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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라, 백일장 작품
가을 학부모 참관수업이 끝나고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아이들의 들뜬 마음은 며칠째 이어졌다. 겨우 진정이 되는가 싶었더니, 전국 어린이 백일장에 아라가 대상을 받는 바람에 또 한 번의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전학 온지 겨우 한 달 된 아라한테 나라 반 아이들이 끌려가는 분위기다. 지진아 그룹까지 아라한테 휘어잡힌 꼴이 되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전국 어린이 백일장 대상은 아무나 받는 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라가 그 작품을 낭독하는 바람에 교실은 온통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제목: 엄마는 대리모/아라 라모스
엄마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딸, 혹시 대리모 집단 수용소라는 것을 아니? 남중국해 먼 바다에 있는 섬. 그 섬은 끔찍한 악몽을 꾸게 하는 섬이지. 그곳 여자들은 가난이 죄였던 거야.’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아라는 잠시 침묵하더니 글을 다시 읽어 내려갔다.
엄마가 한 그 말은 지난번 학부모 초청 참관수업 때 수아 프레젠테이션 자료에서도 있었던 것이다.
“엄마, 나쁜 이야기라면 안 들을래. 수아가 발표한 그 자료가 사실적 이야기였잖아?”
나는 왠지 무서웠다.
“그래도 들어. 앞으로 얼마든지 일어 날 수 있는 이야기 일수도 있으니까.”
나는 엄마의 그 끔찍한 이야기를 무언가에 홀린 듯 끝까지 들을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느닷없이 말했다.
“엄마는 인간 인큐베이터 즉 대리모였단다.”
나는 그 말에 ‘헉!’소리를 지를 뻔했다.
엄마는 자신의 이야기라며 어떤 사건이 발생한 TV 기사처럼 담담히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엄마는 비록 대리임신을 했을지라도 아기는 절대 지켜주고 싶었다. 자신은 죽어도 아기만 살릴 수 있다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날 우연히 대리모 집단 수용소 관계자들이 하는 말을 엿듣게 되었다.
‘안젤라가 임신한 아기는 쌍둥이야. 재수 없으면 돈을 한 푼도 못 받을 수도, 운이 좋으면 돈을 배로 받을 수도 있으니 잘 관찰해! 의뢰인이 한국에서 유명한 모델이니까.’
나를 두고 하는 이야기였다. 쌍둥이 임신은 의뢰인이 원치 않으면 한 아이는 입양을 보내거나 보육원에 보낸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들은 더 나쁜 일을 저지를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엄마는 먹을 게 없어 대리모를 자청했지만, 차마 그 아기를 소문대로 그냥 있을 수만은 없었어. 그래서 목숨을 걸고 그 수용소를 탈출했단다.”
몸에 지닌 돈 한 푼 없이 그곳에서 탈출 한다는 것은 곧 죽음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탈출을 결심하고 실천에 옮겼다. 한국까지 오는 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이었지만, 오로지 아기를 지켜야한다는 그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섬 전체에는 그들 집단들이 에워싸고 있었고, 겨우 그들을 피해 몰래 배를 탔지만, 막상 한국에 와보니 어디 한군데 몸을 의탁할 곳이 없었다. 어릴 때 먹을 것을 얻기 위해 갔던 성당이 생각났다. 무조건 성당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신부님과 수녀님의 도움으로 일을 하며 출산 날을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런데 병원에서 청천 벽력같은 말을 했다. 한 아이는 미숙아라 살 수 있는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고 했다. 당장 수술을 하지 않으면 둘 다 위험할 뿐만 아니라 산모도 위험할 수 있으니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수술을 하려면 많은 돈이 든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느님을 원망했다.
“왜 제게 이런 고난을 주시나요? 제게 죄가 있다면 가난한 죄 밖에 없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 날 구멍이 있다는 기적을 믿으며 간절히 기도에 매달렸다. 그때 수용소에서 엿들은 그 모델을 수소문해서 찾기로 마음먹었다. 유명인이라 금세 찾을 수 있었다. 대리모가 사라진걸 알고 그쪽에서도 행방을 찾고 있던 중이었다.
‘하늘이 우리를 도우는 구나!’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 모델은 건강한 아기 하나만 원한다는 연락이 왔다.
그 생물학적 아기의 이모가 찾아왔다. 그의 도움으로 수술은 무사히 했지만, 한 아기는 겨우 700g도 안 되는 미숙아였다. 아기를 살려 달라고 매달렸다. 의사한테도 하느님께도. 의사는 아기를 인큐베이터 속에 넣어야한다고 말했다. 인큐베이터라는 말에 흠칫 놀랐다. 자신이 인간 인큐베이터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엄마는 아기의 이모한테 평생 비밀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하고 모든 비용을 대신 내주었다. 이모는 건강한 아기만 데리고 갔다.
“아가야, 안 돼! 데려가면 안 돼요. 제발! 내 아가야!”
세상을 다 잃은 듯이 통곡했다.
“아픈 아기를 살리기 위해서는 못할 일이 없더구나. 기도 덕분인지, 아니면 기적이 일어난 건지 아기는 살아났어. 처음에 앞이 막막할 때 쌍둥이를 주신 하느님을 원망했지만, 쌍둥이였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 아픈 한 아기를 어떠한 고난이 있더라도 잘 키우겠다고 하느님과 약속했어. 병원에서 일을 하면서 아기를 돌볼 수 있게 배려해 주었어. 얼마나 고마운지. 하지만, 병원에서도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그 후유증으로 아기는 키가 자라지 않는 왜소증에 걸리고 말았어.”
아기가 살아났다는 것만으로 그 왜소증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아기의 이모는 생물학적 엄마에게 한 아기의 존재를 말하지 않았다더구나. 아기를 살려준 이모한테 무덤까지 비밀을 가지고 가기로 약속했는데. 영원한 비밀이란 없는 법이란다. 그렇지만 넌 내 딸임에 틀림없어. 내가 열 달 동안 너를 내 배속에 담고 있었고. 12년이나 너를 키웠으니까.”
엄마는 그 말을 하면서 온몸으로 오열했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오로지 내 딸인 너가 있기 때문이지.”
그 모델은 사랑한 애인이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자 정자를 채취해 대리모를 의뢰했다고 했다. 그는 소문날 것을 염려해 그 먼 곳까지 대리모를 의뢰했던 거였다. 그 대리모가 엄마 자신이고. 그리고 두 아이의 생물학적 아빠는 결국 하늘나라로 떠나고 말았다. 이모는 데려간 아기를 자신의 호적에 올려 키웠다. 동생은 모델 생활을 계속해야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이모가 대리모를 자청했지만, 이모는 이미 온몸에 암 덩어리가 퍼져 있다는 걸 알았다. 언니가 죽자 동생은 언니의 아기를 키우게 된 것으로 되었다. 철저하게 자신의 아기임을 숨기고…….(중략)
아라의 낭독이 끝나자 교실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아라, 네 이야기구나? 그런 일이 있다니. 미안 해! 우리가 널 괴롭혀서.”
지진아, 준이, 그리고 아이들이 아라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나라는 왠지 그 한 아이가 자신 일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러면 그 한 아이가 누구야?”
준이가 말했다. 아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2. 나라, 엄마 & 이모
이모는 집에 들어오면 습관처럼 TV를 켠다. 이모가 새벽 2시쯤 들어 왔으니까 분명 그때부터 TV는 켜져 있었을 것이다. 너무 조용하면 무섭다나 뭐라나. 어른이 무섭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나라는 이미 익숙해졌다. 일단 소리를 줄였다. 이모는 요즈음 신상품 패션쇼 준비로 바쁘다고 했다. 그럴 때 이모가 늘 입에 달고 있는 말이 있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 내 딸!’
“히히! 귀요미!”
나라는 이모가 엄살을 부릴 때마다 웃음이 나왔다. TV를 끄려다 리모컨을 든 채 텔레비전에 시선이 꽂혔다. 어제저녁에 도우미 아줌마가 준비해 두고 간 샐러드 볼을 냉장고에서 꺼냈다. 하지만, 나라의 눈은 TV에 고정되어있다. 우유를 컵에 따르다 식탁위에 쏟고 말았다.
“앗!”
깔끔이 이모가 알면 또 잔소리 감이다. 나라는 행주로 식탁을 닦으면서도 눈은 그대로 TV에 두고 있다. 토스트에 딸기잼을 바르고 사과 한 개로 아침을 먹으면서도 여전히 눈은 TV에 꽂혀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 인지 이해가 안 돼!’
이제 나라도 아침 정도는 이모를 깨우지 않고도 혼자 해결 할 수 있을 만큼 자랐다. 5학년씩이나 되었으니 말이다. 아침을 먹고 이모 방문을 소리 나지 않게 열어보았다. 이모는 이불위에 다리를 얹고 베개를 껴안고 자고 있었다.
‘후후!’
나라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으며 들어가 이불을 당겨 덮어주었다.
“내 딸! 사랑해!”
이모가 나라 목에 팔을 감으며 딸이라고 했다. 이모가 딸이라고 해 줄때가 나라는 제일 행복했다. 늘 나라가 바라던 것이다.
“엄마! 사랑해!”
나라도 이모를 엄마라 하며 볼에 뽀뽀를 했다. 어느새 이모는 잠이 들었는지 조용하다. 나라는 힘든 이모를 볼 때마다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겠다.’
시계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TV를 한 번 더 돌아보고 서둘러 책가방을 메고 현관을 나서며 중얼거렸다.
‘못됐어. 불쌍해! 근데 대리모가 도대체 뭐야?’
나뭇잎은 벌써 단풍이 물들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마른바람이 윙윙거리며 부는 게 영 을씨년스럽다. 바람이 텅 빈 놀이터를 한 바퀴 돌더니 모래바람을 일으켰다. 나라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길에는 학교 가는 아이들이 거의 없었다. 앞만 보고 뛰었다.
“나라야!”
뛰던 발걸음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뒤돌아보았다. 수아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어머, 너도 늦었구나?”
수아는 두 손을 무릎에 짚고 엎드려 푸아 푸아! 하면서 밭은 숨을 골랐다.
“응, 뉴스 보다가. 이번 참관수업 자료가 되겠다 싶어 보느라 늦었어.”
“나도 그 뉴스 보느라 늦었는데 도대체 이해가 안가더라. 뭔가 자료가 될 만한 걸 찾긴 찾았어? 어쨌든 대단하다. 그렇게 어려운 주제로 발표를 하다니.”
“우리 아빠 도움이지 뭐.”
“너는 좋겠다. 아빠가 계셔서.”
“쓸데없는 소리 하네. 아빠 없는 아이가 한둘이야? 요즈음은 여자들이 귀찮다고 아빠를 안 만든대.”
“무슨 뜻이야?”
“그게 바로 대리모가 있는 이유가 될지도 모르지.”
“대리모? 참, 그게 뭔데?”
“여자들이 몸매 망가진다고 아기는 갖고 싶은데 자신은 낳기 싫고 대신 임신해 줄 사람을 돈으로 산다는 거잖아. 중국 유명 여배우가 그랬다고 논란이 되어 메인 뉴스로 떴잖니. 아까 그 뉴스가 그거지. 네 이모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이 특히 그렇게 한대. 모델은 몸매가 생명이잖니.”
“설마, 그런 일이 있을 라고?”
“성경에서도 아기를 못 낳는 아내가 대를 잇기 위해 자신의 몸종을 남편한테 줘서 아기를 낳게 한다고 되어 있어. 그것도 일종의 대리모지 뭐겠어.”
“우리하고 상관없는 이야기니까 늦기 전에 빨리 학교나 가자.”
나라가 앞서 뛰었다. 수아도 뒤따라 뛰었다.
“나라야, 같이 가자. 내 솟 다리로는 도저히 네 롱 다리를 못 따라가겠다.”
수아는 헉헉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수아는 맨 앞자리에 앉을 만큼 키가 작다.
“하하! 얼른 오기나 해! 서둘러야겠다.”
수아는 공부는 상위권은 아니지만 명랑하고 착한 아이다. 아빠가 의학박사인데도 표내지 않는다.
교실에 들어서니 꼭 시장 바닥같이 시끄러웠다. 얼른 자리에 앉자 소희가 쪼르르 달려왔다.
“나라야, 이번 학부모 참관수업에 네 이모 오실 거지?”
“물론이지.”
“기대할게.”
이모는 세계 최고의 패션모델이다. 나라가 다섯 살 때 돌아가신 엄마는 이모랑 일란성 쌍둥이였다, 처음 보는 사람은 구별이 안 갈 정도로 두 사람은 닮았다고 했다. 나라도 사진만 보면 구별이 안 갔다. 갓난아기였을 때 나라는 엄마보다 이모를 더 따랐다고 했다. 엄마 품에 안기면 자지러지게 울다가도 이모가 안아주면 금방 방긋방긋 웃었다고 했다. 나라는 엄마가 돌아가셨는데도 이모한테만 매달렸다. 이모는 엄마가 돌아가시자 나라를 자신의 딸로 키운다는 것을 부각시켰다. 모델 계에 소문이 자자하게 날 정도로 그 부분을 크게 뉴스에 쟁점화 시켰다. 이모는 그것으로 인해 인기가 더 상승했다고 했다. 하지만, 나라는 엄마도 아빠도 없는 게 슬펐다. 이모마저 없으면 자신은 고아라는 생각이 들어 무서웠다. 그래서 나라는 아이들 앞에서 표내지 않으려고 더 거드름을 피우는지도 모르겠다.
