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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3장1-12절 롯 헤어짐인가 파송인가 240919(수) 원주희목사
2024.09.19 목 오전 8:12 ・ 34분 43초
이 말씀에 나오는 삶의 아름다운 모습들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지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고향을 떠나갈 때 둘이 권력 지친이었기 때문에 함께 고향을 떠났습니다.
동생이 형인가 먼저 죽었기 때문에 이제 조카였고, 아브라함에게는 혈육이라고는 롯밖에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재산이 많았고 많은 재산의 상속분을 재산을 지출하면 누가 가지게 되겠습니까?
로이 가지게 될 수 있죠. 그래서 로이 아마 아브라함을 따라올 때는 내심 그런 마음도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과 함께 함께 여정을 떠나서 함께 귀가하게 되었는데 그만 13장에 일어나서 아브라함 롯이 결별하게 됩니다.
좀 참는 게 좋습니까? 결별하는 게 맞습니까? 로의 입장에서 어떻습니까?
삼촌 아브라함한테는 자식이 없고 좀 있어 보니까 조카 삼촌은 계속 하나님이 자녀를 준다 준다 그런다는데 그거 가능성 잘 없어 보이고 조금 지나면 이거 내 거 될 수 있다 없다 그런 마음이 없잖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근데 이들이 함께 거주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 목자의 가축들과 로의 목자의 가축들이 양대가 많아지고 목초지가 부족해지니까 서로 다투기 시작한 겁니다.
그 다툼이 일어났을 때 일어났을 때 아브라함이 로을 부릅니다.
불러서 우리는 한 친족이 아니냐 나나 너냐 내 목자나 내 목자나 서로 망하게 하지 말자 다투게 하지 말자.
나하고 너도 다투지 말고 너의 목자도 나의 목자도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이렇게 말합니다.
다투게 하지 말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함께 귀가하려면요 한 따라 합시다. 질서를 재조정해야 합니다.
가족 간에 아브라함의 지금 로도 지금 많이 컸거든요.
아브라함은 나이가 들어가고 그래서 가족 간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돼요.
양대가 얼마 없을 때는 이게 그냥 니네 너가 사면 됐는데 이제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서 함께 살아야 됩니다.
근데 롯과 아브라함이 선택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니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내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니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라함은 롯에게 말합니다. 니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 니가 나를 떠나가라.
니가 좌편을 택하면 나는 우편을 택할 것이고, 니가 우편을 택하면 나는 좌편을 택할 것이다 이렇게 말했어요.
이것은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단순하게 목초지를 양보한 정도가 아니에요.
목초지를 양보한 정도가 아니고 아브라함에게는 가족이 있다 없다 없어요.
피부치라고는 조카인 로밖에 없습니다. 근데 그 조카 롯에게 떠나가라고 말한 겁니다.
떠나가라고 말하는데 롯이 삼촌의 바지가에 붙으면서 삼촌 제가 뭘 잘못했나요?
저 조금만 더 있게 해 주시면 안 돼요. 그럴 수도 있지 않습니까?
왜요? 조금 더 있다 보면은 어차피 삼촌은 나이가 많이 들어가고 그 재산은 다 누구게 될 수 있다.
자기 게 될 수 있다라고 하는 셈법이 인간사에는 존재하지 않습니까?
근데 떠나가라고 하니까 롯은 아브라함을 떠나서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해서 양떼를 치기에 좋은 땅을 택해서 떠나가게 되었고 아브라함과 롯이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생을 살아가다가 한번 따라 합시다.
함께 따로 때로는 함께 있는 것이 좋을 때가 있고요.
때로는 흩어져서 따로 있어야 될 때 있습니다. 근데 신앙 안에서 떠나갈 때가 있거든요.
떠나갈 때를 잘못 택하면 아브라함과 롯 같은 그런 결과를 낳고 맙니다.
아브라함도 지금 믿음을 배워가고 있는 중이에요.
하지만 롯은요. 아브라함에게 기대 있는 믿음이에요.
근데 그것을 아브라함을 떠나고 했더니 아브라함을 떠났던 롯은 어떻게 되었느냐 소돔 고모라 땅이 에덴 동산 같이 그렇게 풍성한 땅이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멸망시키기 전까지. 그래서 롯은 요단 온 지역을 택해서 동으로 옮겨가서 그들의 손으로 떠나게 되었는데,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하나님이 가라고 한 땅에 계속 머물렀다면 조카 롯은 그 지역들의 도시에 머물면서 그 장막을 옮겨 어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그랬어요.
여러분 신앙생활은 우리가 때로는 누군가에게 붙여진 삶을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누군가에게 붙여진 삶을 살아갈 때는 붙여진 자는 누군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받아야 될 마치 영적 아버지 영적 어머니와 같은 그런 분들을 우리가 만날 때가 있어요.
그때 그 만남이 축복이 되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걸 타이밍을 잘못 잡으면요. 록 같은 결과를 빚게 되었어요.
충분하게 내 신앙에 자생력을 가지지 않았는데 덜렁 파송을 받은 것처럼 그렇게 떠나갔는데 그만 그 롯이 소돔 땅에 가서 소돔의 문화와 소돔의 죄악들 속에 그냥 젖어버려가지고 그도 빈털털이 되고 그의 온 가족이 소동 고모라 멸망할 때 다 죽어버리잖아요.
두 딸은 남았네요.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까지 떨어지는 그런 일들이 우리 인간 사회에서 비일비재합니다.
동물들의 세계를 보면 동물들이 자녀를 기르지 않습니까?
아기 새끼를 낳고 그러다가 어느 때가 젖 뗄 때까지 떼고 나면 어느 정도 성인이 성체로서 야생에 살아나갈 훈련을 시키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그냥 떠나보냅니다.
