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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필과비평작가회의 원문보기 글쓴이: 남정언
[비평]
수필의 액체성과 이미지 - 2020년 신춘문예 당선 수필에 투영된 이미지 / 배귀선
1. 들어가며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소감으로 언급한 말이다. 이 말은 영화감독 마틴스코세이지의 어록으로 창의는 독창적이며 모든 예술의 근간이 된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더욱이 창의를 바탕으로 한 발견의 미학을 중요하게 여기는 문학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 같은 창의적 사고는 창조를 있게 하는 매개로써 그 사유가 관습적으로 고체화되지 않고 다분히 액체적이어야 할 것이다.
액체는 자유로이 이동하고 변화함으로써 유동성이라는 미래적 창의를 내재한다. 고체에 비해 형태의 변화를 내포하고 있는 액체는 유체로서 시간과 공간에 범주화되거나 하나의 형태로 묶이지 않는 특성이 있다. 액체를 이루고 있는 본질은 그대로이면서 이동과 변형을 거듭한다. 어떠한 장애물이 나타나면 에둘러 가고 상황에 따라서는 장애물을 수용하여 대상과 하나가 되기도 한다. 이때의 수용은 고체적 사유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전제한 아방가르드적 수용이다. 지난 연대 예술 사조의 흐름이 이러한 액체적 현상과 다르지 않을 것인바 현대 수필문학의 매커니즘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문학예술인 수필이 고체성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로써 본고에서 언급될 수필의 이미지 역시 다르지 않다. 이를테면 액체가 지형의 용기에 따라 그 모양이 변형되는 것처럼 이미지에 따라 수필의 문학성은 달리 층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문학에서 이미지는 ‘모방mimesis'의 개념으로 인식되다가 ‘표현’의 영역에 가까워진 근대를 거쳐 현대에 들어서 현상학적으로 접근한 학자는 가스통 바슐라르이다. 그는 이미지가 존재의 근원적 상상력에 닿아 있으며 상상에 의해 생성된 이미지는 인간 내면에 울림을 주게 되고 이로써 존재의 전환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는 문학작품을 통해 감동을 경험하는 순간 이전의 ‘나’와 다른 새로운 존재가 탄생한다는 의미로 문학의 근본적인 맥락에 닿아 있다. 그에 따르면 이미지를 생성하는 상상력은 독자성과 동시에 보편성도 가진다. 예컨대 인간 개개의 삶은 독자적이지만 문학작품 속에서 상상력을 통해 이미지로 구현된 개별성이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보편성을 가지게 된다. 바슐라르는 시론의 맥락으로 이미지의 현상학에 접근했지만 이러한 시적 이미지의 기능은 수필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예술은 새로움을 추구하는데 그것은 유동성을 띄기 때문이다. 수필문학 역시 현상에 대한 다양하고 가변적 새로움과 견자의 태도에 따른 이미지 구현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고는 수필의 액체적 입장을 견지하며 2020년 신춘문예 당선 수필에 투영된 이미지에 접근하고자 한다.
이러한 방법적 고찰의 이면에는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로서 개념이 정립된 1930년대가 놓여 있다. 이 시기 김진섭이 언급한 ‘무형식의 문학’ 이론과 김광섭의 ‘붓 가는 대로’ 쓴다는 수필이론이 발표되면서 수필에 대한 인식은 문학성 재고보다는 신변잡기에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물론 무형식의 ‘무’가 내포하는 의미를 자유로운 형식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고, ‘붓 가는 대로’의 어구를 낭만주의 화법으로 감정의 유로라 할 수도 있겠으나 두 이론은 수필의 문학성 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관련하여 2020년 신춘문예 당선 수필에 나타난 이미지에 주목했다. 신춘문예는 매년 연말 신문사에서 문학작품을 공모하여 신년 초에 당선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신인 작가의 등단을 알리는 제도이다. 이에 대한 찬반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장르를 불문하고 불거지는 신춘문예 심사자의 고체화된 자질을 비롯하여 응모자의 첨삭 대필, 부분 표절 등의 문제가 그것이다. 전통을 고수하자는 측과 제도의 개선을 주장하자는 측이 대립하기도 하고, 아예 신춘문예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 같은 논란 가운데서도 신춘문예는 지속적으로 실시되고 있으며 수필 부문 역시 당선작이 발표되고 있다. 따라서 본고의 주제에 부합하는 신춘문예 당선작 7편을 선하여 공간적 이미지와 주제의 조응, 성찰과 감각의 이미지 그리고 비유적 이미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는 신춘문예에 대한 긍정의 모색이자 수필의 문학성을 위한 분석과 비평일 것이다.
2. 공간적 이미지와 주제의 조응
수필에 드러난 공간적 이미지는 대부분 과거에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과거는 존재의 심연에 잠들어 있는 기억으로 개인에 따라 신화 같은 시간일 수 있다. 미르차아 엘리아데는 “이미지들이 원형으로 변형되고 신화화된 과거에 대한 향수를 고백”하는데, 여기서 “과거는 사라진 시간에 대한 회한 이외에도 수많은 다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며 낙원의 노스탤지어를 언급한다. 이는 바슐라르의 근원적 이미지에 닿아 있는 언술이기도 하다. “이미지들이 원형으로 변형”될 때 그 원형 archetype은 이미지와 상상력의 보편성 맥락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엘리아데가 이미지의 영속성 측면에서 접근한다면, 바슐라르는 독자적이면서 보편성을 지니는 상상력으로부터 이미지가 태어난다고 본다.
