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녀의 딸 2
난데없이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순식간에 ‘번쩍’하고 번개가 쳤다. 뒤이어 ‘콰르릉’ 천둥까지 몰아치는 게 예사롭지 않았다. 세찬 바람에 굵은 빗방울마저 떨어졌다. 누군가 “이무기다. 이무기.”라고 외치자, 줄지어 섰던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기 시작했다.
“담백 성, 집에 가자.”
“그래 호백아, 성아 손 꽉 잡아!”
호백이는 담백의 손을 잡고 뛰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순간 아픈 것도 잊은 채 호기심이 발동한 호백이 뒤돌아보았다. 거대한 바당속 괴물체가 “크아앙” 괴성을 질렀다. 호백이는 “성아”를 외치며 담백의 품을 파고들었다. 갑자기 호백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성, 어멍과 강백 성은?”
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찾아 나설 수도 없었다. 금방이라도 이무기가 입을 쩍 벌리고 달려올 것만 같았다. 어쩔 수 없이 호백이는 담백의 손을 잡고 정신없이 내달렸다. 집에 도착한 호백이는 참았던 울음을 왈칵 쏟았다. 다행히 얼마 안 있어 어멍과 강백이 돌아왔다.
이무기 출현 이후 종달리에는 줄기차게 비가 내렸다. 호백이는 어멍에게 들은 이무기 이야기가 떠올랐다.
‘뱀이 커서 구렁이가 되고 구렁이가 물속에서 오백 년을 살면 이무기가 된다. 오백 년 동안 물속에서 수행하고 여의주를 얻으면 천 년 만에 이무기가 용이 된다. 천 년의 기다림 끝에 이무기가 용틀임을 하고 승천하려고 몸을 띄우려는 찰나 한 해녀가 이무기를 봤다. 당황한 잠녀는 ‘용이 승천한다’ 꽥 소리를 질렀고, 놀란 이무기는 바당에 떨어졌다. 한순간에 천 년의 꿈이 사라진 이무기는 분을 참지 못해 천둥 번개와 비를 뿌려 어부를 죽이거나 해녀들이 바다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안개를 만들었다. 생활이 어려워진 사람들은 급기야 승천을 막은 잠녀가 문제라며 여자를 바치는 인신공양을 제안했다. 이상한 일은 이무기의 승천을 막은 잠녀를 본 사람이 없다.’
이무기의 포효는 연일 계속되었고 천둥 번개를 동반했다. 공포에 쌓인 주민들은 집 밖에 나서지 못했다. 가까운 이웃끼리 모여 숙덕거릴 뿐이었다. 영등제 중에 이런 일이 발생한 건 분명 부정 탔다는 둥, 제에 올린 제물을 바당에 뿌리는 지드림 중에 이무기가 나타난 건 용왕님이 우리 정성을 받지 않은 거라는 둥, 누군가 이무기를 노엽게 만들었다는 둥, 심방 좌씨의 영험이 떨어진 증거라는 말까지 떠돌았다. 누구도 이무기 출현 이유를 알거나 설명할 수 없었지만, 서로를 향한 불신은 깊어만 갔다. 밭일을 하거나 바당에 나가지도 못한 채 종달리는 온통 적막강산이었다.
이장이 조용히 마을회의를 열었다. 더 이상 주민들의 불신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다들 어렵게 나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우애 좋은 종달리에 불신이 깊어가는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서로 떨어져 있으면 공포만 더하고, 자꾸 모여야 좋은 생각도 내고 해결 방안도 나올 것 같아 모이시라 했습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우리 마을에 온 이무기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계속 이러고 살 수 없잖습니까? 종달리를 위해서 무슨 말씀이라도 해주십시오.”
이장이 말문을 열었다.
“이장님, 말 한번 잘하셨습니다. 일하던 사람이 집에만 있으려니 몸이 근질근질해 죽겠습니다.”
잠녀 중 한 명이 말했다.
“분명 이번에도 이무기의 승천을 막은 잠녀가 있지 싶어요. 그 사람을 바치면 이무기 화도 풀어져서 마을을 떠나겠지요. 정말 이러다 배 한번 못 뜨고 다 죽습니다.”
선주(船主)가 심각성을 경고했다.
“이무기 화를 풀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죠. 마을이 다 죽게 생겼는데, 뭔들 못합니까?”
여기저기서 어부들이 맞장구를 쳤다.
“선주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합니까? 이무기가 왜 나타났는지도 모르는 판에 사람부터 바치자니. 이런 해괴한 말이 어딨습니까?”
대상군인 어멍이 목소리를 높였다.
“저도 고만덕 성 말에 동감이요.”
경산 아즈망과 잠녀 삼촌들은 ‘사람을 바치자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분개했다. 마을회의는 서로의 감정만 상한 채 끝나버렸다.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어멍은 분노했다.
“탐라에 험한 물질하는 여자 없으면 가정이 돌아가기를 해? 마을이 돌아갈 거야? 이무기가 울부짖는 게 잠녀 탓이라니? 설사 그렇대도 같이 살 생각을 해야지. ‘너 죽고 나 살자’는 못된 심보는 어디서 배웠대?”
담백도 분통이 터졌다.
“어떻게 사람 바치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죠? 삼춘들한테 실망했어. 남을 죽여야 내가 사는 곳이 우리 마을이라니 정말 무서워요.”
가만히 듣고 있던 강백도 말을 이었다.
“담백이 말이 백번 맞아. 이무기가 나타났을 때 정말 아수라장이었어. 놀라서 기절한 할망, 무서워 발이 안 떨어진다며 우는 아이, 도망가다 신발 한 짝을 잃었다며 찾는 사람, 무엇보다 제장을 정리하느라 정신없었어. 심방과 어멍, 경산 아즈망 등 잠녀들이 다 도왔지. 그때 선주랑 어부들은 안 보였어. 그래놓고 이제 어려워지니까 여자만 사지로 내몰아라. 어멍, 이번 일 잠녀회에서 얘기해 봐요.”
“나도 그럴 작정이야. 내일 심방 좌씨와 의논한 후에 잠녀회에서 지혜를 모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