떠나지 않으면 그 어미가 막 쫓아내가지고 떠나보내기도 합니다.
때로는 어떤 동물들은 보면은 많이 낳아요. 거북이 바다 거북이 봤습니까?
바닷가에 바다 거북이 알을 놓으면요. 얼마나 많은 알을 놓는지 몰라요.
많이 낳아가지고는 바다로 그냥 부모가 돌보지 않습니다.
그러면요.
그 바닷물까지 헤엄쳐 가는 와중에 그 개가 잡아먹기도 하고 새가 잡아먹기도 하고 막 그럽니다.
확률 게임을 해요. 많이 나아가지고 바다로 나갔다가 다시 성체가 돼서 그 바다에 돌아와서 알을 놓는 거북이는 그렇게 많이 되지 않습니다.
동해안에 가면 연어를 이렇게 산란하러 온 연어를 잡아다가 알을 채란해가지고 수정시켜서 바다로 떠나보내는 거 하거든요.
그거 하는데 연어 머리를 잘라요. 머리를 잘라서 머릿속에 물고기 이석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석을 조사하면 그게 언제 태어났는지 이런 거 다 나와요.
그래서 머리를 잘라서 이석을 조사하면 몇 살인지 언제 동해안에서 떠나보내는 연어지 다 조사하면 나옵니다.
그런데 거기에 수많은 고기들을 방류하는데 방류한 고기 속에서 고작 0.1%밖에 안 돌아온대요.
근데 이거 확률을 높이려면요. 이거를 이제 부화장에서 부화시켜서 다른 동물들에게 먹히지 않을 만큼 그거 하고 적응 훈련을 좀 시켜서 그렇게 해서 야생에 방류하는 겁니다.
신앙생활도 우리에게 하나님이 교회라는 공동체를 허락하시고 목회자라는 사람을 세우시고 교회에 먼저 믿는 사람들을 공동체로 묶어준 이유는 이 안에서 우리가 충분히 공급받아야 될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양육되어져야 되고 세워져야 될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할렐루야 그렇게 세워지고 난 뒤에는요. 보내는 겁니다.
옛날 교회는 뒤에다가 이런 거 많이 붙여놨습니다.
모이면 뭐 하고 기도하고 흩어지면 뭐 하고 전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고 인데요.
흩어져서 전도할 수 있는 사람 그렇게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에 무장된 사람은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전까지는요.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고 할 때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데까지 상당한 기간 동안에 교회 안에서 양육되어져야 합니다.
할렐루야 아브라함과 롯은 지금 하나님이 어떻게 언약 안에서 한 팀이 되어서 고향을 떠나서 하란을 떠나서 하나님이 보내신 가나안 땅까지 봤고요.
이 가나안 땅에서 아브라함이 그 때로는 실수해서 애굽 땅에 내려가서 낭패를 겪는 것도 보고 다시 돌아와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재단을 쌓는 걸 봤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는 중에 하나님께서 롯에게도 삶의 분깃들을 허락하셨다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런데 삶의 분깃은 받았지만은 신앙은요.
믿음의 유산을 받을 만큼 아직 준비가 됐다. 안 됐다.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믿음의 본빛을 받을 만큼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근데 아브라함도 이걸 안다면 아마 롯시 아브라함을 떠나서 소돔에 내려갔다가 낭패를 겪고 그 소돔을 멸망시키려 할 때 하나님이 간절하게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하나님 거기 내 조카였습니다.
그놈이라도 건져주세요.
중보기도하고 그리고는 그 소도에서 나오는데 자기 둘, 딸내미 둘이만 데리고 나는 걸 알았다면 그때 내가 너를 보내지 말았어야 됐는데 아마 그러지 않았었겠습니까?
여러분 신앙 안에서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붙여진 사람으로 살아가는 때가 존재합니다.
초대교회 때는 초대교회 때는 교회 안에 성도들의 인적 구성이 오늘날과 좀 달랐어요.
오늘날은 교회 목사 그다음에 장로님 권사님 막 이렇게 세웠지만은 초대교회 때는 이런 인간관계 구조를 가졌습니다.
십자가의 인간관계 구조를 가졌는데요. 초대교회 때는 이런 인격 구조를 가졌어요.
교회 안에서 아비가 있습니다. 영혼의 아버지 같은 분이 있고 그 아버지 같은 분 밑에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자녀 영적 자녀 같은 존재들이 있어 이 자녀들이 또 복음을 전하면서 또 신앙을 가지고 또 사람들을 세워가면 이들에게 또 자녀가 생긴 겁니다.
이 아들에게는 얘는 영적 할아버지 같은 존재였지 이 사람이 결혼을 하면 옆으로는 배우자가 생깁니다.
같은 영혼의 아버지를 둔 사람들. 자녀들 속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또 다른 자녀들이 있는데 이들을 독력자 관계가 되었어요.
십자가에 인만한 그대로 초대교회는 딱 짜여져 있습니다.
언제까지 도와주느냐 이 영혼의 아버지가 이 자녀가 또 다른 자녀들을 양육하고 신앙 안에 세울 때까지 그렇게 도왔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돼 있었기 때문에 교회 안에 있으면서 안 따라가 영혼의 고아가 아니었습니다.
영혼의 고아가 아니었어요. 오늘 시대에 한국 교회나 전 세계 교회의 비극이 뭡니까?
교회 안에서 자신의 영혼의 어머니 같은 분, 자신의 영혼의 아버지 같은 분을 잘 만나지를 못해요.