이모가 주니어 패션쇼에서 선보인 옷들을 학교에 입고 가면 아이들은 까무러친다. 나라는 그런 아이들의 반응을 즐겼다. 특히 지진아 그룹 아이들의 까무러치는 반응 말이다. 나라는 이모랑 주니어 패션쇼에 같이 무대에 선 경험도 있다. 나라는 이모를 닮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나라의 꿈은 이모보다 더 유명한 세계적인 패션모델이 되는 것이다. 이모도 나라를 모델로 키우기 위해 매일 스텝 밟는 연습을 시켰다. 나라는 더 적극적이었다. 살아남기 위한 본능일지도 모른다.
“나라야, 이 화보 좀 봐. 지금 네가 입고 있는 그 원피스야. 한마디로 환상의 꽃이다.”
소희가 호들갑을 떨었다. 소희의 칭찬이 나라는 싫지 않았다.
“얘는? 그만 아부해라! 나라 으쓱대는 꼴 좀 봐. 못 봐주겠다.”
지진아가 왜 가만있나 싶었다. 지진아는 학급을 휘어잡고 있었다. 하지만 나라한테만은 꼬리를 내리는 게 일쑤였다. 공부면 공부, 그림, 음악, 거기다 예쁘기까지, 도저히 지진아가 나라를 흉내 낼 수 없는 조건이다. 지진아는 늘 나라에게 심술을 부렸다. 어떤 땐 도가 지나칠 때도 있었다.
“너, 말조심해! 으쓱대긴 누가 으쓱댄다고 그래?”
나라는 지진아한테 소리를 꽥 질렀다.
“야! 너네들은 무슨 옷에만 관심이냐? 이번 학부모 참관수업 걱정이나 할 것이지. 츳츳!”
준이가 혀까지 차 가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수업 시작 음악이 울렸다. 시끌벅적하던 교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 고요를 깬 건 준이었다.
“잰 누구야?”
준이의 말에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교실 앞문으로 쏠렸다.
3. 아라, little nymph
아라는 선생님과 함께 교실로 들어갔다. 아라는 아주 작은 키에 헤어스타일은 남자아이처럼 짧았다.
“쟤, 자라다 말았나?”
동글동글한 남자아이가 한 그 말에 선생님이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선생님 옆에 서 있는 자신이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교실을 획 둘러보았다. 커다란 칠판과 커다란 컴퓨터 스크린 그리고 뒤 게시판에 붙어 있는 아이들 그림도 수준급이었다. 교실 바닥은 먼지 하나 없이 반질거렸다. 유리창 역시 손자국 하나 없었다. 아이들의 표정은 모두 자신감이 넘쳐 도도해 뵈기까지 했다. 차림새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대부분이 텔레비전 광고에서나 봄 직한 브랜드 마크가 명찰처럼 가슴에 붙어 있었다.
“2학기 시작한 지가 언젠데 웬 전학?”
동글동글하게 생긴 그 남자아이가 큰 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늘 우리 반에 전학 온 친구예요. 아라는 외국어를 참 잘해요. 아마 다섯 개 나라 언어는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래요. 아라! 인사해요.”
선생님은 아라를 내려다보며 소개했다.
“와!”
아이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글이 남자아이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우와! 대박이다. 귀요미, 너 혹시 학년을 잘못 찾아 온 게 아니냐?”
동글이가 한 말에 아이들이 책상을 두드리며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아라는 아이들이 웃는 바람에 잠시 당황해서 말을 더듬고 말았다.
“내, 내 이름은 아라 라모스야. 라스트 네임이 라모스라는 거지. 그리고 내 별명은 little nymph 즉 작은 요정이라는 뜻이야. 잘 지냈으면 좋겠어.”
“우-! 발음 좋고! 별명까지? 성이 라모스? 다문화잖아? 주제에 당당하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아이가 다문화라고 했다.
“나라 너도 영어, 불어하면 원어민이 도망 갈 정도 잖냐?”
그 동글이가 떠들어재꼈다.
“자자, 조용히 하고. 모두 아라 도와주고 잘 지내요. 아라는 나라 옆에 가서 앉도록 해요. 그러고 보니 이름도 나라, 아라 ‘라’자 돌림이네.”
선생님은 자리를 배정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이들도 따라서 갸우뚱했다. 나라 표정이 벌레 씹은 것같이 일그러졌다.
“반가워. 나 아라라고 해. 잘 부탁해.”
아라는 나라의 가슴께에 닿을 만큼 작았다. 나라는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아라에게 말했다.
“너, 다문화 같은데 뭘 믿고 그리 당당해? 키까지 반 토막인 주재에.”
“다문화이면 당당하면 안 되니? 또 키 작다고 당당하면 안 된다는 법이 법전에 쓰여 있니?”
아라는 태연하게 말했다.
“뭐, 뭐?”
예상치 못한 반전에 나라는 당황했다.
“어쮸, 천하에 잘난 나라가 작은 요정 앞에서 쪼네.”
“준이 너! 내가 언제? 너 나중에 죽어!”
나라가 소리를 꽥 질렀다. 나라는 도도한 표정이면서도 화를 내도 귀티가 났다. 아라는 그 몇 분 사이 이 교실 분위기를 다 파악했다.
지난번 학교 아이들 부모들은 거의 다 공장에 나가 일을 했다. 아침에 등교할 때 옷을 챙겨 입혀 줄 엄마는 새벽에 공장에 가고 없었다. 실내화인지 운동화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시커먼 실내화를 신은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교실 바닥은 군데군데 얼룩이 절어 있었다. 아이들이 버린 휴지가 널브러져 있을 때도 많았다. 유리창 또한 아이들 손자국이 지문처럼 찍혀 있었다. 그 학교 아이들은 대부분이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다. 지금 이 교실 아이들은 다문화라고 해도 산업 디지털 의류단지 안에 사는 그런 다문화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아라는 벌써 어제까지 다니던 그 학교가 그리웠다.
‘엄마가 뜻이 있어 그러니까 새 학교에서 잘해! 우리 딸은 잘 할 수 있어.’
단단히 결심한 것 같은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쉬는 시간에 포니테일로 머리를 묶은 아이가 아라 책상으로 패거리를 몰고 왔다. 포니테일 주변에 아이들이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게 꼴사나웠다. 처음 전학 오면 주목받기 마련이라서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전에 학교에서는 하루에 몇 명씩 전학 오는 아이도 있었기 때문에 그런 분위기에는 익숙했지만, 신경이 쓰였다.
“난 진아야. 너 내 마음에 든다. 근데 넌 왜 영어 성이야? 작은 요정! 너 참 귀엽단 말이야. 호호!”
“진아라 했니? 내가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근데 왜 내가 네 마음에 들어야 하지?”
“뭐야? 전학 온 주제에 말대꾸야?”
지진아가 웃던 웃음을 뚝 멈추고 씩씩거렸다. 누군가 아라 옆구리를 쿡 찔렀다. 조심하라는 뜻인 것 같았다. 포니테일을 아이들이 이름만 부르지 않고 꼭 ‘지’ 씨 성을 붙여 ‘지진아’라 부른다고 키가 작고 얼굴에 죽은 깨가 있는 아이가 귀띔해주었다. 아라 옆구리를 찌른 아이였다. 그 아이는 머리를 두 갈래로 묶고, 키는 아라 자신보다 커 뵈지는 않았다. 얼굴에는 죽은 깨가 군데군데 있는 게 빨간 머리 앤을 닮았다. 이름이 수아였다. 아라는 아이들의 특징을 눈여겨봐 두었다.
“왜 영어 성이냐고 물었다! 작은 요정! 아니 혼혈아!”
“아, 그건…….”
“질문할 걸 해야지. 그러니까 지진아라는 소릴 듣지. 당연히 아빠가 외국인이니까 영어 성이겠지. 안 그러냐. 아라? 참, 나 준이라고 해. 채준!”
준이가 대신 말했다. 지진아가 거침없이 혼혈아라고 하는 바람에 아라는 잠시 당황했다. 전 학교에서는 아무도 혼혈아란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 학교엔 거의가 다문화아이들이기 때문이다. 다문화 아닌 아이들이 오히려 더 이상했다. 언어도 다양했다. 타갈로그어, 스페인어, 영어. 인도네시아어, 중국어 등 배우고자하면 다섯 나라말은 거뜬히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라는 그 다섯 개 언어를 거의 수준급으로 구사했다. 그래서 별명이 작은 요정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모국어를 쓰지 않았다. 서툴지만 한국어를 썼다. 부자나라 낯선 땅에서 살아 남기위한 방편이었다.
“고맙다 채준! 그건 준이 말이 백 프로는 아니라도. 맞긴 맞아.”
아라는 엄마 성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백 프로는 아니라도’라는 말을 쓴 것이다.
“맞으면 맞는 거지. ‘백 프로는 아니라도’ 라는 말은 뭐야?”
지진아가 눈을 치뜨고 취조하듯이 물었다.
“아, 혹시 텔레비전 경제 프로에 나오는 한국말 잘하는 외국인 경제학 박사 성이 라모스잖아. 리차드 라모스! 그분이 혹시 너희 아빠? 그분 우리 동네로 이사 왔다는 소문이 있던데. 참, 그분도 외국인 치고는 키가 작아. 너 아빠 닮았구나? 하기사 작은 고추가 맵긴 맵다 잖냐.”
준이가 TV 경제 프로를 들먹이며 아라 바람막이가 되어주었다. 준이 아빠도 경제 전문가라고 했다.
“아, 아…….”
“아빠! 맞네. 맞지?”
아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준이가 단정 지어버렸다.
“와우! 그래서 작은 요정이구나?”
아니라고 말할 틈도 없었다. 수업이 끝나자 궁금한 게 많은 아이들이 아라 책상으로 또 몰려왔다.
‘아라, 지진아 그룹은 빌라와 단독, 나라 그룹은 아파트, 우리 반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어. 둘이 각 그룹 리더야.’
빨간 머리 앤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네 집은 외국인이 많이 사는 빌라겠지?”
“아, 아니……”
“그럼 주택?”
아라는 지진아 말에 대답하지 않고 책가방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가방은 노 네임 이였다.
“아라, 네 아빠는 검소하다고 TV 쇼 MC가 말하더라. 다른 출연자들은 입고 나온 옷 상표를 모자이크 처리하느라 난리였는데, 리차드는 노 네임이라 가릴 게 없다며 호탕하게 웃더라.”
준이 자신은 메이커를 감고 있으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백화점에서 쇼핑 안 합니다. 동대문시장, 남대문시장 참 좋아해요.”
준이는 라차드 말을 그럴듯하게 성대모사를 했다.
“리차드가 방송에서 한 이 말 한마디가 시장 상인들한테 큰 힘이 되었대.”
“아, 그래서 너에게도 시장표 사 주셨구나? 이 가방!”
나라가 준이 말에 맞장구를 치며 아라 가방을 들었다 놨다. 그냥 놓은 게 아니라 팽개쳤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나라! 심한 거 아니니? 아라 가방을 팽개치면 어떡해?”
빨간 머리 앤 수아다.
“아, 비싼 거 아니니까 괜찮아.”
“수아! 너보다 작은 애가 와서 위로가 되겠다.”
나라는 수아까지 모욕을 주었다. 아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 이래서 엄마가 이 옷을 사 주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제 오후에 생전 처음 백화점에 갔었다. 아동복이 몇 층에 있는 지도 몰랐다. 우리는 안내문을 읽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8층까지 올라갔다. 백화점의 화려한 인테리어가 눈이 부셨다.
“어머, 귀엽게 생겼네. 2학년이지? 이 쪽 옷이 잘 어울리겠어.”
우리가 아동복 코너를 어색하게 기웃거리자 점원 언니가 말했다. 아라는 5학년이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언니가 골라 주는 옷의 가격표를 보고 아라는 화들짝 놀랐다.
“엄마, 왜 이렇게 비싼 옷이 필요한데?”
“우리 딸 절대 주눅 들지 말라고.”
“엄마. 나 주눅 들지 않아. 이거 엄마 월급의 삼분의 일이야.”
그 옷은 외국 브랜드였다. 엄마도 가격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쩔 수 없이 기획 상품 옷을 두 벌 골랐다. 아라가 입고 있는 옷은 이 아이들이 보기에는 싸구려 옷일 뿐이다. 준이는 눈치도 없이 또 떠들었다.
“지난 번 토크쇼에서 MC가 리차드에게 묻더라.”
“부인은 한국분이고, 아주 예쁜 열두 살짜리 딸이 있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네, 나 닮아 키는 좀 작지만 아주 귀엽습니다. 전 딸 바보입니다.”
준이가 또 흉내를 냈다.
“그 딸이 바로 아라 너고?”
아라는 얼결에 리차드라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딸이 되고 말았다. 아라는 리차드 라모스에 대해 검색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수업 시작 음악이 울렸다. 아이들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내가 천장 받치고 있으니까 안 무너져.”
“하하! 호호! 까르르!”
그 말에 아이들이 와르르 웃었다. 아라는 서있다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아라는 왠지 나라 앞에서만 주눅이 드는 것 같았다. 수업 시간 내내 머리가 복잡해 공부가 되지 않았다. 쉬는 시간이 되자 아이들이 또 몰려왔다.
“귀찮아 죽겠네. 좀 몰려다니지 마라. 나 조용히 있고 싶거든.”
“성질하고는. 배려라고는 눈곱 반만치도 없는 이기주의자!”
“뭐, 뭐야?”
나라는 포니테일 지진아와 말씨름을 했다.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평탄한 학교생활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앞으로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4. 나라, 아라의 정체
그동안 아라에 대해 파악한 게 별로 없었다. 왠지 가까이하기엔 뭔가 석연찮은 부분이 많았다. 의문투성이다.
‘아라한테서 느끼는 묘한 이 감정은 왜일까?’
