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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3장1-12절 안디옥교회의 세계선교 240913 원주희목사
2024.09.13 금 오전 8:30 ・ 19분 43초
이 말씀에 축복과 은혜가 우리 교회 가운데 또한 이렇게 이루어지게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안디옥교회가 처음에는 이방인 몇 명에게 복음이 전파되면서 그렇게 세워졌습니다.
처음부터 이방인 중심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회당에서 교회가 세워졌다면 아마도 정통 유대인들과 굉장한 율법주의적 갈등들을 겪었을 거예요.
근데 안디옥교회는 그때 그 당시 교회 개척은 쉬웠습니다.
가정이 우리 집에 모이자 하면 그게 교회였습니다.
건물 짓고 상가 극보가 아니었습니다. 가정에 모이는 거니까 그냥 그나마 건물이 있는 회당에 가지 않고 그냥 집에서 모여서 예배하는 게 안디옥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그의 건물을 가졌을 수 있겠죠. 이 교회가 처음 시작은 그렇게 착하게 시작했는데 얼마나 자라났느냐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금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이웃 교회를 섬길 수 있을 정도의 재정적인 자립을 가져올 뿐 아니라 남을 섬기는 교회로 그렇게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교회의 모습들을 보세요. 안디옥교회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더라 이랬어요.
선지자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을 의지해서 예언적인 사역을 하는 분들, 또 영적인 계시를 풀어내는 사람들이 있고 또 교사들이 있더라 했습니다.
이게 교사면서 선지자인 사람도 있고 선지자와 교사가 구분되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사적인 사명을 가진 사람들은 성경 말씀이 쏟습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서 증건합니다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천국의 서기관들로 사는데 어떻게 사느냐 새것과 옛것을 적절히 꺼내와서 이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권면합니다.
옛 것은요. 구약의 율법적인 말씀들을 통해서 책망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이런 거 하고 복음적인 말씀은요.
그렇게 찢어진 거 죄된 것들을 십자가의 은혜 아래에서 우리를 고치신다 이렇게 증언하면 복음적인 새것과 옛 것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이것을 이렇게 말씀을 이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의 교훈을 풀어내면 교사적인 사명이에요.
선지자는요. 선지자는 물론 이 말씀에 근거합니다마는 이 말씀에서 말하지 않는 디테일한 부분들, 삶의 자리에 있는 영역들을 교원합니다.
선지자도 요즘 선지자 예언 사역을 할 때 위로하고 권면하는 것 생각합니다.
꼭 그것만 아니에요.
선지자는 구약에 나를 보세요. 책망합니다. 책망하는데 그게 교회에 부작용이 많으니까 예언 사역을 위로하고 권면하라고 하는 겁니다.
예언 사역을 축사 사역과 겸해서 하면 책망합니다.
지적질하는 사역으로 갑니다. 영분별해서 음란의 죄, 도둑질의 죄, 온갖 죄성들을 자꾸 얘기합니다.
옛 것입니다. 지적해서 옛 것으로 드러내고 그다음에 새 것으로 복음 안에서 그를 싸매는 사역으로 함께 병행해 갈 때 그때 사람들은 바르게 자라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 축복과 은혜가 우리 교회 안에 충만하게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선지자의 사역이든지 교사의 사역이든지 결론은 뭐냐 따라 합시다.
그리스도 안에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안디옥교회의 사람들을 양육하는 포인트는 그겁니다.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께 머물러 있어라. 바라바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때로는 선지자가 나서기도 하고, 때로는 교사적인 사명 안에서 그렇게 영혼을 섬겨내는 그러한 교회가 바로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근데 선지자 들이라고 했습니다. 교사들이라고 했는데 그 보세요.
사람들 이름이 나옵니다. 바나바, 시모, 루기오 만화엔 사울 5명의 지도자의 무리가 나옵니다.
안디옥교회는 5명의 지도자가 팀이 되어서 주를 섬기는 교회였습니다.
안디옥교회가 처음 행성 때 구레네 몇 사람이 내려왔다 했는데 아마 이 구레네 사람 무기어는 처음 초기 안디옥교회의 전도자였던 그분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때는 무명으로 나왔거든요. 근데 어쨌든 5명의 지도자가 팀이 되어서 영혼들을 섬기는데 그들이 굳건한 마음으로 주께 머물러 있는 것.
그것을 위해서 성경 말씀을 교사적으로 가르치든지 이 말씀에 근거해서 예언적으로 그들을 교훈하든지 앤 크라이스토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겁니다.
할렐루야 빗나간 예언 사역은 뭐냐? 예수님 안에 머물러야 될 사람을 예수님 바깥에서 징계 받고 있는 사람이 자꾸 축복한다 카는 거예요.
거짓 선지자입니다.
너 지금 어려움이 있는데 이 어려움들은 주님이 너를 부르신 싸인이야.
너 지금 기도하고 회개할 때 회개하고 엔크라에서 주님 안에 머물러야 돼 그겁니다.
참된 가르침은 뭐냐? 복음의 말씀으로 때로는 복음을 선포해서 영혼을 구원하는 역사, 때로는 복음의 십자가의 은총 안에 그들을 초청하고 죄 가운데 떨어진 것들을 돌이켜서 엔프라이스도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사람으로 세우는 것이 모든 사역의 중심입니다.
할렐루야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을 조력하는 겸손하게 수정될 때에 누가 하시냐 주님이 다 아십니다.
주님 살아계셔요. 부활하신 주님이 다 아십니다.
할렐루야 이게 안디옥 교회입니다. 안디옥교회의 선지자들이 교회 안에 이러저러한 예언서에 가고 이렇게 하는데, 이 중심에 바나바가 잘 양육한 겁니다.
때로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기도 많이 하고, 성령의 충만했던 예루살렘 교회에서 선지자들의 무리를 불러다가 부흥회를 하기도 하고, 이러저러하게 영혼으로 섬기려 했더니 이렇게 5명의 지도자 그룹이 되었습니다.
