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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천현(木川縣)
[동쪽은 청주(淸州) 경계까지 19리이고, 북쪽은 직산현(稷山縣) 경계까지 19리이며, 서쪽은 천안군(天安郡) 경계까지 17리이다. 남쪽은 전의현(全義縣) 경계까지 22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4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인데, 신라에서 대록군(大麓郡)으로 고쳤고, 고려는 목주(木州)로 고쳐서 청주에 예속시켰다. 명종(明宗) 2년에 감무를 두었고, 본조 태종 13년에 전례에 의해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감을 두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대목악(大木岳)ㆍ대록(大麓)ㆍ목주(木州)ㆍ신정(新定).
【성씨】 본현 우(牛)ㆍ마(馬)ㆍ상(象)ㆍ돈(豚)ㆍ장(場)ㆍ심(沈)ㆍ신(申)ㆍ왕(王) 세상에 전하는 말에,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운 뒤에 목주 사람이 여러 번 배반한 것을 미워하여 그 고을 사람들에게 모두 짐승 이름으로 성(姓)을 내렸다. 뒤에 우(牛)는 우(于)로 고치고, 상(象)은 상(尙)으로 고치고, 돈(豚)은 돈(頓)으로 고치고 장(場)은 장(張)으로 고쳤다.” 한다.
【산천】 작성산(鵲城山) 고을 동쪽 5리에 있는 진산(鎭山). 흑성산(黑城山) 고을 서쪽 11리에 있다. 취암산(鷲巖山) 고을 서쪽 12리에 있다. 용혈(龍穴)이 있는데, 비를 비는 곳이다. 세성산(細城山) 고을 남쪽 8리에 있다. 성거산(聖居山) 고을 서북쪽 14리에 있으니, 직산현 조에 자세하다. 길상산(吉祥山)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또 진천현조(鎭川縣條)에 보인다. 산방천(山方川) 고을 동쪽 20보(步)에 있다. 근원은 고을 북쪽 산방동(山方洞)에서 나와서 청주 진목탄(眞木灘)으로 흘러 들어간다.
【토산】 철(鐵) 산방천에서 생산된다. 사기그릇[磁器]ㆍ꿀[蜂蜜]ㆍ대추[棗]ㆍ지치[紫草]ㆍ안식향(安息香).
【누정】 동작루(東作樓) 선덕(宣德) 갑인년에 세웠다. ○ 유사눌(柳思訥)이 이름을 짓고 기문을 지었다. 『신증』 관찰사(觀察使) 정미수(鄭眉壽)가 소심(小心)이라고 이름을 고쳤고, 최보(崔溥)가 기문을 지었다.
【학교】 향교(鄕校) 고을 서쪽 2리에 있다.
【역원】 연춘역(延春驛) 고을 동쪽 3리에 있다. 탑원(塔院) 고을 동쪽 23리에 있다. 황신원(黃信院)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신원(新院)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혹 남원(南院)이라고도 한다. 정항원(井項院) 고을 서쪽 14리에 있다. 말원(末院) 고을 서쪽 15리에 있다.『신증』 불지방원(佛地方院) 고을 동쪽 35리에 있다.
【교량】 장명교(長命橋) 산방천(山方川)에 있다.
【불우】 전곡사(轉谷寺)ㆍ보문사(普門寺) 모두 성거산(聖居山)에 있다. 은석사(恩石寺) 작성산(鵲城山)에 있다. 승천사(勝天寺) 흑성산(黑城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고을 동쪽 1리에 있다. 여단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흑성산성(黑城山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2백 90척이고, 높이가 6척이며 가운데 못이 하나 있는데, 가물 때는 비를 빈다.
【인물】 고려 ①우학유(于學儒) 활달하여 기개가 있었다. 의종(毅宗)과 명종(明宗) 양대에 왕궁을 숙위(宿衛)해서 충성되고 근신하였다. 이고(李高) 등이 난을 일으킬 적에 우학유와 함께 모의하고자 하니 우학유가 말하기를, “공의 뜻은 크도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가 항상 나를 경계해서 말하기를, ‘무관이 문관에게 굽혀 지내고 있으니, 이 일이 어찌 분하지 않느냐. 그것들을 없애기란 썩은 가지 꺾기보다도 쉬운 일이지만 문관이 해를 당하면 역시 발길을 돌리기 전에 화가 우리들에게 미칠 것이니 또한 너는 마땅히 삼가라.’ 하였는데, 우리 아버지는 비록 돌아갔어도 그 말이 아직도 귀에 있는지라, 죽어도 따르지 않겠노라.” 했다. 벼슬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이르렀다.