아빠가 유명방송인 리차드 정도라면 내세울 게 참 많을 텐데. 우리 반 아이들은 자랑거리를 찾으려고 열을 올리고 있는데, 너무 조용한 것도 좀 이상했다.
‘키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인가?’
토요일 날 이모 패션쇼가 있는 날이다. 내키진 않지만 아라를 초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까워 질 수 있는 좋은 기회일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라, 이번 토요일 날 우리 이모 패션쇼가 있어. 초대권이야. 쇼 시작 십 분 전에는 자리에 앉아야 하는 거 알지?”
당연히 고마워 할 줄 알고 말했다.
“글쎄! 고맙긴 한데 스케줄이 없으면.”
“뭐? 스케줄?”
나라는 잠시 당황했지만 무시하고 다시 말했다.
“너 청바지에 티셔츠 입고 오면 안 되는 것도. 바보가 아니라면.”
나라는 아라에게 무시하는 투로 말했다. 그래도 아라는 별 반응이 없었다.
토요일 날, 일찌감치 패션쇼장에 갔다. 먼저 가 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소희랑 소희 엄마가 VIP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나라구나. 어쩜 이모 닮아 이렇게 키도 크고 얼굴도 예쁘니?”
“나라야! 여기서 보니 더 예쁘다.”
소희는 나라 팔을 잡고 폴짝폴짝 뛰었다.
“네 꿈이 의상 디자이너지?”
“당근이지. 나는 돌아가신 아빠 뒤를 이어 훌륭한 교수가 될 거야. 너의 이모 지젤님도 우리 아빠의 훌륭한 제자였잖니. 그나저나 넌 좋겠다. 따로 비싼 돈 주고 모델 수업 받지 않아도 되고 부럽다야.”
“세상에 그냥 이루어지는 꿈은 없어. 이모 연습하는 거 보면 어떤 땐 불쌍해. 맛있는 거 못 먹지. 잠 못 자지, 배고파 물만 자꾸 마시는 거 보면 눈물 나. 그리고 매일 하루에 열 시간도 넘게 연습해. 한걸음 한걸음이 연습이라고 보면 될 거다. 나도.”
“너도?”
“그럼.”
나라는 말을 하면서 자꾸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누구 기다리니?”
“으, 응!”
“남자 친구구나?”
“무슨…… 아라.”
“웬일이야. 너 아라 싫어하잖아?”
“상대를 이기려면 상대를 잘 알아야 하지 않겠어.”
“후후, 그럼 그렇지. 그런 속셈이 있었구나?”
오케스트라단에서 오프닝 연주가 흘러나왔다. 쇼 시작 시간이 다 됐다는 뜻이다. 큰 홀이 빈틈없이 꽉 찼다. 아라 자리만 비어 있었다. 결국 아라는 오지 않았다. 배신을 당한 것 같아 기분이 꿀꿀했다.
관객은 외국 바이어를 중심으로 패션모델, 의상 디자인, 의상 큐레이터를 공부하는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학교 단위로 참석했다.
“와아! 지젤! 지젤!”
한 작품이 끝날 때마다 관객들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이모한테 보냈다. 지젤은 이모 모델 예명이다. 패션쇼는 대성공이었다. VIP홀의 열기는 대단했다. 출연진들이 무대에 나와 인사를 했다. 회장 할아버지가 무대에서 내려와 나라에게 왔다.
“네가 지젤 조카 나라구나? 이모랑 열심히 연습한다고 들었다. 무대로 올라 와 봐요. 그동안 연습한 것 한 번 저 많은 관객들한테 보여 봐요. 좋은 체험이 될 거에요.”
나라는 엉겁결에 할아버지 손을 잡고 무대에 올라갔다.
“앞으로 지젤 뒤를 이을 좋은 모델이 될 유망주인지 나라의 오디션을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나라가 주니어 모델로 적합한지 판단해 주세요.”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나라는 자신을 위해 꾸며진 무대인 것처럼 당당히 무대에 서서 가슴을 활짝 펴고 쉼 호흡을 크게 들이마셨다. 회장 할아버지는 오케스트라를 향해 손을 올렸다.
‘Jordan Sparks- One step at a Time’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라는 숨이 멈춰버릴 것처럼 가슴이 벅찼다.
‘침착해. 그동안 연습한 실력을 발휘하는 거야.’
나라는 자신을 토닥였다.
이 음악은 이모랑 연습할 때 자주 사용하던 곡이었다. 오늘 출연한 모델들이 두 줄로 늘어섰다.
“똑, 똑, 똑, 똑, 똑!”
나라는 패션계 최고의 모델들 사이로 배경음악 구두 굽 소리에 맞춰 스텝을 밟았다. 관중들도 숨을 죽였다.
마지막 악장 연주가 끝났다. 나라는 두 바퀴 회전으로 스텝을 마무리했다. 관중 속에서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기립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와와 와! 나라! 지젤! 나라!”
이모가 다가와 포옹해주었다. 회장 할아버지도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나라는 숨을 할딱였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허허, 할아버지. 듣기 좋구나! 잘했어요. 열심히 해봐요.”
예상보다 빨리 나라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나라는 걸음마를 떼면서부터 이모에게서 스텝 밟는 법을 배웠다. 하기 싫어 떼를 쓰기도 했던 기억이 났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나라는 자신의 팔을 꼬집어보았다.
‘우리 딸 잘했어! 축하해! 나 경쟁자 생겼네. 꿈인 줄 알고 팔 꼬집었지?’
이모는 손나발을 하고 나라 귀에다 속삭였다.
‘고마워요. 엄마!’
오늘은 엄마라고 부르고 싶었다. 나라도 이모 흉내를 내며 속삭였다. 나라의 뛰는 가슴은 한참 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이모는 쇼 뒤풀이가 있어 소희 엄마한데 나라를 부탁을 했다. 나라는 소희 엄마차를 탔다.
“역시 나라야. 혹시 실수할까 봐 조마조마해 숨이 멎는 줄 알았어. 완벽했어. 모델오디션 통과 정말 축하해.”
“고마워. 소희야. 나 아직도 떨려.”
패션 관에서 나라 아파트로 가는 길은 저택이 있는 골목길로 가야 했다. 소희가 한참 떠들더니 잠이 들었다.
“소희가 피곤했나 보네. 애는 금세 잠이 드는 아이야.”
“괜찮아요. 그냥 자게 두세요.”
나라는 내내 마음이 들떠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소희 엄마가 조용한 클래식 음악을 틀었다. 아라 생각이나 속상했다. 아라의 속마음을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모든 게 불리한 조건인데 뭘 믿고 그리 당당하지? 여차하면 왕따를 당할 수도 있는데. 아빠 영향 때문인가? 그나저나 왜 오지 않았지? 다른 애들 같으면 못 와서 안달인데.’
지진아 생각도 났다.
“나라, 너네 이모 패션쇼 초대권 같은 거 없니? 우리 초대 좀 하지?”
“얘는? 늘 만석인데 그런 게 어딧어.”
“쳇, 없으면 관두고!”
지진아는 나라에게 늘 이런 식이었다. 엄마 아빠가 안 계신다고 무시하는 것 같아 속상했다. 유명한 아빠가 있는 아라가 부러웠다.
오늘따라 아빠가 더 보고 싶었다. 만약 아빠가 계셨다면 나라가 모델이 된 걸 기뻐하실까?
“이모, 우리 아빠는 어떤 분이었어?”
전에 딱 한 번 물어 본 적이 있었다. 이모는 우리 아빠가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하며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초라해 지는 것 같아 더 물어보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저택 앞을 차가 지나게 되었다. 대낮처럼 환한 불빛 아래 낯익은 여자아이가 대문에 기대 서 있었다. 분명 아라였다.
“아, 아라!”
목소리는 음악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아라는 운동복 차림이었다.
‘운동을 하고 왔나?’
나라는 차 뒤 유리창에 붙어 아라를 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집이 아라네 집? 저 집은 회장님 저택인데?’
전에 딱 한 번 이모 따라서 와 봤기 때문에 아리송했다.
“저 저택이 ‘패션 쥬얼리’ 회장님 댁이야. 참, 나라도 알고 있겠네.”
소희 엄마가 백미러를 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회장님과 어떤 관계지?’
의문이 꼬리를 물고 늘어났다.
‘아라가 회장 할아버지 외손녀?’
가슴속에서 쿵! 하는 천둥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소희가 보지 않아 천만다행이다. 만약 소희가 봤다면 소문은 순식간에 퍼질 것이다. 아이들은 아라랑 사귀고 싶어 난리를 칠 것이다. 나라는 입을 앙다물었다.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아 혀를 내둘러 입술에 침을 발랐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혼란스러워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나라, 집 구경하니? 이 동네 집 정말 크고 좋지? 우리 집은 여기에 비하면 오두막이지 뭐.”
“아 네, 정말 크고 좋아요. 하지만 소희네 집도 좋아요.”
나라는 이 저택이 아라네 집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믿어야만 했다. 눈으로 확인한 명백한 사실이니까.
‘정말 아라가 회장 할아버지의 외손녀라면? 그래서 그리 당당한가?’
아라 말 한마디면 오늘 오디션은 물거품이 되는 건 불 보듯이 뻔했다. 그럼 이모도? 눈앞이 깜깜해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라는 밤새도록 악몽을 꾸었다.
아라가 나라 구두를 훔쳐가는 꿈이었다.
‘악! 안 돼! 이리 내 놓지 못해? 아라 제발…… 흐흑!’
식은땀이 베개를 흥건히 적셨다.
월요일 아침이다. 밤새 잠을 못 자 머리가 띵했다.
이모는 나라에게 꼭 바비 인형을 꾸며 주는 것 같이 옷을 입혀 주었다. 귀찮았다. 하니만 이모의 행복해 뵈는 얼굴을 보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 딸 예쁘다. 질투 날만큼. 너를 가지길 잘했지.”
“그 말 기분 좋은데. 엄마도 최고야!”
나라는 불안한 마음을 삼키고 억지로 말했다.
“참, 아라라고 내가 지난번에 말했지? 우리 반에 전학 온 애 말이야. 아라 집 되게 부자다. 집이 어마어마하게 커!”
“저런, 우리 딸 부러웠구나? 우리도 주택으로 이사 갈까?”
“아니. 이모 사랑해. 나 학교 간다.”
“싱겁긴. 이제 걸음걸이 하나도 더 신경 써야한다는 거 알지?”
“오우케이!”
나라는 얼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아라가 회장 할아버지 외손녀라는 건 말하지 않았다. 나라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만, 그 사실이 자신의 추측이길 바랄뿐이다.
화창한 가을 날씨다. 아파트 정원에서 마른 낙엽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상쾌했다. 기분이 약간 평온을 찾았다.
“애들아, 나 어때?”
나라는 불안한 기분을 털어버리려고 스텝을 밟으며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나라! 너무 야한 것 아니야?”
준이다.
“야하긴 뭐가 야하니? 딱 좋은데. 너무 예쁘다. 이번 너의 이모 무대 최고였어. 그리고 얘들아! 빅뉴스다!”
“뭔데, 뭔데?”
여자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소희 자신이 쇼에 다녀왔다고 말 하지 않고도 광고를 하고 있었다. 소희는 나라와 나란히 서서 스텝을 맞추며 걸었다.
“야야, 고목에 매미 붙은 것 같으니까 좀 떨어져 주랴. 그리고 뜸 들이지 말고 빅뉴스나 말해! 들어보기나 하자.”
지진아가 아니꼬운 듯이 비아냥거렸다.
“나라가 정식으로 패션모델 오디션 통과했어. 그것도 회장 할아버지가 스프라이즈로 직접 나라한테 오디션 신청한 거였어. 완전 대박!”
나라는 스텝을 멈추고 아이들을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이야? 와! 축하한다. 나라!”
아이들이 난리였다.
“댕큐!”
아라가 일찍 와서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오디션 통과 축하해. 그리고 미안해. 패션쇼 가지 못해서. 스케줄도 꽉 짜여 있었지만, 할아버지가 못 가게 했어.”
“너가 무슨 스타니? 스케줄이 꽉 차게?”
‘저택에 산다고 재는 거야 뭐야!’
“뭐? 그, 그럼 회장님이 너네 할아버지라는 게 사실이야?”
나라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아?”
아라가 오히려 당황해서 물었다.
“아, 아니야? 그냥…….”
나라는 어젯밤 대문 앞에서 아라를 보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뭐야? 너 둘이서 다투는 거야?”
아이들이 눈치 채지 못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반장이 발표하는 바람에 위기를 모면했다. 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수류탄을 안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의 일이 더 걱정되었다.
“조용히 하고, 그동안 조별로 열심히 준비해온 가을 학부모 참관수업 프레젠테이션 주제 아직 못 낸 그룹은 수요일까지 제출하길 바래. 벌써 이번 주 금요일로 다가왔어. 며칠 남지 않았다는 거 기억하길 바란다.”
“오케이!”
아이들이 합창으로 대답했다.
“아라는 나라 모둠에 배정되었어. 잘 의논해서 준비하길 바란다. 이상!”
“패션에 대해 준비하는 것 같으니까 돕겠어.”
아라가 말했다. 나라는 못마땅해 입술을 꼭 깨물고 말했다.
“고마워. 네가 돕는다면 우리 모둠은 분명 잘 될 거야.”