그 그룹들이 떼로 가이 모여서 주를 섬겨 말할 때에 금식할 때에 주를 섬겨, 때로는 금식하고 주를 섬겨 예배할 때에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뭐라 따로 세워라.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라 였습니다. 5명 중에 3명 남습니다.
3명 남습니다. 3명이 5명의 몫을 또 해내야 되고요.
또 또 다른 사람을 세워서 또 5명의 팀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게 안디옥교회의 지투헬버르마 원형셀입니다.
원형 셉이에요. 쿠바의 공산화가 되면서 쿠바가 공산화가 되면서 집단으로 모이면 여론을 만드니까 5명 이상 못 모이게 했습니다.
교회를 다 찢어야 됐어. 100명이 모이는 교회는 몇 개 교회가 됩니까?
5명씩 다 찢으니까 20개의 교회가 그래서 다 가정에서 모이고 건물 없애버렸습니다.
근데 시간이 지나니까 5명에서 오그라드는 교회도 있고 5명에서 전도가 되잖아요.
그러면 16명 됩니다. 그럼 찢어야 됩니다. 근데 이 5명이 되니까 공산주의 법규를 지켜내면서 교회들이 묘한 성장을 해내기 시작합니다.
4명이 되면 5명이 되면 6명째 전도가 되면 찢어져야 되니까 5명일 때 소그룹 분할을 시작합니다.
3명, 2명, 3명 2명 찢어질 준비를 해요. 아예 4명일 때 2명 2명 이렇게 찢어질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는 5명이 되고 1명이 더 들어오면 3명을 데리고 개척을 하고 6명이니까 셋 셋 이렇게 나눠집니다.
그게 공산주의 쿠바 시절에 지금은 이제 쿠바가 개방을 많이 했으니까 그렇지만은 쿠바 시절에 소그룹 교회로 엄청나게 그냥 작은 교회들이 부응한 모습들이었습니다.
안디옥교회의 원형 세입니다.
5명의 지도자가 함께 모여 주를 섬겨 금식하고 그 원팀이 돼서 함께 섬겨 나갈 때 그 영혼들 어떤 문제를 갖춰 놓고 한 명 앉혀놓고 5명이 둘러앉아서 기도하면 해결 못하겠습니까?
그렇게 해결해 가던 그런 교회 그들이 서로가 서로의 정보하고 함께 하나님과 한마음이 돼서 금식하며 기도할 때에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라.
그들은 이 말씀에 순종해서 보세요.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뭐하니라 안수하여 보내리라.
지도자는 바나바예요. 근데 바나바가 나머지 바나바와 사울이 나머지 3명에게 안수 기도 받고 추방 주방 파송되어졌습니다.
근데 이게 구도가 참 묘하죠. 이 나머지 23명은 이 안디옥에 원래 거주지가 있던 사람들 바나바는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 사울은 사도바울은 다수에서 온 사람 외지인이에요.
그래서 이제 안디옥교회의 터줏대감들이 사도바울과 바나바를 쫓아낸 겁니까?
터세에서 쫓아낸 겁니까?
아니고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와서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할 일을 끝냈고 이제 너희들은 또 다른 곳에 가서 또 다른 안디옥교회를 세우는 사명으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그 일에 나머지 3명이 계급이 아니에요. 누가 높고 낮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안수하고 그냥 두 바나바와 바울에게 안수하여서 그들을 보냈다 였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서 실로기아에서 내려서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 전할 때 그때 함께 동행한 사람이 요한이었고, 마가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다 했습니다.
함께 따라가다 보면 마가 요한은 그가 가지고 있는 연약함이 있을 거예요.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 연약함을 뛰어넘고 앤 크라이스도 주님 앞에 어떻게 머무는가를 배우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그것을 잘 배우면 마가 요한은 하나님 앞에 정말 귀한 종으로 세워지게 돼요.
근데 인간은 모두 다 다 연약함을 가지고 있는 그 연약함에 걸려들기가 더 쉬운 거예요.
그래서 마가 영화는 열병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1차 성교행 끝내고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도망가버렸습니다.
그랬는데 바보에 이르러서 바 예수라고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를 만났는데 이 사람은 서귀 바울과 함께 있었었고, 서귀 바울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던데 이 바나바와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데 얼마나 방해했는지 몰라요.
방해하니까 엘로마 바 예수 유대식으로는 바 예수 헬라의 이름은 엘로마 라고 불려지는 무당이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더라는 것입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오,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굳게 하기를 거치지 아니하겠느냐 책망을 하더니 보라 이제 주의 성이 내 위에 있으니 내가 무엇이 되어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그랬습니다.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찾게 되었다.
이적이 나타났는데 징계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이적은 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고 사람을 온전케 하고 회복시키는 이런 것만 아닙니다.
때로는 징계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일을 방해하고 있는 바 예수 엘루마 이 사람을 징계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나타났습니다.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뭐 했다 믿었다는 겁니다.
이게 역효과를 낼 수도 있습니다. 이적이 나타나서 징계받는 거 보면서 아이쿠 두려움에 잡히게 한다든지 예수 믿으면 잘 된 건데 이렇게 눈 멀고 말이야 하면서 징계받는 것이 역효과를 낼 수도 있습니다.
근데 오늘 이 본문에서는 이것이 오히려 긍정의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의 가르침을 주의 가르침을 놀랍게 여겼다라고 오늘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의 선교 여정에 첫 번째 열매로 안디옥을 떠나서 첫 번째 열매로 그렇게 기록되어졌습니다.
안디옥교회 얘기입니다. 안디옥교회는 작은 사람 몇 사람이 이방인들에게도 혹시나 해서 전도해서 시작된 교회였습니다.
그들이 주도자 바나바를 만나서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사람에 대해서 훈련을 받고 그 머무는 삶에 대한 훈련이 되어졌을 때 그 교회는 5명의 지도자로 자라나는 그런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5명의 중심 지도자가 한 팀이 원팀이 되어서 주님을 섬기는 그런 교회였고, 예루살렘 교회 구조의 건물, 이웃 교회를 섬기는 교회였고, 세상을 향해서 복음을 전하는 강력한 센터, 이방 선교의 중심지가 되는 교회로 그렇게 성장했습니다.
