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닙니다.
은혜의 산에 오르면 또 다른 은혜의 산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