나라는 속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드디어 금요일이다. 참관 수업은 정규수업이 끝나고 특활 시간으로 잡혀있었다. 아이들이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5. 아라, 타갈로그어 자장가
패션쇼가 있는 그 날 아라 엄마는 안채에서 퇴근이 늦었다. 늘 회장님이 귀가해야 퇴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라는 나라가 초대한 패션쇼 티켓을 꺼내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VIP석이라고 되어 있었다. 아라는 그날 패션쇼에 가고 싶었다. 아라는 패션쇼라는 개념조차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더 궁금했다. 하지만 입고 갈 옷이 마땅찮았다. 옷장을 다 뒤져도 청바지와 티셔츠밖에 없었다. 아라는 옷장 문을 꽝! 소리 나게 닫아버렸다. 아라는 한 번도 옷 때문에 속상한 적이 없었다. 좋은 옷이 없다는 게 불편할 때도 있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나라가 한 말이 귓속에서 이명처럼 앵앵거렸다.
‘청바지에 티셔츠 입고 오는 건 아니겠지? 바보가 아니라면…….’ 가슴이 답답해 한강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강변에서 숨이 차도록 달리고 또 달렸다. 한강 변에는 걷기를 하거나 조깅을 하는 사람들, 혹은 멋진 스포츠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로 붐볐다. 이조차도 디지털 산업 의류단지 쪽하고는 완전 달랐다. 그쪽도 한강변 공원길은 있었다. 그곳 사람들은 온종일 노동에 시달리고 새벽에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운동은 사치에 불과했다. 이곳은 참 활기차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같은 가로등, 똑같은 물, 똑같은 잔디밭. 그런데 왜 다를까? 아라는 어쩌면 이곳이 자신의 꿈을 키워 줄 것 같은 막연한 생각을 했다.
전 학교에서 선생님이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낸단다.’ 그 말이 그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제 이해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엄마가 이곳으로 왔나?’
아라는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려고 한강 변을 한 바퀴 더 돌아 와 대문 앞에 한참 기대 서 있었다. 어쩐지 그날따라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아, 내가 대문 앞에 있을 때 나라가 보았나? 그 시간이 쇼 끝나는 시간쯤 됐을 테니까.’
월요일 날 나라는 패션쇼 작품을 입고 나왔었다. 아라 자신이 초라해 보였다. 아라는 속상하거나 우울할 때 버릇처럼 자장가를 흥얼거리며 그림을 그렸다. 스케치북을 꺼내 나라가 입고 있는 원피스를 스케치했다.
“방언기도 하냐?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로 흥얼거려?”
준이다.
“와, 그림 잘 그린다. 패션 잡지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네. 누구한테 사사받은 거니? 혹시 그 유명화가 S대 교수님? 터치 기법도 그분하고 비슷해.”
소희가 감탄하며 말했다. 소희의 꿈이 의상 디자이너라 그림도 잘 그린다는 말을 아라는 들은 적이 있었다.
“아니, 사사 받은 적 없어.”
“어떻게 사사도 안 받고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감? 더군다나 왼손으로.”
준이는 아라가 하는 일에 일일이 참견이었다.
“아니 이게 머선 일이고! 진짜네. 그 교수님 그림하고 똑같다 아이가. 그분은 꽃 그림으로 유명하재. 나라가 이븐 원피스 작품도 그분 작품 아이가. 배우지도 않코 이정도면 천재다 천재. 그래서 작은 요정?”
“하하하! 호호호!”
지진아가 자기 엄마 흉내를 내며 익살을 부리자 아이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아라는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가 자신을 이 학교에 전학을 시킨 이유를 모르겠다. 최고의 패션업계 회장님 댁이 이곳에 있는 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아라는 이 학교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에 학교에서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아도 괜찮은 곳이었다. 키가 작은 것도 흠이 되지 않았다. 이곳은 모든 게 낯설다.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들 정도로. 아라는 아이들이 멋대로 상상하는 것도 불편했다. 저택에 산다느니, 경제학자 리차드가 아빠라느니 하는 추측 말이다. 그렇다고 아니라고 부정도 긍정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더 미웠다. 하지만, 갇힌 공간에서 껍질을 깨고 나오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줄탁동시!’그것은 혼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아라는 리차드 라모스라는 그분을 잠깐만 발판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려면 그분에 대해 철저히 알아야만 했다. 컴퓨터를 켰다.
검색어 -리차드 라모스-
국적: 미국인, 대한민국으로 귀화.
생년월일: 1977년생,
직업: 방송인, 경제학박사,
가족관계: 한국인 배우자, 딸.
현주소: 서울 강남구 학동로 청담동.
‘우리 동네잖아! 우리 이웃?’
뭔가 큰 사건이 터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리차드가 출연한 방송을 찾아보았다. 준이 말처럼 키는 작았지만 정말 멋진 분이었다. 리차드가 아빠였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보았다.
“나 참, 나도 한심하기는…….”
하지만, 아라는 그분의 표정, 말투, 행동이나 옷 입는 스타일까지 공부하듯이 외웠다. 눈을 감고 그분이 진짜 아빠라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상상해 보았다. 주말에 놀이공원은 물론이고, 영화관도 갈 것이다. 최고로 멋진 옷을 입고 패션쇼도 당연히 갈 것이다.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공주 같은 옷을 입은 자신을 상상해 보았다. 그 행복한 상상을 깨고 싶지 않았지만, 눈을 뜨자 모든 게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전학하는 날 엄마가 아라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
‘우리 딸, 절대 기죽지 않기다. 이건 다 아라를 위해서 하는 일이야.’
엄마가 회장님 댁 상주 요리사라는 것을 비밀로 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라는 것이 절대 아니다. 말을 하지 말라는 것뿐이란다.’
‘그래, 어차피 ‘인생은 연극이다’지금부터 아라 인생의 특별한 무대를 꾸미는 거야. 여태 그래 왔듯이 더 열심히 노력하는 거야. ‘꿈은 이루어진다!’
엄마는 아무리 힘들어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고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노력해서 이루었다고 했다. 엄마는 외국인으로서 한국 궁중 요리사 자격증을 딴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것도 뜻이 있어 취득했다고 했다. 한국말은 한국 사람과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잘한다. 검정고시로 방송대까지 졸업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제일 규모가 큰 의류공장 구내식당 조리 담당 팀장이 되었다. 입맛 까다로운 회장님이 엄마 요리를 좋아했다. 그리고 회장님 댁 상주 요리사로 발탁되었다. 별채까지 제공받는 조건이었다. 그 이상의 이유는 아라는 모른다.
‘아라, 이것만 명심해. 꿈이 없는 삶이 가난한 것이지 꿈을 가지면 마음이 부자가 된다는 것 말이야. 엄마는 늘 최선을 다 한단다. 우리 딸을 위해서는 모든 희생을 할 각오도 되어 있으니까.’
엄마는 여기로 이사 온 이후 자신이 동남아시아 인이라 아라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마음을 졸이는 것 같았다. 아라가 디지털 산업 의류단지 학교에 다닐 때 엄마는 영어 일 일 교사였다. 그리고 방과 후 영어 도우미도 했다. 엄마는 노래도 잘해서 성당 성가대에서 활동하고 어린이반에서 영어도 가르쳤다. 엄마는 글도 잘 쓴다. 아직은 아마추어지만, 언젠가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거라고 믿는다. 지금까지의 일들이 일기장을 보듯이 아라 머릿속에 나열되었다. 그런 엄마를 이곳에서는 감추고 싶은 엄마가 되어버렸다. 속상했다.
전학 온 첫날 다섯째 시간은 음악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느닷없이 아라에게 노래를 시켰다. 선생님 말씀은 전학 왔으니 서먹한 관계 회복 차원이라고 했다. 아라는 엄마가 늘 자장가로 불러주던 그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그 노래라면 자신이 있었다. 그 자장가는 한국말도 아니고 영어도 아닌 타갈로그어로 된 노래다. 아라는 눈을 지그시 감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잘 자라 우리 아가
산새도 풀벌레도 쉬-잇!
구름도 산들바람도 쉬-잇!
잘 자라 우리 아가
토닥토닥!
아가도 새근새근
산새도 풀벌레도 잠이 들고
구름도 산들바람도 잠이 들고
잘 자라 우리 아가
토닥토닥!
노래가 끝나자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와! 완전 짱이다.”
준이 목소리가 제일 컸다.
나라는 노래가 끝났는데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그 자장가가 나라 마음마저 사로잡은 것일까. 나라의 얼굴이 참 편안해 보였다.
“이 노래는 타갈로그어 자장가에요. 이 타갈로그어 자장가는 필리핀 원주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 오는 자장가라 태교로 아기에게 들려 줘요. 그곳 아이들은 이 자장가를 잘 알아요.
“그래서 태교가 중요하다고 해요. 그게 바로 부모에게서 받은 소질이라는 것이기도 하고요.”
선생님이 설명하셨다.
“그러면 너네 엄마가 그쪽 사람이야?”
지진아가 하는 말에 순간 당황했다.
“리차드 아내가 한국 사람이라 했으니 당연히 아라 엄마도 한국 사람이지. 안 그러냐? 아라!”
아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안한 게 아니라 못한 것이었다.
“참, 리차드가 오래전에 필리핀에 선교활동을 간적이 있대. 리차드는 그곳에서 딸을 낳아 키웠다고 들었어. 그 딸이 아라고. 내 말 맞지 아라?”
준이의 상상력은 아라를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6. 나라, 나라와 아라 그리고 이모
“오늘 나라 이모 볼 수 있겠네. 우리 사인 해 주는 거지?”
“당연하지. 사인 받을 예쁜 카드는 준비했겠지? 줄서 봐. 번호 정해 줄게.”
아이들이 서로 먼저 번호를 받으려고 난리였다.
학부모님들의 차가 하나둘 운동장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운동장에는 고급 자동차 판매점을 방불케 했다. 대부분이 엄마들인데 수아 아빠와 찬이 아빠가 유일했다. 이모가 아직 오지 않았다.
‘분명 아침에 온다고 했는데 어디 아픈가?’
이모는 빈혈이 있어 간혹 현기증을 느낀다고 했다. 먹지 않으니 당연했다. 그러면서도 무대에만 서면 힘이 넘치는 표범 같았다.
나라는 자꾸만 창밖을 내다보았다. 작년 참관 수업 때도 이모는 오지 않았다.
“이모, 이번에도 펑크 내면 이모랑 절교다. 각오해!”
“알았어요. 하지만 스케줄 변경이 없어야 할 텐데.”
“그래도 안 돼! 작년에 지진아 패거리들한테 당한 걸 생각하면 속상하단 말이야.”
나라는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창가와 자리를 왔다 갔다 했다.
“나라, 우리 사인 받아야 하는데 혹시 너네 이모 또 안 오시는 거 아니야?”
아이들이 더 안달하는 게 이모 인기를 실감 나게 했다.
“발표할 것 신경 써야지 사인 받을 것 신경 쓰고 있어?”
반장이 나라 앞에 몰려 있는 아이들에게 잔소리했다. 그때 나라 전화에서 ‘카톡’하고 문자가 왔다.
-우리 딸 미안해. 갑자기 신상품 설명회가 생겼어. 이모 없어도 잘 할 수 있지? 파이팅!
“이모! 뭐얏!”
전화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이모 못 오신다는 문자야?”
소희 말에 나라는 이마를 찌푸렸다.
“되게 비싸게 노시네.”
“뭐? 뭐라고?”
나라는 지진아의 그 말에 씩씩대며 자리에 앉았다.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셨다.
학부모님들도 자리에 앉았다.
“어머님 아버님, 자제분들의 대견한 모습을 보실 기회입니다. 잘 오셨습니다. 모둠별로 발표가 있겠습니다. 어머님 아버님 서로 인사 나누어 주세요.”
인사하느라 잠깐 교실이 소란스러웠다. 반장이 사회를 맡았다.
“각 모둠마다 준비하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먼저 1모둠부터 발표하겠습니다.”
1모둠인 준이 모둠이 앞으로 나왔다.
“우리 모둠은 경제에 대해 준비했습니다. 경제 전문가이신 저희 아버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준이와 모둠원이 ppt 경제 지표 그래프 자료 화면을 띄웠다.
먼저 우리나라 GDP 즉 Gross Domestic Product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와우!”
준이는 영어까지 섞어가며 멋지게 발표했다.
“다음 2모둠인 나라 조가 발표하겠습니다. 준비해 주세요.”
모둠 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아라는 청바지에 흰 티셔츠 차림이었다. 확! 짜증이 났다.
“넌 맨날 청바지 밖에 없어? 오늘 같은 날은 다른 옷 좀 입고 와야지? 짜증 나!”
“나라, 아라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그건 아라 개성인데. 배려하는 마음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어.”
지진아가 아라를 두둔하고 나섰다.
“뭐? 너 언제부터 그리 착해졌는데?”
나라는 시무룩해서 모둠 원들과 편집한 이모 패션쇼 ppt 자료 영상을 띄웠다. 패션쇼 영상이 끝나자 모두가 일어서서 기립 손뼉을 쳤다. 나라는 ppt 자료 설명을 하면서도 신이 나지 않았다.
“우리나라 패션계를 대표하는 지젤 패션쇼였습니다. 우리 반에는 저를 비롯해 모델이 되고 싶거나 의상 디자이너나 의상 큐레이터가 되고 싶은 친구들이 있습니다. 우리 친구들이 미래의 세계 K패션모델, K패션디자이너, K패션큐레이터가 될 겁니다. 그 친구들한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첫 번째 작품은 ‘꽃과 보석’이라는 작품인데요. 제가 입고 있는 이 옷이 그 작품입니다.”
그때 뒷문이 조용히 열렸다. 나라는 뒷문으로 달려갔다.
“이모!”
나라는 달려가 이모 품에 안겼다. 눈물이 확 쏟아졌다.
‘우리 딸 많이 서운했구나. 늦어 미안해!
이모가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귓속말로 했다. 이모가 딸이라고 하는 바람에 나라는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지젤이닷!”
소희가 큰 소리로 말했다.
