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미세먼지도 없고, 맑고 따뜻한 봄 날씨가 예상되는 날이네요. 모두 평안하시죠?
본 5-6장의 골자는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가 주어졌다면, 그 자유로 율법주의를 선택하지 말고, 성령을 통해 믿음으로 사랑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선한 것(롬 7:12)입니다. 그러나 율법주의는 다릅니다. 내용보다 형식에 방점을 두고 있습니다.
바울은 앞 장들에 이어 ‘믿음이냐 율법주의냐’라는 이야기를 6장 마지막까지 끌고 나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율법 행함의 대표적인 예로 할례를 들고 있는데, 만약 어렸을 때 부모에 의해서 할례를 행했다면 그것은 논외입니다.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장성한 다음에 ‘할례를 받아야 하느냐’에 관한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논의는 주로 헬라계 유대인이나 순수 헬라인 중 율법주의자들의 권유나 강요에 의해 할례를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사람들을 향한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크리스챤들입니다.
만약 율법주의자들의 권유에 의해 할례를 받게 된다면 그 사람은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갖게 되기 때문에(5:3) 상당히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물론 그 사람이 할례를 받더라도 나중에 ‘아~ 이게 아니네요. 나는 이런 식의 율법주의보다 믿음으로 자유함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래요’라고 하면 되는 것이지만, 그런 방향 전환을 하지 않는 한 율법주의자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까지는 잘 하더니 왜 우왕좌왕 하느냐, 다른 마음을 품지 말고 내가 하는 말을 따르라’고(5:7, 5:10) 설득합니다.
물론 갈라디아서 전체가 그런 그의 설득입니다.
그 설득의 키 워드는 성령, 믿음, 사랑입니다. 그 반대는 율법 준수 의무입니다.
양쪽을 가르는 특징은 ‘사랑’입니다. 그 결과, 사랑이 나타나느냐입니다. 바울은 이 사랑에 대해 5:6, 13, 14, 22에 걸쳐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6절에서는 믿음은 사랑을 통해 역사한다고 말합니다.
13절에서는 자유를 얻은 사람은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할례 이런 것을 신경 쓸 것이 아니라, 신경 써야 할 것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4절에서는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다 라고 말합니다. 다시 한번 성도의 지향점이 ‘사랑’에 있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22절에서는 성령의 열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첫째로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그 세 가지 중에 제일은 사랑’(고전 13:13)이라는 말씀과 더불어, 믿는 사람들의 최고의 가치는 사랑이라는 것을 재확인해줍니다.
이처럼 사랑은 5-6장에서 바울 논의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딱딱한 논쟁이지만 간단하고 명확한 중심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렇습니다. 사랑이라는 잣대 만으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좋니 안 좋니 이런 저런 말을 하지만,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이것입니다. 또한 우리도 자주 잊어버리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사랑이 없으면 뜬구름 잡는 듯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 가까이에 있는 사람부터 사랑하기 위해 기꺼이 우리의 에너지를 쏟아야 합니다. 그런 모습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이론적인 데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결핍은 사랑이 없는 데서 비롯됩니다. 목회자가 설교 준비를 열심히 하지 않는 것, 성도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 성도를 열심히 돌아보지 않는 것, 그 모든 원인은 분명합니다. 또한 성도들이 서로 시기 질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열심을 내지 않는 것, 그 모든 것이 다 사랑이 없는 연고입니다. 후자의 경우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나의 이웃을 사랑하는지, 나의 주님을 사랑하는지 그것이 내 신앙의 척도입니다.
