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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KM 지점의 롬포유 쉼터에서 도착한 것이 12시 26분이었다. 능선 구간이었다. 키나발루의 눈물을 조망하면서 점심을 먹었다. 산장에서 가져 온 딸기 잼을 발라서 빵을 씹었다. 소금이 없어서 삶은 계란을 먹기가 약간은 거북하였다. 점심을 먹기 시작하는데 청설모 비슷한 설치류(齧齒類)가 숲에서 나왔다. 사람을 전혀 겁내지 않았다. 빵 조각을 던져주자 날름날름 씹어 보다가 입에 물고는 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그리고 금방 되돌아왔다. 또 빵조각을 던져 주자 입에 물고는 숲으로 사라진다. 새끼가 있는지 식량 창고가 따로 있는지도 모른다. 등산객이 주는 먹이에 익숙해 있는 것 같았다. 약 20분에 걸쳐 점심을 마치고 12시 45분에 롬포유 쉼터를 출발하였다. 능선을 따라 걸었다.
피치 프랜트(pitcher plant)라고 하는 식충실물(食蟲植物)이 보였다. 레벤도스 빌로사라고도 하는데 이는 철자(綴字)는 알 수 없지만 학명(學名)인 것 같다. 키나발루를 상징하는 식물이다. 작년 가을에 KBS TV가 키나발루를 방영할 때 나왔다. 그때의 소개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큰 식충실물이라 하였다. TV에서 보았던 그 잔영(殘映)이 아직도 뇌리(腦裏)에 남아서 구면인 듯 바로 알아보았다. 어른 주먹 크기의 꿀단지 같은 모양으로 색깔이 아름답고 개폐(開閉)가 가능한 뚜껑이 우산처럼 단지를 덥고 있는 모습이 앙증스럽기까지 하였다. 처음에는 한 송이가 보였지만 조금 전진하자 숲 속에서 나무 가지에 달린 채로 군락(群落)을 이루어 분포하고 있었다. 뚜껑을 열고 단지 속을 들여다보았다. 물이 고여 있었다. 물이 아니라 단지 속으로 떨어지는 곤충을 녹이는 독액이다. 단지에 곤충이 들어오면 뚜껑이 닫히고 곤충은 단지의 독액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기운이 쇠잔(衰殘)해져 죽는다. 그러면 소화액이 나와서 먹이를 녹인다. 뚜껑은 곤충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기능도 있지만 빗물이 단지 속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우산의 기능도 하는 것으로 보였다. 빗물이 단지 속에 들어가면 죽는다. 단지 속의 액체를 사람이 마시면 생명이 위독해진다고 산행 가이드는 해설하였다. 일행 중 한 여성이 뚜껑을 위로 젖히고 손가락을 넣자 갑자기 오므라들어 질급을 하며 손가락을 빼었다는 것을 이날의 산행을 마치고 라반라타 산장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들었다.
사진 24. 식충식물 레벤도스 빌로사 (촬영 : 김정호)
팀폰 루트와의 합류 지점에 당도하 것은 12시 50분. 메실라우 게이트를 출발한 지 약 5시간이다. 여기서 길은 방향을 바꾸어 정상을 향해 직상하기 시작하였다. 두 루트의 합류지점에서의 고도는 해발 2,745M이었다. 백두산과 비슷한 고도이다. 지금 백두산은 영하의 혹한과 강풍과 폭설이 지배하지만 여기서는 비가 내리고 여름철의 백두산 정상부의 기후와 유사하였다. 이 높이에서 백두산은 수목이 없지만 여기서는 울창한 숲이 전개되고 있다. 여전히 0.5KM 마다 거리가 표지되어 있었다. 거리는 팀폰 게이트로부터 계산하는 것 같았다.
고도가 3,000M를 넘어도 숲은 계속되었다. 어느 초목도 한국에서는 없는 것들이었다. 짙은 녹색 속에서 짙은 색깔의 꽃들의 화려함이 대단하였다. 한국의 꽃에서 느끼는 가련(可憐)하고 청초(淸楚)함은 없으나 화사한 색깔은 실로 이국적(異國的)인 만큼 매혹적이었다. 한국에 가져가면 모두가 고가(高價)의 화훼(花卉)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320만 화소(畵素)밖에 안 되는 카메라이지만 놓칠 수가 없어 찍었다.