어떻습니까? 아브라함에게는 롯은 마치 영혼의 자녀 같은 육신적으로도 족하니까 영원히 자녀 같은 그런 존재이고요.
로스으로 다 드러나면 그들을 또 신앙 안에 세울 수 있는 그런 좋은 인격 관계이지 않습니까?
근데 이게 끊어집니다. 목회를 해나가면서
그 육신의 아버지가 목사님인 분들, 장로님인 분들이 목회가 풀어지는 걸 저는 많이 봐요.
신학교 다닐 때 같은 신학교 같은 크라스에서 공부했는데 그 친구 내보다 별로 잘한 거 없었는데 인생 쭉쭉쭉 잘나가는 거 그렇게 많이 봤습니다.
그게 참 부럽더라고요. 근데 저같이 그런 영적인 배경이 약한 사람들은 누구를 만나야 되냐 멘토를 만나야 되거든요.
멘토를 만나면 그분이 영혼의 아버지 같은 역할을 하고 나는 그분을 통해서 영적인 유산을 물려받는 축복을 누리는 거야.
그런데 한국교회 안에 이거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거든요. 우리 교회 권사님들이 장로님들이 영원히 아버지가 되고 영혼의 어머니가 되는 은혜와 축복이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영혼의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된 사람은 뭘 해야 되느냐 복음을 전해야 되겠죠.
복음을 전해야 되고요.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 살아계신거 안 살아계신 헷갈립니다.
그 사람들에게 체험적인 신앙이 좀 주어지게 되면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되면 하나님 정말 살아계시는구나 깨닫는 삶이 펼쳐집니다.
그다음 체험한 사람이 이게 다입니까? 그다음은 따라가서 제자에게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걸어야 돼 그냥 예수 믿는다고 하는데 거듭났다고 하는데, 예수님 믿는 제자의 길을 전혀 걷지 않는 많은 무리와 같은 세상을 사는 사람 많이 있습니다.
제자의 길을 걷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이 보낸 신앙이 자라나는 사람들을 자신의 삶의 자리로 이길 타송이라고 합니다.
타성되어지 초대교회는 영혼의 아버지와 영적 자녀 사이에서 이렇게 신앙을 북돋아주고 영적인 유산을 주고 함께 기도하고 삶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그렇게 세워가는 축복을 누렸어요.
그리고 그 자녀가 신앙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걸어가게 하고, 그도 그의 가정과 삶의 자리 안에서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복음을 전하는 그런 사람이 될 때까지 양육하는 그런 여정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부모와 자식뿐만 아니라 배우자와 동력자 사이에 수평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그들은 원 팀 한 팀이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아름다운 은혜를 이었습니다.
이게 뭉쳐지면요. 십자의 격자 구조가 계속 형성되면서 초대교회는 그렇게 성장하고 서로가 서로를 세워가는 아름다운 교회였던 겁니다.
할렐루야 그 교회가 우리 교회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이런 교회였기 때문에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각각 은혜를 받은 대로 손이 있고 발이 있고 지체가 있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면서 그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거.
아브라함과 롯은 하나님이 맺어준 혈통 안에서의 언약 관계 안에서 마치 패밀리 영혼의 가족인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화가 너무 일찍 되어 버린 거예요.
너무 일찍 되어졌더니 아브라함은 좀 외롭지 하지만 그가 인생을 살아온 깊이가 있는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그런지 믿음을 잃지 않고 쭉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삶을 풀어가는 사람이 되었다면 젊은 롯은요.
젊은 롯은 소유가 많아지는 축복을 누리니까 좀 더 살기 좋은 그 당시 도회지 그 당시 도의 지인 어디로 갑니까?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뭐 한지라 떠난지라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러 있으려고 애를 썼다면은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물렀다 하였습니다.
도시 생활하는 것이 다 나쁜 건 아닌데 문제는 로이 도시 생활한 그곳이 소돔이었다는 겁니다.
소돔은 어떤 때였습니까? 소돔은 동성애가 만발한 때였고요.
소돔은 물질문명의 번영을 이루는 데 너무너무 죄악이 만연한 그러한 도시였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성했는데 신앙적으로는 정말 바닥을 내려가고 신앙만 바닥이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엄청난 바닥에 처해 있는 그러한 땅이었습니다.
롯은 그곳에서도 성문 앞에서 재판하는 사람이 되었어 왜 왜 그렇게 했습니까?
나름 유지였기 때문이에요. 로이 소돈 땅에서 유지 역할을 할 수 있었지만은 그러나 그의 영혼은 소돔땅의 죄악들을 보면서 그의 의로운 심정이 점점 더 점점 더 상하더라라고 했습니다.
너무 일찍 믿음에서 믿음의 공동체에서 이탈되어져서 로슨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스스로 채워내고 스스로 만들어내는 자생력이 없었던 겁니다.
여러분 하늘의 밤하늘에는 달이 떠 있습니다. 별도 떠 있습니다.
밝기는 달이 더 밝아요. 그런데요. 밤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해요.
태양빛이 오는 것을 반사해내고 있는 겁니다. 별은요.
지구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작은 빛밖에 내지 못하지만은 사실은 달보다 더 뜨겁고요.
달보다 더 밝은 빛을 사실은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벌이 내는 빛은 자생적으로 그 스스로 내는 빛이에요.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어떤 공동체 안에 있을 때 자기의 빛을 바라는 그런 사람이 있고요.
반사하는 빛이라도 바라는 사람이 있고요. 그 공동체를 떠나 있으면 자기 자신이 내가 얼마나 어두운 존재인가를 깨닫고 발견하는 그런 사람들도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내남제일교회라는 공동체로 묶어주었습니다.
