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2장1절-20절
하박국은 바벨론 제국에 의해 동족 이스라엘이 고통당하던 시대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미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당했고, 이제 남은 남유다는 새롭게 떠오른 바벨론 제국의 침략으로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제국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입니다. 설사 이스라엘이 우상숭배 함으로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을찌라도 그 중에는 말씀에 순종하며 의롭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도 있는데, 악한 자들과 더불어 선한 백성까지 함께 고통을 당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거듭해서 항변합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첫 번째 질문, ‘공의가 실종되고 의인이 악인으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 ‘불의한 남유다의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서 갈대아사람(바벨론제국)을 일으켰다’ 두 번째 하박국의 질문, ‘불의한 남유다를 심판하기 위해서 더 불의한 나라(바벨론 제국)를 통해서 심판하시는 게 정당합니까’ 이에 대한 하나님의 두 번째 답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1절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하박국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을 듣기 위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고 합니다. <파수하는 곳>은 적의 침입이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주변에 모든 방해물을 제거한 장소입니다. <성루>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도록 성벽에 돌출하여 만들어진 원형 또는 반원형의 탑을 말합니다.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는 하박국의 고백은 실제로 성루에 서서 파수꾼 노릇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주변의 그 어떤 방해물도 없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하나님께 집중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때 매우 중요한 말씀이 선포됩니다.
4절입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 내 삶에 일어났을 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며 바라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바라보는 첫 번째 이유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데도 왜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는가’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는 원망 반, 하소연 반으로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이처럼 이해할 수도 없고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을지라도, 이런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이라도 듣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대개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정말로 답답한 마음에서 질문했기에 즉시로 응답해 주시면 좋으련만, 언제나 현실은 우리의 바램을 저버립니다. 그래서 더 힘들고 괴로운 것이 인생입니다.
성경은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이란 무엇인가? 내가 바라는 것, 내가 보고 싶은 것들을 지금은 확인할 수 없어도 그들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믿음이라는 의미입니다. 믿음 없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대와 소망도 가질 수 없습니다. 모든 기대와 소망은 지금 존재하지 않지만 반드시 존재한다고 믿을 때만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믿음 없이 단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본문 4절,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에서 언급된 믿음은 자기의 기대와 소망이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에 찬 믿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박국은 그 시대에 의인이었으며 그에게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런 하박국에게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자기의 기대와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을 믿음으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서 하박국의 문제는 믿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하박국은 믿음을 자신의 기대와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것이 자신의 기대와 소망과는 다르게 펼쳐질지라도) 하나님의 섭리는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확신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란 순종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며, 주어진 상황에 대한 순종이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고막을 진동시켜서 들려오는 소리만이 아니라 이미 기록으로 주어진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미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데, 오직 고막을 진동시켜서 들려오는 소리만을 고집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또한 알파와 오메가 이신 하나님은 우주의 역사를 시작하신 분이며, 그 역사를 이루어 가실 뿐만아니라, 종국에는 그것을 완성하시는 분이기에 주어진 상황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만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하나님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아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이끌어 가시고 끝내시는 분임을 온전히 믿지를 못합니다. 역사를 시작하신 하나님은 믿습니다. 종국에 끝내시는 분임도 믿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역사를 이끄시고 다스리시고 통치하신신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내 기대와 소망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기대와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을 믿음이라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믿음은 신앙이라 말하지 않고 기복신앙이라고 합니다. 기복신앙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복신앙은 반드시 우상숭배로 이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다행히 하박국은 두 번째 답변을 통해 진리를 깨닫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질문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고 3장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고백으로 마무리합니다. 그 고백은 너무나 유명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는 고백입니다.
자신의 기대와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을 믿음이라 생각했을 때는 무화가나무가 무성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풍성하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많고 밭에 먹을 것이 넘치고 우리에 양이, 외양간에 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깨달은 후에는 자신의 기대와 소망은 사라지고, 오직 <믿음>만이 하박국에게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박국 선지자가 품었던 질문들, 아니 그 보다 더 많은 질문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 앞에서 해결받은 하박국처럼, 우리의 가슴 깊이 품은 질문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응답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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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하나님, 우리의 기대와 소망과는 너무도 다른 현실 때문에 우리의 가슴 깊은 곳에는 수 많은 질문들이 있습니다. 그 질문들로 인해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지 않게 하시고, 오히려 불의한 세상 속에서 약한 자들이, 선한 이들이 고통당하는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그들과 함께 아파하며 고통을 나눔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게 해 주옵소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진리의 말씀 앞에서 나의 생각과 욕심을 내려놓음으로 오직 믿음만이 내 삶에서 꽃 피우게 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물이 바다를 덮은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