2020년 신춘문예 당선 수필에는 집의 이미지들이 드러난다. 집에는 “세계 안의 우리들의 구석”이라고 언급한 바슐라르식 명제의 안온함과 편안함 그리고 내밀함이 내포되어 있다. 이때의 구석은 요나적 공간으로서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원형적 이미지를 표출한다. 이른바 집이라는 공간은 개인의 경험을 담아내는 독자성과 함께 근원적 이미지로서 보편성도 가진다. 기하학 이상의 공간적 의미를 지니는 집의 양화적 이미지는 이처럼 모성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세월호 참극 때 수장된 아이들을 두고 “이제 집에 가자”라는 어머니의 단발성 절규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집이 거주의 공간으로서만이 아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집이라는 공간은 이러한 원형적 이미저리를 통해 보편성이 확보된다. 엘리아데가 제시한 낙원에의 희구 이미지 또한 텍스트 속에 제시된 집(공간)의 이미지들과 만난다. 상상을 배제한 채 언어를 기호로만 해석한다면 이러한 이미지의 기능에 따른 감동을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은 이상수의 <황동나비경첩>에 드러난 안방의 공간적 이미지이다.
친정 안방에 놓인 화초장은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왔다. 두 칸짜리 문판에 단아하게 매화가 그려져 있고 황동나비 세 마리가 돋을새김 되어있다. 위 칸엔 모시적삼을 비롯해 두루마기와 유건이 걸리고, 아래 칸엔 치마저고리며 처녀 때 손수 수놓은 베갯잇이 포개져 있다.
(……)
기와가루를 가져와 나비의 날개를 닦는다. 세 마리 황동나비는 여전히 단단하게 문짝을 붙잡고 있었다. 녹슬어 있던 황동나비가 날갯짓을 한다. 매화나무 위에 앉았다간 팔랑팔랑 안방을 날아다닌다. 나비가 날아간 자리마다 매화향이 가득 퍼진다.
-이상수, <황동 나비경첩>(영주일보)에서
친정집 안방에 있는 화초장의 황동나비문양 경첩을 매개로 어머니와 작가 자신의 삶을 겹쳐놓은 이 작품에는 공간과 시간, 모성의 이미지가 배어있다. 아버지가 사업실패로 힘겨웠을 때 화초장의 경첩처럼 아버지의 곁을 지켜준 것은 어머니이고, 작가의 남편이 실직한 후 자신이 경제활동을 하면서 집안에 소홀했을 때 남편이 자신을 기다려준 것도 경첩과 같았다는 데에 의미를 부여한다. 경첩은 화초장이 화초장으로 기능하게 하는 부속품으로 그것은 표면에 존재 의미가 드러나지 않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부속이다. 대상을 있게 하므로 존재 그 자체의 의미를 지닌다. 경첩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의 이미지를 통해 작품의 내적 주제를 부각하는 동시에 가족관계를 넘어 모든 관계의 삶으로 의미망을 확장한다. 이처럼 이미지는 대상을 형상화 또는 의미화함으로써 주제를 확장하기도 하고, 이미지 너머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이때의 이미지는 미문과 묘사에 따른 수사적 기능에만 머물지 않는다.
집의 안방에 위치하는 화초장은 어머니(여성)의 공간을 상징한다. 화초장의 “위 칸엔 모시적삼을 비롯해 두루마기와 유건이 걸리고, 아래칸엔 치마저고리며 처녀 때 손수 수놓은 베갯잇이 포개져 있다”는 문장은 엘리아데의 “과거에 대한 향수”가 머무는 곳이다. 작가의 어머니에게 화초장은 지난 시간의 흔적이 묻어 있는 대상물이다. 때문에 어머니는 힘겨울 때 화초장에 배인 추억을 소환하고 그 추억에 의지한다. 아버지와 고성이 오간 날 새벽 화초장을 문지르던 어머니가 “마치 어떤 의식을 치르는 사람 같아 보여 엄숙하기까지” 했다는 작가의 기억 속 어머니의 행위 이면에는 가족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어머니 자신을 추스르는 의미도 생성하면서 이미지들이 의미의 다발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화초장에 어린 어머니의 향수이며 가족을 위한 미래의 염원이기도 하다. 때문에 어머니에게 화초장은 한갓 무정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머문 공간 이미지의 유정물로서 의미를 지닌다. 이로써 과거를 회상하던 고백적 자아가 화초장을 문지르면 쓸쓸함이 묻어나고 어머니의 지난한 시간이 아릿하게 전해져오는 것이다. 이를테면 화초장은 바슐라르의 내밀성과 엘리아데의 시간의 영속성이 있는 공간으로서 작가의 어머니가 고난을 이겨내는 매개이다. 이러한 매개적 장치를 통한 결말의 이미지가 눈에 띈다. 기와가루로 “나비의 날개를 닦”을 때 황동나비는 여전히 화초장의 문짝을 잡고 있다는 데서 굳건한 가족애가 겹쳐지며, 그 나비가 날갯짓을 하고 “안방을 날아다”니자 “나비가 날아간 자리마다 매화향이 가득 퍼진다”는 상상적 결말은 희망의 이미지로 낙원의 공간을 염원한다. 중심제재로써 화초장과 그 부속인 경첩이 지닌 이미지가 이 수필의 주제구현에 기여하고 있다.