오늘 밤에 묵을 라반라타 산장으로 직상하고 있어서인지 급사면이 계속되었다. 여전히 중간 중간에 쉼터가 있다. 무거운 배낭을 지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평소에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체력이 있어서인지 유별나게 힘들다는 느낌은 없었다. 의외였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하나의 무리를 이루어 측진하던 일행이 직상 진행으로 바뀌면서부터 서로 간에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하고 선두와 후미가 생겼다.
말레이시아에 오기 전에 이 산행을 계획하면서 내 딴에는 고심을 거듭하였다. 인터넷에서 확인하고 또 고산 등반을 한 경험자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사람에 따라 3,000M을 넘어서면서 고소증세가 서서히 나타난다. 키나발루에서는 등반자의 약 1할이 고소 증세로 등반을 포기하거나 고통을 호소한다. 그런데 나는 3,000M를 넘었는데도 두통이 나거나 어지럽거나 매스껍거나 맥이 빨라지거나 숨이 차는 등의 특별한 증세를 느끼지 않았다. 차두리 군이 예언한 대로 이따금 방귀를 끼었다. 이것도 산행 중에 흔히 경험하는 일상(日常)의 사건이다. 이 정도의 거친 숨은 백두대간의 가파른 급사면을 오를 때도 경험하는 것이다. 산행 가이드가 일행들의 고소 적응을 위해서인지 자주 뒤로 돌아 일행을 쳐다보고는 휴식을 취하도록 하였다.
메실라우 산장에서 산행을 시작하기 직전에 차두리 군이 한 말이 생각났다. 이번 산행에서 본인의 문제는 본인이 알아서 하여야 하고 남을 돕는 것도 한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없으면 빨리 포기하는 것이 집단을 위하고 자신을 위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냉정한 말이었다. 나에게는 겁을 주는 말이었다. 그때 옆에서 회장님이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나는 애써 선행자를 따라 가려 하지 않고 천천히 진행하였다. 포터는 이따금 나에게 “아 유 오케이?"하고 물었다.
산행을 시작하여 5시간이 경과할 무렵에 가파른 길이 끝나고 언덕(?)에 올라섰다. 간이숙박시설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시설명이 와라스헛이었다. 서구인의 외모를 가진 두 명의 청년이 각각 커다란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로 사방을 촬영하고 있었다. 간이숙박시설에 머물고 있는 듯 간편한 옷차림이었다.
남쪽에는 먼 아래에 구름이 지나가고 구름 사이로 녹색의 저지대와 마을이 보였다. 내 발로 걸어서 오른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인간계(人間界)가 멀리 아래에 있다. 시야를 조금 들자 멀리서 파란 하늘이 구름 위에 보였다. 대기에 먼지가 없어서인지 너무도 청신(淸新)한 하늘이었다. 이런 하늘을 전에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금방이라도 쏟아 내릴 것만 같은 하늘을 카메라에 담았다.