그 축복과 은혜가 우리 내난 죄 가운데 다시 재현되어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다시 이 네남 젤리와 덕천교회 시절에 성령의 역사가 충만해서 그 안에서 영혼을 건져내며 심령을 살리고 일꾼들을 길러내서 세상에 많은 주의 종들을 배출했던 그 아름다운 교회로 다시 회복되어질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이에 방해하는 바 예수 엘루마 모든 어둠의 세력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끊어질 것을 선포합니다.
모든 의의 것들은 그리스도의 권세와 능력 앞에서 끊어지고 파쇄되어질 것을 선포합니다.
주님의 영광이 이곳에 함께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케 되어지며, 주의 백성의 믿음으로 자라나는 그 아름다운 믿음의 여정을 잘 걸어가게 되기를 소망하고, 이 지역과 사회 안에 교회로서의 본질적 사명을 감당해내는 그런 교회로 세워지게 될 것을 소망하며 선포하고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안디옥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데 수종들었던 바나바의 기쁨을 함께 나누어 보았습니다.
목회를 하는 부족한 저희들도 이 바나바의 기쁨이 있기를 원합니다.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 머물게 하고,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 안에 머물게 하고, 그 주신 말씀 붙들고 살아나게 하고 살아가게 하고, 그 말씀 의지해서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고 복음을 풀어내는 그러한 교회로 우리 내남죄를 위해 축복하여 주옵소서 안디옥교회의 아름다운 표상이 우리 교회 표상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로님 역사해 주옵소서 주께서 함께해 주시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행13장13-43절 비시디아안디옥선교01 240914 원주희목사
2024.09.14 토 오전 7:06 ・ 19분 16초
이 말씀의 축복과 은혜가 우리 내난 땅에도 온전히 풀어지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1차 선교 여행을 떠났는데 선교 여행 중에 반빌리아 버가에 이르렀더니 요한은 그들에게 떠나 예루살렘에 돌아갔다 했어요.
요한이 돌아갈 때 바울은 몹시 마음이 상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풍토병에 걸렸거든요.
그래서 풍토병에 걸려 열병에 걸렸는 자기도 풍토병에 걸렸는데 그 병 때문에 사도바울이 옆에서 병구환을 하고 또 안수기도 하고 계속 케어했습니다.
계속해 의해서 건강이 이제 회복되어서 그 지체 요한 때문에 지체에 있다가 회복돼서 이제 버가에까지 갔는데 요한은 회복돼서 이제 다시 선교 여행을 또 가야 될 여정에서 그가이에서 배 타고 예루살렘으로 도망가버린 겁니다.
그래서 굉장히 괘씸한 마음이 들었고 그게 함께 동역하던 사람이 떠날 때 낙심한 마음도 들 수 있고 그렇지 않습니까?
근데 예루살렘에 돌아가고 바나바와 바울은 마음을 추스려서 어디로 갔느냐?
버아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오까지 갔다 했어요.
그리고 안식일이 어디에 들어갑니까?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서 회당에 들어가서 갔더니 거기 동네에는 좀 커서 유대인들이 몇이 있고 그들이 예배드릴 공간으로 회당, 신화고 교회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회당에 들어갔더니 회당에 이제 누구나 와서 성경을 이렇게 깨달은 바 있으면 나누고 그럴 수 있었거든요.
근데 사도 바울과 들어갔더니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해당 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구원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이랬다는 거 발언권을 줬다는 것입니다.
회당장의 발언권을 받아서 바울이 일어나서 말합니다.
말합니다. 대상을 보세요.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뭐하는 자들아 경외하는 자더라 이랬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혈통적으로 유대인들이에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유대교를 종교로 받아들인 이방인들, 또는 이제 남편이 유대인인데 아내가 이방인인 사람들, 그렇게 해서 국제 결혼이 이루어진 사람들이나 또는 종교로서 유대교를 이렇게 신봉하고 아이고 나는 이방인이긴 하지만은 종교로서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옳겠습니다라고 받아들인 사람들 그분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말씀을 전한 내용을 보면 격세의 지감을 느낍니다.
17절부터 해서 쭉 이어지는 광야생활 예수님 얘기까지 쭉 이어지는데 이 모든 설교가 누구하고 너무 닮았는지 압니까?
스데반의 설교와 너무 닮았습니다. 조금 점작이 된 것도 있고 조금 추가된 것 있는데 큰 맥락이 스테반의 설교와 굉장히 유사합니다.
처음 설교 바울 사도가 처음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는 설교가 스데반의 설교와 똑같습니다.
그가 서도바이 순교하는 현장에서 들었던 저건 아니야라고 들었던 그 설교를 자신의 입으로 똑같이 지금 하고 있는데 그 주제는 뭐냐 따라서 예수가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이 구세주이시고 그분이 부활하셨다 이 얘기입니다.
그걸 전하고 그 말씀을 전할 때 그리고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그런 저 그래서 하나님의 부활 얘기 쭉 하고 난 뒤에 그러므로 그 예수님이 오셔서 오셨는데 그러므로 138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긴 얘기했는데 결론적인 얘기 이 사람을 힘입어서 죄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것이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절의 역사가 있음을 전하는 것이고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으면은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얘기해도 긴 설교를 해도 결국은 예수 전하는 거예요.
강다니엘 설조는 그 안에 성경의 여정 안에서 간증도 들어가고 예화도 들어가고 구약을 인용하고 신약을 인용하고 하지만은 긴 설교의 여정에 의해서 예수를 전하는 겁니다.
다른 거 잘하는 거 원합니까? 딴 데 가시면 됩니다.
신천지에 가면 히드도보도 못한 얘기할 수 있습니다마는 교회에서 늘 전해야 되는 것은 예수를 전하는 겁니다.
근데 이게 왜 늘 새롭냐 복음 앞에 반응할 때마다 성령이 우리에게 깨우침을 주시거든요.
