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는 순환한다. 경기가 한창 좋을 때라도 기업은 불황을 대비해야 한다. 호황 때 못지않게 기술, 설비, 인력에 투자해서 제품 품질과 생산성을 높이고 수익력을 키워둬야 경기가 나빠져도 수익을 낼 수 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90년대 전반까지 3저 호황 때 우리 기업은 미래 대비에 소홀했다. 호황 때 번 돈을 생산적 투자로 돌리기보다 주식과 부동산에 대거 투자해서 재테크로 불리기에 바빴다.
기업 경영은 수익 위주로 할 수도, 외형 위주로 할 수도 있다.
수익 위주 경영은 양보다 질을 추구하는 경영방식이다. 많이 팔려고 애쓰기보다는 고급 제품을 생산하고 고가에 팔아서 비용 대비 이익을 많이 낸다. 빚은 되도록 적게 져서 이자 부담에 따른 수익성 하락을 막는다.
외형 위주 경영은 반대로 한다. 고품질 제품을 고가게 팔기보다 값싼 제품을 대량 생산, 판매한다. 이익은 적게 나더라도 매출 규모 키우기에 중점을 둔다. 빚을 많이 져서라도 자산 규모를 키운다.
3저 호황 때 우리 기업은 수익보다 외형 위주로 경영했다. 사업 규모가 클수록 빚과 금융 비용 등 사업 유지비를 많이 썼고, 매출 대비 이익률이 낮아서 실속 없는 고비용, 저효율 구조가 되어갔다. 은행이 기업에 자금을 빌려줄 때도 수익성보다 매출 규모를 잣대로 삼아 기업의 외형 경영을 부추겼다.
덩치 불리기 경영은 불황에 약하다. 호황 때는 수요가 커서 웬만큼 매출을 받쳐주므로 박리다매로 이익을 낼 수 있지만, 불황이 오면 매출이 떨어져 현금 수입과 이익이 급감한다. 한편에서는 호황 때 불려놓은 사업을 계속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에다 호황 때 진 빚 상환 부담까지 가중된다. 안팎으로 경영난을 겪고 불황이 길어지다 보면 사업이 위기에 몰릴 수 있다.
그리하여 19990년대 중반을 넘기자 한국 경제에 돛을 달아줬던 3저 여건에 변화가 생겼다. 달러 대비 엔 시세가 내림세로 돌아서 '엔저' 상황이 됐다.
엔 시세 하락은 일제 수출품 판매가를 내리는 효과를 내서 일제 수출품이 글로벌 시장에서 약진하게 도왔다. 일제 수출품과 경쟁하던 한국산 제품은 수출 성장세가 둔해졌고, 수출에 의지해 성장하던 한국산 제품은 수출 성장세가 둔해졌고, 수출에 의지해 성장하던 한국 경기는 불황으로 빠져들었다. 경기가 꺾이자 국내 부동산과 주식 시세도 폭락했다.
그랬더라도 당시 우리 기업이 서둘러 빚을 갚고 수익성을 높였다면 훗날 어려움이 덜했을지 모른다. 대개는 엔 저가 오래가지 않으리라고 낙관했다. 오히려 호황이 돌아오면 때맞춰 매출을 키울 수 있게 준비한다며 빚을 더 내서 설비를 늘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엔 시세는 내리 3년 하락세를 이어갔다. 1995년 달러당 평균 94엔이던 것이 계속 떨어져 1997년 120엔까지 갔다.
엔 시세 급락에 비례해 한국산 수출품은 대표 상품인 반도체와 철강을 필두로 헤외수요(외수外需)가 급감해 재고가 쌓여갔다. 수출기업은 생산 활동이 날로 둔해졌고 국내수요도 따라서 위축됐다. 반대로 기업이 갚지 못한 은행 빚은 시간이 흐를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설비투자와 부동산 매입에 거액 빚을 진 기업 중에서는 이자도 못 갚을 만큼 자금난을 겪는 곳이 속출했다. 운영자금마저 없어 부도(不渡, default, 빚을 제때 갚지 못하는 것) 위기를 겪는 기업도 많아졌다. 가장 심각한 곳은 빚 규모가 큰 재벌(대기업, 공식용어로는 대기업집단)이었다. 거의 모든 재벌이 여러 은행에서 거금을 빌려놓고 이자도 못 갚는 자금난에 허덕였다. 결국 1997년 재벌 연쇄 부도 사태가 발생했다.
기업이 융자금을 갚지 못할 때 은행이 택하는 길을 대개 두 가지다. 첫 번째, 소생 가능성이 보이면 자금을 더 빌려줘서 당면한 자금난을 넘기고 사업을 정상화한 다음 빚을 갚을 수 있게 해준다. 은행 입장에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융자 원리금을 손해 보지 않고 계속 수익을 낼 수 있는 길이다. 하지만 더 지원해봤자 기대할 게 없어 보인다면? 추가 대출을 끊고 채권(債權, 빚을 돌려받을 권리) 행사에 나선다. 바로 두번째 길이다.
은행이 추가 융자를 해주면 기업이 소생할 수도 있지만, 빚 회수에 나서면 생존하기 어렵다. 다만 재벌 계열 대기업의 경우는 은행이 '가망 없다'고 판단하더라도 대뜸 목을 죄기 어렵다. 융자 규모가 큰 대기업 채권을 포기하면 은행까지 타격을 입고 생존에 위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 도산(倒産, bankruptcy)은 은행뿐 아니라 금융, 산업, 고용을 포함해서 국민경제에 미치는 악영향도 크다. 일이 커지면 사태를 미리 막지 못한 정부와 집권당에 국민의 비난이 몰려 정권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당시 한국 재벌은 정부를 업고 사는 이치를 잘 이용했다. 자금난과 도산 위기에 부딪혔는데 은행이 자금 지원을 꺼리면 여당 정치인과 정부 관료 등에게 줄을 댔다. 부패한 정치권력과 거래해 정부 보증과 특혜 은행 대출을 받아내면서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키웠다. '우리가 망하면 은행, 예금자, 금융 질서, 나라 경제에 큰 혼란과 손해가 생기고 정부와 정치인에 큰 부담이 걸릴 테니 결국 자금을 지원해 살려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계산으로 배를 내밀며 사업을 했다. 실제로 정부가 은행을 동원해 자금 지원을 해주는 방법으로 위기에 빠진 대기업을 구제한 예가 많다. 한국은행까지 동원해 자금 지원을 해준 예도 있다.
1997년 당시에도 경영위기에 빠진 재벌이 몇몇 정도였다면 정부가 은행 지원을 주선하고 뒷감당을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당시에는 자금 위기에 몰린 재벌이 한둘이 아니어서 한두 군데 불 끄기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다. 정부도 대책이 없다는 사실을 시장이 알게 되자 금융가는 각자도생(各自圖生) 판국이 됐다. 은행은 기업 대출을 거절하기 시작했고 재벌은 맥없이 무너졌다. 먼저 1997년 1월 한보그룹이 거액 빚을 갚지 못하고 도산했다. 이어 삼미, 기아, 대농, 해태, 진로, 쌍방울, 뉴코아, 한신공영 등 내로라하던 30대 재벌 중 절반이 해를 넘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쓰러진 재벌 기업으로부터 거액 융자금을 떼인 은행도 줄지어 문을 닫았다. 대기업과 금융기관이 줄도산하면서 받을 돈을 떼여 망한 중소 사업자, 졸지에 일자리를 잃은 실업자가 양산됐다.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기업과 금융기관의 대외 신용은 바닥을 쳤고, 심각한 불황이 한국 경제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