다음 제은숙의 <불씨>는 부엌(아궁이)의 이미지가 두드러진다.
장작이 탄다. 마른나무가 몸을 뒤채며 터지고 끊어진다. 치솟을 땐 다가갈 수도 없게 뜨거웠던 것이 잦아들면 은은한 열기와 함께 옆자리를 내어준다. 숯불은 불길을 제 속에 불러들여 스스로 발광한다.
(………)
아궁이는 겨우내 타올랐다. 어머니는 밥을 짓고 남은 숯불에 생선을 구워 상에 올렸다. 객지에 있는 아버지의 고봉밥은 아랫목에 묻어 두었다. 부엌 한편에는 자식들 입에 들어갈 끼니만큼 땔감이 쌓인다. 밤새 방을 덥힐 온기도 쟁여 놓는다. 어머니는 하루하루 되살아나는 불씨였고 우리 삼 남매의 입은 아궁이였다.
-제은숙, <불씨> (전남매일)에서
이 수필은 불의 이미지에 모성애를 겹쳐서 그려준다. 마른나무가 탈 때 “몸을 뒤채며 터지고 끊어”지는 형상이다가 불기가 어느 정도 잦아들면 “은은한 열기와 함께 옆자리를 내어”주고 숯불이 되면 “불길을 제 속에 불러들여 스스로” 빛을 낸다. 이러한 불의 이미지는 아궁이 앞에서 불을 때는 작가의 어머니로 이어진다. 고등어잡이 배를 탔던 아버지를 대신해 땔감을 구하는 일부터 자식들의 입을 위해 한시도 불싸를 꺼뜨릴 수 없었던 어머니는 “자식들 입에 들어갈 끼니만큼” 땔감을 쌓아 “밤새 방을 덥힐 온기도 쟁여 놓는다.” 어머니가 부엌 한쪽에 쟁여 놓은 것은 땔감일 테지만 온기를 쟁였다고 표현함으로써 낯선 이미지를 추동한다. “하루하루 되살아나는 불씨”가 될 수밖에 없는 어머니의 삶을 관념적 설명이 아닌 이미지를 통해 보여준다. 따라서 “삼남매의 입은 아궁이”였다는 회상을 통해 불씨와 같은 어머니의 삶으로 연결된다.
모성애라는 관념적 주제를 불씨와 같은 어머니의 생으로 환원한 이 작품에서는 부엌의 이미지가 두드러진다. 부엌은 모성을 상징하는 공간이기에 작품 속 어머니는 보편적인 어머니상으로 투영되며, 내 어머니가 아닌 모두의 어머니로 읽히면서 주제의 공감성을 확보한다.
다음 우광미의 <댓돌>에서는 머묾과 정화의 공간으로서의 댓돌의 이미지가 드러난다.
그곳은 성전의 들머리다. 저마다 순례길 같은 일상에서 지고 온 남루들을 벗어놓는다. 하루치의 자잘한 삶의 편린들을 정화시킨 후 비로소 맨발을 방으로 들인다.
(……)
시간을 거슬러 표정들이 살아나고, 귀 기울이면 속삭임이 들려온다. 모 닳은 댓돌은 우리집 호적등본이다. 칸이 부족해 너덜너덜한 우리 삶의 이야기가 깨알처럼 씌어 있다.