성령 안에 들려지니까 똑같은 얘기 듣는데 은혜가 되는 겁니다.
그 복이 우리 교회 안에 함께하게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근데 하나의 경고성 말씀을 주시고 있습니다.
너희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해야 된다.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이 복음을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에게 일러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것이라 하였느니라 안 믿을 때 놀라고 멸망하라 이렇게 선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갈 때 말씀 사역이 다 끝나고 사람들이 말하기를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누구를 따릅니까?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권하는 말씀이 양육입니다.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게 양육해야 됩니다. 할렐루야 양육의 핵심은 뭡니까?
항상 어디에 머물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라.
부사님 축복합시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습시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습시다.
그럴 때 보라운이 일어납니다. 그때 복음을 영접하는 것은 한순간이고, 믿음을 갖는 것은 한순간이지만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또 괴로울 때나 인생에 어려움이 있을 때나 뭐 할 때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다 보면 묘한 일이 생겨납니다.
교회는 천사들이 모인 데가 아니에요. 때로는 악마 같은 사람이 있고요.
때로는 내가 악마가 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니네 없이 우리는 죄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예요.
그러나 이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는 누가 계시냐? 성령님이 계셔요.
할렐루야 머물러 있다 보면 이상합니다. 한 고비 두 고비 넘어가다 보면 때로는 용서해 사람을 용서해야 될 때도 있고요.
때로는 상처받은 것을 어떻게 주님의 은혜 아래 뛰어넘어봐야 될 때도 있고요.
근데 그렇게 하다 보면 사람이 자라나는 거 하나님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러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것은 마치 결혼생활 같아요. 부부가 결혼에 혼인의 언약을 맺고서 그다음부터는 때로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고, 때로는 내 성에 안 맞는 일이 있어도 성격이 안 맞고 뭐 해도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까?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고 몸부림을 치잖아요. 가정을 깨버린 사람들도 사실은 그 몸부림은 몸부림치다 하다하다 깨는 거죠.
근데 어쨌든 최선을 다해 보려고 애를 쓰지 않습니까?
근데 그 애쓰다 보면요. 용서도 해야 되고 용납도 해야 되고 극복도 해야 되고 그렇게 뛰어넘다 보면 이상합니다.
이상합니다. 그것을 사랑 안에서 성령 안에서 뛰어넘다 보면 사람은 신앙 안에 변해요.
신앙 안에 변해요. 그래서 부부의 관계 안에서 성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은혜와 축복이 우리 교회 가운데 함께 하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때로는 사람에게 부딪힐 때 그거 뛰어넘고 뛰어넘다가 안 되면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난 왜 이거 안 됩니까?
무릎 꿇을 때 그때 하나님은 내가 감당하기 너무 힘든 사람이면 피하기도 하시고 넘어서기도 하시고 극복하기도 하시고 여러 가지 은혜를 주시기도 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사람을 함께 사는 법들을 터득해 나갑니다.
그러면서 은혜는 놓치지 않으면서 사람과의 관계가 어떻게 풀어가는지를 배우게 하십니다.
때로는 교회를 섬기다 보면 목회자한테 시험 들 때도 있어요.
장로님에게 시험 들 때도 있어요. 누구한테 시험 들 수 있습니다.
때로는 내가 시험에 대해서 남을 시험 들게 합니다.
그게 인생사예요. 근데 그 고비고비들 속에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머물러 있으려 하다 보면 그것이 나를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회복과 은혜가 우리 교회 가운데 함께하게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거 지나고 나면 이런 일이 생겨요.
저 강상류에서 태풍이 오고 홍수가 나면 그 집체 많은 돌들도 막 굴러내려옵니다.
막 흘러오면 돌끼리 막 꽝꽝꽝꽝 부딪혀요. 빵빵 부딪혀 이쪽들어 저쪽 떨어져 나가고 떨어져 나간 조각들이 모래가 되고요.
떨어진 작곡들이 더 내려가 더 내려가고 저 강하에 가면 돌들이 몽골몽골해집니다.
몽돌이 됩니다. 러시아에서 바닷가 하나 항구에다가 공장에서 나오는 유리 조각이 병, 그다음에 판유리 유리병, 유리잔 온통 유리조각들을 그냥 막 산더미처럼 폐기물이라고 바닷가에 버려버렸습니다.
애들이 발에 찔리고 난리가 났습니다. 근데요. 한 해 지나고 두 해 지나고 새해 지났더니 파도가 밀려오잖아요.
그 파도가 싹 밀려왔다가 밀려가고 쓱 밀려왔다 밀려가고 하는데 밀려가고 밀려올 때마다 이 파도에 떠 있는 모래들에게 이 유리조각들이 깎이기 시작합니다.
깎이고 또 깎였더니 그 유리조각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보석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바닷가는 파도에 유리조각에 애들이 발찔려서 아무도 못 간다 했던 그 바닷가는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그 바다에 가면 금기가 있습니다. 절대로 유리 보석을 주석하지 마세요.
여러분 사람은 이상합니다. 깎이면서 부딪힐 때마다 깎이고 깎인 사람은 변화되어지고 변화되어지면 영롱한 보석처럼 되어지는 은혜가 그렇게 있는 겁니다.
뭐와 함께 깎일 때 따라 합시다. 은혜 아래에서 악길일 때 은혜 아래서 다루어질 때 인생 풍파를 넘어가는 것, 사람을 넘어가는 재정을 넘어가는 것, 나의 죄성을 넘어가는 것 다 넘어서면서 우리는 보석 같은 존재로 변화대예요.
근데 은혜 바깥에서 닦이면요. 사람들에게 분노심만 자꾸자꾸 생겨납니다.
이리 당하고 저리 당하다 보면요. 여러분 사람 안에 분노심만 자꾸 생겨요.
근데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깎일 때 우리는 놀라운 믿음의 보석 같은 사람으로 세워지는 겁니다.
그 복과 은혜가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 안에 충만하게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이 새벽 우리가 주 앞에 고합니다.