“와! 지젤, 지젤!”
아이들이 환호했다. 교실 안이 빛이 나는 듯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모델이자 나라 이모 지젤님이 오셨습니다.”
반장이 소개하자 이모가 묵례했다. 축 처졌던 나라 어깨가 쫙 펴졌다.
모둠에서 준비한 음악 ‘Jordan Sparks- One step at a Time’을 틀었다.
“똑, 똑, 똑, 똑, 똑!”
“이 음악은 제가 오디션 받을 때 ‘패션 쥬얼리’회장님께서 선정해 주신 음악입니다.”
일정하게 들리는 배경 음악 구두 발소리에 맞춰 나라가 스텝을 밟았다.
아라가 나와서 함께 스텝을 밟았다.
‘어?’
나라는 예상도 못한 일에 깜짝 놀랐다.
‘지가 언제 스텝을 밟아 봤다고, 감히 내 옆에서 스텝을 밟아? 키는 작아가지고. 옷은 또 이래가지고.’
하지만 아라 손을 잡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와! 아라 귀엽다. 원더풀!”
아라의 빈티 청바지와 헐렁한 흰색 티셔츠가 의외로 나라가 입은 원피스와 잘 어울렸다. 나라는 잡았던 아라 손을 놓고 의도적으로 한 발짝 앞으로 나갔다. 그때 이모가 나와서 아라 옆에 섰다.
‘이모!’
나라는 눈짓으로 이모를 불렀다. 이모가 나라를 향해 윙크를 했다. 셋이서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았다. 완벽한 패션쇼 환상의 무대가 되었다. 관객들은 스텝에 맞춰 손뼉을 쳤다.
“쩍, 짝, 짝!”
“지젤! 지젤! 아라! 아라!”
아이들이 아라와 이모만 연호하자 나라 스텝이 엇박자가 되고 말았다. 넘어질 뻔했다.
“우-!”
아이들이 야유를 보냈다.
‘야! 너 때문이잖아?’눈총을 주었지만 아라는 이모랑 너무나 자연스럽게 스텝을 맞추고 있었다. 전에 나라가 이모랑 아동 패션쇼를 함께 하는 것 같았다. 아라가 자꾸만 눈에 거슬렸다.
“앗!”
나라는 결국 아라 발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자존심 상해 눈물이 나려고 했지만, 꾹 참았다.
‘최고의 모델은 실수도 잘 극복해야 하는 거야.’
이모가 한말이 생각났다.
관중석에서 저, 저런! 하는 소리와 우! 하는 아이들 야유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이모와 아라가 동시에 손을 내밀었다. 이모 손을 잡고 싶었지만, 양손을 내밀어 동시에 잡았다.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스텝을 연결시켰다. 관중석에서 더 큰 박수 소리와 나라를 향한 연호가 터져 나왔다.
“나라! 나라!”
나라, 아라 그리고 이모 순으로 아라가 가운데 섰다. 셋은 손을 잡았다. 아라가 그네에 매달리는 느낌이었다. 그 바람에 교실 열기는 다시 달아올랐다. 스텝이 끝났는데도 한참 동안 교실의 열기는 가시지 않았다. 참관수업 패션 무대는 나라의 실수가 있었지만 대성공이었다.
“무대가 세 사람이 서기에는 좁아 나라가 아라 발에 걸려 넘어지는 실수가 있었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마무리를 잘해 준 나라와 아라에게 박수 보내주세요. 그리고, 귀한 쇼를 보여주신 지젤님께도 힘찬 박수 보내주세요.”
반장이 소란해진 분위기를 바로잡았다.
“이번에 발표할 모둠은 지진아 모둠입니다. 변호사인 엄마의 도움을 받아 어린이들이 보호 받아야 할 몇 가지 상식에 대해 발표 하겠다고 합니다. 지진아 그룹 나와 주세요.”
“요즈음 자주 일어나고 있는 아동 성폭력 범죄와 가정폭력, 유괴실태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아동학대보호법이 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동 유괴 성범죄와 가정 폭력까지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아동을 보호하기 위해 가정에서 철저히 교육을 시켜서 아이들을 밖으로 내 보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어른을 불신하는 사례가 있어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고 봅니다. 아이들이 마음 놓고 거리를 나 다닐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봅니다.”
“쯧쯧! 큰일이네요.”
부모님들의 얼굴에 걱정하는 빛이 역력했다. 지진아도 멋지게 발표를 했다.
“이번에 발표할 4모둠은 의학박사님인 아빠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데 궁금합니다. 수아 발표해 주세요.”
7. 수아의 프레젠테이션
수아 모둠원들이 영상 자료를 띄웠다. 배경이 우리나라가 아니었다. 숙소 같은데 모여 있는 여자들이 모두 배가 불룩했다.
“뭐야? 우리 반에서 누가 임신한 사람 있어?”
준이가 소리 지르자 학부모님들도 의아한 눈으로 서로 바라보며 소란스러웠다.
“이 영상 장면은 대리모 집단에 관한 고발 자료인데요. 대리모란 모두 아시겠지만, 사전적인 뜻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부부나 아이의 양육을 원하는 독신자를 위하여 아기를 대신 낳아주는 여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대리모 집단에서는 사전상의 의미를 무시하고 불법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의아해하시겠지만, 영상을 보시면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저희가 어른이 될 때쯤이면 대리모를 통해서 아이를 가질 확률이 높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담겨있습니다. 그냥 아이들이 하는 거라고 가볍게 생각하지 마시고, ‘우리 아이가 저런 시대에 살겠구나.’ 하는 걱정으로 영상을 보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단해! 마냥 어린 아이인 줄만 알았는데, 언제 우리 아이들이 저렇게 자랐죠?”
한 어머니가 말하자. 다른 쪽에서는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이모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선생님이 이모에게 달려갔다. 나라도 달려갔다.
“아, 괜찮습니다. 요즈음 피로가 겹쳐서 그런가 봐요.”
수아는 프레젠테이션을 멈추었다.
“아, 수선을 피워 죄송합니다. 제 팬들이 서운 할까 봐 왔는데 도리어 방해가 되었군요. 수아 학생 계속하세요. 난 괜찮아요.”
이모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계속하겠습니다. 다음 영상은 중국에서 일어난 사건인데요. 우리나라에서도 헤드라인 뉴스로 얼마 전에 다루었습니다.”
수아는 영상을 보며 전문가처럼 설명하기 시작했다.
“임신할 수 있는 젊은 부부들이 열 달 동안 고생하는 게 싫어서, 아니면 자신의 몸매가 망가지는 것을 염려해서 대리모를 고용한다고 해요. 그 특별한 예는 중국 유명 배우 대리모 사건인데요. 다 아시겠지만, 한 번 더 상기하는 차원에서 영상 보시겠습니다.”
수아는 준비해온 영상을 틀었다.
중국 유명 배우의 ‘#대리모 반품사건’ ‘#생명은 상품이 아냐.’ ‘#7개월이나 되어 떼어버릴 수도 없네.’ 뉴스의 타이틀 글에 해시태그가 붙어있었다.
“중국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 여배우가‘7개월이나 되어 떼어버릴 수도 없네.’라고 한 이 말이 전 세계에 타전되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저, 저, 저런! 저 몹쓸 인간 같으니라고.”
학부모들이 난리였다. 수아가 보충 설명을 했다.
“중국 여배우가 자신의 남편 정자를 받아 대리모를 고용한 사건입니다. 배양한 아기가 7개월이 되었을 때, 그들이 이혼하게 되면서 사건이 불거진 겁니다.”
뉴스를 처음 본 엄마들이 그 여배우가 내뱉는 말에 더 흥분했다.
“아기를 애완동물 취급하는 이기주의의 여성들이 정자은행에서 정자를 사서 대리모를 고용한다고도 합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자신의 아빠가 누구인지, 정체성이 없는 아이가 되고 말지요. 그래서 대리모를 인간 인큐베이터라고도 한답니다. 하지만 난임 여성이나 일하는 여성이 늘어나면서 대리모는 앞으로 커다란 산업으로 경제 발전에 자리매김할 수도 있다는 보고가 나왔습니다. 하나의 산업이 된다는 것이지요. 또한 저 출산으로 인하여 인구가 줄어드는 것도 막을 수 있는 대안이라고 학계에서는 긍정적인 반응도 있답니다.”
수아는 잠깐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시작했다.
“또한 동성 부부들을 위해 캐나다 여성들은 자신의 건강한 몸으로 대리모 봉사를 한다고 해요. 그렇게 하면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된다고 하네요.”
“학생! 그 자료는 아이들이 보기에는 적절치 않심니더.”
“아닙니다. 어머님! 저희들 5학년이면 충분히 이해할 만큼 자랐다고 봅니다. 그리고 대부분 아이들이 이미 가정에서 TV로 시청했고요.”
“아, 아니, 저, 저런……,”
변호사인 지진아 이모가 수아 프레젠테이션이 아이들한테 유해하다고 지적했다.
학부모들과 아이들이 술렁였다.
“어머님들 조용히 해 주시고, 수아 모둠은 계속 발표하세요.”
반장이 분위기를 바로잡았다. 수아는 계속해서 진행했다.
“그런가 하면 젊은 부부들이 아기를 낳지 않으려고 해요. 만약 이대로라면 300년 뒤에는 지구에 인간이 멸종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 분야연구팀에서는 인공 수정으로 대리모를 통해 인구를 늘리는 방법도 강구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는 보고입니다. 그 예는 남중국해 인근 해안에 대리모 집성촌이 있다고 해요. 처음 본 영상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일명 ‘아기 공장’이라고 하는데요. 그곳에는 특히 후진국에서 많은 여성이 생계를 위해 대리모에 참여한다고 해요. 그 마을 여성들은 보통 두세 번 이상 대리모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한 대리모의 인터뷰를 보시겠습니다.”
‘대리모를 하는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니까 책임감은 없어요. 하지만 최고의 직업관으로 열 달 동안 최선을 다해요. 임신 중 장애아로 판명되거나 원하지 않는 쌍둥이일 경우 고용 집단에서는 바로 낙태를 시켜버려요. 그렇게 되면 대리모들은 계약 금액을 한 푼도 받지 못해요. 우리의 잘못도 아닌데, 그들의 횡포지요. 그리고 태어난 아이들을 의뢰인이 포기하면 보육원이나 해외로 입양되고요. 그들은 과학을 이용해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셈이 되지요. 그들에게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란 찾아볼 수 없어요. 범죄 조직들은 아기는 단지 그들의 돈벌이 수단일 뿐입니다.”
“쯧쯧! 아이들만 불쌍하네.”
“그건 그들만의 잘못이 아니군요. 대리모를 신청한 그 부부들도 문제네요.”
학부모님들이 혀를 끌끌 차며 의견이 분분했다.
“의뢰인이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혼하면 아이를 찾아가지 않는다는 거네요. 그 중국 여배우 같이요.”
“네, 맞아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의뢰인이 성별을 선택한다고 해요. 혈액형까지도 주문하는 패키지 상품도 있다고 합니다.”
“재미있겠는데요. 갖고 싶은 아기를 가질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는 것 아닙니까? 또 엄마들은 공부 잘하는 아이를 원할 것이고요. 나라처럼 키 크고 예쁜 아이들만 선호할 것 아닙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대박이겠는데요.”
경제부 기자가 꿈인 준이가 떠들었다.
“우-! 준이 넌 다음에 어른이 되면 그렇게 하겠다는 뜻이야?”
“그, 글쎄요.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지.”
아이들의 야유에 준이는 꼬리를 내렸다.
“물론 그러한 장점도 있겠지만, 그러다 보니 불법으로 행해지는 끔찍한 사건도 일어난다고 합니다. 대리모 할 젊은 여성이 없어 납치하는 사건도 있다고 해요. 또한 그 집단의 횡포를 견디지 못해 대리모가 그곳을 탈출해서 폭로하는 바람에 세상에 알려지기도 했고요. 대리모가 아이의 출생 비밀을 폭로하겠다고 생물학적 부모를 협박해 금품을 요구하다 법정구속까지 되는 예도 있었다고 해요.”
“그렇다면 해결책도 있어야 할 것 아닙니꺼.”
변호사인 지진아 어머니가 말했다.
“어떤 해결책이 있는지 변호사님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대리모 여성의 인권과 아이의 생명이 침해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대리모와 의뢰인 모두 합의 할 수 있는 법안이 마련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인 것 같군요.”
“네 변호사님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아까 대리모 인터뷰에서도 말했지만, 대리모들은 책임감이 없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어쨌든 수태를 한다는 것은 이유를 막론하고 생명에 대한 존엄성은 지켜야 한다고 봅니다. 기분에 따라 행동하다 보니 중국 여배우 같은 사건도 일어나고요. 보호받고 사랑받아야 할 어린 생명이 어른들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결국 피해자는 어린이입니다. 대리모, 아이, 의뢰인 모두 보호받을 수 있는 법안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데에 찬성합니다.”
“버림받은 그 아이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아파도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합니다.그 아이들을 위해 전 세계보건기구에서 경제적인 뒷받침도 마련되어야 하겠습니다.”
“변호사, 의학박사, 경제 전문가이신 세 분 말씀 감사합니다. 좋은 부모님께 사랑받으며 태어나 부유하게 사는 여러분은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학부모 참관수업은 모두가 만족했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부모님을 향해 감사하다는 인사 한 번 해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엄마, 아빠!”
아이들과 부모님들이 마주보고 두 팔을 올려 하트를 만들었다.
나라는 멋진 아빠가 있는 수아가 부러웠다. 이모가 앉아있던 자리가 비어있었다. 학부모들은 금세 친해져 삼삼오오 짝을 지어 돌아갔다.