① 우학유 : 본관은 목천(木州)이다. 우복야(右僕射) 우방재(于邦宰)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남달랐고 기개가 있어 의종·명종 양조에 숙위(宿衛)하였는데, 오직 충성과 근실로써 임무를 다하였다.
이고(李高)·이의방(李義方) 등이 난을 도모하면서 군사를 맡을 자를 의논하는데 모두 말하기를 “지금 우공(于公)을 두고 다시 어떤 사람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우학유의 집에 가서 일을 의논하자, 우학유는 말하기를 “공(公)의 뜻은 장하나 나의 아버지가 항상 나에게 말하기를 ‘무관이 문관에게 굴한 지 오래이라 어찌 분하지 않겠으며 그들을 제거함은 썩은 것을 부러뜨림과 같이 쉬운 일이기는 하나, 문관이 해를 당하면 화가 우리들에게 돌아올 것이 너무나 명백하니 너는 이를 삼가야 한다.’라고 하셨으니, 나의 아버지는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말씀은 아직 귀에 남아 있으므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좇지 못 하겠소.”라고 하였다.
뒤에 이고와 이의방이 뜻을 이루어 해치려고 하자 두려운 나머지 이의방의 누이에게 장가들어 화를 면하였다. 1172년(명종 2)에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 서북면병마사가 되었다. 이 때 성주(成州: 지금의 평안남도 성천) 사람이 삼등현(三登縣: 지금의 평안남도 강동)을 없애려고 하여 그에 좇지 않는 자를 죽여 수십명에 달하였고, 또 철주(鐵州: 지금의 평안북도 철산) 사람은 그 수령을 죽이려고 꾀하다가 서로 다투어 죽는 등 서북면이 자못 소란하였으나, 능히 이를 진압하지 못하였다. 1179년에 벼슬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이르러 죽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증』 【효자】 본조 ①서만(徐萬) 아버지를 효성스럽게 섬겨 초하루 보름에는 반드시 술과 반찬을 갖추어 바쳤다. 아버지가 겨울에 병이 들어 생선을 먹고자 함으로써 서만은 얼음을 두드리면서 하늘을 향해 부르짖으니, 물고기 네 마리가 뛰어 나와서 갖다가 바쳤다. 아버지가 죽자 3년 동안 여묘하면서 한 번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성종(成宗) 11년에 상으로 벼슬을 주었다.
① 서만 : 서만(徐萬)은 목천군 북면 사담리[현 천안시 동남구 북면 사담리] 출신이다. 부모가 살아 계실 때 효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삭망[음력 초하룻날과 보름날]에는 술과 음식을 갖추어 봉양하였다. 집안이 넉넉하지 않았으나 평생을 한결 같이 이행하였다. 부모가 먹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면 천리 길을 가서라도 구해다 드렸다고 한다. 서만의 효행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아버지가 병환이 나서 매우 위중하였는데 별안간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였다. 엄동설한이라 못과 방죽이 꽁꽁 얼어붙어 어찌할 도리가 없자 서만은 냇가 여울에 가서 얼음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잉어를 얻게 해 달라고 하늘에 기도하였다. 그러자 무릎 밑의 얼음이 체온으로 녹으면서 구멍이 뚫렸고, 그 구멍으로 느닷없이 잉어 네 마리가 뛰어 올라 얼음 위에 나뒹굴었다. 서만은 하늘을 향하여 사례하고 잉어 두 마리를 집어 들고 두 마리는 물속에 도로 넣어 주었다. 두 마리면 약에 쓸 양으로 넉넉하다고 여겨 두 마리는 물속으로 살려 보낸 것이다. 네 마리 모두 가져가면 약으로 쓰고 남아서 다른 가족까지 먹게 될 터인데 하늘이 준 잉어를 어찌 다른 사람이 먹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 뒤 서만이 잉어를 얻은 여울을 ‘이어담(鯉漁潭)’이라 부르게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삼 년 동안 시묘를 살았다.
[묘소] 충청남도 천안시 북면 사담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찾을 길이 없다.