우리의 성품 안에 예수 닮은 성품이 있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믿음의 여정 있게 하나님 역사해 주시어서 주 안에서 온전한 승리와 이김의 생이 되기에 하나님 주장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함께해 주시기 원합니다.
추석 명절 맞이합니다.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오고 가는 모든 내 마음 속에 내 남자의 일에 속한 모든 권속들의 아버지의 안전을 지켜 보호하여 주시고, 아버지 하나님 모든 만남마다 축복의 만남이 되게 역사해 주시고, 복음을 아름답게 나누고, 은혜를 아름답게 나누고, 사랑을 아름답게 나누는 만남 되게 역사해 주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어리석어서 우상에 절하고 죄악에 떨어지고 다투고 분내고 싸우는 그런 만남 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지켜 보호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함께해 주시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행13장14-43절 비시디아 안디옥 선교02 240915 원주희목사
2024.09.15 일 오전 7:57 ・ 25분 46초
스티아 안디옥에서 회당에 들어가서 이렇게 말씀을 나눌 때에 그때 이 회당 안에 두 그룹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초대교회 당시에 선교 여행을 떠날 때 하나님께서 미리미리 이렇게 기반들을 이렇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곳곳에 유대인의 회당들이 있었습니다. 없는 데도 있었습니다.
없는 데는 없는 데서는 없는 데서 시작해서 했어요.
근데 회당이 있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 있고 거기에 복음에 대한 접촉점이 굉장히 높은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과 하나님을 뭐 하는 사람들 경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복음에 대한 접촉점이 대단히 높은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지금 유대 이스라엘 지역 가나안 땅에 있는 이스라엘 해당 이스라엘은 종교 권력이 사도계파와 바리새파로 나눠져 있습니다.
에세네파는 은둔 생활 하니까 세속적인 사람들과 접촉을 하지 않으니까 그 세속의 사람을 접촉하는 사람들 중에서 바리새파와 에세네파가 있는 바리새파와 사도계파가 있는데 이 이방 땅에 있는 유대교는 전부 다 바리새파입니다.
이방 땅에 있는 유대교는 전부 다 바리새파입니다.
이들은 제사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번제를 드리지 않습니다.
이들은 신화곡에 회당에 모여서 찬양하고 시편에 찬양을 하고 그다음에 구약 성경 말씀을 풀어주는 서기관들의 각론 설교를 들으면서 예배를 드렸어요.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랑 굉장히 흡사합니다. 형식이 찬양 몇 곡 하고 그다음 대표 기도했는지 모르겠지만은 기도 조금 하고 그다음에 설교하는 겁니다.
이게 유대교의 회당의 예배였습니다. 바리새파의 예배 의식을 따라서 바벨론 땅에 끌려가면서 그들은 이방 땅에서 양을 잡아들일 만한 돈이 없었습니다.
번제단을 쌓아놓을 만큼 재정이 없었습니다. 제사장을 따로 이렇게 채용을 해서 직업적인 제사장을 세울 만큼 재능이 없었습니다.
종살이하는 주제에 어떤 돈이 있습니까? 그래서 그들이 겨우 생각해낸 것이 가정 가정 가정에서 우리가 이 고난을 받는 것은 제사를 안 드리는 것도 아니고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데 있다.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각 가정에서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바리새인 운동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운동을 통해서 그들은 결집되어지고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까 회당을 만들었습니다.
신화곡의 회당을 세었는데 이 회당의 특징은 제사하지 않는 겁니다.
제사 무용론이 바리새파에게 있었습니다.
제사 드려봐야 우리가 예루살렘 멸망할 때까지 얼마나 번제를 드리고 얼마나 화목제를 드렸느냐 근데 그렇게 제사 드려도 우리는 멸망당했고 실패한 나라가 되었다.
그 원인이 뭐냐 말씀을 안 지켜서 그렇다. 근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는 겁니다.
한 달 합시다.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맞아요. 바르스을 지켜야 돼요.
바르세 운동의 중심 주제는 말씀을 지켜야 된다. 맞아요.
근데 하나 더 해야 됩니다. 따라갑시다. 회개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당한 이유는 하나님의 큰 섭리도 있겠지만은 그들이 안식일을 어기고 안식일을 어기고 종들을 억압하고 그런 죄를 지었기 때문이에요.
그 죄를 지었는데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짓는 죄가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짓는 죄가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짓는 죄는 하나님이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른 사람을 종 삼았으니 너희도 종 돼봐라 그거예요.
이미 지은 죄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회개해야 됩니다.
할렐루야 회개해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는 그 여정을 지나갈 때 그들은 한목지 드렸습니다.
소원의 재물입니다. 하느님 우리나라를 해방시켜 주세요.
바벨론에 잡혀가지 않게 해주세요. 화목재 드렸어요.
소원의 예물을 드렸습니다. 근데 하지 않은 제사가 있습니다.
속죄제입니다.
심지어 절기상 대속죄일이라고 하는 전리가 있는데 그 대속죄일은 의무적으로 회개하는 주관이거든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말합니다.
곧 대속제 일인데 이제는 백성이 회개할 듯 하니까 너 가서 회개하라고 그러라.
예레미야가 나가서 회개하라 했습니다. 절대 아니에요.
구딩이 빠졌습니다.
그리고는 그만 예루살렘은 멸망을 당했던 겁니다.
우리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지은 죄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리새파가 세상 곳곳에 이방 땅 곳곳에 회당을 세웠고, 회당을 세우면서 그들이 가나안 땅에 되돌아가면서 지방 곳곳에 회당을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에는 수르바베를 통해서 성전을 지어서 하나님 앞에 올려드렸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나라는 성전의 제사를 집례하는 사두계파 사람들과 지방에서 회당의 예배를 주관하는 바리새파 사람들로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근데 이방 땅에는 전부 다 바리세파입니다. 그래서 전부 다 회당입니다.
회당에서는 주로 서기관들이 말씀을 전하지만은 가끔씩 외부에 누구 다른 사람이 오면 말씀을 나누는 시간들을 주었습니다.