‘화장실 가셨나?’
나라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이모! 이모!”
대답이 없었다. 나라는 힘없이 교실로 다시 돌아왔다. 아이들이 나라에게 몰려와 따졌다. 특히 지진아가 못되게 굴었다.
“네 이모 도도하고 이기주의라고 소문났더니 진짜네. 완전 우리를 갖고 논 거였잖아. 안 그러니 애들아!”
“뭐야? 정말 이럴래? 우리 수업을 위해 귀한 시간 내서 멋진 스텝까지 선보였으면 됐지 않아? 사인은 다음에도 받을 수 있잖아? 이모를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용서 못 해!”
“그까짓 사인 우리가 그거 못 받아 이러는 줄 알아? 착각하고 있네. 그래, 용서 못 하면 어쩔 건데? 아빠도 없는 주제에. 애들아, 나라와 나라 이모 이상하지 않니? 왜 나라는 이모랑 판박이처럼 닮았지? 아무리 그래도 이모랑 저렇게 닮지는 않거든. 혹시 네 이모가 아니라 네 이모가 숨겨놓은 딸 아니니? 그러니까 너가 지젤 딸이라는 거지. 안 그러냐?”
“뭐? 뭐라고? 너 명예 훼손죄인 거 알아? 네 엄마가 변호사니까 그 분야에 대해선 네가 더 잘 알겠네.”
“아니면 말고. 얘들아, 가자. 팬클럽에서 탈퇴하자. 그리고 악플 남길 거다.”
“지진아 너! 그까짓 사인이라고 했니? 그래 악플 달아봐. 그랬단 악성댓글신고 할 거니까.”
나라가 명예훼손 운운하니까 지진아가 발뺌하고 교실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소희가 발끈하고 나섰다.
“야, 지진아 너무하는 거 아니야? 너 횡포 못 봐주겠다. 그것하고 아빠 없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야. 나도 아빠 안 계신다. 왜? 그리고 나라이모는 나라엄마랑 똑 닮은 쌍둥이였대. 맞지? 나라!”
소희 아빠는 삼 년 전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소희가 나라 옆에 바짝 붙어 눈물까지 흘리며 옹호했다. 소희가 고마웠다. 하지만, 나라도 이모의 이상한 행동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긴 마찬가지였다. 자신도 이런 일이 있으면 더 참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이해하려고 했지만, 이모에게 나쁜 일이 일어났을까 봐 더 걱정되었다.
8. 아라, 엄마의 이야기
아이들이 한바탕 소란을 피우더니 교실이 조용해졌다. 나라 이모는 정말 멋졌다. 약간 창백해 보이는 얼굴이 지적이기까지 했다.
‘수업이 끝나기도 전에 왜 갔을까? 아이들이 수업이 끝나면 사인 받으려고 잔뜩 기대하고 있는 줄 아실 텐데. 진짜 어디 편찮으신가?’
아라는 괜히 걱정되는 이유를 모르겠다. 아라는 걸으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떠올려보았다. 나라 이모에게서 묘한 감정을 느꼈다. 스텝을 밟을 때 가까이서 느낀 나라 이모의 따뜻한 온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걸었는데 벌써 대문 앞이었다. 아라는 이 대문을 볼 때마다 낯설었다. 대문 번호 키를 누르는 것이 꼭 벌레를 손가락으로 짓이기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차가운 금속 번호판을 천천히 눌렀다. 대문이 철컹 굉음을 내며 열렸다. 정원에는 정원사 할아버지가 낙엽을 모으고 있었다. 마른 나뭇잎 냄새가 향긋했다. 아라는 별채 일꾼들이 기거하는 건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지진아가 내가 이러고 사는 걸 안다면 자신의 그룹으로 들어오라고나 할까?’
아라는 왠지 우울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아라는 거울 앞에 서서 까치발을 해 보았다. 발끝을 한껏 들어보았다. 그때 준이가 한 말이 생각났다.
‘작은 고추가 맵다 잖냐!’
안 매워도 좋으니 키가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야. 이제 겨우 열두 살이야. 키가 클 기회는 있을 거야.’ 하며 자신을 위로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요즈음 들어 아라는 엄마를 이해하려고 해도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분수에도 맞지 않는 이 학교로 전학을 시킨 것이며, 엄마는 어떻게 필리핀에서 한국에 오게 됐을까? 이런 생각을 했는데 어느새 깜빡 잠이 들었다. 가위에 눌리는 꿈을 꾸었다.
“아악!”
엄마가 도망가는 꿈을 꾸었다.
“웬 잠꼬대를 그렇게 하니? 피곤했나 보구나. 옷을 입은 채로 잠이 들다니.”
아라는 엄마를 보자마자 품속으로 와락 파고들었다.
“아흠! 꿈이었네. 깜짝 놀랐잖아. 엄마 도망간 줄 알고. 히히!”
“도망가긴. 말 안 들으면 생각해 봐야겠다.”
엄마는 농담을 하며 꼭 안아주었다.
“아, 엄마 냄새 좋다!”
아라는 코를 킁킁거렸다.
“오늘 참관수업 어땠어?”
“응, 완전 환상의 패션쇼 무대였는데 나라가 넘어지는 바람에 망칠 뻔했어. 나라 이모가 와서 스텝도 같이 했다.”
아라는 자신도 나가서 스텝을 함께했다고 흥분해서 말했다.
“우리 조 인기 최고였지. 애들도 난리였지만, 엄마 아빠들도 난리였어.”
“그랬구나. 부모님들은 다 오셨어?”
“엄마만 빼고. 얘들이 나라이모 사인 받으려고 난리였어. 나도 받고 싶었는데.”
“못 받았어?”
“응, 수업이 끝나기도 전에 가고 없었어.”
그 때문에 아이들이 나라한테 난리 친 것까지 죄다 말했다.
“니가 좀 말리지 그랬니. 그래서 나라 울었어? 앞으로는 니가 나라 도와줘라.”
“내가 왜?”
“너 약한 사람 잘 도와주잖니. 그러라는 거지 뭐.”
“근데 엄마가 어떻게 나라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아? 나라에 대해 그리 궁금한 게 많은데? 엄마가 나라 엄마야?”
“아, 그 글쎄……. 나라가 내가 엄마라면 좋아할까?”
그 부분에서 분명 나라는 좋아하지 않은 것이다.
엄마는 전에 디지털 산업 의류단지에 있을 때 회장님 회사 모델 잡지에 나온 나라를 보았다고 했다. 나라 이모가 전속모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엄마는 그런 것까지도 알고 있었어?”
“우리 딸 의상디자이너가 꿈이잖아. 그래서 관심이 있는 거지.”
아라는 엄마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옛날 학교 친구들 보고 싶다. 나 이번 주말에 옛날 친구들 만나려 갈까? 엄마!”
“안 돼! 이제 그곳은 잊어버려.”
“아니 왜? 나는 그곳 친구들이 훨씬 더 좋은데. 정도 많고. 난 여기 싫어. 다 지들 잘난 척만 하는 이기주의자들 같아. 우리 도로 그곳으로 이사 가자.”
“안 돼! 엄마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데. 또 그곳으로 가잔 말이야? 이제 넌 그곳하고 신분이 달라.”
엄마 말에 아라는 의아해했다.
“신분? 내 신분이 어떻게 다른데?”
“아, 아니야. 그냥 동네가 다르다는 뜻이야.”
엄마가 꼭 다른 사람같이 느껴졌다. 그렇게 착하던 엄마가 왜 변했는지 모르겠다. 회장님 댁 요리사라는 것, 비밀로 하라는 것까지는 이해 할 수 있다. 다문화가정이라고 하면 특별한 이 학교에서 딸이 왕따 당할까 봐서 그런 줄도 안다. 하지만 이런 거짓말이 얼마나 오래갈까? 아라 자신도 불안한데 엄마까지 이곳에 온 후로 늘 조바심을 내는 것 같아 더 불안했다. 엄마가 지난번 학교에서 여러 가지 활동하던 그때가 훨씬 더 보기 좋았다. 그땐 엄마가 자랑스러웠다.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아라를 부러워했다. 여기서는 회장 할아버지 운전기사까지도 엄마를 업신여기는 걸 보았다.
“안젤라, 나 시간 없어요. 식사 얼른 차려요.”
그 기사 아저씨는 엄마를 도우미 취급했다. 아라는 속상해 아저씨한테 소리를 지르며 따졌다.
“아저씨! 우리 엄마가 아저씨 밥 차려 주는 사람인 줄 알아요? 엄마는 요리사라고요. 회사에서 아저씨보다 높은 직책이었단 말이에요. 지금도요.”
“아라, 어른한테 말버릇이……, 관둬라.”
“엄마는 자존심도 없어?”
여기 오고 나서 자꾸만 엄마와 거리감이 생기는 것 같았다. 아라는 그런 생각들을 떨쳐버리려고 머리를 흔들었다. 아라의 이런 마음을 엄마가 눈치 챌까 봐 수아 프레젠테이션 이야기를 꺼냈다.
“참, 엄마, 수아라는 얘. 걔 아빠가 부인과 의학박사라고. 지난번에 내가 말했지? 빨간 머리 앤을 닮았다고 한 아이 말이야.”
“기억나는 것 같기도 하고. 왜?”
“걔도 부인과 의사가 되는 게 꿈이래. 하여튼 걔가 오늘 발표한 게 뭔 줄 알아?”
“주제가 뭐였기에?”
“대리모에 대해서 발표했는데, 엄마, 대리모 알아?”
아라는 수아 프레젠테이션에 등장하는 해시태그를 나열했다. #인큐베이터, #아기 공장, #대리모, #대리모 집성촌, #입양 등.
갑자기 엄마 얼굴이 노랗게 변했다. 아라는 놀라 엄마를 붙잡고 흔들었다.
“엄마, 왜 그래? 어디 아파? 안색이 안 좋아.”
엄마는 가슴을 붙잡고 손사래를 치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라야, 물, 물…….”
아라는 물 컵을 엄마 입에 갔다 댔다.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엄마 좀 눕고 싶구나.”
“엄마 병원 안 가도 괜찮겠어?”
아라가 알기로는 엄마는 한 번도 아프다고 자리에 누운 적이 없었다. 그런 엄마가 지금 침대에 누웠다.
“엄만 가난이 평생 죄가 될 줄 몰랐어. 어쩔 수 없었어.”
“또 그 이야기. 뭐가 어쩔 수 없었다는 거야? 엄마는 지금도 충분해. 아빠 없어도 아라 잘하고 있잖아. 엄마 가만 누워 있어. 오늘은 내가 다 할게.”
아라는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었다.
“내 딸 다 컸네. 이엄마가 미안해!”
엄마는 아라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흐느꼈다.
“엄마, 울지 마.”
엄마는 모든 이야기를 그 날 아라에게 해 주었다.
아라는 엄마를 거리감 두었던 게 후회되었다. 엄마는 기절하듯이 금세 잠이 들었다. 엄마 가슴에 가만히 귀를 대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왔다.
9. 나라, 엄마의 태교는 스텝
나라는 스마트 폰 큐알 카드로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이모 구두가 현관에 놓여 있었다.
“이모?”
“응, 나라 왔어?”
“이모, 왜 나한테 간다는 말도 없이 도망갔어?”
이모는 막 왔는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아, 미안. 그치만 도망은 아니다.”
“이모가 없어지는 바람에 내가 친구들한테 얼마나 시달렸다고. 얘들이 팬클럽 탈퇴한대. 그리고 악플도 단다고 했어.”
나라는 이모를 보자 왈칵 설움이 복받쳤다.
“에고, 우리 딸 속상했구나. 회사에서 급한 연락이 와서 네게 말하면 방해 될까 봐 몰래 나온 것뿐이야.”
이모는 나라를 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다 큰 게 울긴. 그런 것 신경 쓰지 말고 이 지퍼 좀 내려 주라.”
이모는 나라를 안고 있던 팔을 풀고 등을 내밀었다.
“이모는 아무렇지도 않아? 팬들이 그러면 인기 떨어질 건데.”
“나라야, 이모는 인기로 모델 하는 게 아니야. 네가 알다시피 이모는 피나는 노력을 하잖니.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도 그냥 걷는 게 아니라 혼을 불어넣는단다. 누구도 이모 흉내 못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라.”
이럴 때 이모의 도도한 표정이 오히려 지적으로 보였다. 누구도 흠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는 그런 압도적인 분위기랄까? 그런 이모를 나라는 사랑했다. 신기할 정도로 그 모든 것을 나라는 이모를 더 닮아 갔다. 그래서 나라는 자신의 로망으로 이모를 꼽았다.
“그렇지? 이모는 인기 같은 거로 하는 게 아니지. 휴! 다행이다. 나라 얼마나 걱정 한 줄 알아? 걔들이 악플 달면 장난 아니 거든. 악플로 자살하는 연예인도 있잖아.”
“넌, 이모가 아픈지 걱정은 안 하고 고작 그런 말이나 하고 그래?”
“아, 미안. 이모 이제 아프지 않아?”
“일찍이도 물어보네.”
“히히! 이모 사랑해!”
나라는 이모를 꽉 껴안았다. 그리고 이모 원피스 등 지퍼를 내려주었다. 피부가 정말 고왔다. 이모의 맨살을 만져보고 싶었다. 나라는 이모 맨살 등을 쓰다듬었다.
“아이 깜짝이야!”
이모는 반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벌레라도 떼어내듯이 탈탈 털어냈다. 아니 괴한이 자신의 몸을 만진 것처럼 소스라치며 놀랐다. 나라도 깜짝 놀라 한걸음 물러났다. 한동안 이모 얼굴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놀라 다른 행동을 할 수조차 없었다. 조금 전의 이모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겨우 입을 열어 말을 했다.