-우광미, <댓돌>(경남신문)에서
“그곳은 성전의 들머리다.”라는 도입 문장의 이미지는 이후 일어날 일들에 대한 상당한 의미망을 암시하고 있다. 작가에게 “댓돌”은 삶의 고단함을 내려놓고 쉼의 공간으로 가기 위한 의식이 머무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안과 밖을 규정하는 또는 이어주는 곳으로 여기와 저기의 분별이 심화되는 곳이자 무화시키는 공간이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기 위한 정화(맨발)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또한 본문에 언급된 “맨발”은 존재의 고단한 삶을 은유하기도 하고 관습적 상징으로써 무소유를 암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의 무소유는 거창한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 집이라는 이미지가 주는 안온함과 쉼을 위해 댓돌이라는 매개 공간에서 저곳의 일상을 한 순간이나마 놓아야 한다는, 작지만 큰 의미가 작용한다. 이처럼 댓돌은 “삶의 편린들을 정화”시키는 곳이기에 ‘맨발’이라는 어휘의 차용은 댓돌의 이미지를 도드라지게 하며 주제의 각인효과를 얻는다. 결국 이 작품에서 집은 가족의 거처로서 아늑함과 편안함을 상징하는 공간이자 성전과 같은 이미지로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댓돌의 이미지가 우직함과 강인함인 반면 작가의 주관적 이미지는 집 밖에 존재하는 대상물로서 집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정화의 기능을 담은 공간이다. 작가에게 “댓돌은 밤이 되면 도량의 정례석처럼 정靜”한 공간이기도 하고 부모님의 고단한 “숨소리마저 거두어 달빛에 씻어내는 정화수 막사발” 같은 곳이기도 하다. 나아가 “모 닮은 댓돌은 우리집 호적등본이”며 “우리 삶의 이야기가 깨알처럼 씌어 있”는 곳으로 다가온다. 이는 기억을 간직하는 공간이 될 수 있기에 이미지의 독자성과 객관성을 담보하는 부분으로써 이 같은 작가의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댓돌이라는 무정물은 유정물로 전환된다. 어머니와 댓돌의 관계, 작가와 댓돌의 유정함, 할아버지와 댓돌에 얹힌 고요함, 아버지의 흙고무신이 가지런히 놓인 댓돌의 이미지를 통해 가족의 의미와 집의 이미지를 되새기게 하여, 작품 속 자아는 물론 누구든 댓돌에 드리워진 공간적 이미지를 통해 집이라는 성전으로의 귀의를 꿈꾸게 한다.
이상수의 <황동나비경첩>과 제은숙의 <불씨>가 집안의 이미지를 그려주었다면 우광미의 <댓돌>은 집 밖과 집안을 연결해주는 이미지로 형상화된 작품이다.
3. 성찰과 감각의 이미지
흔히 수필을 성찰의 문학이라도 한다. 오감을 통해 인지하는 감각적 기능을 비판하며 이성을 중시한 데카르트적 성찰이 학문의 확립을 위한 회의에서 출발한다면 수필 문학의 성찰은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 반성하는 행위로써 과거를 돌이켜보며 자아를 탐색하는 과정이다. 마음수련이라든가 참선, 명상 등을 통해 자아를 돌아보는 성찰은 종교에서 파생된 것으로 일반에서 행해지기도 한다. 이러한 성찰의 이면은 깨달음으로 이어지는데 깨달음은 돈오돈수처럼 직관적으로 오기도 하고 돈오점수처럼 점진적으로 오기도 한다. 철학적 성찰을 드러내는 것이든 종교적 신념을 드러내는 것이든 성찰은 수필문학의 본질이다. 이러한 본질을 토대로 내면 성찰의 메시지를 오감을 동원하여 감각적 표현으로 이미지화할 때 수필의 미학적 기능은 물론 수필의 순기능인 성찰의 깊이를 더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감각적 표현이란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그리고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지는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한다. 그렇지만 수필의 성격상 관념과 추상을 배제할 수는 없다. 상황에 따라 사건을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고 장면을 형상화하거나 감각적으로 이미지화해 보여주어야 할 때도 있다. 건조한 관념과 추상이 부드러운 이미지와 용융된다면 수필의 의미가 깊어질 것이다.
수필에서 체험을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문학은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지금을 위한 어제이고 미래를 전제한 과거이듯 시간과 공간을 불문하고 체험은 문학의 자장을 있게 하는 기제이다. 체험이 일차적 과정이라면 감각은 그 체험을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이차적 행위로써 감각은 대상에 대한 정서와 인지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같은 대상을 두고도 세계관이나 가치관에 따라 인식이 달리 적용되는 이치와 다르지 않음이다.
새를 볼 때는 그냥 본다. 무슨 대단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고 잠시 생각을 멈추고 오롯이 새 자체에 집중한다. 새를 보기 전에 애써 걱정이나 고민을 내려놓을 필요는 없다. 뭘 하려거나 억지로 누군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눈앞의 새를 보면 된다. 숨죽인 채 새의 모든 행동을 주시하다보면 어느새 나는 비워져 있다. 새를 보는 동안 나는 서서히 가벼워진다. 비어 있을 때 나 자신은 아주 가볍고 가벼운 것은 늘 옳다. 나는 끓어 넘치는 것을 혐오한다. 넘치는 것은 모자란 만 못하고 하등 무용하다.
-조혜은, <새>(한국경제신문)에서
이 작품은 새를 응시하는 데서 성찰의 이미지가 태동된다. 새를 볼 수 없을 땐 대상을 새의 특징에 빗대어 상상하기도 한다. 작가의 옆자리에 앉은 후배의 모습에서 백문조를 상상하기도 하고 까마귀를 닮은 세탁소 주인, 동고비를 닮았다는 아르바이트생 등 작가의 상상은 새처럼 자유롭게 수필의 공간을 날아다닌다. 이러한 상상은 성찰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며 유기적으로 작용한다.
