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장(朱元璋)
1328년 10월 21일 - 1398년 6월 24일 / 壽 70歲
주원장
모순의 영웅 명나라의 창업자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 전 세계의 역사에서 '입지전적 인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주원장을 뺀다면 큰 의미가 없다. 5,000년 중국 역사 속에서 수많은 황제들이 명멸했지만 그들 중에서 진정한 '민중의 아들'은 주원장 단 한 사람뿐이다.
한(漢)나라의 건국자인 한 고조 유방 역시 지체 높은 귀족이 아닌 비천한 농민 출신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유방은 상당한 재산을 가진 부농이었으며 그 재산의 일부를 가지고 마을의 촌장 벼슬을 살 수 있을 정도로 여유 있는 집안 출신이었다.
유방과 달리 주원장은 하루하루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극도로 궁핍한 소작농 출신이었다. 그것도 6남매 중의 막내로 일찍이 부모를 잃고 형제가 뿔뿔이 흩어져 호구지책으로 절에 들어가 탁발승 노릇을 하기까지 했으며 사회적 여건상 그것도 여의치 않자 절망적인 심정으로 홍건적(紅巾賊)에 가담했다.
그는 작은 무리를 이끄는 소두령으로 출세하기 시작해서 홍건적 부대의 최고 지휘관으로 성공을 거두며 스스로 권력 기반을 닦았으며, 이를 배경으로 천하 패권을 노리는 각축장에 합류해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최종적으로 천하의 주인이 된 사람이다.
주원장은 당시 중국의 시대상황이 낳은 인물이었다.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에 의해 중국식 왕조로 창건된 원(元)나라는 채 90년을 존속하지 못했다. 원 왕조의 황제들이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한 기간도 고작 한 세대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이는 승계 순서가 아니라 실력으로 칸의 자리를 차지했던 쿠빌라이의 원죄라고 할 수도 있다.
원 왕조는 승계 원칙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대 황제들은 형제나 일족 들을 실력으로 제압하여 통치권을 확보해야 했다. 이 때문에 왕조 말기에는 13년 동안 7명의 황제가 교체되었으며 그들 중 대부분이 쿠데타나 암살로 생을 마감했다. 때문에 원나라의 황제가 가지고 있던 권위는 왕조의 후반부에 이르면서 거의 소멸되었으며, 황위 승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던 강력한 군벌 세력이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원나라의 11대 황제인 순제(順帝)2) 는 중국의 역사가들에 의해서 대단히 무능한 통치자로 매도되고 있지만 사실 이는 상당히 억울한 평가이다. 그는 명석한 인물이었으며 땅에 떨어진 황제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다양한 시도를 해서 어느 정도 성공도 거두었다.
그렇지만 한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로서는 지나치게 변덕스럽고 의심이 많으며 심성이 나약했다는 점이 결정적인 문제였다. 순제는 당시의 실권자인 바얀(Bayan)3) 엘 티무르(El Temur)의 격렬한 반대로 일곱 달 이상 즉위를 하지 못하다 바얀이 조카에게 살해당하면서 간신히 황제로 즉위할 수 있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열세 살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으니 비정상적인 성격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순제가 즉위한 직후, 황실에서는 권력 투쟁으로 바람 잘 날이 없는 가운데 천재지변이 연이어 덮치면서 대혼란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유럽의 인구를 격감시킨 페스트가 유입된 것을 시작으로 대기근과 홍수가 연달아 발생하고 메뚜기 떼가 습격하면서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전국적으로 수백만의 유민이 발생했으며 이는 산발적인 반란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농민 반란은 점차 조직적인 봉기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는데, 배후에는 종교 단체들이 있었다. 그러한 종파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것이 백련교(白蓮敎)였다. 이들은 13세기 중반 남송(南宋)에서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아 정통 불교 종파로부터 파생된 종파로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미륵불이 내려와 세상을 구한다(天下大亂 彌勒佛下生)'라는 미륵신앙을 기반으로 했다.
순제는 백련교의 교주였던 한산동(韓山童)을 체포해서 처형함으로써 화를 자초했다. 한산동의 처형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산발적인 농민 반란이 조직화되면서 '홍건적(紅巾賊)의 난'으로 커져 버린 것이다. <끝>
출처>다음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