나누는 시간을 줄 때 사도 바울이 일어서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근데 이 부류 중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리새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이방인입니다.
바리새파와 이방인들, 바리새파와 예수님의 교훈에 다른 점이 뭡니까?
바리새파의 교훈에 부활이 있습니다. 바리새파의 교훈에는 말씀을 지켜야 된다라는 말씀 해석이 있습니다.
바리새파의 교훈과 예수님의 교훈이 다른 점이 뭡니까?
내용상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어요. 근데 예수님의 교훈에는 따라 합시다.
석재가 있습니다. 바리새파의 교훈에 없는 숙제가 예수님의 교훈에 있습니다.
자신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속죄가 있습니다.
이 바리새파의 교훈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차이가 또 뭘까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회복, 다윗의 자손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왜요? 유대인이 아니니까 바리새파는요 이스라엘의 회복, 다윗의 나라가 회복되는 것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근데 사도 바울이 이 바리새파의 교훈과 이 하나님을 경애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희망과 예수님의 교훈 이 틈바구니에 그리스도의 피묻은 십자가의 은혜를 불어넣고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바리새파 교훈 내에서 부족한 부분을 십자가의 은총 안에서 이렇게 전하고 그리고 유대인의 왕으로 와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메시아를 바라보는 바리새파의 사람들에겐 좀 불편한 진리 예수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고 그를 통해서 다윗의 나라, 민족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는 진리에 대해서 증가한 겁니다.
이 진리는 누가 더 접촉점이 많으냐 하나님을 경애하는 사람들 이미 바리새파의 교훈을 통해서 아이고 좀 더 거룩하게 사는 것에 대한 도전을 받으면서 거룩한 삶 종교로서 유대교를 택했는데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좀 거부 반응이 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나는 헬라인으로서 야외의 신을 섬기고 싶은데라고 하시는 분들 그분들에게는 사도 바울이 전한 바나바가 전하는 이 새로운 복음의 진리가 얼마나 큰 매력덩어리인 겁니다.
복음은 어떤 사람에겐 매력덩어리고요. 어떤 사람에겐 불편할 수 있습니다.
바리세파 입장에서는 민족주의를 떠나거든요.
기독교 치니까 다윗의 나라가 회복되어서 이스라엘 나라가 다시 다윗의 때처럼 회복되어지길 바라는 민족주의를 떠나버려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온 인류의 죄를 사하셨고 모든 인류의 구세주가 되신다.
이 진리를 전파하니까 좀 불편한 진리입니다. 근데 사도바울이 이 이스라엘 사람 바리새파의 교훈과 하나님을 경애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꿈과 비전, 그리고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풀어내는 데 풀어내는 진리는 스데반의 설교와 굉장히 유사합니다.
왜? 스데반이 그걸 최초로 증거한 원래 기록된 성경에는 그렇습니다.
스데반이 그걸 최초로 선포한 사람이었습니다. 길게 이스라엘 역사를 언급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에서 시작합니다.
애굽에서 낙오되 된 백성을 높여 권 권능으로 인도하여서 출애굽의 사건 안에서 함께하셨던 하나님이시다.
광야의 46만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가나안 땅 일곱 조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었다.
스데반의 설교에는 광야 생활의 여정들을 광야 교회라고 하면 좀 더 더 자세히 풀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렇게 길게 풀지 않았습니다. 광야교회의 정도를 얘기하시고 사무엘 때까지 사사시대를 얘기하고 그 왕정시대에 얘기하고 사울 왕과 다윗 왕의 시대를 얘기하시고 그 다윗왕에 얘기하면 바리새파가 눈이 번쩍 뜹니다.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마치 다윗의 때에 그 뜻을 다 이루셔서 우리는 그 애굽강에서부터 큰강 유보라 때까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땅을 회복하고 그리고 강장 강성한 나라의 축복을 우리가 누렸잖아 그게 다윗의 대입니다.
그게 바리새파 얘기가 성껏한 얘기예요. 지금까지 얘기는 바리새파에게 솔직한 얘기입니다.
이게 사실이고 그리고 1 23절부터는 예수님 얘기입니다.
여러분 구약을 잘 알면 바리새파, 구약을 잘 알면 바리새파의 신앙까지 갈 수 있어요.
그런데 복음이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할렐루야 복음이 임하면 이걸 뛰어넘게 되는 거죠.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 다윗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다.
곧 예수다. 예수님을 세우셨고 그 세우셨는데 그가 오시기에 요한이 왔고 아주 근대에 우리는 지금 2천 년 전 이야기지만은 사도 바울이 얘기할 때는 세례 요한이 왔던 얘기 십자가에 죽은 얘기가 불과 30년 40년 전에 일어난 얘기입니다.
아주 가까운 과거의 이야기예요. 그 얘기를 지금 차근차근 하는데 여기까지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동의할 만한 얘기입니다.
회개의 세례 그의 신발끈도 풀지 못하게 했다는 세례 요한의 증언이 있었다.
그리고 이 구원의 말씀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셨는데 만약 창조했다면 다윗의 나라가 회복됐을지 몰라 이 얘기했지.
근데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의 말을 알지 못함으로 예수를 정제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죽였다.
이거지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달라고 그를 청해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였다.
네 이건 다 성경, 구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다 응하게 하신 것이다.
나무 위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다.
죽은 자 가운데 그를 살리셨다. 이것은 사두계파에게는 불편한 자 부하를 지니.
근데 바리새파는 죽은 자의 부활을 믿어요. 또 그래서 죽은 자의 부활을 믿으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얘기가 그렇게 낯선 얘기는 아니에요.
갈릴리로부터 온 사람들이 여러 날 보여 40일 동안 보이셨고 이제 그들이 예수님의 증언자가 되어서 증언했다.
그리고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이 약속을 이루셨다.
그럼 예수님이 누구냐?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시편의 말씀에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얘기합니다.
하나님께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자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심을 가리켜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예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또 다른 시편에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그랬습니다.