[상훈과 추모] 서만의 효행은 조정에까지 알려져 1480년 마을에 정문이 세워졌으며, 1816년(순조 16)에 군수 조국인이 지나가다가 정문이 허물어져 가는 것을 보고 중건하였다. 그러나 2013년 현재 정려지 표석만 남아 있다. 사담리에서 90년 가까이 살아온 이한수에 따르면, 5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정문의 비석이 있었는데 없어져서 마을 노인들이 표시라도 해 놓자고 하여 시멘트로 기둥을 만들고 『대록지』를 참고하여 효자 서만의 행적을 대리석에 간략하게 기록해 놓았다고 한다.【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③
【제영】 위린산수차중기(爲憐山水此中奇) ①권진(權軫)의 시(詩)에,“나그네 길 봄바람에 말 발굽 더디니, 이 가운데 산수가 기이한 것 어여뻐라. 나무 그늘 땅에 가득하고 뜰은 고요한데, 달이 배꽃 위에 올라오니 저절로 시가 되네.” 하였다. 사면산여화(四面山如畫) ②유계문(柳季聞)의 시에, “사방으로 둘린 산 마치 그림과 같은데, 천년 동안 이 땅이 스스로 기이하네.” 하였다. ③흑산막막운차사(黑山漠漠雲遮寺)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서원(西原 청주(淸州)) 잔치 파할 때 아직도 이른 아침이러니 목성(木城)으로 돌아오는 길 다시 멀고 머네. 흑산이 아득한데 구름은 절을 막았고, 푸른 들판 넓고 넓은데 물이 다리[橋]를 치네, 늙어 가니 자못 벼슬 재미 적은 것 알겠고, 술 깨서 나그네의 혼이 녹아나네. 늦게 공관(公館)에 들어가니 거처가 고요한데, 떨어지는 버들개지와 나는 꽃 함께 적막하네.”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 이민수 (역) | 1969
① 권진 : 본관은 安東. 호는 독수와(獨樹窩). 아버지는 監察糾正 權希正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1377년(우왕 3) 21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해 촉망을 받았다. 당시 권세가인 염흥방(廉興邦)이 자기의 조카딸과 혼사를 맺고자 했으나, 권세가와 혼인하기를 거절해 염흥방의 미움을 사 여러 해 동안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였다.
그 뒤 연해안 지방에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자 의창현령이 되어 민심을 안정시키고 폐단을 제거해 선정을 펴니, 당시 시중(侍中)이었던 李成桂가 발탁해 전주판관으로 삼았다.
1398년(태조 7) 성석린(成石璘)이 평안도로 나가 민심을 수습할 때 특별히 천거해 경력(經歷)으로 삼았으며, 정종이 즉위하자 문하부 직문하(直門下)를 거쳐 지합주사(知陜州事)가 되었다. 1400년 조박(趙璞)의 옥사에 연루되어 영해 축산도(丑山島)로 귀양갔다가 얼마 안되어 돌아왔다.
이듬해 태종이 등극하자 지형조사(知刑曹事)에 이어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를 지내고, 1406년(태종 6) 강원도관찰사에 부임해 선정을 폈다.
청렴함이 알려져 이듬해 대사헌에 발탁되었으며, 관의 기강을 확립하는 데 힘썼다. 그 뒤 경상도관찰사에 이어 1413년 충주목사를 지내고,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1417년에 형조판서에 오르고 그 뒤에 호조·이조 판서 등을 역임했다.
1426년(세종 8) 찬성(贊成)이 되었으며, 1430년에 이조판서를 거쳐 1431년 우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형률을 잘못 적용해 백성 10여 명이 강도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었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433년에는 겸판이조사(兼判吏曹事) 재직 때 사람을 잘못 천거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세종 때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목조(穆祖)부터 태종이 세자로 있을 때까지의 사적을 서술했으며,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의 제조(提調)가 되어 악률(樂律)을 만드는 데도 참여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② 유계문 : 본관은 文化. 자는 숙행(叔行). 유식(柳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안택(柳安澤)이다. 아버지는 우의정 유관(柳寬)이며, 어머니는 안씨(安氏)이다. 아버지 유관이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봉된 이래,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훈구 가문(勳舊家門)의 후예이다.
1408년(태종 8) 생원으로 식년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다. 일찍이 문한관(文翰官)을 역임했고, 이조정랑·의정부사인 등을 거쳐 1423년(세종 5) 판사재감사 겸 지형조사(判司宰監事兼知刑曹事)에 임명되었다. 이 때 도관정랑(都官正郎) 김유공(金有恭)과 함께 보충군(補充軍) 누락자를 심사하다 일 처리를 잘못해 일시 파면되었다.
다음해 재기용되어, 함길도경차관(咸吉道敬差官)으로서 대호군 지함(池含)과 함께 야인 추장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를 회유하기 위해 동북면에 파견되었다. 많은 시련을 견디어내면서 동맹가첩목아를 회유해 조선 측의 제의를 관철시켰고, 이 해 다시 아목하(阿木河)에 같은 목적으로 파견되었다.