시야를 북쪽으로 돌렸다. 산장이 보였다. 거기가 바로 오늘 묵을 라반라타 산장이었던 것이다. 바로 코앞에 있었다. 그제야 오늘의 산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다는 안도감과 그리고 성취감에 조금 전까지의 고행(苦行)이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그럴 수 없이 상쾌해짐을 느꼈다. 여유를 가지고 키나발루 정상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았다. 거기도 실로 장관이 펼쳐지고 있었다. 부산등산교실 8기의 암벽 등반 교육장이었던 가지산 아래 백운산의 백운암장 같은 그러나 이보다는 비할 바 없이 웅장한 규모의 암장이었다. 암장의 상부는 구름에 가렸고 군데군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다음 날 정상에서 하산하면서 알았지만 정상으로 가는 길은 암장의 동쪽에 붙어 있는 숲 사이로 나 있었다. 사진을 찍었다. 무겁다고 챙기지 않은 고화소(高畵素)의 카메라를 가져 오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와라스헛을 출발하여 라반라타 산장에 당도하는 데는 3분밖에 안 걸렸다. 건물의 북동쪽을 돌아 산장의 현관에 섰다. 해발 3,275M의 표지판이 보였다. 입구에 기온을 나타내는 디지털 온도계가 걸려 있었다. 8.8.8℃이었다. 이 수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한 동안 기록하기를 망설였다. 살을 에는 추위가 아니고 이따금 부는 미풍이 스칠 때 약간 차다는 느낌으로 미루어 봐 8℃ 정도의 기온임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드문드문 의자에 앉아 쉬고 있었다. 입구의 맞은 편 남쪽 방향은 벽 전체가 창문이다. 방금 들어온 입구의 벽을 좌측으로 돌아서 화장실, 왼편 벽 쪽에 접수계의 사무실이다. 그리고 오른 쪽으로 돌아 벽 안 쪽에 넓은 부엌, 그 맞은편에 매점이 있었다. 식당, 휴게실, 사무실, 매점을 겸하는 다용도의 넓은 공간이었다. 식탁과 의자가 실내 전체에 놓여 있었다. 나는 창가의 의자에 앉았다. 중년 여자 두 분이 메모지를 꺼내 놓고 무언가 상의를 하고 있었다. 우리 보다 이른 시간에 당도한 것 같지는 않고 전 날에 온 것 같이 간편 차림이었다. 외모가 한국인이어서 우리 동포인가 귀를 기울였다. 일본말이 들렸다.
사진 34. 라반라타 산장의 식당 모습 (촬영 : 강용주)
화장실은 남여공용이었다. 세면대도 있었고 아주 청결하였다. 공간이 넓은데다가 마음만 먹으면 문을 잠그고 간단히 샤워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간단히 세수를 하였다. 얼굴과 손의 물기를 닦으려 화장지를 찾았지만 화장지가 다 떨어졌기에 맞은 편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말하였더니 여직원은 당연한 듯이 화장지 꾸러미에서 한 롤을 끄집어 나에게 건넸다.
일행이 모두 도착할 때까지를 기다렸다. 김이 스린 창을 손으로 닦아 밖을 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을 때리는 물방울로 보아 제법 굵은 빗줄기였다. 땀에 젖은 몸이 식자 한기(寒氣)가 스쳤다. 포터를 찾아 내 배낭에서 우모방한복을 끄집어내어 입었다. 그제야 몸에서 온기를 느꼈다. 내가 도착하여 20여분이 지나 일행의 후미가 도착하였다. 산행 가이드는 오늘 아침에 한 것과 마찬가지로 접수계에 가서 신고를 하였다.
이 산장으로부터 위로 10여분 거리에 군팅라가단헛이라는 산장이 있다. 차두리 군은 당초 계획한 이 라반라타에서 묵기 보다는 군팅라가단에 묵는 것이 좋겠다고 우리 의견을 타진하였다. 라반라타 산장은 한 방에 기차의 침대칸처럼 6명 내지 8명이 투숙한다. 난방이 잘 되어 실내 공기가 지나치게 건조하다. 요금을 지불하면 젖은 신발과 옷을 말릴 수도 있다. 한편 군팅라가단 산장은 난방 시설이 라반라타에 비해 조금은 열악하지만 하시라도 물을 끓일 수 있어 내일 새벽에 정상을 향해 산행을 할 때 뜨거운 커피나 홍차를 준비할 수 있다. 등정을 하기 직전에 컵라면으로 간단히 배를 채우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라반라타 보다 고지에 있어 고소 적응이 라반라타 보다 유리한데다가 내일 새벽에 라반라타 산장에 묵는 사람들 보다 빠르게 등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저녁식사는 뷔페식이었다. 기본은 오늘 아침의 메뉴와 차이가 없었고, 잘게 쓴 무와 곤약을 넣고 끓인 닭고깃국, 닭고기 튀김, 소세지를 토막 내어 소스로 버무린 것, 삶은 양배추, 볶음면, 볶음밥, 커피, 홍차가 있었다. 식사 시간에는 실내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여기서도 여성 동지가 김치 주머니를 풀어서 볶음면과 볶음밥을 먹을 수 있었다.