할렐루야 이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그 영향력을 선한 영향을 미치면서 밝혀주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빛을 바라게 자기의 삶에서 빛을 바라는 사람으로 만들어 세워낼 수 있는 그러한 사람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저는 대구의 개척교회를 해드렸습니다. 부산에서 목회를 할 때 중보기도팀에 제가 리더였습니다.
그리고 새 가족반 성경 공부하고 새 가족 정착을 위한 사역을 하는데 정착률이 80%가 넘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나 너무 목회를 잘하겠다라고 생각해 들었습니다.
착각이었습니다. 서울로 갔습니다. 서울에 가서 서울 목회를 꼭 경험해 봐야 된다고 선배들이 그래서 그런가요?
하면서 서울의 선임 목사로 스카웃대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거기서도 나름 인정받는 사람으로 그렇게 됐어요.
근데요. 그러다가 대구에 개척교회를 또 시작해 보니까요.
교회에서 전기세 내가 내야 되고요. 교회 운영비 내가 만들어야 되고요.
그 지하에 개척교회 하면서 하나님 앞에 그랬어요.
하나님 저는 지하에 왔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지요.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지예 이랬습니다. 병 걸려 하나님이 지하 2층 지하 3층 마치 파내려가는 것 같더라고요.
그 시간을 지나가면서 내가 마음을 치고 안타는 게 뭔지 압니까?
부목사 생활하고 목사 한다고 그냥 얼떡거리고 다녔는데 내가 그렇게 해냈던 것들은 사실은 성도들이 기도를 받쳐주는 남들이 기도해 주는 그 힘으로 한 것이지 내 스스로의 힘이 아니었구나 라는 것들을 처절하게 그렇게 느꼈어요.
그 개척교회의 시간을 2년 동안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더니요.
참 이상하지 그랬더니 그다음부터는요. 얻다가 던져놔도 그냥 할 것 같아요.
여러분 신앙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빛이 되십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누군가 사람을 통해 비춰지는 빛은 여러분 저도 멘토가 되는 사람들을 여러 사람을 겪어봤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중에 흠집 주 어떤 사람이 윤리적으로 넘어지는 사람도 있었고요.
그래서 손절해버린 사람도 있어요. 사람은 다 그래서 거기에요.
근데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시간 동안에는 그분에게 저를 붙여놨더라고 왜 아직 배워야 될 게 있으니까 배울 것이 무엇입니까?
사실은 별거 아니에요.
바나바라고 하는 하나님의 종이 안디옥에 가서 교회를 세워가는데 그 교회를 세워가는데 안디옥에 이제 예수 믿는 사람한테 분들에게 바나다가 뭘 원하는 줄 압니까?
한번 따라 합시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러 있었어요.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의 성도들에게 양육한 키 포인트 마음을 굳게 해서 세상에 어떤 일이 있고 이런 일이 있고 저런 일이 있든지 간에 항상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러 있었어요.
그거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 안에 믿음의 공동체를 맺어주셨는데 우리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말한다면 뭔 말이겠습니까? 항상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러 있었어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재성과 우리의 스스로 어떤 상처나 삶의 어떤 분담함과 또는 무료함들 속에서 또는 세상의 모든 일들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흐름에 반응해서 믿음 아래 이렇게 살아가는 그 은혜 아래 머무르는 것들을 놓쳐버릴 때가 더 많이 있습니다.
근데요.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러 있으면요.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러 있으면 반드시 그 상황 지나가고요.
그 상황 뛰어넘고요.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믿음의 꽃을 피우는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가시밭의 베카파가 예수의 향기 날릴 수 있는 이유는 뭡니까?
가시밭에 한번 찔러보세요. 향기 날리고 싶은가 니 찌르나 나도 찌르지 그게 인간의 본성이고요.
찔린 마음을 그 사람이 힘이 있으면 말 못하고 끙끙 하고 있다 가죠.
종로에서 딴 데기 맞고 한강 가서 야 하면서 분포리 한다고 다른 사람한테 막 풀어 찢겨서 그냥 폭탄 노릇하기 쉬운 게 인간이에요.
근데요. 그런 분노의 마음, 억울한 마음 그런 것들도 하나님 아래 은혜 안에 머물러 있다 보면요.
내 마음 만지시는 주님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죄악이 넘어졌을 때도 하나님 안에 은혜 안에 머물러 있다 보면요.
회개의 영어로 성령이 역사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틈에 어느 틈에 우리는 자라나요?
할렐루야 자라나서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신앙의 체험도 하고 그리고 제자도의 삶을 살고 갈레리요.
세상에 아무리 잘 나가도요.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성령의 은사가 하늘을 나는 은사를 가져도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걷지 않으면 은사는 가짜예요.
그리고 그렇게 세워진 사람이 자기 가정으로 가면 가정 안에서 자녀들을 믿음으로 길러내든지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든지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게 파송이에요. g2헤브 세르 훈련을 받았는데요.
이것을 4가지 단계를 따라가면서 구원 단계 확립 단계 제자 단계 파송 단계 이래 나눠서 양육해 구원받은 사람이 자기 신앙을 하나님 정말 살아계시구나 신앙을 확립하는 것 이때는 체험적인 필요하다.
그래서 확립 단계 확립된 사람들이 하나님 정말 살아계시다면 이 말씀 진짜네 이 말씀 붙들고 살겠느냐 할 때 제자 단계 무슨 단계일 제자 단계 제자가 된 사람을 하나님의 주요한 귀한 사역을 위해서 파송 단계 파송은 사람마다 부르심이 다 달라요.
기본적으로 우리가 파송받은 데가 있습니다. 가정으로 버르심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가정으로 부르심 받았습니다. 내가 섬기는 삶의 자리에 부르심 받았습니다.
