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천 구간 순례자는 이래 내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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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수첩 1 서울과천구간.hwp
순례자 수첩 1. 서울-과천 구간
1.1 순례구간
- 1구간(08:00~12:00)
-- 충무공 동상-우포도청 터-충무공 생가터-동작대교- 동작역
-동재기 나루터 *한강둔치에서 점심식사(힘든 분은 중간에 귀가)
- 2구간(13:30~17:00)
-- 동작역-서초천-방배동-사당역-남태령-삼남길-과천역
1.2 난중일기 원문 읽기
충무공이 백의종군하는 정유년4월 기사를 보자. 한자 음독과 해석이 있으므로 자습할 수 있을 것이다.
初一日辛酉。晴。得出圓門。到南門外尹生侃奴家。則菶,芬及蔚與士行,遠卿同坐一室。話久.尹知事自新來慰。備邊郞李純智來見。知事歸。夕食後。佩酒更來。耆獻亦至。李令公純信佩壺又來。同醉致懇。領台鄭判府事琢, 沈判書喜壽,金二相命元,李參判廷馨,盧大憲稷,崔同知遠,郭同知嶸。送人問安。(초일일신유。청。득출원문。도남문외윤생간노가。즉봉,분급울여사행,원경동좌일실。화구.윤지사자신래위。비변랑리순지래견。지사귀。석식후。패주경래。기헌역지。리령공순신패호우래。동취치간。령태정판부사탁, 침판서희수,김이상명원,리참판정형,로대헌직,최동지원,곽동지영。송인문안。)
4월 1일. 맑다. 옥문을 나왔다. 남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 이르렀다. 조카 봉과 분, 아들 울, 윤 사행, 윤 원경과 더불어 한 방에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 했다. 곧 이어 지사 윤자신이 찾아와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도 와서 보았다. 울적한 마음을 이기기 어려웠다. 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을 먹고 나서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윤기현도 왔다. 옛 정으로 술을 권하며 위로해서 물리칠 수가 없어 억지로 술을 마시고 취했다. 이순신(李純信)도 술병을 차고 와서 같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의정, 판부사 정탁, 판서 심희수, 찬성 김명원, 참판 이정형, 대사헌 노직, 그리고 동지 최원과 곽영 등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했다. 취하여 땀이 몸에 배었다.
初二日壬戌。雨雨終日。與諸姪話方業。進饌甚豐。(초이일임술。우우종일。여제질화방업。진찬심풍。)
4월 2일. 종일 비오다. 여러 조카들과 이야기했다. 방업이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왔다.
初三日癸亥。晴。早登南程。金吾郞李士贇,書吏李壽永,羅將韓彦香。先到水原府。余則秣馬于仁德院。暮投水原。愼伏龍偶到。見吾行。備酒慰之。府使柳永健出見。(초삼일계해。청。조등남정。금오랑리사윤,서리리수영,라장한언향。선도수원부。여즉말마우인덕원。모투수원。신복룡우도。견오행。비주위지。부사류영건출견。)
4월 3일. 맑다. 일찍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금오랑 이사윤, 서리 이수영, 나장 한언향은 먼저 수원부에 이르렀다. 나는 인덕원에서 말을 먹이고 저물어서 수원에 들어가니, 신복룡이 우연히 수원에 왔다가 내 지나가는 것을 보고는 술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나를 위로했다. 수원부사 유영건이 나와서 봤다.
1.3 안내도
1.4 역사적 사실
가. 이순신 장군의 약력
장군은 1545년3월8일 (양 4월28일) 서울 건천동(충무로 명보극장 근처)에서 태어났다. 충무로라는 명칭은 이를 기념하여 해방 후(1946.10.1.)에 부여했다. 일제 때는 혼마치(本町通)였다. 1985년에는 생가 근처(인현동 1가)에 표지석도 세웠다. 서울시는 그 일대 보도를 화강암으로 깔고 10미터 정도의 간격으로 거북선과 해전 날짜를 새겨 놓았다.
충무공의 형제는 형 둘, 남동생 하나인데 어릴 적에 유성룡 집안과 형제간의 교류가 많았다. 공의 나이 8세를 전후하여 가족은 어머니의 고향인 아산으로 이사했다. 왜 낙향했는지에 대해서도 아직 잘 모른다. 공의 자식은 정실의 3남1녀와 측실의 2남이다.
28세에 무과시험 중 낙마하여 다치고 4년 만에 합격하여 1576년 동구비보 권관(종9품), 1579년2월 훈련원 봉사, 10월 충청병사 군관에 부임했다. 장군은 1580년7월 발포 수군만호(종4품)가 되었으나 1582년 1월 발포 수군만호에서 파직되었다. 이 파직은 훈련원 시절 서익의 불법적인 승진 요구를 공이 거절한 보복이라는 설이 있다. 서익이 군기경차관으로 발포에 내려와 보복했다는 것이다. 군기경차관은 임시로 지방에 내려가 병기 군량의 손실을 조사하고 민정을 살피는 벼슬이다.
1582년5월 훈련원봉사로 복직되어 1583년7월에 함경도 남병사의 군관이 되었다. 그 후 경원군의 건원보 권관으로 전보되었는데 10월에 호족 울지내를 사로잡았다. 그 공으로 11월에 훈련원 참군으로 승진했다. 그해 11월 15일에 부친 별세로 귀향해 3년간 거상휴직(居喪休職)했다. 이즈음 북병사가 이순신의 작전계획을 보고받지 못했음을 이유로 상소하여 상이 취소되고 원대로 발령받았으나 공은 아산에서 거상하며 머물렀다.