이어 우사간에 제수되었으나 공물(貢物)을 수탈한 죄로 일시 파면되었다. 곧 아버지의 도움으로 다시 좌사간에 임용되었으며, 이후 승진을 거듭하였다. 1426년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외직에 나갔다가 곧 소환되어, 이조참의·형조참판 등을 거쳐 1430년 대사헌이 되었다.
이 때 대간(臺諫)의 관원과 함께 뇌물을 받고 장리(贓吏)인 사재감주부(司宰監主簿) 태석균(太石鈞)의 고신(告身)에 서명했는데, 이 때문에 의금부의 치죄를 받고 직첩을 박탈당하였다. 2년 뒤 아버지의 간곡한 소청에 의해 다시 서용되었고, 이어서 강원도도관찰사·한성부윤 등을 거쳐 1437년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다시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형조참판이 되었을 때, 강원도관찰사 재직 시의 비행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중재로 무마되었다. 1440년 경주부윤에 임명되었으나 장기간에 걸쳐 외직에 있었다는 점을 이유로 이를 사양하면서 회피하다 왕의 노여움을 크게 사 의금부에 하옥당하였다.
그 뒤 인수부윤(仁壽府尹)·호조참판·판한성부사·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443년 개성부유수에 임명되었고, 2년 후 왕의 행궁(行宮)에 문안가다가 영서역(迎曙驛)에 이르러 길에서 갑자기 죽었다.
글을 잘 짓는다는 명성이 있었으며, 글씨를 잘 써서 태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안지(安止)·최흥효(崔興孝) 등과 함께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을 쓰기도 하였다.
또, 대간으로 있을 때에는 불교의 폐해와 개선, 『주자가례』의 보급, 염리(廉吏)의 등용과 장리의 제거를 통한 민폐 제거, 공법 개정(貢法改正) 등을 주장해 당시 사회의 병폐를 많이 개선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상위직으로 진출하면서 일에 성실함이 없었고, 뇌물을 받고 불법을 저질러 자주 탄핵을 받아 파면되기도 하였다. 시호는 안숙(安肅)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③ 사가집 > 사가시집보유 제3권 > 詩類 > 徐居正
목천(木川)
서원의 주연 파할 제 아직 이른 아침이러니 / 宴罷西原尙早朝
목성으로 돌아오는 길은 다시 머나멀구나 / 木城歸路更迢遙
검은 산은 아득해라 구름이 절을 가렸고 / 黑山漠漠雲遮寺
푸른 물은 하 맑아라 물이 다리를 쳐 대네 / 綠野粼粼水拍橋
늙어 가매 자못 벼슬 재미 적음을 알겠고 / 老去頗知官況少
술이 깨니 나그네 정은 처량하기만 한데 / 醒來無乃旅魂銷
해 저물어 공관에 드니 거처가 조용하여라 / 晩投公館簾櫳靜
떨어진 개지 날린 꽃이 모두가 적적하구나 / 落絮飛花共寂寥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8
신증동국여지승람
55권 25책.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관찬지리서이다. 이 책은 세 차례의 수교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원래 『동국여지승람』은 1481년(성종 12) 50권으로 편찬되었다.
내용은 1477년에 편찬한 『팔도지리지』에 『동문선』에 수록된 동국문사(東國文士)의 시문을 첨가하였으며, 체재는 남송(南宋) 축목(祝穆)의 『방여승람(方輿勝覽)』과 명나라의 대표적 통지인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참고하였다. 『동국여지승람』의 1차 수교는 1485년 김종직(金宗直) 등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 때 시문에 대한 정리와 연혁·풍속·인물편목에 대한 교정, 그리고 『대명일통지』의 예에 따라 고적편목이 신설되었으며, 중국의 지리지에는 없는 성씨·봉수(烽燧)의 양조도 신설되었다.
그 뒤 1499년에 임사홍(任士洪)·성현(成俔) 등이 부분적인 교정과 보충을 가하였으나 내용상의 큰 변동은 없었다. 제3차 수정은 증보를 위한 것으로서 1528년(중종 23)에 착수하였다.
1530년에 속편 5권을 합쳐 전 55권으로 완성, 이에 ‘신증(新增)’의 두자를 삽입하여 간행하였다. 임진왜란을 겪은 뒤 이 책은 더욱 희귀해져 일본 경도대학소장본이 유일하며, 1611년(광해군 3)에 복간한 목판본이 규장각도서 등 국내에 소장되어 있다. 1455년(단종 3)의 을해자로 인쇄된 『동국여지승람』의 초간본 중 권37·38은 김두종(金斗鍾)이 소장하고 있다.