내가 교회 학교 어느 부서를 섬기면 거기에 부르심 받았습니다.
그래서 파송 단계 그렇게 신앙이 자라나야 거기 가서 열매를 맺지 그게 믿음의 삶의 여정들인 거예요.
그 축복을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마도 로이 아브라함 곁에 좀 더 머물면서 머물 동안에 그의 마음속에 그 불편함들이 있을 거예요.
왜 삼촌은 말이야 그 유산 나한테 주지 뭐 혜택도 하는 아 낳는다고 그 산노 그럴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좀 그러고 있지 않습니까?
근데 그 불편한 마음까지 끄긋거리는 그런 여정을 지나가는데요.
그거 때로는 함께 머물려 하니까 내려놓아야 되고 때로는 뭐 할 때 포기도 해야 되고요.
그런데 이러다 보면 이렇게 주님의 은혜 아래서 그의 인생을 풀어가시는 역사들을 경험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심 안에서 너 이제 믿음 됐단 말이야 너 좌편으로 가서 저쪽의 일들을 감당해라 할 때 파송되어지면요.
헤어짐이 아니고 파송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안에서 헤어짐이 아니라 파송의 축복이 넘쳐나는 우리 교회이기를 소망합니다.
헤어짐이 아니라 파송의 축복이 넘치는 겨 교회가 예배를 마치고 주일날 성도들 내보낼 때요.
아이고 다음 주까지 믿음 생활 제대로 하겠나 걱정되는 게 아니고 보내면서 그의 가정 안에서 믿음의 한목소리를 해내고 파송이 되어지는 그런 축복과 은혜 우리들의 가정 안에 풀어지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 그들도 그들의 인생 속에서 이런 일 저런 일 겪을 거예요.
그런데 그 모든 일들 속에서 명심하고 기억해야 될 것은 한번 따라 갑시다.
마음을 굳게 하여 항상 은혜 안에 머뭅시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봅시다.
그걸 위해서 성경 읽기도 필요합니다. 그걸 위해서 찬송도 필요합니다.
그걸 위해서 기도 생활도 해야 됩니다. 그걸 위해서 하다못해 유튜브에 누구 설교라도 들으면서 마음을 진정하고 다스려가고 그렇게 해 가야 돼요.
그럴 때 헤어짐이 아니라 파송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은혜가 있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의 가정 안에 이 축복이 함께하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명절을 맞아서 자녀를 만나고 가족들을 만나고 또 헤어져 보내었습니다.
헤어짐 속에서 이 만남이 그 헤어짐이 파송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마음 같습니다.
하나님 그들도 그들이 흩어진 자리에서 예수 제대로 만나게 축복해 주시고 믿음의 진정한 공동체를 경험하게 축복해 주시고 그리스도 안에 자라가는 은혜가 있게 역사해 주셔서 그의 몫을 믿음으로 살아내는 아름다운 은혜가 있기에 우리 하나님 주장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한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함께해 주시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창13장10-18절 현실의 복과 언약의 복 240925수요 원주희목사
2024.09.26 목 오전 8:28 ・ 27분 28초
이 말씀의 축복과 은혜가 저와 여러분과 함께하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비, 고비 때마다 선택을 하면서 삽니다.
어디 가서 살 것인가 무엇을 먹을 것인가 누구를 만날 것인가 오늘은 무엇할 것인가 작은 선택들이 모여서 일상의 선택을 하고, 중요한 고비에서는 직장은 어디 갈 것인가 어떤 여자한테 장가를 갈 것인가 어떤 남자를 신앙으로 맞을 것인가 아들 딸은 장가를 누구한테 보낼까 며느리를 누구를 드릴까?
딸은 누구한테 시집을 보낼까 모든 일의 선택의 여지인데 큰 선택도 있고 작은 선택도 있습니다.
그 선택 안에서는 한번 따라가자 책임이 따릅니다.
내 혼자 선택해서 가면은 그 내 책임이 돼요.
그런데 이게 가장이 돼보고 하니까 나의 선택 하나가 온 가족을 움직이는 거 그래서 그 선택을 내가 때로는 잘못했다 싶을 때는 가족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내가 왜 그때 그 선택을 해서 내 혼자 이 고생을 하나 또 가족의 가족들 이 고생을 시키나 이런 마음이 들고 맙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둘 다 각각 선택을 했습니다. 롯은 눈을 들어서 요단 지역을 바라본 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뭐였다 넉넉했다 였습니다.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물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올여름에 야채값이 굉장히 높았잖아요.
왜 야채값이 높습니까? 비는 적게 오고 날씨는 너무 뜨거우니까 하우스 안의 온도가 한 50도 정도 올라갔다 그래요.
그러니까 이게 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니까 이 야채값이 천정부지로 뛰었어요.
근데 더운 게 낫습니까? 폭염에 시달리는 게 낫습니까?
태풍이 오는 게 낫습니까?
이 폭염 때문에 폭염에 막혀서 태풍이 우리나라 땅을 안 왔어요.
일본을 몇 번 때리는지 몰라요. 중국을 몇 번 넘어뜨리는지 몰라요.
그 강한 태풍들이 기후 변화 때 얼마나 세진 태풍도 중국을 같은 지역을 연달아 세 번을 때리니까 그거 정말 난감한 문제거든.
저는 더운 것도 싫고 사실은 태풍도 싫은데 근데 굳이 선택하라 한다면 더운 거는 그래도 그래도 그냥 버틸만 버티면 되지 않습니까?
태풍은 와보니까 정말 쌓아놨던 모든 것들을 다 앗아가더만요.