“새를 볼 때는 그냥” 보는 데에만 전념하는데 거기에 “무슨 대단한 방법이” 있는 게 아니라 “오롯이 새 자체에 집중”한다. “숨죽인 채 새의 모든 행동을 주시”한다는 자아의 고백적 문장 속에는 많은 상념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 작가가 처음 새를 보기 시작한 것은 열 살 때로 자아가 “부서지기 쉬웠을 때”라고 고백한다. 잠시 부모와 헤어져 있었던 그 시기 새 한 마리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 새를 통해 위안을 받은 후부터 새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러한 응시는 현재까지 이어져 작가의 세속 탈출 방법이자 성찰의 기제가 된다. 그러나 작가는 “새를 보기 전에 애써 걱정이나 고민을 내려놓을 필요”도 없고 “무러 하려거나 억지로 누군가 되지 않아도 괜찮”으며 오로지 새를 보는 행위에 집중한다고 고백함으로써 무위의 유위 혹은 무의미의 의미와 같은 사유 방식을 취한다.
가벼움을 예찬하던 자아가 끓어 넘치는 것을 “혐오한다”는 다소 극단적인 어휘를 선택하는데, 이는 “넘치는 것은 모자란 만 못하고 하등 무용하다.”는 성찰의 이미지를 끌어내기 위한 전제 문장인 셈이다. 유가의 단정적인 어투에서 느껴지는 언어의 감촉은 뚜렷한 자아 성찰의 이미지를 생성하며, 새를 바라보는 비움의 성찰 이면에는 영혼의 비상을 꿈꾸는 자아가 얼비친다.
그 자아는 이전의 자아가 아닌 새로운 자아로서 존재 전환의 문학적 감동과 같은 비움의 채움을 경험하게 된 자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미지의 근원은 비어 있기 때문에 날 수 있는 새의 뼈에 닿아 있고, 그러한 새를 바라보는 것에서 욕망, 욕심 등 상념들이 삭는다. 때문에 작품 속 자아가 새를 보는 일은 “저장이 아니라 비움”이라고 언술함으로써 시각적 성찰을 통한 감각의 이미지화로 시각의 지각知覺화를 추동한다. 오감 중에서 시각이야말로 감각의 시초라 할 수 있다. 보이는 것을 감각적으로 묘사하는 방법은 문학의 원료이기 때문이다. 시각의 성찰을 통해 가벼움의 미학을 드러내고 있는 이 작품은 근원적 이미지를 구현하고 있다.
우광미의 <댓돌>에 나타난 감각적 이미지와 성찰을 살펴보자.
해가 설핏해지자 산 그림자가 마당에 내려앉는다. 감나무 끝에 서성이던 바람이 댓돌 위로 먼 기억을 풍경들을 부려놓고 간다. 우듬지 까치 소리가 여명을 깨울 때부터 들리던 자분자분한 어머니 발걸음 소리. 뻐꾸기 울고 스무날만 지나면 풋보리를 먹을 수 있다던 외할머니 말씀이 문득문득 생각난다던 어머니. 보릿고개를 넘어가며 했다던 그 말이 어려움을 이겨내는 주문인 줄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광미, <댓돌>(경남신문)에서
“해가 설핏해”질 무렵 “산 그림자가 마당에 내려앉”으면 “감나무 끝에 서성이던 바람이 댓돌 위로 먼 기억의 풍경들을 부려놓고 간다.” 이때 기억의 소리들이 실타래처럼 풀려나온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기억의 풍경”을 끌어오는 주체는 작가가 아니라 바람이다. 기실 감나무 끝에서 서성이던 바람은 곧 작가의 심리가 반영된 문맥으로써 그렇게 바람이 작가의 마음처럼 가지 끝에서 서성였기에 과거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감각의 발화를 통해 기억 속으로 들어가면 “까치 소리”에서 “어머니의 발걸음 소리”로, 다시 “뻐꾸기 울고 스무날”이 지나면 “풋보리를 먹을 수 있다던 할머니 말씀”으로 전이되면서 기억의 풍경이 심화된다. 결국 댓돌을 중심으로 청각적 이미지를 그려주는 감각의 끄트머리에는 가난한 시절이 소리의 결을 따라 겹쳐진다. 그것은 ‘풋보리’라는 어휘에 의해서 유추되는 시공간이며 청각적 심상이다. 한편 작품 속 자아는 댓돌을 바라보며 성찰의 이미지를 생성한다. 우광미의 시각에서 댓돌에 스민 시간과 공간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무감한 댓돌을 통해 삶의 유정함과 신성함을 작품 속에 용융한 감각적 성찰의 이미지가 흥미롭다.
다음은 김애자의 <망월굿>에 드러난 시각과 청각의 이미지이다.
나무에 달아놓은 액막이 부적과 소원들도 활활 타 올라간다. 잡아먹을 듯 널름거리는 불의 혓바닥을 빠져나온 불똥이 탁탁 소리를 지른다. 마치 마음속에 쟁여둔 사악함을 몰아내라고 죽비를 치며 호령하는 것 같다. 반백년이 지나는 동안 불뚝한 뱃가죽만큼 쌓아 둔 분노와 욕심의 찌꺼기를 서둘러 내놓았다. -김애자, <망월굿>(전북일보)에서
대보름날 달집태우기를 바라보는 작품 속 자아는 불빛의 형상을 보며 “마음 속에 쟁여둔 사악함을 몰아내라는” 죽비소리로 듣는다. 시각적 이미지인 불빛을 청각적 심상인 죽비소리로 의미화한 데서 공감각의 이미지도 엿보인다. 죽비는 선가에서 수행자들의 경책 도구로 쓰이는 것인데 작가는 불빛을 “분노의 욕심”을 내려놓으라는 성찰의 죽비로 치환한다. 불빛 죽비가 “불뚝한 뱃가죽만큼 쌓아”두고 쟁여 둔 마음 “찌꺼기”를 내놓도록 한다.