1586년1월 사복시 주부가 되었다가 16일 후에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전보되었다. 곧 녹둔도 둔전관도 겸했다.
1587년8월에 러시아 국경지대인 녹둔도에서 추장 맛니응개 등 적장 3인의 머리를 베고 포로 60여명을 구출했다. 그러나 9월 절도사 이일의 무고로 파직되어 첫 번째 백의종군을 했다. 이 파직 사건도 이일이 전투 피해의 책임을 장군에게 돌리고 상소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순찰사 정언신의 변호로 장군은 무죄로 판명되었으나 백의종군은 계속되었다.
1588년1월 북병사 이일은 종성부사 원균, 이순신, 이경록 등의 군사 400여명으로 시전부를 급습하여 330여명을 죽이고 말 30필, 소 20두의 전과를 올렸다. 당시 이순신과 이경록은 백의종군 상태이므로 직급이 ‘급제’였다. 급제란 과거에 급제했으나 관직이 없는 자를 말한다.
장군은 45세 때(1589년 2월) 전라순찰사 이광의 군관으로 발탁된 후 12월에 정읍현감(종6품)이 되었다. 1년쯤 지나 1591년2월12일에 전라좌수사에 부임했고 그 후 1년 만에 일본이 침입했다. 1592년 임진년은 조선개국 200주년 기념해로서 조정은 축하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던 때였다. 1592.7.17은 태조가 왕위에 오른 날이므로 건국기념일이 된다. 이날을 기념하여 전국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90세 노인에게 궤장을 하사하고 불꽃놀이도 펼칠 것이다.
이순신 일가는 1593년5월18에서 6월1일 사이의 어느 날에 아산에서 여수로 피난을 갔다. 순천도호부 여수 고음내란 마을이다. 여수에서 4년을 지내다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어 옥에 갇히고 백의종군하게 되자 1597년4월에 아산으로 귀향했다. 이순신 일가의 식솔은 형 희신(1535-87)의 처와 4남2녀, 요신(1542-80)의 처와 2남 1녀. 순신 부부와 3남 1녀, 동생 우신(여필) 부부와 2녀, 모친 등 직계 21명이고 측실과 3자녀, 그리고 부모, 형제, 그들의 부인과 자녀 등을 모시는 노비가 45명으로 합계 70명이다. 자식, 조카, 노비는 수시로 군역에 동원되었다. 순신은 아버지 정(1511-83), 큰형 희신이 사망한 1587년 이후에 실질적 가장으로서 사망한 두 형의 미망인과 자식들도 함께 부양해야 했다. 정읍현감에 임명되어 식솔들을 데리고 부임하니 친구가 남솔(濫率)이라는 비판을 받을까 염려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남솔은 고을 원이 부임 시 정한 수 이상의 식솔을 거느림을 말한다. 이순신은 그런 비난을 받아도 형님들의 자식을 거두어야할 처지이므로 하는 수 없다고 했다.
나. 이순신가계도
다. 임진년 한성 점령 당시의 상황
임진년 5월10일, 양력으로는 6월19일. 당시 서울에는 11만7천의 일본군이 집결해 ‘대휴식’에 들어갔다. 일본군은 여자 전리품을 갈구했다. 율곡 부인 노씨는 파주에 있었다. 부인은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의 묘에서 시묘하다가 율곡의 무덤까지 쫒아온 적에게 참살 당했다. 뛰어난 여류화가 율곡의 누님 이매창(李梅窓)은 강원도 안협으로 피난했으나 적이 덮치려 하자 벼랑에서 투신 자결했다. 같은 동네에 피난한 한음 이덕형 부인 이 씨는 영의정 이산해의 둘째 딸인데 그녀도 절벽에서 투신했다. 정숙한 여인은 두 남자를 섬기지 않는다(貞女不更二夫)는 조선 여성의 정조관념에 비추어보면 이 기록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남자들이 국방을 소홀히 하면 그의 아내와 누이와 딸이 적에게 당하는 법이다.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이매창이 절벽에서 투신하던 5월 초에 전라좌수영에서 이순신은 첫 번째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전투가 두려워 탈영한 황옥천을 체포하여 목을 베고 군중 앞에 높이 매어 달았다. 출동에 앞서 군사들의 사기를 바로잡기 위한 엄한 조치였다. 전쟁은 장난이 아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신중하라.”고 전군에 명을 내렸다. 여수를 새벽에 출발한 이순신 함대는 소비포와 당포에서 일박을 했다. 격군을 호령하여 사흘을 항해해 피곤한 이순신 함대는 거제도 옥포에서 왜선 50여 척을 만났다. 원균은 자기의 본진인 경상우수영에서 싸우지도 않고 도망해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한산도에서 단 한척의 전선을 타고 와 참전했다. 옥포 해전은 최초의 해전이며 임진왜란의 전황을 바꾸는 계기가 된 전투였다. 이 전투 이후로 일본 해군은 해상보급로를 확보하지 못하여 기나긴 육로를 방어하면서 보급해야 했다. 육상 보급로는 의병의 중요 공격목표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은 식량난으로 패전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