어쨌든 그 선택이라는 것들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아브라함과 은 각각 선택을 하는데 소화까지 물이 넉넉해서 농사하기 좋다.
양을 먹이기가 좋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롯은 아브라함이 니는 자하면 나는 우하고 니가 우하면 나는 좋아할 테니까 니가 먼저 선택해라 하니까 물이 좋은 땅을 선택해서 그 땅을 지하에서 나갑니다.
그러고는 그 선택을 떠나서 요단 동쪽을 택하고 동으로 옮겨서 그들이 서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물면서 그 장막을 옮겨서 결국은 어디까지를 선택했냐 소돔에까지 이르렀더라.
어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에까지 이르렀더라. 왜냐하면 소돔이 도시가 돼서 살기가 좋아 보였거든요.
물이 넉넉해서 아마 소돔에 옮기고 난 뒤에는 아브라함은 양떼를 치는 생활보다 유목생활을 했던지 저기 미를 재배하면서 농사 농경새가 됐든지 아마 업을 바꿨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도시에 맞는 생활을 하면서 그의 선택을 해나갑니다.
이게 눈에 보이기에는 더 좋은 선택같이 보입니다.
왜요? 물도 좋고 그다음에 농사짓기 좋고 도시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이렇게 저렇게 잘 살 수 있는 기회들을 많이 잡을 수 있으니까 그게 로스의 선택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선택을 해버렸기 때문에 선택지가 없습니다.
게다가 아브라함의 마음속엔 깊은 상실감만 남았습니다.
믿었던 조카가 그렇게 할 줄 몰랐는데 이런 것도 있고,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올 때는 피부치라고는 마누라하고 롯밖에 없어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나머지는 다 종이든지 뭐 그냥 그런 계약관계에 얽힌 사람들이고 거래처 사람들이고 혈육관계는 아내와 로밖에 조카밖에 없는데 그 조카가 그를 등지고 떠나버린 겁니다.
지독한 외로움과 앞으로 더 어떻게 해야 되나 하는 그런 것과 이 땅에 또 뭐 하며 살지라고 하는 그런 것 그런 속에서 아브라함은 남아 있습니다.
근데 소돔은 소돔 사람들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뭐였더라 죄인이었더라.
롯은 그의 선택한 것에 대해서 짊어져야 될 몫이셨습니다.
죄인들의 땅에 선택해서 들어간 데 대해서 그가 짊어져야 될 몫이 있었습니다.
그 영혼들을 변화시키든지 아니면은 그 소돔의 죄악들 때문에 그의 가정이 타락하든지 그 위기들 속에서 롯은 지나가야만 됐고요.
아브라함은 홀로 양떼를 치면서 요단 서쪽에서 그렇게 외로운 시간들을 보내는 것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 선택에 대해서 하나님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아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내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이렇게 약속해 주었습니다.
소돔닭을 선택해 간 롯에게는 하나님의 아무런 언약이 주어지지 않는데 양보하고 나는 손해 보는 사람인가 싶은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이 언약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내가 내 인생을 복으로 보증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인생을 복으로 약속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과 함께하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돈에 관해서 위대한 속담이 하나 있습니다. 돈은 쫓아가면 점점 더 달아나버리고 돈이 따라오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돈이 따라오는 사람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돈보다 더 좋은 것들을 더 위대한 것들을 따라가고, 그리고 돈은 나를 따라오는 오늘도 외동에 사는 최무선 분을 한번 만났었는데요.
커피 한잔 마시면서 이런저런 카페에서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분이 그분도 최 씨도 그래서 저도 제주 동네에 살다 보니까 이 동네 집안 사람들 얘기를 쭉 이렇게 하다 보니까 한 30분 동안 얘기를 했어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을 나서고 정유재란 때는 아무도 의병이 나서지 않았어.
그리고 왜정 지화가 되었을 때는 그때 나라가 빼앗기고 전국의 시세를 좀 아는 부자들이나 세도가들은 전부 다 일본에 줄 뗄 때입니다.
근데 이 내 남편인 최 씨 집안에서 독립자금을 댔잖아요.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그분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할렐루야 세상을 살아보면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을 추구해 가가고,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뭘 붙여주시고 돈을 붙여주시고, 할렐루야 그 은혜와 축복이 저와 여러분과 함께하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돈을 쫓아가는 사람들은 그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보다 무조건 돈만 쳐다보.
그런 사람들은 돈을 벌어도 수전노가 되기 쉬워요.
근데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추구해서 믿음의 선택을 하고 간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돈을 붙이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을 선택한 로의 가정에 언약을 준 게 아니고 오늘 그것을 모두 양보해버리고 하나님 앞에 머물러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시는데,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내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할렐루야 영원히 이르게 될 것이라고 약속을 주십니다.
근데 문제는 아직 아브라함의 자손이 없어요. 자손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또 약속하십니다.
내가 내 자손이 땅에 티끌 같게 하리니,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어서 마지막 체국의 희망은 롯이에요.
저놈 저거 저 내 자식 삼아서, 그리고 조카니까 그거를 내 자식 삼아서 내 모든 유산을 하나님의 음을 안 주면 저한테 줘야지 하는 길 오십니다.
근데 믿었던 조카 롯이 그를 떠나버린 겁니다. 그럴 때 아브라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자손이 땅에 티끌 갖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데, 내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행으로 두루 다녀보아라.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주리라. 이렇게 주님이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이 말씀 받고서 그 땅을 이렇게도 가보고 이렇게도 가보고 왔다 갔다 했을 것 같습니다.
어떤 것 같습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이 너 이 내난 땅을 너에게 주리니 너 저 박달에도 가보고 너 노국에도 가보고 다 나가 봐라.