조혜은의 작품이 “새”를 통해 가벼움의 미학을 성찰해냈다면 우광미는 ‘댓돌’이라는 무정물을 통해 겸허한 삶을 통찰한다. 그 과정에서 드러난 청각적 심상이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과 부합되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실루엣으로 둘러쳐진다. 김애자의 <망월굿>에는 공감각적 이미지가 나타나는데, 성찰을 담고 있으며 이러한 이미지는 주제를 풍부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이처럼 선정된 각 텍스트의 이미지는 작품에서 새로움을 향한 액체성을 띠며, 작품의 의미화에 기여한다.
4. 비유적 이미지
비유는 서로 다른 사물이나 관념들 간의 유사성에 대한 지각 행위로써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풍부하게 할 수 있고,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으며 어떤 유무형의 이미지를 구현하기도 한다. 이때 구현된 이미지는 의미를 확장하거나 축소하기도 한다. 이처럼 비유는 비유 그 자체로 존재하기보다는 이미지의 구현이라는 궁극의 목표를 향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지는 비유가 없이도 가능하다는 데서 비유는 표피적이고 이미지는 근원적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말하자면 비유가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대상이나 사물 또는 주제를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나타내기 위해 다른 대상을 끌어들여 비교하는 것이라면 이미지는 원초적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이미지를 생성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집’의 이미지는 이미지 그 자체로 모성의 안락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미지의 근원성 때문으로 이미지는 비유보다 원초적이고 본질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문학에서 비유는 이미지 구현에 공헌하는 바가 크다. 비유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삶 속에서 널리 유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문학의 공간에서도 비유의 활용은 화룡점정,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하겠다. 예를 들어 형태나 모양의 유사성과 내용이나 성질의 유사성 등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비유는 그 자체 기능에 그치지 않고 이미지를 생성한다. 이때 비유적 이미지는 감각적 이미지보다 통합적이고 포괄적인 성격을 띤다. 그것은 비유가 때로는 이질적인 것과 모순되는 것, 충돌하는 요소들을 한 문맥 속에 수용하는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유적 이미지가 2020년 신춘문예 당선 수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봄가을 추수와 명절에만 왔던 엄마가 떠나고 나면 좁고 어둑신한 다락으로 숨어들었다. 어둠과 햇살이 반반 섞인 천장 낮은 그곳은 나의 유일한 위안처였다. 엄마 보고 싶은 마음을 인형처럼 껴안고 잠이 들었다.
아버지가 일거리를 찾아 도시 변두리를 헤맬 동안 엄마는 내 키만큼 쟁인 마늘 접을 머리에 이고 나가 난전 한 귀퉁이에 부렸다. 때글때글한 햇볕을 헤진 머릿수건 하나로 받아내며 마늘 접이 줄어들길 기다렸다. 꼬챙이처럼 말라가는 당신 몸에선 늘 마늘냄새가 났다. 네 명의 가족이 살기엔 단칸방은 구겨진 종이상자처럼 좁기만 했다.
-서정애, <붉은사슴이 사는 동굴>(제주신보)에서
이 작품에서는 “어둠과 햇살이 반반 섞인 천장 낮은 ”할머니의 다락이 클로즈업된다. “엄마 보고 싶은 마음을 인형처럼 껴안고” 잠들었던 다락의 유년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비유적 이미지가 드러난다.
“마음”을 껴안고 잘 수는 없다. 실제로 껴안은 것은 인형이다. 만약 ‘엄마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인형을 껴안고 잤다’라고 서술했다면 그 의미의 확산은 협소할 수밖에 없다. 무형의 “마음”을 유형화함으로써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 한층 깊어지는 효과를 얻었다. 또한 “때글때글한 햇볕을 헤진 머릿수건 하나로 받아내며 마늘 접이 줄어들길 기다”린다는 문장에서 햇볕의 이미지는 반어적이다. 햇볕의 원초적 의미는 따스함이라는 긍정의 의미를 지니는데 이 작품 속에서의 햇볕은 굵고 단단하다는 의미의 “때글때글”이라는 형용에 의해 일반적인 햇볕의 이미지가 아니라 어머니의 고단한 삶으로 전치된다. 더하여 “꼬챙이처럼 말라가는 당신(어머니)”이라는 직유와 “단칸방은 구겨진 종이상자처럼 좁기만 했다”의 직유는 작가의 어려운 시절을 극적으로 이미지화한다. 나아가 이 작품의 공간적인 배경인 암실, 유년의 다락방, 도시의 반지하 방, 나이 들어 홀로 남게 된 집의 이미지는 사진(윈난성 동굴 벽화) 속 동굴 같은 이미지로 전치되며, 이러한 알레고리 기법에 의해 동굴 속에 사는 ‘붉은 사슴’은 곧 수필 속 자아라는 비유적 이미지를 생성하는데 이는 유연성을 지닌 액체 이미지의 다름 아니다.