회장님과 차두리 군 간에 어떻게 의견이 모아졌는지 모르지만 군팅라가단에서 묵기로 결정되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17시 25분에 우리는 군팅라가단으로 이동하였다. 라반라타에서 약 0.5KM 떨어진 거리였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포터가 내 배낭을 다시 챙겼다. 군팅라가단은 해발 3,323M로 라반라타 보다 고도가 약 50M 높았다. 평지에서 50M의 고도차(高度差)는 별 것 아니다. 차두리 군에 의하면 여기서 이 고도차는 매우 유의(有意)하다. 군팅라가단에 도착하는 데는 10분 정도 소요되었다.
군팅라가단은 복층(複層)으로 내부 구조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있는 기숙사와 같았다. 현관을 들어서면 넓은 공간의 로비이다. 좌우로 중앙에 복도와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로비의 북쪽 벽의 싱크대에 큰 가스취사기가 한 개 덩그러니 놓여 있고 그 위에 커다란 주전자가 얹혀 있었다. 주전자는 쭈그러질 대로 쭈그러진 모습이었다. 게다가 뚜껑에까지 그을음이 덮였다. 전반적으로 시설은 라반라타에 비해 열악한 편인 성 싶었다.
일행 중 평소 알고 지내는 부부와 메실라우 산장의 트윈에서 같이 지낸 남자 분과 함께 같은 방을 배정 받았다. 방은 정원이 네 명으로 기차 침대칸과 똑 같은 구조였다. 부부가 한 쪽의 상단에 남편 분이 하단에 그 부인이 차지하였다. 그리고 우리 싱글 남자 두 사람이 반대편의 침대 상하를 각각 차지하였다. 시트와 베개가 아주 깨끗하여 반가웠다. 나는 하단 침대에 배낭을 놓았다. 우선 몸을 씻으려고 샤워장에 갔다. 샤워를 틀자 찬 물이 나왔다. 조금 전에 보았던 가스취사기로 물을 데울 생각으로 로비에 갔다. 여성 동지들이 차지하고서는 이미 주전자에 물을 담아 끓이고 있었던 것이다. 여성 동지들에게 양보하기로 하고 나는 샤워장으로 돌아왔다. 세수를 한 후 찬 물을 타월에 적셔 몸을 닦는 것으로 샤워를 대신하였다. 다행히 오늘 산행하는 동안에 굵은 줄기의 비를 맞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비닐 봉투로 바지 속에서 무릎 아래를 감싸는 비책 덕으로 등산화는 물론이고 양말도 전혀 젖지 않았다.
대충 몸을 닦고 내일 정상에 올라 갈 준비를 했다. 무릎 관절이 염려되어 셀레브렉스 한 알을 복용하였다. 이는 국내에서도 산행 전일에 반드시 하는 일이다. 여기서부터는 포터가 동행하지 않는다. 가능하면 배낭을 지지 않고 가기로 하였다. 하반신에는 등산용 하의 속옷과 동계용 등산 바지를 입었다. 상반신에는 반소매 티셔츠와 그 겉에 긴소매 티셔츠를 입고 다시 우모 방한복을 입었다. 그리고 동계용 방한 모자를 섰다. 그대로 입은 채로 이불 속에 들어갔다. 난방이 되어 있지 않아 밤에 추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 02시에 기상하여 02시 50분에 출발하게 되어 있다. 잠자리에 들어가면서 시계를 보니 19시 10분이다. 상단 침대의 남자분이 출입문의 손잡이가 망가져 잠금 장치가 기능을 하지 못 한다 하면서 소등(消燈)을 하였다. 옷을 입은 채로 이불을 덮은 탓인지 전혀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방안의 공기에서 냉기는 없었다. 의외이었다. 위층 복도에서 계속 신발 끄는 소리가 났다. 잠을 청하였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밖은 계속 폭포수가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세찬 비가 오는 소리 같기도 하였다. 건너편과 바로 위의 침대에서는 잠이 들었는지 뒤척거리는 소리가 없었다. 나만 잠을 이루지 못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내일의 힘든 등정을 생각하자 조금은 불안하였다.
