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송지희 기자의 보살의 길 / 신라여성 사씨
한국불교 첫 비구니…신라불교 확산 이끈 주역
고구려 아도 스님 모신 모례 장자의 누이
부처님 법에 감화되어 출가…영흥사 창건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인연 따라 찾아온 객(客)입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당분간 묵어갈 수 있을까요.”
신라 눌지왕대(417~458)의 어느 늦은 밤, 왕성 인근마을인 일선군에 위치한
모례 장자의 집에 불쑥 낯선 손님이 찾아왔다.
당시 그의 집안은 지역의 세력가이자 부호(富戶)에 속했기에
신세지길 원하는 객들의 방문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흔쾌히 손님을 반기려던 모례 장자가 잠시 멈칫했다.
어두운 그늘 사이로 비치는 객의 모습이 보통의 손님들과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회색빛 장삼에 짚으로 만든 삿갓을 깊이 눌러쓴 독특한 차림새.
게다가 어딘가 모르게 묘한 분위기가 풍겼다.
그러나 외모가 독특하다 하여 찾아온 손님을 무작정 내칠 수는 없는 법,
모례 장자는 낯선 객을 집안으로 안내했다.
그러나 방으로 안내된 객이 삿갓을 벗어든 순간 모례 장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머리카락을 싹뚝 잘라낸 빛나는 두상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모례 장자는 한 눈에 그가 고구려의 신흥종교, 불교의 승려임을 알아봤다.
당시 신라는 불교가 아직 전래되지 않았던 때라 신라인이 그가 승려임을 알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그러나 이미 지방의 세력가로 왕실과 인연이 있던 모례 장자는
고구려에 이미 불교가 널리 확산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어둠에 의지해 찾아온 낯선 객이 그 불교라는 종교의 성직자임도 단박에 알아챈 것이다.
토속신앙 기반한 권력층이
신흥종교인 불교 유입 배척
이 시기 백제와 고구려에는 이미 불교가 공인되어
민간과 왕실에서 널리 신앙되고 있었지만 신라는 달랐다.
천지산천에 제를 올리는 토착신앙의 뿌리가 깊어 불교의 유입이 쉽지 않았던 것.
더욱이 신라정치의 중심인 6부 세력은 토착신앙에 기반한 권력으로,
신흥종교의 유입이 새로운 세력 형성의 계기가 될 것을 우려해
더욱 적극적으로 불교 유입을 경계하고 있었다.
이전에도 고구려 승려 두어명이 신라에 왔지만
불교를 전파하기는커녕 죽임을 당했다는 왕실의 소문을 전해 듣기도 했다.
모례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내칠 경우 어쩌면 이 낯선 객의 목숨은 위험할지 모른다.
그러나 알지도 못하는 종교의 성직자를 위해 무턱대고 위험을 감수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고민이 깊어질 무렵 누이 사씨가 나타났다.
누이는 어려서부터 생각이 깊고 배포가 담대한 여성으로 주위의 존경이 두터웠다.
모례 장자의 이야기를 들은 사씨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하인들을 불러 집안에 굴을 파 손님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 것을 명했다.
모례 장자의 집에 나타난 이 낯선 객이 바로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파한 것으로 알려진 아도 스님이다.
신라에 와 왕성 서쪽마을에 살면서 대궐로 들어가 불법을 전하려 했으나,
사람들이 그를 꺼려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이에 모례 장자의 집으로 몸을 피한 것이다.
아도 스님은 그때부터 모례의 집에 머물며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경을 강독했다.
모례 장자와 누이 사씨는 스님이 설하는 불교의 사상에 깊이 감화되어 첫 번째 신도가 됐다.
특히 사씨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
기존의 신앙이 천지산천의 신들에게 제를 올리며 무탈과 평안을 바라는 의타적인 종교였다면,
불교는 그야말로 나 자신이 곧 부처라는 존귀함을 기반으로 세상의 진리를 풀어내며
생과 사의 본질을 꿰뚫는 종교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씨는 불경 공부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 수행자가 되어 부처님이 설하신
위없는 진리를 깨닫기 위해 전력을 다해 정진할 것을 서원하고,
계를 받아 출가하기에 이른다.
사씨는 신라 불교가 여성의 의해, 또는 남성과 동시에 여성에게도 함께 수용되고 전래됐음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인물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전통적으로도 고구려, 백제불교에 비해 신라불교에서는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졌음을 감안하면,
이 같은 신라불교의 특징이 불교의 전래시부터 시작된 셈이다.
그럼에도 한국불교 최초의 비구니이자 신라의 불교 확산을 이끈
사씨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야박할 정도로 적다.
“신라 모례의 누이 사씨가 고구려 승려 아도에게 감화되어 출가한 뒤 영흥사를 창건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이 간략한 내용이
신라 최초의 여성 불자 사씨에 대해 남겨진 기록의 전부나 다름없다.
그마저도 고구려 아도 스님이 신라에 불교를 전파했다는 기록에 추가된 서술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학계 일부에서 사씨는 설화성이 짙은 인물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 실존여부에 대한 논란도 있다.
이 간략한 기록 외에는 사씨의 삶에 대한 흔적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본명과 생몰연대는 물론이고 영흥사를 창건한 시기도 나와 있지 않다.