“이모! 미안 해. 이모가 정말 내 엄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나라는 그동안 참았던 울음을 서럽게 터뜨렸다. 이모도 놀랐는지 멍한 상태로 서 있었다.
“아, 미, 미안. 여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이모 놀라게.”
“이모, 정말 미안해!”
“아, 아니야! 우리 딸 엄마가 많이 보고 싶었구나. 이모가 잘해 주려고 애섰는데 아무려면 엄마만 하겠니.”
이모는 나라를 품에 꼭 안았다.
“이모! 엄마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 해 주라.”
“이제 잊어버려. 벌써 7년이나 지났는데. 그리고 너는 엄마가 계실 때도 이모를 더 따랐지 엄마를 따르지 않았어. 근데 지금 와서……. 이모가 엄마 생각나지 않게 더 잘해 줄게.”
이모도 그 말을 하면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불쌍한 것. 앞으로 엄마라 불러. 이제 당당히 딸로 키울 거야.”
“이렇게 큰 딸이 있는 것 소문나면 이모 모델 생명 끝나는 거 아니야?”
“그러면 나라가 이모 먹여 살리면 되지. 나라도 모델인데. 안 그려니?”
“아, 맞다. 나라가 이모 책임질게.”
“하하, 좋았어. 배고프겠다. 우리 탕수육 시켜 먹을까?”
“아, 안 돼! 이모 다이어트!”
“괜찮아. 이제 나라가 다이어트 해야겠구나?”
“하하, 호호!”
우리는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 마주보고 웃었다.
그러고 보니 나라는 이모의 맨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집에 있는 자쿠지에서도 함께 목욕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왜일까?
‘그래, 이모는 늘 바빠 함께 목욕할 시간이 없었지.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고 했으니까.’
나라는 그렇게 마음을 달래며 이모에게 눈을 흘겨주었다.
“아까 소리 질러 미안해. 이모가 무심결에 놀랐나 봐.”
“이모는 무슨 트라우마가 있어? 그러니 남자친구가 없지.”
“요 깍쟁이. 이모 시집간다면 나라가 허락할래?”
“글쎄? 하는 거 봐서.”
“요게.”
이모는 나라 코끝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나라는 이모가 결혼할 거란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이모는 나라를 두고 결혼을 할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 같았으니까. 오로지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랄까. 이모만큼 젊고 예쁘고 화려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여자가 애인이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될 것 같은데, 나라는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남자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걸까? 만약 이모한테 애인이 생긴다?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이모를 누구와도 나누기 싫었다. 나라는 참 이기주의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모, 오늘 학교에 와줘서 고마워. 하지만 도망간 건 미워!”
“또 도망이란다. 우리 딸 기죽을까 봐서 부랴부랴 갔었는데. 안 그러니?”
이모는 안정이 되는지 농담까지 했다.
“아, 그렇지? 지네들 생각 해 준 줄도 모르고 괘씸한 것들! 하지만, 지진아 패거리들한테 시달린 걸 생각하면 이모가 밉단 말이야.”
“저런, 마음 풀어. 그나저나 너 안 하던 실수를 하더라. 왜 스텝을 놓친 거니?”
“아, 그것? 아라 걔한테 신경 쓰느라.”
“참, 걔 아라라 했니? 누구한테 사사 받는데? 처음 해 본 스텝이 아니던데.”
“아니야. 걔 아무한테도 사사 안 받는대. 키는 작아가지고 무슨 모델 사사는? 걔 의상 디자이너가 꿈이래.”
이모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모는 뭔가 잠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더니 말했다.
“걔 오래전부터 이모가 알고 있는 것 같은 거 있지.”
“그래서 스텝 끝나고 아라를 꼭 안아줬구나? 나 질투 날 뻔했어. 꼭 떨어져 있던 모녀가 오랜만에 만난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암튼 특별났어.”
“걔 엄마는?”
“엄마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어. 한국 사람이라고 하던데.”
나라는 아라에 대해서도 아는 만큼 이모한테 다 말해 주었다. 아라 할아버지가 ‘패션 쥬얼리’회장님이라는 것만 쏙 빼고.
“이모, 태교 때 들은 자장가라든가 이야기는 평생 기억에 남아 있다고 하던데 정말이야?”
“글쎄……!”
“이모, 우리엄마는 나 임신했을 때 어떤 태교를 했대?”
“으응……. 글쎄? 갑자기 태교는?”
“아라 걔 말이야. 엄마가 태교로 자장가 불러줬다며 그 자장가 부르는데 엄청 잘 부르더라. 울 엄마는 태교 안 했대?”
“아마, 네 엄마는 일하느라 따로 태교할 시간이 없었을 거야. 엄마도 모델이었으니까 스텝과 음악 듣는 게 태교 아니었을까? 그래서 네가 스텝을 잘 밟는지도 모르지. 음악에 대한 감각도 뛰어나고.”
“아…….”
이모를 보면 그렇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모는 탕수육을 볼이 미어지게 입에 넣으며 말했다.
“우리 낼부터 다이어트하자. 이모 오늘은 실컷 먹어보고 싶다.”
“히히, 나도. 하지만, 이모는 절대 살 안 쪄. 신이내린 몸매잖아. 이모 입가 좀 봐! 우리 사진 찍자.”
입가에 탕수육 소스가 듬뿍 묻은 채로 셀카로 사진을 찍었다. 나라는 오늘 마냥 행복했다. 아빠만 있으면 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모, 아빠 보고 싶다. 엄마는 아빠 사진도 안 남겼어?”
“나라야, 이모가 미안해.”
“미안하면 아빠 이야기 해 주라. 응? 난 엄마도 아빠도 없고. 이모마저 없으면 고아잖아. 엉엉! 난 뭐야? 제발 이모!”
나라는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빠가 없다고 지진아한테 무시당한 것 생각하면 더 서러움이 복받쳤다.
“이모, 말해 줄 거지? 흐흑!”
“아빠는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했잖니. 다음에 니가 더 크면…….”
이모는 끝끝내 말을 하지 않았다.
10. 아라, 딱 30분 아빠
아라가 전학 온 지 거의 한 달이 되었다.
그날은 늦가을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아라는 여느 날보다 일찍 학교에 가려고 우산을 들고 대문을 나섰다. 이른 아침이라 저택의 골목길은 등교하는 아이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고급 자가용만이 즐비하게 오갈 뿐이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우산을 썼지만 이미 옷은 다 젖었다. 아라는 땅만 보고 걸었다. 발밑에 으깨지는 낙엽이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왠지 오늘은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전에 다니던 학교 그 아이들이 오늘따라 더 보고 싶었다.
‘엄마가 좋아하는 필리핀아이 코트니는 옷을 잘 챙겨 입을까? 베트남아이 안은 머리를 잘 빗고 다닐까? 조선족인 영지는 신발을 잘 빨아 신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왔다. 아라는 전철 쪽으로 발길을 옮겨 뛰다시피 걸어갔다. 마음은 이미 그 학교에 가 있었다.
‘내 그림이 아직 교실 게시판에 걸려 있을까? 전국 백일장에서 내가 상 받은 동시도 학교 게시판에 그대로 있을까? 그런 생각에 젖어 급하게 걸어가는데 이 골목과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작은 노란 물방개 모양 승용차 한 대가 아라 옆으로 지나갔다. 그러더니 후진을 하고 와서 아라 옆에 섰다.
‘어어!’
하마터면 차에 부딪칠 뻔했다. 조수석 창문이 스르르 내려왔다.
“미안, 굿모닝!”
차 안의 낯익은 사람을 확인하고 아라는 깜짝 놀랐다.
“굿모닝! 일찍 학교 가는구나? 저런, 옷이 다 젖었네. 아저씨가 학교까지 태워다 줄까?”
“아, 안녕하세요? 리차드 라모스 아저씨 맞죠?”
아라는 엉겁결에 인사하며 물었다.
“그래, 그런데 이 길은 학교 가는 길과는 반대쪽이잖니?”
늘 가슴 속 아빠로 품고 있던 리차드 라모스 아저씨! 아라는 혹시 길에서라도 마주치길 은근히 바라고 있던 터였는데 이렇게 만나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는 TV에서 아저씨를 뵈어 알 수 있지만, 아저씨가 저를 아세요?”
“그럼 알지. 내 이웃이잖아. 어서 타. 옷 다 젖는다.”
아라는 아저씨 옆자리에 탔다. 이미 리차드 아저씨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낯설지 않았다. 아저씨한테 아라와 동갑인 딸이 있다는 게 생각났다.
“아저씨 해수 잘 있어요? 해수는 국제학교 다니죠?”
“그걸 어떻게 아니?”
“우리는 이웃이잖아요. 후후!”
“그렇지. 이웃! 근데 너 지금 학교 안 가고 땡땡이치려고 했구나? 네 얼굴에 쓰여 있거든.”
“헤헤, 딱 맞췄어요. 옛날 친구 보고 싶어 그 학교로 가려고 했어요.”
“비가 오니 갑자기 친구들이 보고 싶었구나?”
“네.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대신 아저씨를 만났잖아요.”
아라는 여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이야기했다. 아저씨한테만큼은 숨기고 싶지 않았다. 엄마 이야기도. 왜일까?
“참, 네 이름이 뭐지?”
“아, 제 이름은 아라 라모스고요. 이모 성이 라모스에요. 아빠가 안 계세요. 그래서 우리 반 아이들이 리차드 라모스 딸로 오인했어요. 이 동네로 이사 올 아이 정도면 당연히 부잣집이거나 특별한 아이인 줄 알았던 거죠. 제가 회장님 댁 요리사 딸이라는 건 상상도 못 했을 거예요. 그래서 저 아저씨 개인 정보를 인터넷에 검색해서 다 외웠어요. 출연하신 방송 유튜브도 찾아보고요.”
“하하! 재미있구나, 하지만, 아라는 특별하긴 하네. 요리사 딸이니까.”
“그건 그래요.”
“아저씨 만난 선물로 딱 삼십 분만 아라 아빠 해 줄까?”
“정말 그래도 돼요?”
아라의 말소리가 빗속을 뚫고 하늘로 치솟았다. 하지만, 걱정도 되었다.
“우리 속담에 ‘꼬리가 길면 밟힌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밟히지 않을 만큼만 하지 뭐. 후후!”
아저씨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어떻게요?”
“아직 아이들이 학교에 오지 않았을 거야. 아라 아침 먹었니? 안 먹었으면 요 학교 가는 길목 패스트푸드점 있잖아. 아저씨 거기 가서 모닝커피와 간단한 아침 먹을 건데 같이 갈래?”
“아이들이 보면 어쩌려고요?”
“그게 작전인 거지.”
“아, 무슨 뜻인지 알았어요.”
아라는 웃음이 나왔다. 분명 누군가가 아저씨랑 아라를 볼 것이다.
“나중에 학교 앞까지 태워다 줄게.”
“학교 앞까지요?”
교문 앞에까지 아저씨가 태워다 주면 더 많은 아이가 보겠지.
“굿 아이디어인데요. 좋아요. 삼십 분만 아저씨 딸 할게요.”
아라와 아저씨는 하하 크게 웃으며 살짝 팔장까지 끼고 패스트푸드점으로 들어갔다. 다정한 아빠와 딸처럼.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일어서니까 아저씨도 미국인 치고는 키가 작았다.
“왜? 내 키가 작아 실망했니?”
“저도 작잖아요.”
“하하! 그렇지.”
큰소리로 웃는 바람에 매장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되었다. 아저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의자를 빼주며 앉으라고 했다. 그런 아저씨가 근사했다.
“아라, 뭐 먹을래?”
“전 잘 몰라요.”
아저씨가 치즈 & 에그 베이글과 우유를 시켜주었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 내내 수다를 떨었다. 늘 해오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는 백화점 좋아하지 않아요. 동대문시장, 남대문시장 좋아해요.”
아라가 우유를 마시며 아저씨 흉내를 냈다. 아저씨도 하하! 호탕하게 웃었다.
“아저씨. 지금 입고 계신 옷은 어느 시장 메이커예요?”
“쉿! 누가 들어. 아빠!”
아저씨가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입에 대고 말하였다. 아라도 손가락을 입에 얼른 갔다 댔다.
“하하, 이거? 아라가 맞춰 봐!”
“남대문 표 맞죠? 저도 엄마랑 간혹 갔어요.”
아라는 삼십 분이 너무 짧아 아쉬웠다. 리차드 아저씨는 교문 앞에 차를 세웠다. 아저씨가 내려서 아라 쪽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아라를 가볍게 안아 주며 작별 인사를 하며 말했다.
“아라,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거야. 그냥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아라 엄마를 보렴. 그 열악한 환경에서도 꿋꿋이 살아오셨잖아. 용기를 잃지 마. 아라 파이팅!”
“파이팅! 고맙습니다.”
잠깐이었지만 아라는 행복했다.
이미 비는 그쳐있었다. 아라는 아저씨를 향해 손을 흔들며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었다. 아쉬운 듯 돌아서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서 교실로 들어갔다. 아이들이 몇몇 와 있었다.
“굿 모닝 아라, 아빠가 태워 주었구나. 요 앞 패스트푸드에서 아침도 함께 먹더라.”
준이가 쪼르르 달려와 말했다.
“으, 응!”
“와, 멋지더라. 역시 검소하셔. 그 정도면 벤츠나 BMW를 타셔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면 페라리라든지.”
“사치하는 거 싫어하시잖아. 매일 지하철 타시는데 오늘 비와서 그나마 승용차타신 거야.”
아라는 이제 좀 뻔뻔해지기까지 했다.