에이 발 아프구먼은 그 어떻겠습니까? 아브라함이 그다음 날 아마 그렇게 걸었을 것 같아요.
근데 그러면서 약간의 반신만이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이걸 줄까 정말 내게 자식을 줄까?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가 받으면요.
하나님의 약속은 때로는 그냥 천둥치듯이 꽝 이렇게 떨어지면서 그냥 너무너무 놀라고 권위처럼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탁 주어질 때는요.
받는 순간에 믿음이 확 올라옵니다. 성령님의 임재와 함께 때로는요 그 약속이 세미넘섬섬 들려질 때는 그 약속을 받아도 정말 이게 될까 정말 이게 될까 우리는 그 헷갈리는 시간을 지나가요.
그 뒤로도 약속이 성취되는 데까지는 상당한 과정을 지나가거든요.
여러분 혹시나 옛날에 어디 부흥에 가서 누구에게 좋은 예언을 받아본 적 있습니까?
기독교 예언 사역들을 어떤 사람은 자꾸 점쟁이처럼 생각해요.
동쪽으로 몇 보, 서쪽으로 몇 보, 좌로 한복 뒤로 한보 하면은 7월달에 귀인을 만나고 그건 점쟁이들 얘기고 기독교 신앙에서 예언은 믿음의 과정을 지나가게 됩니다.
믿음의 과정을 지나가면서 성취가 되기도 하고 미루어지기도 하고 폐하여지기도 하고 더 약속보다 더 좋은 것을 줄 수도 있고 할렐루야 하나님 살아계신 분이시고 그분은 그 약속하신 분 신실하게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에 꾸준하게 믿음의 가정을 가는 게 참 중요해요.
그래서 내가 믿음의 그 과정을 지나가지 않으면 약속은 뻥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 지금 약속을 주고 있습니다.
그 땅을 주겠다. 너희의 자손들을 지끌같이 많게 하겠다 그 약속을 했는데 그다음 날 하나님이 약속에 대해 확정을 주고 너 그거 믿음으로 치하라는 뜻으로 그 땅을 종으로 행으로 한번 달려봐라.
창세기 15장에 가면은 자석을 많이 죽여도 너 하늘에 별 한번 세하지 마라 하면서 아브라함이 눈으로 믿음으로 선택하게 한 번 더 요구하십니다.
이 믿음의 과정을 지나가야 되는데요.
그것 하고 또 이렇게 하고 근데 그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가 아브라함에게 그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성취되는 데가 언제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땅에 갔다가 그리고 가나안 땅에 돌아와서 아브라함 이후로 4대가 지나고 난 뒤에 그 땅을 주시기 시작했어.
아브라함에게 땅의 티끌같이 되겠다 했는데 아브라함에게는요.
믿음으로 낳은 이삭과 그다음 육신은 이스마엘과 후처 그대로 사이에 낳은 아들 여럿 해가지고 총 7남매 8남매 정도입니다.
티거같이 되지 않았어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보니까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고백하는 저 같은 사람을 포함해서 티끌같이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우리 믿음의 조상이라고 고백하면서 우리 믿음의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그런 말씀의 역사가 그대로 이루어진 겁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근데 이 아브라함에게는 약속이 주어졌고 롯에게는 약속이 아니라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선택한 것에 대한 결과를 책임져야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우리가 선택한 것은 우리가 책임을 져야 돼 무엇으로 인생을 결정하겠습니까?
여러분의 삶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선택의 기준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그 믿음으로 선택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약속으로 응답하시고 그 약속을 성취해 가는 데 상당한 과정을 지나가게 되지만 그 과정도 하나님이 믿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지나가게 하시고 도우시고 끌어서 반드시 그것을 이루어내십니다.
그 축복과 은혜가 저와 여러분과 함께하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저는 김미진 간사의 강의를 참 좋아해요. 가끔씩 들어요.
몇 번이나 듣고도 떠듣고 떠었는데요. 떠들을 때마다 가슴이 이렇게 설레요.
그분이 그럽디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 결코 쉽지 않더라.
자기가 살아보니까 사람들은 성령의 도우심 안에 믿음으로 살면 박수 칠 일만 생기고 좋은 일만 생길 것 같지만은 사실은 그렇지 않고 순간순간 선택을 해야 되고 그 선택에 대해서 본인이 책임져야 되고, 그런데 가만히 그래요.
믿음으로 사는 것에 대해서 그 믿음 안에서 선택하는 데 대해서 고비고비마다 지나가야 될 몫이 있고 지나가야 넘어야 될 산들이 있고 극복해야 될 어려움들이 있고 한데 그분이 그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보다 더 좋은 생은 나는 못 봤다. 그럽디다.
여러분도 이해가 되기를 예수님이 축복합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입니다.
롯은 눈에 보이는 대로 선택했고, 아브라함은 말씀 안에서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은 그것을 믿음의 선택이라고 하시고 그 믿음의 선택에 대해서 약속을 삼아주시고, 그 약속을 아브라함이 죽고 난 뒤에도 세대와 세대를 넘어가면서 그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옛날에 대우전자 지금 사라졌지 않습니까?
대우전자에서 삼성을 따라잡겠다고 그때 가전제품, 세탁기, 냉장고 막 이 내놓으면서 그분들이 탱크주의라는 걸 외쳤습니다.
탱크주의 탱크가 튼튼하다 이 말이지. 그래서 그때 광고 카피라이트가 이랬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 튼튼한 거 자기들은 삼성보다 브랜드는 약하지 모르지만은 튼튼하게 만들었고 10년 갑니다.
그거 자랑했어요. 그게 대우전자가 삼성을 따라잡겠다고 내는 전략이었습니다.