책머리에는 이행의 진전문(進箋文)·서문·교수관원직명과 구본 『동국여지승람』의 노사신(盧思愼)의 진전문, 서거정(徐居正)의 서문 및 교수관직명·찬수관직명·목록이 수록되어 있다. 책의 끝에는 홍언필·임사홍·김종직의 발문이 실려 있어 간행 과정과 의도를 살펴볼 수 있다.
권1에 경도(京都) 상, 권2 경도 하, 권3 한성부, 권4·5 개성부, 권6∼13 경기도, 권14∼20 충청도, 권21∼32 경상도, 권33∼40 전라도, 권41∼43 황해도, 권44∼47 강원도, 권48∼50 함경도, 권51∼55 평안도 등이 수록되었다.
각 권마다 여러 개의 군현이 수록되어 있으나, 경기도의 광주목과 여주목, 경상도의 경주부, 평안도의 평양부 등 큰 읍은 1개 행정구역만 수록되었다.
경도 앞에 조선 전도인 팔도 총도가 실려 있으며, 각 도 첫머리에는 도별 지도가 삽입되었다. 이 지도들은 실측 지도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지극히 단순한 형태를 나타낸다.
이 지도는 동서의 폭이 지나치게 넓은 반면 남북의 길이가 짧기 때문에 한반도의 모양이 기형적이며, 주요 하천의 유로가 부정확하고, 강폭이 과장되어 있으며, 서남해의 섬과 반도들이 적당히 그려져 있는 등 문제점이 많다.
그러나 이 지도는 본래 지지를 읽는 데 참고가 되도록 첨부한 안내도였으므로 지도학적 가치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지도에 표시된 내용도 산과 하천이 중심이 되어 있는데, 이는 산천에 대한 제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서 순수한 자연현상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리지에 지도를 첨부함으로써 지리지에 수록된 내용의 공간적 파악과 정확한 인식을 달성하려 한 점은 이전의 지리지에서 한 걸음 발전한 것이다.
내용은 각 도의 연혁과 총론·관원을 적은 후, 목·부·군·현의 연혁, 관원·군명·성씨·풍속·형승·산천·토산성곽·관방(關防)·봉수·누정·학교·역원·교량위치·불우·사묘·능묘·고적·명환(名宦)·인물·시인의 제영(題詠) 등의 순서로 기재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 이후에 증보된 것은 신증으로 밝혀져 있다. 인물 속에는 효자·열녀가 포함되어 있다.
군현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특히 강조된 내용은 연혁·성씨·산천·역원·고적·인물 등이다. 연혁에서는 시대에 따른 각 군현의 지명 변화, 행정구역의 변천 과정 등을 밝히고 있다. 성씨는 토성(土姓)·내성(來姓)·속성(續姓) 등으로 구분하여 기록하였으며, 역사상 유명한 학자·고승·충신·무장·효자·열녀 등을 다룬 인물조와 관계가 깊다.
산천조는 명산·하천·바다·호소·나루터 등의 위치를 읍을 기준으로 거리와 방향을 기록하였으며, 시문으로 과거의 경관을 묘사하였다. 역원제와 봉수제는 왕명의 전달, 긴급 군사 정보의 송부, 공무 여행자와 관물 수송 등 봉건 전제군주제 하에서 행정상의 중추신경 구실을 했던만큼 매우 중요시되었다.
봉수와 역원의 위치는 읍을 중심으로 방위와 거리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역은 찰방역과 일반역으로 나누었다. 찰방역의 경우 그 소속 역명을 열거하였으며, 주요 역원은 그 시설과 연혁 등이 기술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조선 전기 지리지의 집성편(集成編)으로 속에 실린 지도와 함께 조선 말기까지 큰 영향을 끼친 지리지이다.
이 책은 지리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역사·행정·군사·사회·민속·예술·인물 등 지방 사회의 모든 방면에 걸친 종합적 성격을 지닌 백과전서식 서적이다. 따라서 조선 전기 사회의 여러 측면을 이해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자료로서 여러 학문에서도 중요한 고전으로 꼽고 있다.
그러나 세종 때의 지리지가 지녔던 장점인 토지의 면적·조세·인구 등 경제·군사·행정적인 측면이 약화되고, 인물·예속·시문 등이 강화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일본인들의 관심을 끌어, 1906년 후지가미(淵上貞助)가 활판본 A5판으로 인쇄하였고, 1912년 조선고서간행회에서 활판본으로 간행한 바 있다.
1960년대에는 서울대학교소장본을 바탕으로 한 영인본이 동국문화사에서 나왔으며, 1969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최초로 한글로 번역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