2007.01.15(월)
건너편 상단 침대에서 일어나는 기척이 들려 나도 일어났다. 헤드랜턴을 켜서 시계를 보자 새벽 1시 05분이었다. 커튼을 약간 젖혀 김이 스린 유리창을 커튼으로 닦고 창 너머 밖을 보았다. 비가 창을 때리고 있었다. 상단의 침대를 점거한 남자 분은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건너편 침대의 남편 분은 작년 여름에 중국의 어딘가에 3,000M 급의 고산을 트렉킹하면서 고산 증세에 시달렸다 한다. 내가 주치의로부터 처방을 받아 비아그라를 준비하였다는 말을 듣고 내 소개로 의사를 만나 역시 비아그라를 처방 받아 왔다. 어제 메실라우 산장에서의 만찬에서 양주를 내놓은 분이다. 그의 부인도 일어났다. 우리 셋은 각자 가져온 비아그라를 한 알씩 먹었다. 작은 알이다. 나는 어제의 산행에서 아무런 고소 증세를 느끼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 처음에 비아그라를 복용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먹어서 나쁠 것이 없다 생각하고 건너편의 부부와 함께 어울리는 것도 좋겠다 싶어 입에 넣고 물을 마셨다. 그리고 다시 소등을 하고 누웠다.
어둠 속에서 기상 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눈을 감았다. 남자는 새벽에 방광이 차면 딱딱해지는 현상이 있다. 이는 아직도 내가 경험하는 것으로 남자이면 노소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만큼 지극히 정상적인 생리이다. 나는 지금의 상태가 약한 정도이기는 하지만 자연스러운 현상인지 아니면 약효로 나타나는 현상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어떤 연유인지는 기실 지금의 나에게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고산 증세 없이 등정하는 것이다.
이 혼란은 처음 느낀 그 때 뿐이었고 02시에 기상하면서 나는 이를 이미 잊고 있었다. 바쁘게 짐을 꾸리면서 나는 두 가지 문제로 한 동안 당황하였다. 하나는 바지 속에 입은 등산용 내의이다. 항상 경험하지만 여간한 강추위가 아니면 불필요하였다. 이를 그대로 입고 갈 것인가 고민하다가 과감하게 벗었다. 몸이 가볍고 시원하다. 나는 한국에서 요대를 큰 것과 작은 것 두 개를 가지고 갔다. 비가 멎으면 입고 있는 우의를 벗어야 하고 산행 중에 몸이 더워져서 땀이 나면 입고 있는 윈드자켓 또는 다운자켓(우모복)을 벗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수통과 간식도 챙겨 가야 한다. 이 물건들을 큰 요대에 넣어 가기에는 요대가 좀 작았다. 그렇다고 어제 아침부터 포터가 지고 온 배낭을 비우고 오늘 등정에 필요한 물건만을 넣기에는 배낭이 너무 컸다. 15L 정도의 작은 배낭을 가져 오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건너편 침대의 부인도 나처럼 다운자켓을 챙겨 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 남편은 우모복을 가져 갈 필요가 없다고 부인에게 우겼다. 부인이 당황하자 남편 분이 화장실에 간 사이 부피가 있는 그러나 중량이 그리 나가지 않는 우리 셋의 우모복 세 벌을 내 배낭에 넣어 부인이 매고 가기로 하였다. 남편이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 배낭을 꾸렸다.
밖은 칠흑 같이 어두웠다. 정말로 다행스럽게도 비가 멎어 있었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히 보였다. 윈드자켓 겸용으로 입었던 상의 우의를 얼른 방에 도로 놓고 나왔다. 로프를 잡고 계속 걸어야 하기 때문에 스틱은 오히려 불편하다 하여 또 다시 방으로 가서 스틱을 두고 나왔다. 머리에 간단한 방한모를 쓰고, 윈드자켓을 걸쳤다. 그리고 어제의 산행 기점에서 처럼 카메라, 기록지, 볼펜, 비스켓, 초콜릿을 넣은 작은 요대를 허리에 차고, 500CC 생수병을 가슴에 품었다. 방한모는 이중의 천으로 만든 것으로 양 날개가 달려 이를 펴면 귀와 옆얼굴을 덮고 접으면 머리 위에 고정되는 것이다.