시편의 말씀을 통해서 지금 부활을 증언해 주는 거는 누구에게 주님이 하신 겁니까?
엠마흐로 가는 제자에게 줬던 말씀이에요. 그 말씀들이 초대교회를 통해 계속 전승되어져 내려왔고, 이 전승되어져 내려온 진리를 바나바가 이 안디옥에서 가르쳤을 수 있고, 바울이 어떻게 깨달을 수 있고, 어쨌든 어쨌든 이 엠마오에서 가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시편의 말씀을 통해서 부활을 증언해 준 진리들을 그들이 배웠고 그것을 그 체험한 것과 그에게 말씀을 통해서 예수가 부활하셨구나 그들이 받아들였습니다.
그게 부활 체험한 제자들의 모습이었어요. 그리고 사도바울이 이 지금 다시 10편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의 부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됨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러므로 넘어갑니다. 여러분 이런 구약의 배경들을 통해서 유대인들에게 오해를 좀 풀어주고, 바리스파에게 오해를 풀어주고, 그리고 하나님을 경애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좀 더 이해를 시키고 그리고는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믿어 죄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사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신다.
여기서 달라집니다. 이스라엘 나라 메시아가 와서 다윗의 나라를 회복시킨다.
아니고, 메시아가 오셔서 인류의 죄를 사하고 에덴 동산, 하나님이 처음 창조할 때에 죄 없었던 인류에게 유산으로 주던 그 하나님 나라 그것을 회복시켜준다.
이게 사도바울의 메시지로 넘어가는 겁니다.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했던 바리새파가 자랑하는 모세의 율법, 그것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했던 모든 일에 이 사람은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며, 그리고 권합니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너에게 미칠까 삼가라.
이르시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에게 일러 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반응입니다. 다음 안식일 이 말씀을 해주세요.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들, 바리새파 중에 많은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복음을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영접한 그들에게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기를 항상 어디에 머물라 하나님의 은혜에 머물라.
아주 짧게 양육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머물아 권했습니다.
이게 비시디아 안디옥의 교회가 형성되어지는 여정이에요.
우리 교회 안에도 이 은혜와 축복이 함께하게 되기를 바라고 사도 바울이 초대교회에 대 선교를 이루어 갈 때, 그 1차, 2차, 3차 선교 여행을 해나갈 때마다 곳곳에 신학고개, 하나님이 예비하신 신학 고개가 있고, 그 예비하신 신학의 회당 안에 특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의 접촉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잘 전할 때, 또 하나님이 함께하신 이적과 기사가 함께하면서 초대교의 선교 운동들이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역사가, 이 아름다운 역사가 이네난 땅에도 동일하게 이루어지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소망합니다.
기도합니다.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우리의 모든 두난에도 보일의 그 피로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십자가의 그 은총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리스도의 그 충만함이 우리 안에 머물게 하시고 날마다 예수로 승리하는 그 은혜가 있기에 우리 하나님 주장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한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함께해 주시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행13장43-52절 비시디아 안디옥 선교03 240916 원주희목사
2024.09.16 월 오전 8:53 ・ 14분 45초
이 말씀의 축복과 은혜가 우리 내남제일교회 가운데 충만하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도 바울이 베시디 안디옥에서 말씀을 전했는데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랐는데 두 사도가 이들을 양육해야 되는데 양육의 원칙이 이렇습니다.
항상 따라 합시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어라.
사람들은 이게 이 손으로 달을 가르치면 처음에는 이 손에 가르친 달을 보다가 그다음에는 이 손가락을 보기 시작해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뭡니까?
말씀과 기도, 말씀을 읽는 것과 기도하는 것 또는 교회 예배 생활을 하는 것 이것들입니다.
근데 말씀을 읽는 것, 성경 말씀은 귀하지만은 말씀을 읽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러 있기 위함입니다.
할렐루야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러 있기 위함입니다.
교회 예배에 출석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러 있기 위함입니다.
교회 안에 이러저러한 모임을 가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러 있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은혜 안에 머물러 있을 때 그 말씀을 통해서 은혜 안에 머물러 있을 때 말씀을 통해 깨달은 진리를 붙들고 살아가는 삶도 펼쳐지는 겁니다.
근데 주객이 전도되면 목적이 호도되어지면 성경을 읽는데 은혜 아래 안 머무는 이상한 현상 현상입니다.
예배 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 아래 안 머무는 노예나 교단에서 회의 할 때요.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합시다 하고서 딱 예배합니다.
30분 딱 예배하고서는 그다음 예배 끝나고 피티끼가 싸워요.
예배가 그냥 다음 회의를 진행하기 위한 앞에 그냥 짧은 의식을 진행하는 그런 시간처럼 돼버린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기 위해서 예배했으면요.
그다음요 은혜 아래서 회의를 진행하고 은혜 아래서 살아가고 이걸로 뻗어가는 겁니다.
할렐루야 우리 내담자 일교의 양육의 가장 큰 키 포인트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무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은혜 안에 머무는 삶입니다.
그러고 있을 때 새벽기도회 설교의 주제가 뭐냐 하면 항상 성령의 인도함 받아 살아가는 것 또는 기도하는 사람들이 모였으니 기도의 세계 이거 바로 신앙 논설을 하고 나면 주일 낮 예배 설교는 꿈고 있을 때는 초심자들에 초점을 뒀습니다.
아주 대중적인 설교를 하자 오후 예배와 수요 예배 때는 제자도 오후 예배나 수요 예배 올 정도 된 사람들은 그래도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걸어야지 제자들에 대한 얘기를 조금 강해 설교를 하더라도 야고보서 같은 삶에 관한 얘기들을 자꾸 건드리는 거.
오후 예배 때는 새벽 기도 때는 정말 교회의 핵심 일꾼들 기도 생활하시는 분들 그런 분들이 오시니까 이분들은 정말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동력자들을 세워야 되겠다는 그런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영의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헌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어떻게 따라갈 것인가에 대한 얘기를 하고 이렇게 12년을 목표로 했네요.