김옥자의 <아버지 게밥 짓는다>에서는 겹쳐진 비유의 이미지들이 나타난다.
게가 몽글몽글 밥을 짓고 있다. 뻘과 모래밭에 수 천 수만 개의 밥을 지어 놓고 있다. 연신 앞발 두 개를 얼굴에 비벼대며 거품을 물었다 뱉어 낼 때마다 게밥의 숫자는 늘어났다. 너울성 파도 한 번이면 와르르 쓸려나갈 저 밥들. 아버지가 지어 놓은 밥들은 수시로 파도에 쓸려 나갔다. (……)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온전치 못한 다리를 짜디짠 물에 담금질을 하며 게밥을 짓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아버지가 평생을 일궈 놓은 밥을 퍼 먹고 있는 오늘, 여덟 형제가 그 자식을 위해 다시 세상의 파고를 넘나들며 또 다른 밥을 짓고 있는 중이다.
-김옥자, <아버지 게밥 짓는다>(매일신문)에서
게는 조개처럼 갑각류로서 안과 밖의 이미지가 상이하다. 안은 부드러운데 겉은 딱딱하다.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친 아버지의 걸음걸이는 게가 걷는 모습과 같다. 가족들에게 아버지의 다리는 언급할 수 없는 상처이기에 금기의 상징이다. 게가 집게발로 “몽글몽글 갯벌에 밥을 짓는” 것과 아버지가 게처럼 걸으며 ‘게밥’을 짓는 것은 생명을 위한 일이며 가족을 지키는 수단이다. 예컨대 모래사장의 게는 아버지와 동일시된다. “게는 몽글몽글 밥을” 지어 “뻘과 모래밭에 수 천 수만 개의 밥을 지어 놓”는다. 그러나 “너울성 파도 한 번이면 와르르 쓸려나갈” 밥이다. 여기서 게의 밥은 곧 아버지가 일군 밥이고 가족의 밥으로 환치되는데, 밥은 생명을, 게는 아버지라는 등식의 변증법적 이미지를 추론하게 한다. 전자가 관습적 상징이라면 후자는 창조적 상징으로써 그 밥에는 가족의 삶이 투영되어 있으며 게걸음으로 생을 밀고 나간 아버지의 고단한 삶이 내재되어 있다. 거기는 작품 속 자아의 기억이 머무는 곳으로써 “인내의 짜디짠 냄새” 또한 배어있다. 역경이나 고난을 이겨내는 심리적 어휘인 인내를 “짜디짠 냄새”로 은유한 데서 비유의 신선함이 드러난다. 더하여 “세상의 파고”라는 명사 은유와 “까치발을 든 민꽃게처럼”이라는 직유의 수사 또한 적절하게 차용하여 수필의 주제와 이미지를 한층 끌어올린다. 여기서 아버지의 삶은 특수한 삶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지만 개인으로 국한되지만은 않는다. 누구든지 게걸음을 걷는 형상이 될 수 있다는 자아의 인식을 통해서 한 편의 수필이 지닌 의미의 확장을 엿볼 수 있다. 나아가 작가의 “여덟 형제가 그 자식을 위해 다시 세상의 파고를 넘나들며 또 다른 밥을 짓고 있는 중”이라는 결말은 수필의 순환구조 형식을 새롭게 구현하고 있으며 이 시대 아버지에 대한 수필문학의 서술적 차원의 객관성과 보편성을 담보하고 있다.
뒷마당 한갓진 곳에 땅을 파고 왕겨로 불을 피워 성인식을 치르듯 찬찬히 딸의 증거물을 태웠다. 달빛의 흔적이 다 탈 때까지 지켜보는 당신의 얼굴은 달보다 더 붉게 물들었다.
(……)
달은 생명의 집이다. 씨를 품는 여인의 몸이며 땅이다. 초승달에서 보름달로 차고 기우는 달의 정기를 받은 여인들의 몸에는 창조의 기운이 서려 있다.