회장님의 재촉에 바삐 로비를 나서면서 나는 간식으로 비스켓을 한 봉지 얼른 먹었다. 그리고 초콜릿을 움찔 움찔 씹었다. 바람의 기세가 약해져 있었다. 바지를 뚫고 피부에 닿는 냉기가 약간은 차갑다고 느껴 조금 전에 내의를 벗지 않았어야 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산행을 시작하여 몸이 더워지면 냉기가 가실 것임을 믿고 헤드랜튼의 불빛을 쫓아 정상을 향한 첫발을 내디뎠다. 그때가 본래 예정한 대로 02시 50분이었다.
숲 속으로 들어간 길은 처음부터 급경사의 계단이었다. 길옆으로 손잡이가 설치되어 있었다. 길은 잠깐 잠깐 평지가 나타났으나 금방 다시 급사면의 계단이 나타났다. 한참 계단 길을 오르자 몸이 더워졌다. 윈드자켓을 벗어 허리에 찼다. 어둠을 뚫고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였다.
이따금 구름이 가리는 하늘에는 별들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북두칠성을 찾아 그 국자의 끝의 별에서 가늠하여 북극성을 확인하고 산행의 방향이 북쪽을 향하고 있음을 알았다. 한층 거리가 가까워져서인지 비가 멎은 직후의 대기 때문인지 별들이 모두가 밝고 그리고 맑게 반짝였다. 40여년 전 최전방 철책선을 경계하던 시절이다. 매일 밤하늘에 시간의 경과와 함께 자리가 돌아가는 별들의 운행을 쳐다보며 밤을 지새던 나의 청춘시대가 생각났다. 어린 딸에게 농담을 한 기억도 났다. “하늘에 별이 몇 개? 동에 빽빽, 서에 빽빽, 남에 빽빽, 북에 빽빽, 그리고 복판에 스물 스물, 전부 합쳐 840개” 하자 딸이 엉터리라고 항의하였다.
잠깐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 작년에 백두산을 같이 등정한 그 여성 동지가 암봉(巖峯) 너머 멀리서 반짝이는 큼직한 별을 가리키며 그것을 자기별이라 하였다. 마침 나도 그것을 내 별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참이라(?) 이렇게 되면 우리 둘이 어떤 사이가 되는 것인가 농담을 하였다.
아래 속세를 내려다보았다. 어둠의 심연 속에서 취락(聚落)의 불빛이 여기 저기 산재하였다. 고개를 약간 쳐들자 희미하게 빛이 스린 하늘과 어둠이 짙게 깔린 땅이 서로 닿는 경계선이 엄청난 원을 그리며 시야에 들어왔다. 우리가 얼마나 높은 데에 서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급사면의 계단길을 벗어나자 이제는 가파른 암장이 나타났다. 이제부터는 밧줄에 의지하여 전적으로 앞에 보이는 암장을 올라가야 하였다. 6.5KM 지점이다. 시계를 보니 03시 45분이었다. 산행을 시작하여 여기까지 불과 0.5KM를 올라오는 데 약 1시간이 소요되었다. 갑자기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어두워서 암장 아래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로프 줄을 잡고 조심조심 오른 쪽으로 측진하여 낭떠러지를 벗어났다. 낭떠러지를 벗어나도 나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우리의 산행 가이드는 5분 내지 10분 정도의 간격을 두고 우리를 쉬게 하였다. 04시 05분경에 7KM 지점을 가리키는 표지목이 보였고 이로부터 3분을 올라가자 사얏사얏 체크포인터에 당도하였다. 여기서 관리인은 흉패에서 일행의 이름과 번호를 장부와 대조하여 확인하고 산행의 계속을 허락하였다. 해발 3,800M 지점이었다.