우리가 신앙생활이 결국은 뭡니까? 목사가 왜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머물 수 있도록 코칭해 준 사람이 목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면 그다음은 성령이 감독하십니다.
성령이 끌어가십니다. 내가 그들과 일거수일투족 함께할 수 없지만은 성령님은 숨쉬듯이 함께하십니다.
주님의 은혜 아래 머무는 우리 내 남자의 모든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할렐루야 먼저 은혜를 받아야 돼. 은혜를 받으면 십자가의 그 은총 속에서 주는 은혜를 받으면 구원받은 사람 중생합니다.
거듭난 사람이 성령을 체험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예요.
성령 체험하고 성령 충만을 유지해 가려고 하면 기도해야 됩니다.
성경 읽어야 됩니다. 예배 생활해야 합니다. 교회에 적절히 봉사도 해야 합니다.
11조 생활도 해야 됩니다. 모든 경건 생활을 다 해야 됩니다.
목적이 무엇 때문에 성령 충만해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려고 할 때 할렐루야 그 목적이 선명한 우리 이남 제비이기를 소망합니다.
은혜 안에 머무는데 가급적이면 말씀과 기도가 균형이 잡힌 신앙생활 그다음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온 시민들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였다.
비시디아 안디옥이라고 하는 요즘 같은 말하면 성 단위로 이렇게 모이니까 뭐 그렇게 큰 성이 아니겠죠.
사람들이 다 모였습니다.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했다.
오늘 이 비스데 안디옥의 설교의 중심에 누가 있습니까?
바울 사도가 있습니다. 안디옥에서는 바나바가 중심이었습니다.
선교지를 나오니까 이제 주도권 리더십이 바울 사도에게 넘어옵니다.
왜요?
하나님의 부르심이 다른 거예요 바울 사도에게 더 부르심이 맞는 겁니다.
근데 하나님이 왜 바나바를 붙이셨겠습니까? 바나바는 교회 사역을 많이 해봤고, 해당 사역도 잘 알고 그래서 이 바울을 절제시킬 수 있고, 바울을 이렇게 코치할 수 있고 함께 동력할 수 있고, 그래서 바울 사도가 제 길을 걸어갈 때까지 바나바가 마치 보조다리와 같이 그렇게 독력하면서 그렇게 길을 잡아주는 사람으로 그대 붙여줬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했습니다. 근데 바울과 바나바가 그래도 담대히 말하고 말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들에게 간다.
이방인들에게 포커스를 옮기겠다라고 선언합니다.
그다음에 자기의 부르심을 말하였어요.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많은 사람이 믿음을 가졌습니다.
복음을 전해보면 어떤 사람은 믿고 어떤 사람은 안 믿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라는 표현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제 49절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이스트 안디옥을 중심으로 두루 퍼졌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비부인들과 그 신의 유력자를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었어요.
만약 바울과 바나바가 이 지역에 비스트 안디옥 지역에 계속 머물러서 그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그 주변 땅에 그 지방에 두루 퍼진 니가 일을 계속 했다면요.
바울 선교에 거점 도시가 됩니다. 바울 선교는 1차 선교 여행 한 지역들 지나고 2차 지나고 나면요.
안디옥이라는 에베소라는 지역에 가서 3년을 머물면서 거점 선교를 시작해요.
거점 선교는 뭐냐 하면 어떤 지역에 도시 중앙에 중심되는 지역에다가 교회를 세워놓고 그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아시아에 사는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듣더라.
에베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거점 도시 에베소를 거점 도시 삼아서 아시아에 에베소가 중심도시 사람들이 왕래가 많은 데니까 에베소를 중심으로 해서 그 아시아의 모든 지역의 복음을 듣더라.
사도바울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 한 것도 로마가 거점 도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탈리아의 중심 로마가 그 당시 모든 세계의 거점 도시였기 때문에 로마의 복음이 전파되면 그 복음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거점 도시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 복음을 그렇게 전했는데 비스디아 안디옥이 그 거점 도시가 될 수 있는 복음의 거점 도시가 될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의 기회를 몇몇 사람들의 선동 때문에 중단되어졌어요.
하지만 여기에 복음 받은 사람들 이야기 나옵니다.
쫓아내었습니다. 두 사람은 발을 털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갔는데 남은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뭐 하더라 충만하더라.
바울 사도가 그들을 양육했던 목적 항상 은혜 아래에 머물러 있어라라고 하는 그 목적은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왜 짧은 동안에 이렇게 기쁨과 성령의 충만한 교회가 그리스도의 안디옥 교회가 될 수 있었느냐 그들은 바리새인이었거든요.
바리새파의 교훈을 따라서 바리세포 흐리의식도 있습니다.
음식을 먹는 것 안 먹는 것 흐리의식이에요. 하지만 금식하는 생활, 기도하는 생활, 경건 생활에 관한 엄격한 규정들이 있어요.
그리고 바리새인들로서 세상에 죄된 것들을 행하지 말아야 되는 그런 규정들이 있습니다.
그 규정, 종교적인 규정과 삶의 규정들 속에 복음만 들어가면 복음만 들어가면 그것은 성령 안에 해나가고 복음 안에서 펼쳐가고 복음 안에서의 경건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생판 이방인들은요. 경건 생활의 터부터 다시 닦아야 되는 문제가 생겨요.
이고니은 비스테 안디옥에서는 바리새파 사람들, 회당의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서 예수를 믿기 때문에 이은 복음과 그다음 기쁨과 성령의 충만한 자생적 교회가 되어지는 여정을 빨리 걸어갈 수 있었던 겁니다.
이 은혜와 축복이 우리 내난 땅에도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이 시대 안디옥 땅에 복음이 강력히 전파되어졌던 것처럼 이 땅에도 복음이 강력히 풀어지는 은혜가 있게 축복하여 주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무는 내담자들의 모든 성도들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아버지는 자기들의 삶을 살아내고 성령 충만함을 유지해 나가며 복음의 일꾼 되는 이 땅들에게 축복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함께해 주시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