“아라, 인제 그만 재고 우리 그룹에 명단 올려. 그리고 내 이름 네 폰에 친추로 저장해 주라. 오잉!”
지진아가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후회할 걸. 무슨 일이 있더라도 후회 안 한다고 약속한다면?”
“후회는 무슨, 우리가 영광이지.”
긴가민가하던 리차드와의 부녀 관계가 확실해지자 아이들이 더 관심을 보였다. 나라가 교실로 들어왔다. 아침부터 나라 얼굴이 그늘이 져 보였다. 아마 어제 지진아 사건 때문 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라는 요즈음 지진아 그룹에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너, 기분 좋아 보인다?”
나라가 아라의 밝은 모습을 보더니 말했다. 아라는 그냥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소희가 나라 곁에 쪼르르 오더니 위로했다.
“나라 이모 무대 한 번 서는데 얼마나 비싼데 그런 무대를 공짜로 관람했으면 고맙게 여겨야지 비아냥거리다니. 정말 못 됐다 너희들!”
소희가 큰소리로 아이들한테 말했다.
“나 그래서 다운된 것 아니야. 소희야. 이제 쟤들 상종도 안 해. 울 이모는 인기로 무대 에 서는 거 아니야. 오로지 실력으로 서는 거야. 그러니까 이렇게 오랫동안 한 소속사와 계약 맺고 있지. 팬들에 의존하는 반짝 인기인이 아니란 말이야.”
나라는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떠들썩하던 교실이 나라의 그 말에 조용해졌다. 지진아도 어제 일이 미안했던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아라는 아이들의 수다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리차드와의 짧은 삼십 분만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아침부터 북적이던 하루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폭탄을 안고 걷는 것처럼 조마조마했다.
11. 나라, 아라의 결석
아라가 백일장 작품 낭독을 하고 난 후, 며칠째 결석중이다. 전학 온 이후 한 번도 결석하지 않던 아이가 이상했다. 오늘도 수업 시작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걱정이 되었다.
“나라, 네 짝 아라는 오늘도 안 와?”
준이가 물었다.
“글쎄?”
나라는 걱정이 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왜 내가 걱정을 하지?’
지진아가 엉뚱한 말을 했다.
“너 둘은 한집에 사는 사람 같은 느낌이야. 혹시 전생에 쌍둥이 아니었니?”
나라 자신도 간혹 그런 착각을 한 적이 있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아라가 스케치할 때 왼손잡이던데, 너도 왼손잡이잖아.”
“왼손 쓰는 사람이 한둘이야? 외국 사람들은 대부분이 왼손 쓰더라 뭐! 글도 왼손으로 쓰던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라랑은 닮은 데가 한둘이 아니었다. 왼손잡이며, 키가 작을 뿐이지 얼굴도 흡사하다. 노래도, 스텝도……. 아라는 수업이 종료되었는데도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아라네 가 볼까? 걸어가기엔 너무 먼데.’
마침 교문 앞에 주택 쪽으로 가는 스쿨버스가 아직 출발하지 않고 서 있었다. 나라는 그 버스에 탔다.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스쿨버스에는 나라 반 아이 몇 명이 있었다.
“어머! 나라야! 넌, 아파트인데 여긴 왜?”
“응, 아라네.”
아이들이 나라에게 관심을 보였지만 금세 차가 출발하자 제자리로 돌아갔다. 스쿨버스가 저택 골목으로 들어섰다. 패션쇼 하던 날 소희 어머니 차를 타고 지나와보고 처음이다. 저만치 회장 할아버지 저택이 보였다.
“아저씨, 저 여기서 좀 내려주세요.”
“그래, 조심해서 내리 거라.”
나라는 아라 집 큰길 입구에서 내려 걸어가기로 했다.
‘내가 가서 뭐라고 하지? 꽃이라도 한 묶음 사 올걸. 왜 학교에 안 왔지? 집에 없으면 어떡하지?’
나라는 오만 가지 걱정이 생겼다. 그리고 자존심도 상했다.
‘내가 왜 아라한테 가는 거지? 걔가 학교에 안 온 거하고 무슨 상관이지?’
나라는 괜히 왔다는 생각에 후회가 되었다. 그러다 뒤돌아서 버렸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려니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속상해 땅만 보고 걷는데 차 소리가 나 고개를 들었다. 물방개 같은 노란색 차 한 대가 오고 있었다. 분명히 아라 아빠 리차드 차였다. 아라가 타야 할 옆자리에 여학생이 앉아 있었다. 분명 국제학교 교복이었다.
‘저 아이가 리차드 딸? 그렇다면 아라는?’
나라는 지나가는 차 꽁무니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차는 아라 집 대문 앞을 지나 3층 빌라 자동 게이트가 열리자 그 안으로 사라졌다. 나라는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내가 귀신에게 홀렸나? 분명 아라가 어제 아침에 리차드 차를 타고 등교했는데.’
나라는 미션 같은 이 사실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머리가 복잡했다. 뭔가 앞으로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저만치서 동남아 아주머니가 무거운 사장 바구니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나라 옆을 지나치려다 고개를 들었다. 나라랑 눈이 딱 마주쳤다. 아주머니가 흠칫 놀랐다. 나라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돌아섰다. 아주머니가 발길을 멈추고 서 있다가 나라가 뒤돌아보자 서둘러 가면서 자꾸만 뒤돌아보았다. 그 아주머니가 회장 할아버지 대문으로 들어갔다.
‘아라네 도우민가?’
오늘은 이상한 일만 생겼다. 나라는 다시 뒤돌아서 아라네 집을 향해 갔다. 리차드 아저씨 생각이 머리를 들고 일어섰다.
‘그럼, 리차드가 아라 아빠가 아니란 말이야? 근데 어떻게 아침부터 아라가 리차드 차를 타고 등교할 수 있지. 그리고 아침도 함께 먹고.’
지난번 유튜브 여행작가가 길을 가다가 손을 들어 차를 세워 타며 하던 말이 생각났다.
‘미국이나 유럽 쪽은 길에서 히치하이커 하는 사람을 태워다 줍니다.’
‘그럼 비가 와서 태워다 줬나? 근데 아침까지? 내가 탐정 같네. 후후!’
아라네 집 대문 앞에 거의 다 왔다.
그때 대문이 벌컥 열리더니 아라가 뛰쳐나왔다. 뒤이어 그 동남아 아주머니가 달려 나왔다. 나라는 얼른 담벼락에 몸을 숨겼다. 아라는 울면서 한강 변 쪽으로 달려갔다. 그 아주머니가 아라를 목청껏 부르며 뒤따랐다.
“아라야, 내 말 좀 들어 봐! 우리 옛날 살던 곳으로 가면 이 엄마를 용서할 수 있겠니?”
나라는 흠칫 놀랐다.
‘엄마?’
아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다. 나라는 직감적으로 뭔가 잘 못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도 아라 뒤를 몰래 따라 뛰었다.
12. 아라, 생물학적 엄마
집을 나온 아라가 갈 곳은 강둑밖에 없었다. 나라가 뒤따라오는 줄도 모르고. 이제 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어찌 보면 엄마가 불쌍했다. 엄마가 가난했던 게 죄일 뿐이었다. 엄마 아니었으면 나라나 아라는 이 세상에 없는 아이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제 두 엄마 중 한 쪽을 선택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나라 이모는 아직도 아라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그날 엄마는 아라의 출생비밀에 대해 모든 걸 이야기 해 주었다.
강물이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그 엄청난 비밀이 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까? 강물에 손을 담갔다. 물이 차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와 나라는 쌍둥이였어. 생물학적 부모는 따로 있어.’
‘그게 지젤, 나라 이모야?’
아라는 믿을 수 없었다.
‘거짓말이야. 엄마의 그 말은 다 거짓말이라고!’
아라는 엄마가 했던 그 악몽 같은 말들을 떨쳐버리려고 뛰고 또 뛰었다. 눈앞에 또렸한 영상이 지나갔다.
아라는 아침에 있었던 리차드 아저씨 이야기를 저녁에 엄마한테 자랑처럼 들떠 서 말했다.
“이 철딱서니 없는 것아. 그게 어디 당키나 한 소리니? 더군다나 그분은 유명인 아니야. 금세 스캔들로 오인 받을 수도 있어. 아빠가 그렇게 부러워? 나라도 아빠가 안 계시는데 너만 왜 그리 보채는데?”
아라는 어안이 벙벙해 엄마 얼굴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도대체 나라랑 나랑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거야? 왜 나라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라는 엄마한테 따지듯이 물었다.
“비밀은 무슨 비밀! 그냥 말이 그렇게 나온 것뿐이야. 배고프겠다. 저녁이나 먹자.”
엄마는 안채에서 싸 온 반찬을 잔뜩 꺼내 식탁에 차렸다.
“지겨워, 맨날 우리는 얻어먹는 거야?”
엄마의 손이 갑자기 아라 뺨을 후려쳤다. 아라는 뺨을 감싸고 울지도, 소리도, 지르지도 못하고 놀란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12년 동안 엄마는 아라에게 한 번도 매를 든 적이 없었다. 마냥 좋은 엄마, 아라를 사랑하는 오로지 엄마 마음속에는 아라 밖에 없는 엄마. 엄마도 놀라 아라 손을 잡았다.
“놔! 이 손 놔! 엄마 싫어. 왜 이곳으로 와서 나 숨도 못 쉬게 하는데? 숨 막혀! 여기로 온 이유가 뭐야? 무슨 비밀이 있는데? 전에는 엄마 그러지 않았잖아. 한 칸짜리 방에서도 아라는 엄마가 있어 행복했단 말이야. 여기서는 하나도 안 행복해!”
아라는 엄마한테 맞은 것이 억울한 게 아니었다. 그동안 마음고생하고 거짓말한 것이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던 그 시간이 서럽고 억울해서 눈물이 났다.
“왜 나는 엄마를 하나도 닮지도 않았어? 나 정말 어디서 주워왔어? 말해! 자꾸 빙빙 돌려 변명만 하지 말고 속 시원하게 말해 주란 말이야!”
엄마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아라야, 이제 말할 때가 된 것 같구나. 숨긴다고 해결 될 일이 아니고. 휴-!”
엄마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가 태어난 고국은 너무나 가난했단다. 너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엄마는 이야기책을 읽듯이 조곤조곤 말했었다. 아라는 엄마의 이야기를 전국어린이 백일장에서 썼었다.
등 뒤에서 누군가가 다급하게 불렀다.
“아, 아라야!”
뒤돌아보았다. 나라였다. 아라는 눈을 의심했다.
“니가 여긴 어떻게 왔어?”
“야, 기껏 걱정돼 찾아왔는데……. 장기결석 하니까 왔지. 어디 아프니?”
나라는 휴! 하고 밭은 호흡을 토해냈다. 안도의 숨이라고 해야 하나.
“네가? 왜 나를 걱정하는데? 넌 나를 걱정 할 자격도 없어. 이 모든 게 다 너 때문이란 말이야! 너 때문에 다 뒤틀려 버렸다고! 내 앞에서 꺼지라고!”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라는 영문도 모른 채 어안이 벙벙했다. 기껏 생각해서 왔는데 화가 났다.
“야! 니가 뭔데 내게 소리를 지르는데?”
나라도 지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아라 귓전에서 엄마가 했던 말이 모기소리처럼 앵앵거렸다.
‘엄마가 우연히 ‘패션 쥬얼리’회사 화보에서 그 아이를 보았어. 한 번도 그 아이를 본 적도 없었는데 평생 가슴에 담아 둔 그 아이임에 틀림없었어. 물론 엄마는 그 아이 엄마도 본 적이 없었어. 그런데 그 아이를 본 거야. 정말 예쁘게 자랐더라. 그 후로 어떻게 하면 그 아이 가까이 가서 볼 수 있을까만 생각했어. 하지만 엄마가 잘 못 생각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단다. 엄마 생각만 했던 거지. 아라가 상처를 입을 거라는 생각은 못 했어. 그 자리는 우리가 넘볼 자리가 아닌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되돌릴 수 없게 되어버렸고.’
아라는 엄마가 했던 우리의 이야기를 나라가 듣던 말든 쏟아냈다. 나라는 그 모든 이야기를 꿈속에서처럼 들었다. 꼭 예상하고 있었던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그 백일장 이야기가 우리이야기였단 말이니?”
아라는 말이 없었다.
“우리가 그 인간 인큐베이터 아기?”
“아니, 대리모…….”
아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리모’라는 말을 입속으로 뺃어냈다.
나라는 헉! 소리를 냈다. 하지만, 나라는 오히려 속이 후련했다.
언제 회오리바람이 불었던 양, 밤하늘에는 눈이 시리도록 별이 초롱초롱했다. 나라는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나라는 이모가 진짜 엄마라는 것에 오히려 안도의 숨을 쉬었다.
나라와 아라는 강둑에서 일어서 하늘의 별을 같은 방향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둘은 약속이나 한 듯이 두 손을 꼭 잡고 달렸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을 향하여.
달리고 또 달렸다. 빨리 가지 않으면 나타났다 금세 사라져 버리는 무지개 같은 것일 수도. 어두운 곳을 밝은 빛으로 채우겠다고, 신에게 약속하며 달렸다. 저 멀리서 두 엄마가 달려오고 있었다.
‘사정에 의해 아기를 임신할 수 없는 여자들을 위해 대리모가 필요한 시대가 곧 옵니다.’
수아 프레젠테이션 자료가 생생한 필름처럼 나라 머릿속을 지나가고 있었다.
아직 몇 번의 소용돌이를 더 겪어야할지 모르지만, 이제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서 다 괜찮다.
“나라야! 아라야!”
“엄마!”
나라와 아라는 한 목소리로 엄마를 불렀다.(265.2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