사얏사얏 체크포인터를 지나면서 길은 약간 완만해졌다. 간간이 이어지던 수목이 사얏사얏 체크포이터를 지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수목한계선(樹木限界線)을 넘어선 것이다. 얼마 가지 않아 다시 가파른 암반이 나타났다. 밧줄을 잡고 올라갔다. 암반은 물에 젖어 있었지만 다행히도 전혀 미끄럽지가 않았다. 04시 20분에 7.5KM 지점을 지나자 시야가 넓어졌다. 광활한 암반지대가 나타났다. 경사도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어둠 속에서 시선이 닿는 주변이 평평한 암반인 때문에 진행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지형지물이 없었다. 밧줄이 높은 곳을 향하여 일직선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붙잡으려 하였지만 팽팽하여 당길 수가 없었다. 이 밧줄이 없다면 길을 헤매기 십상이다. 밧줄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거의 일렬로 암반의 사면을 전진하였다. 작년에 방영된 KBS TV에서 보던 광경이 생각나서 이 밧줄이 키나발루의 정상 로우스 봉으로 가는 방향으로 계속 이어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둠이 한층 가시었다. 05시 01분경 8KM 지점을 통과하자 좌우에 키나발루 남봉과 당나귀 귀봉이 밤하늘을 배경으로 실루엣처럼 눈에 잡혔다. 탁 트인 암반 사면의 위로부터 바람이 약간 세차게 불어왔다. 땀에 젖은 몸이 약간 찬 공기를 느끼자 나는 허리에 매었던 윈드자켓을 다시 얼른 입었다.
이 평평바위 지대를 벗어나자 길은 다시 좌측으로 비스듬하게 꺾이면서 계속되었다. 여전히 암반이었다. 오른 쪽에 하늘을 배경으로 나타나는 능선 너머에 정상이 있다고 산행 가이드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면서 격려하였다. 이제는 어둠이 상당히 가시었다. 그러나 나는 헤드랜턴을 끄지 않았다.
걸음걸이가 현저하게 느려지고 있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약간 허기를 느꼈다. 공복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싶어 얼른 초콜릿을 하나 씹었다. 옆에 있는 부인에게도 권하였으나 사양하였다. 군팅라가단에서 맞은편 침대에 있었던 그 부인이다. 그녀에게는 산장에서 출발할 때도 초콜릿을 권하였던 것이다. 하산 길에 그녀는 내가 주는 초콜릿을 먹고 등정하는 내내 속이 매우 매스꺼웠다고 실토하였다.
나는 보통 때와는 달리 방귀가 자주 나왔다. 이 구간은 약간 비스듬히 측진하는 길이었으나 수월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모두가 산행 가이드의 지시에 맞추어 자주 걸음을 멈추고 쉬었다. 그때마다 어떤 일행은 등을 완전히 암반에 대고 벌렁 누웠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으나 참았다.
8.5KM 지점을 통과하자 진행 방향이 약간 우측으로 바뀌었다. 키나발루의 정상 로우스 봉을 향해 직상하기 시작하였다. 더욱 힘이 들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급사면인 데다가 조금 전까지는 하나로 이어진 암반 지대가 이제부터는 큰 바위 덩어리 지대로 바뀌었다. 너덜지대가 나타났던 것이다. 밧줄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으나 밧줄의 장력(張力)이 너무 팽팽한데다가 줄의 길이에 여유가 없어 잡고 힘을 의지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밧줄은 정상으로 인도하는 방향을 지시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다. 더구나 밧줄을 따라 가다가는 큰 바위 덩어리가 앞을 막거나 갑자기 앞이 끊겨 우회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산행 가이드 뒤를 바싹 따라 전진하였다. 그는 이곳 행로에 익숙하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모두들 조금 가다가 쉬곤 하였다. 쉬면서 올라온 방향을 내려다보자 왼편 아래에 키나발루 남봉(3,921.5M)과 맞은편에 세인트 존스 봉(4,090.7M)이 보였다. 내가 선 고도에서 보는 세인트 존스 봉은 지금 향해 올라가는 키나발루의 정상 로우스봉(4,095.2M)보다 오히려 높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작년에 백두산 등정에 동행한 여성 동지가 세인트 존스 봉을 보고는 고릴라가 가슴을 펴고 앉아 있는 형상이라 하였다. 가슴에 해당하는 일대가 흑색의 주위에 비해 약간 흰 색조를 띠었다. 그녀와 함께 키나발루 등정에 참가한 여성 군단은 전혀 힘들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사진 37. 등정 중에 세인트 존스 봉을 뒤돌아 보며 (촬영 : 강용주)
어느새 어둠이 완전히 가시고 앞이 환하여 헤드랜턴을 껐다. 그 덕에 시야를 넓게 확보하여 미리 발을 딛고 나갈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다. 키나발루 정상 로우스 봉에 당도한 것이 06시 08분이었다. 8.5KM 지점에서 정상에 당도하는 데 거리는 짧은 것 같은데도 23분이나 걸린 것이다.