-김애자, <망월굿>(전북일보)에서
이 작품에는 달의 여성성과 불의 소멸과 생성, 대지의 원형적 이미지들이 비유적 이미지들과 조화를 이루며 주제를 향하고 있다. 망월이라 외치는 소리와 함께 달집에서 불이 타오르고, 솟아오르고, 치솟는다. 여기에 사용한 ‘타오르다’, ‘솟아오르다’, ‘치솟다’라는 어휘들은 모두 불을 상징하는 어미들로 상승의 이미지들을 담고 있다. 달집이 타오르는 불의 형상을 “잡아먹을 듯 널름거리는 불의 혓바닥”이라 비유해 자신의 욕심을 경계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액막이 부적과 소원들도 불처럼 타오른다는 데서 나쁜 기운과 소원을 동시에 이루는 이중적인 이미지도 얻고 있다. 작가의 초경을 “선홍의 달빛”으로 은유하여 달과 여성성의 시작을 암시하기도 한다. 초경을 경험한 어린 자아는 자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한 듯 숨었으나 어머니는 딸의 성인식을 치르는 듯 뒷마당에서 개짐을 태운다. 이때 개짐 태우는 흔적을 “달빛의 흔적”이라고 비유한 것은 여성성의 은유이자 잉태의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여성의 생리 주기와 달의 주기가 거의 일치하는 것은 물론 임신에서 출산의 기간까지도 달의 주기와 같다는 것은 여체의 신비가 아닐 수 없다. 딸의 초경 개짐이 다 탈 때까지 지켜보는 어머니의 얼굴이 “달보다 더 붉게 물들었다.”는 회상을 통해 달집태우기와 딸을 위한 어머니의 염원이 같은 맥락이었음을 보여준다. 때문에 “달은 생명의 집”이고, “씨를 품는 여인의 몸이며 땅이다”라는 직설적 은유는 달과 여성의 겹쳐진 이미지로 이어진다.
5. 나가며
수필은 줄곧 문학성 시비에 시달려 왔다. 흔히 ‘수필도 문학이다’라는 말을 한다. 이 명제의 이면에는 수필의 문학성에 대한 의문이 숨어 있다. 일인칭 주제인 ‘나’가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장르인 수필은 시나 소설에서처럼 시적 자아나 서술적 자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문학의 주요 기제인 상상력과 관련하여 일정 부분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상상력의 수용문제는 장르적 정체성과 관련되어 논의의 한계를 드러내곤 하는데, 시나 소설의 상상력은 있을 법한 일이라는 어구에 충족하면 되지만 수필은 작가가 경험한 사실이어야 한다는 전제도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필이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문학이라는 의식과 성찰의 문학이라는 카테고리에 갇혀 상상과 이미지적 수사를 허구의 전유물이라 단정하고 수필의 윗목으로 밀쳐놓을 수만은 없다. 비근한 예로 서구의 르네상스 시대에도 장르의 융섭이 있었다. 서정시에 발라드가, 비극에 풍자가, 시에 산문이 섞였듯이 수필의 본질을 헤치지 않는 범위에서 수필에서도 상상, 이미지, 시적 수사 등을 자연스럽게 포용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전의 일부 수필에서 상상력과 이미지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미래 수필의 지향점으로서 이미지의 액체성이 다양하게 변용되고 차용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다행히 2020년 신춘문예 당선 수필에 이러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수필의 공간적 배경을 제시할 때 공간의 이미지화가 두드러지고 있으며 주제와 호응도 이루고 있다. 이상수의 <황동나비경첩>에서 안방과 화초장은 모성의 이미지를 가지며 이 수필의 주제로 결집되는 역할을 한다. 또 제은숙의 <불씨>에서 부엌(아궁이)이라는 공간적 이미지도 모성애를 드러내 주는 등 공간의 이미지화는 작품이 주제로 향하는데 밀도를 더해주고 있다.
성찰과 감각의 이미지에서는 당선작 대개가 기존의 관습에서 벗어나 있었다. 대개의 수필이 성찰을 관념적으로 설명하거나 교훈적으로 드러내는 데 익숙해 있었다면 신춘문예 당선작은 성찰을 이미지로 보여준다거나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비유적 이미지는 모든 당선작에서 고르게 나타났다. 간혹 구태의연한 죽은 비유가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새로움을 창조하는 비유들이 많았다. 몇몇 작품에서는 알레고리와 변증법적 이미지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이미지는 주제와 유기적으로 혼합되어야 제 기능을 할 수 있다. 문학을 유기체에 비유하곤 한다. 이는 문학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각기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함을 말한다. 요컨대 이미지들을 통해 주제를 드러내고자 할 때 이미지들은 전체와 부분이 맞아야 하며 하나의 어휘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그 어휘가 전체 맥락과 조응하는지 여부뿐 아니라 유기적 관계까지 염두에 둔 선택이어야 할 것이다.
준하여 시어를 사용하는 방식에는 “평범한 단어들을 사용하여 그것들을 다소 비범하게 만드는” 방식이 있다고 보르헤스는 말한다. 좋은 수필 역시 작가의 언어 조합을 통한 이미지 구현에서 비롯된다. 이때 벼리된 각각의 어휘 의미는 휘발되고 이미지만 남는데, 좋은 이미지는 현상을 넘어 상상으로 안내하기도 한다. 이는 수필문학이 진중하게 고민해야 할 새로움의 수용이자 활용이며 액체적 입장이다. ‘액체수필’이라는 용어가 다소 생경하지만 대상을 새롭게 본다는 문학의 가변 근원적 차원에서 보면 그리 낯선 이미지가 아닐 것이다. 액체가 지닌 속성으로 미루어 볼 때 수필의 사실적 경험을 토대로 구현된 액체적 유동은 문학의 본질인 새로움(창의)를 향한 기능적 수행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