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02.
떠날 준비
이삿짐 품목을 적는다. 누구나 잠을 자야 하니 요, 이불, 베개가 있어야지. 밥을 해 먹어야 하니 전기압력밥솥, 냄비, 프라이팬, 밥공기, 국그릇, 접시, 수저 등이 필요하다. 쌀도 있어야 하고 김치는 어쩌지. 참치 통조림 캔이 어디에 있었는데 찾아봐야겠다. 도마, 식칼, 고추장, 된장, 간장, 소금은 작은 용기에 담아야 하고 과도와 빵칼도 꼭 챙겨야 한다. 먹는 게 제일 중요하니 빠뜨리지 말고 차근차근 생각해야겠다. 세면용품에서 수건과 바디로션까지 조목조목 적어 본다. 속옷, 티, 바지, 잠바와 바람막이, 손수건에 멀티스카프까지 생각해 내고는 잠옷 한 벌도 또박또박 적는다.
대학생 이삿짐보다 많다. 아내가 준비하는 자질구레한 주방용품들이 장난이 아니다. 식탁 위에 널브러져 있는 저것들을 어디에다 담아야 할까? 커다란 시장바구니에 대충 챙겼다. 빼곡하게 적은 목록에서 분홍형광펜으로 덧칠해 가며 담은 장바구니가 셋이고, 다이소에서 사들인 대형플라스틱 상자가 둘이다. 아직 이불과 겉옷 그리고 조리도구는 시작도 못 했다. 자동차 트렁크는 물론이고 뒷좌석에도 층층이 쌓아야 할 듯하다.
실없는 웃음이 번진다. 나는 내 자신을 신뢰하기 때문에 걱정은 없다. 내가 지나치게 어리석거나 이 일이 무모한 도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한 아내까지 흡족하게 따라주어 고맙다. 그런데도 내 마음은 이상야릇하다. 스스로 불편함을 선택했다지만, 맘속에 도사리고 있는 이놈은 불편함을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가 보다.
선택과 결정은 모두 내 몫이다. 편리함을 버리고 불편함을 선택했다. 게으름과 싸우기 위한 최선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당부했다. “아침밥 먹으면 나가서 저녁때가 되면 들어와라.” 집에 있으면 게을러진다는 말을 삥 돌려서 했음을 느낄 수 있다.
가야 할 곳이 없다. 해야 할 일이 없으며 이루어야 할 목표가 없다. 존재의 필요 유무도 알 수 없다. 어쨌든 해야 할 것들이 사라진 상황이다. 편하게 생각하면 은퇴자는 무한한 게으름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게으름이 무섭다. 내가 게으름에 짓눌려 죽을 것만 같다.
살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게으름과 싸워 이기기 위해 나는 떠난다. 내가 유리하고 게으름이란 놈이 불리한 곳으로 떠나는 것이다. 짐 보따리를 싸면서 내가 저지른 일이 기가 차도록 골치 아픈 일이란 것을 알았다. 그런데 마음은 즐겁다.
베이스캠프 하나를 구한 것이다. 구체화 될수록 성가시다. 게으름이란 놈이 커졌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고민스럽다. 또한 혼란스럽지만, 시작부터 포기할 수는 없다.
첫댓글 무한한 게으름 아무나 하는거 아닌데 ᆢ 갖추고도 버리다니
오라버니의 불편한 선택을 할수없이 응원합니다
고마워요. 그리고 감사해요. 그대도 내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