정상은 이미 우리 보다 앞서 도착한 사람들로 발을 디딜 틈이 없었다. 사람 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정상이 매우 협소하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얼굴에 여명(黎明)이 비쳐지고 있었다. 모두들 해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동쪽 하늘을 보았다. 해는 구름 속에 가려 있었다. 바람이 약간 불었다. 살을 에는 한기(寒氣)를 머금고 있지는 않았다. 한국 가이드는 이렇게 조용하고 온화한 날씨는 드문 일이라 하였다. 틈을 찾아 정상 표지판이 있는 곳으로 억지로 비집고 올라섰다. 겨우 확보한 공간이라 안정하게 발을 딛고 서 있기가 불편하였다.
정상에 서자 나는 바로 무엇을 하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카메라에 담긴 나의 모습을 보면 오른 손을 가슴에 대고 있다. 입을 열고 있고 그 표정을 보아서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향해 말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오른 편에서 나를 부축하며 서 있는 외국 청년이 나에게 무엇이라 말한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진 38. 키나발루 정상 로우스 봉에서 (촬영 : 전은순)
우리 일행들이 정상에서 어렵게 자리를 잡자 차두리 군이 사진을 찍었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카메라를 차두리에게 맡겼다. 그리고 나는 서두러 윈드자켓 가슴 주머니에 품고 갔던 대한민국 부산등산교실 팔기회(八起會)의 기(旗)를 끄집어내었다. 공간이 좁았지만 펼쳤다. 약속한 것이었다. 바람이 세지 않아 반듯하게 펼쳐 들 수가 있어 여간 다행이 아니었다. 몇 년 전인가 정상에서 갑자기 비가 내려 우산을 펼치는 순간에 몸이 공중에 날리면서 낭떠러지로 떨어진 사고사(事故死)가 있었다는 말을 차두리 군으로부터 어제 듣고는 내심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 39. 키나발루 정상 로우스 봉에서 일행과 함께 (촬영 : 차두리)
일행 한 명에게 부탁하여 기를 펼쳐든 내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고향에 있는 팔기회의 얼굴들을 생각하였다. 방한모의 왼쪽 날개가 머리에서 풀어져 왼 뺨에 흘러내린 괴상한 보습이었다. 하산하여 카메라에 담긴 것을 재생할 때 알았다. 정상에서 좁은 확보 공간과 짧은 체류 시간에 얼마나 경황이 없었던 순간이었던가를 증명하는 표징(標徵)이 될 수 있다 싶어 오히려 잘 된 일이라 생각하였다.
사진 40. 키나발루 정상 로우스 봉에서 부산등산교실 팔기회기를 펼치고 (촬영 : 김정호)
첫댓글 끝까지 팔기회 깃발을 휘날리신 고문님 멋집니다
좋은 자료 감사히 간직하여 저도 그곳으로 향해 보겠습니다.... 8기회의 위상을 키나발루 정상에 우뚝 세우셔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부산등산교실 8기회....자부심을 가지고 소수정예부대로서 산악문화를 이끌어갑시다...
"소수정예부대의 산악문화를 이끌어 갑시다"가 참말로 가슴에 닿는 말씀이십니다. 우리 모임이 뜻을 같이 한다면 가능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키나발루 정상 八起會 정복 성공........ ㅋㅋ
첫 팔기회 기가 먼나라 말레이지아 키나발루 정상에 나타남을 축하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