근데 그 광고의 광고가 머리 인상에 남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날마다 선택합니다.
짧게는 오늘 머물까 오늘 뭐 할까 어디 놀러 갈까 오늘 시간 어떻게 보낼까 작은 선택부터 해서요.
고비고비보다 중요한 선택들도 해나갑니다. 근데 그 선택이 우리의 영혼을 좌우합니다.
10년을 좌우하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영혼을 좌우하고 있어 우리가 오늘 선택한 것이 우리 자녀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축복과 언약의 약속으로 그렇게 주어질 수 있는 겁니다.
롯은 그가 선택한 소돔땅을 선택한 대가들을 지불해야 했는데요.
그의 아내는 소금 고모라 멸망당할 때 뒤돌아보다가 소금 기둥대에 붓습니다.
두 딸이 있었는데요. 그 두 딸은 소돔 고모라에서 정혼한 남자가 있었는데 못 데리고 나왔습니다.
못 데리고 나와가지고는 그 도망을 나와서 굴속에 있는데 다시 그들이 걸어서 아브라함한테 오면은 거기 아브라함 밑에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장가 갈 때 있고 시집 갈 때도 있고 인생 새롭게 살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굴 속에서 아버지 술을 먹이고는요.
하룻밤은 큰 딸이 동침하고 그다음 날은 둘째 딸이 동침하고 아버지와 딸 사이에서 모압과 암모를 낳아서 새로운 종족을 만들어가는 그런 가정의 개복.
그렇게 흘러가는 그게 롯의 선택의 가지로 계속해서 그렇게 간 거예요.
여러분 오늘 내가 믿음의 선택을 하면 그 믿음의 선택 안에서 때로는 우리는 그 선택에 따른 짊어져야 될 몫도 있고요.
손해 봐야 될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 선택이 하나님의 은약 안에 이루어진 선택들은 그분이 이루어 가시고 그분이 풀어가시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펼쳐지게 됩니다.
눈앞에 있는 것으로 순간의 이도로 선택하지 아니하고 말씀을 기준 삼아서 하나님 앞에 더 좋은 가치를 위해서 선택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 선택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습니다. 찬양 안 할까요?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지는 널 보호하시네.
여러분 예수님과 우리와 하나님 안에서 구원의 언약을 맺었어요.
그리고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들은 날마다 날마다 믿음의 선택을 해나가고 믿음의 선택에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와 날마다 새로운 언약들을 맺어가십니다.
그 언약이 공수표 같이 보이지만은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나타나게 되는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 놀라운 역사입니다.
그 축복과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가정과 삶의 자리 안에 가득하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 보세요.
이 나라가 1907년에 회개하고 막 그럴 때 나라는 뺏겼고요.
그때 교회에서 애국가 지었는데요. 애국가는 천부의 의지 없어 곡조에 지었습니다.
그래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이 곡조예요.
교회에서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 외치는 것이 마땅할지 몰라요.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이 이 애국가를 따라 부른 겁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찬송 언어 부르는 애국가를 따라 부르는 그래서 동양 어느 나라에 자기나라 국가에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하는 가사가 들은 나라가 어디 있어요?
우리나라밖에 없어요.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도 나라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가 아니고 조상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가 아니고 우리가 우리나라를 짊어지고 나가세요.
이것도 아니고 왜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합니까?
의지할 데가 없으니까 임금도 변질해가 일본 공작 지휘 받아버리고 고관대신들도 다 변질해가 매국로 돼버리고 믿을 놈 하나 없고요.
그럴 때 하나님밖에 믿을 데가 없으니까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 안 믿는 사람들도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가 가사를 그냥 따라하면서 이게 우리나라 애국가가 됐습니다.
근데 참 미안하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미국이 조미 통상조약이라고 해서 조선과 미국은 동맹관계를 맺었고 서로 어려움이 닥치면 서로 돕다 했습니다.
그래놓고요. 일본하고 밀약해가 가스라테프타 조해, 미국은 필리핀을 먹고 일본은 조선을 먹도록 서로 그냥 밀약을 맺었습니다.
세상에 믿을 놈이 어디 있습니까? 근데 하나님은 우리 민족과 기도하고 회개하고 은혜를 구하며 나갈 때 우리와 언약 관계를 맺어주셨고, 할렐루야 언약관계 안에서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
잠깐만 여러분 제발 좀 하나님이 보호해 주세요.
그 간절함이 담긴 이 찬송가를 받아주셔서 하나님은 이 민족을 이만큼 살게 도와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의 가정과 삶의 자리 안에도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가정 만세 하나님이 모아사 내 인생 만세 하나님이 모아서 우리 자녀들 만세.
오늘 우리가 믿음의 선택을 할 때 언약의 가문이 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늘의 축복입니다.
그 복이 함께하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연약하고 부족한 저희들을 언약의 백성 삼아 주시고 구원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나라 안팎의 여러 위기들과 교회의 어려움들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음을 선포합니다.
우리 내남자가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음을 선언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땅에 교회를 세울 때에 이 동네에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믿음의 사람들을 세우기를 소망하는 그 소망 안에서 땅을 들이고 헌신을 하고 희생을 하고 핍박을 견디면서 교회를 짓고 지금까지 지나왔습니다.
주님 이 언약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우리 믿음의 선택들에 대해서 갚아주시옵소서.
부족한 저희의 선택에도,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선택에도, 우리 자녀들의 믿음의 선택에도 하나님이 갚아주셔서 모두가 하나님의 언약 아래서 만대가 복받는 역사가 있기에 축복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놀라운 은혜와 사랑으로 함께해 주시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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