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다스리는 茶한잔] <2> 삼국시대 때부터 불교와 함께 차문화 보급
고구려, 무덤에서 전차 출토
백제, 차 재배지 넓게 분포
신라, 7세기 때 토산차 존재
가운데 구멍이 뚫린 원형의 떡차.
고구려 옛 무덤에서 출토된 엽전 모양의 전차도 떡차의 일종이다.
고구려의 차문화
고구려의 차문화는 불교와 도교의 보급과 함께 크게 발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제17대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승려 순도를 보내 불상과 경전을 전했다.
이는 불교가 한반도에 공식적으로 전해진 최초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이때는 왕명으로 불교가 공인되면서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전진의 순도(順道)와 아도(阿道)화상을 머물게 했다.
다음은 유교가 들어오면서
조상이나 국조숭배사상이 격식화되고 생활과 깊이 연관을 맺게 됐다.
도교는 이보다 조금 뒤에 고구려에 들어왔다.
도교는 예로부터 양생을 생활지침으로 삼았기 때문에
차를 많이 마시고 단약을 만들기에 힘썼다.
따라서 도교의 보급도 차의 보급과 뗄 수 없는 일이다.
고구려의 옛 무덤에서는 전차(錢茶)가 나왔다.
일본의 차 학자 아오키 마사루는 고구려의 옛 고분에서 출토됐다는
둥글고 얇은 원형의 소형박편(小形薄片)의 작은 병차(餠茶) 한 조각을 보유하고 있다.
모양이 엽전같이 가운데 구멍이 뚫린 원형의 떡차로,
지름이 약 4센티미터 정도이고 중량은 5푼(1.8g), 두깨가 얇은 단차이다.
일본에서는 이에 관해 수차례 논문이 나와서 믿을 수 있는 근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확한 병차의 발견 경위나 출토된 고분의 이름 등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단차의 크기와 모양으로 보면
1930년대 전남 해안지방에서 나온 청태전과도 유사하다고 한다.
이 차가 고구려의 것과 같다면 당나라식 병차의 모습도
이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당시 차를 무덤에 넣은 것은 주인이 생전에 차를 아주 좋아했다는 증거이다.
또 이때는 산이나 들에서도 차를 끓였던 것으로 보이는
굴뚝이 달린 이동식 간이 화덕이 평북 운산군 용호동에서 출토돼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제사지(祭祀志)에 보면
고구려에는 하백녀(河伯女)와 고등신(高登神)의 신묘에 차로 제사를 지냈다고 나와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의「주인접객도」와 안악 3호분 고분벽화에도
찻잔을 든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수렵생활을 경제적 기반을 삼은 고구려는
차를 불전이나 신들 조상님께 제물로도 바치고
일상의 생활속에서도 제일 중요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백제의 차문화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침류왕 즉위 원년(384)에 마라난타 스님이
인도에서 중국 동진(東晉)을 거쳐 백제에 와서 불교를 전래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 마라난타와 관련된 글은,
침류왕 즉위 원년(384)에 호승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왔고
이듬해 한산(漢山)에 절을 짓고 10인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중국과의 잦은 교류로 중국 문화를 많이 받아들이면서
관직의 이름이나 복식들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이때 수나라 문제는 차의 장려책을 공표하고 646년에는 차(茶) 법을 제정했다.
426년에 정관대사가 대흥사를 창건하고, 527년에는 대통사와 대조사가,
이어서 선암사가 서고, 544년에 화엄사가 창건된다.
이때 연기조사가 절 뒤 장죽전(長竹田)에 차를 심었다.
이것을 사실로만 본다면 대렴이 심었다는 것보다 280여년이나 빠르지만
그 기록이 워낙 후대의 것이고 정확한 근거가 있지는 않다고 한다.
백제에서 신라보다 앞서 차를 마셨다는 주장은 여러 곳에서 나온다.
우리나라 차 생산이 많은 지역 또한 전라도인 점과 상통한다.
백제는 차나무를 재배하기 좋은 지리적 여건을 두루 갖추었고.
특히 중국의 화남지역과 차 교역이 많았다.
백제지역에서는 고구려, 신라와 달리 중국제 자기도 많이 출토되고 있다.
또한 차 재배 지역이 가장 광활한 곳이라 당연히 차 문화가 성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가운데 주전자와 주발은 차를 마시는 용기로 볼 수 있다.
당시는 찻잎을 쪄서 쌀가루와 섞어 덩이차를 만들어 말린 후,
차를 마실 때는 돌절구에 빻아 뜨거운 물을 부어 마셨다.
위도상 차산지가 가장 많은 백제도 차를 많이 마셨으리라 짐작하지만,
관련 유물은 남아있지 않다. 백제에 차가 있었다는 사료로
일본의 나라시대를 대표하는 동대사(東大寺)의 <동대사요록(東大寺要錄)>에
백제계 고승인 행기(行基)스님이 49개의 절과 46개의 사회사업소를 만들고,
절 주변에 차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의 후예가 차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을 통해 백제 사람들이 차생활을 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신라의 차문화
신라는 강한 민간신앙과 귀족세력의 보수적 성향으로
불교가 100여년간 박해를 받다가 공인받은 것은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로부터이다.
법흥왕(532) 때 김해를 중심으로 수로를 시조로 받드는 본가를 합병하고,
진흥왕(562) 때는 고령 중심의 대가야를 정복했다.
모두 차가 많이 나는 지역이므로 신라가 차문화를 인식한 것은
중국문화의 수용과 더불어 6세기쯤으로 진작된다.
삼국사기 제10권 흥덕왕 3년(828) 12월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대렴이 차 종자를 가져와서 왕명으로 지리산에 심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7세기인 선덕여왕 때 이미 토산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7세기에 토산차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사료로 통도사사적기에
통도사 북쪽에 있는 동을산의 차 마을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 차 마을은 차를 만들어 절에 바치던 소(所)이다.
절에 바치던 차아궁이와 차샘이 지금도 남아있고 이를 다소(茶所)마을이라 했다.
신라시대에는 의례에 차를 흔히 썼다.
문무왕 때 김수로왕의 시제에 차를 올린 것은 종묘다례라 볼 수 있으며,
충담선사가 삼짇날과 중구일에 미륵부처님께 차를 올린 기록이 있다.
고려초 성종 8년에 최승로(927~989)가 별세하자
왕은 뇌원차(腦原茶) 200가(상자)와 대차 10근을 하사했는데,
모두 다 토산차였다. 단차(團茶, 덩이차)인 뇌원차와 대차를 만드는 법은
신라인의 제다법으로 추측된다.
2022. 11. 11
안연춘 현명원 T아트문화원 원장
출처 : 불교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