다만 경북 선산의 모례 장자 집터에 남아있는 우물,
그리고 아도 스님이 창건했다는 도리사 벽화에 남겨진 법문 듣는
한 여인이 현재 전하는 사씨의 흔적일 뿐이다.
그럼에도 신라에 처음 불교가 유입된 시기,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했고
향후 전법을 이끌어 나갈 사찰까지 창건한 사씨의 삶은,
비록 한 줄의 기록일지라도 그 이면에 담긴 묵직한 의미는 간과될 수 없다.
특히 신라는 신흥종교에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여건으로,
백제와 고구려에 비해 불교가 확산되고 공인되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다.
이차돈의 순교 이후에야 불교가 공인된 사실이 이를 대변한다.
천지산신에 제를 지내는 토속신앙이 강했고
왕과 함께 신라의 정치를 주도한 6부 세력들이 종교에 기반으로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비구니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백제와 고구려에 비해,
신라는 불교의 전래와 동시에 사씨라는 여성불자가 탄생했고 출가해 승려가 됐다.
게다가 그는 직접 사찰을 창건해 전법활동에 나서기까지 한다.
이는 한국불교 역사에 잠재되어 있는, 여성 불자로서의 사씨를 되짚어 볼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역사 속에서 사씨의 흔적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아도 스님이 신라를 찾아 불교를 전한 시기를 우선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각 역사서의 기록은 분분하다.
경주서 여성에 활발한 포교
법흥왕비, 사씨 흠모해 출가
‘삼국사기’는 눌지왕(417~458)과 소지왕(479~500)대,
‘아도본비’가 미추왕(262~284)대, ‘해동고승전’은 법흥왕(514~540)대로 각각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 ‘삼국유사’를 집필한 일연 스님은 홍법편에서
‘삼국사기 4권 신라본기’와 ‘아도본비’를 인용해 아도화상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며
“제19대 눌지왕 때 고구려 승려 묵호자가 신라에 왔고,
21대 소지왕 때에 승려 아도가 와 불교를 전파했다고 보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결론지은 바 있다.
또 “아도의 모습과 거동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다”는 데 근거해
묵호자와 아도가 동일인물이라고 봤다.
이는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시기를
눌지왕대로 바라보는 역사학계의 대체적인 시각과도 일치한다.
이 가운데 사씨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의 ‘아도본비’ 인용 부분에서 확인된다.
기록에 따르면 아도는 고구려 사람으로 불심이 깊은 어머니 고도녕에 의해 5세에 출가하고
19세에 불법을 전하기 위해 신라를 찾는다.
어머니는 그에게 신라로 갈 것을 권하면서 “이 나라는 지금까지 불법을 몰랐으나
3000여 개월(250여년) 후 계림에 성왕이 나와 크게 불교를 일으킬 것이다.
그 나라 서울에는 7개의 가람터가 있으니
첫째는 금교 동쪽의 천경림, 둘째는 삼천기(…)”라고 일러준다.
이에 아도는 신라로 와 불교를 전하고자 했으나
사람들이 꺼리고 위협하여 일선군 모례의 집에 숨어 살았다.
이 시기 왕실의 공주가 깊은 병이 들었는데 무당과 의원이 치료를 했으나 효험이 없었다.
백방으로 의사를 찾던 중 아도 스님이 대궐에 찾아와 공주를 치료하자 병이 나았다고 한다.
왕이 기뻐하며 소원을 묻지 아도 스님은 천경림에 절을 세워
나라의 복을 빌고자 한다고 요청했고, 왕의 허락을 얻어 ‘흥륜사’를 창건하게 된다.
모례의 누이 사씨도 이때 비구니가 되어 삼천기에 ‘영흥사’라는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기록에 따르면 사씨는 당시 아도 스님을 따라 지금의 경주로 간 뒤
본격적으로 불교를 전파했을 가능성이 크다.
천경림과 삼천기는 모두 현 경주에 위치한 곳이기 때문이다,
아도 스님이 일선군 모례 장자의 집에서 경주로 떠나와 흥륜사를 창건하고 불법을 홍포할 때
사씨가 함께해 영흥사를 창건했다고 볼 수 있다.
사씨가 경주에서 아도 스님과 함께 포교 일선에서 활동했다면
아마도 여성불자들을 이끄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을 ‘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법흥왕비(보도부인)가 사씨의 풍을 흠모하여 묘법(妙法)이란 법명으로 출가해
말년을 영흥사에서 머물렀다”고 기록된 대목이다.
불교가 공인된 직후 왕비가 그 뜻을 흠모하여 출가했다는 것은,
당시 사씨의 이름이 신라에 널리 알려졌다는 것이며 그에 대한 존경심 또한 매우 높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사씨가 불교의 공인 전에 개별적으로 출가했다는 점을 들어
신라 최초의 비구니는 법흥왕비로 보기도 하지만, 설득력은 없다고 보여진다.
사씨는 남성위주 역사 속에서 그 의미를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채 간략한 기록으로만 남겨졌다.
그러나 그 속에는 여성의 몸으로 당당하게 보살의 길을 걸어간
사씨의 삶이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더불어 사씨에 대한 기록은 신라에 처음 불교가 유입되고 확산되는 과정에서
여성의 활약이 있었음을 확인하는 분명한 근거이기도 하다.
2012. 02. 08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