바울은 율법주의와 믿음의 신앙을 대조하면서 그것을 육체와 성령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에 머물러 있는 것은 육체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영-혼-육 중에서 혼-육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앙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영적인 활동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과 우리 영의 교통/소통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6:17에서 만약 이러한 교통/소통이 원활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이 충돌만 하다가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영이 성령의 음성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게 되면, 성령과의 교통/소통이 활발해지고, 그 다음에는 우리 영이 성령과 더불어 우리의 혼을 원활하게 control하게 되고, 우리의 혼은 우리의 육을 원활하게 control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는 모습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에서는 이와 같은 성령- 영-혼-육으로 이어지는 성령의 역사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몸이 우리 혼의 명령에 반발하고, 우리 혼이 우리 영의 명령에 반발하고, 우리 영이 성령의 명령에 반발하는 연쇄반응으로 인해 아무것도 선한 것을 성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영과 성령과의 통로가 막히면 육체의 일이 성행하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5:19-21이 그것입니다. 반대로 우리 영과 성령의 통로가 활짝 열리고 그 교통/소통이 원활해지면 성령의 열매(5:22-23)를 맺게 됩니다. 성령과의 교통/소통을 위해서는 정욕과 탐심으로 대표되는 우리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5:24).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못 박혀야 합니다(6:14).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의지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지금은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믿지 않던 사람도 이 복음의 진리를 고백하는 것 만으로 놀라운 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야 말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 그 십자가로 하나님과 내가 화목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 만으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교통/소통의 문이 열리는 것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큰 은혜입니다.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반면 그러한 진리를 애써 부인하고 육체(할례 등)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려는 시도는 지극히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것을 설명하려는 바울의 심정이 터질 지경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바울의 논의는 시종일관 율법주의와 믿음 간의 대조입니다. 믿음은 성령-믿음-사랑의 연결고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의 증거는 6:8(“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육체는 율법주의를, 성령은 믿음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6:12-13에서 마지막 쐐기를 박습니다. 즉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은 박해를 면할 수 있다는 회유에 불과하고, 기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키지도 않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립니다. 즉 십자가는 피해가야 할 것이 아니라 자랑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일한 자랑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반대자들의 주장을 무력화시키는 워딩입니다. ‘짐을 서로 지라’(6:2),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6:4),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6:5)는 말에 이어, 바울은 십자가 만을 자랑하라는(6:14) 권면과 함께 모든 논의를 종결시킵니다.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고 사는 바울의 입장에서 할례나 무할례는 무차별한데(6:15a), 할례에만 매달리는 율법주의자들의 공격과 회유는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 만이 중요”(6:15b)하다는 바울의 결론은 우리에게도 큰 울림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려는 노력이 없고, 새로워지는 경험이 없으면 우리도 어느 순간 율법주의자가 될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성령 안에서는 날마다가 새로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은 날마다 신선한 것이어야 합니다. 얼마전에 해 놓은 밥통의 밥을 꺼내 먹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새 밥을 해서 먹어야 합니다. 그 고삐를 조금이라도 늦춘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형식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며, 우리의 눈물은 마르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말은 머리 속에 있는 것을 되뇌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 대신 날마다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는 설레임이 있어야 합니다. 가슴을 적시는 신선함이 있어야 합니다. 고인 물이 아니라 흘러가는 물과 같은 청량감이 있어야 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연애가 시들해지는 것처럼 혹시나 우리 주님과의 교제가 형식적인 것이 되고 있다면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전개하고 있는 논의를 면밀히 뜯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위대하심과 광대하심을 감안할 때, 우리 주님과의 연애는 날마다 새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고인 물과 같은 것은 우리 영이 잠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잠들어 있는 영을 깨워야 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때로는 부르짖음을 통하여, 때로는 좀 더 깊은 깨달음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갱신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그럴 때 바울이 내뱉는 다음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좀 더 실감나게 다가올 것입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6:17)
오늘도 기쁜 날 되시길 빕니다.
첫댓글 육체 또는 성령을 따라 사는 길, 그 사이의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의 모습을 나열해 놓은듯 보입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길에도 열매는 있습니다. 음행, 분쟁, 시기, 방탕함…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피조물의 깊은 곳에 있는, 사랑만이 채워줄 수 있는 갈급함을 세상의 것으로 채우려 시도한 자리에 생겨나는 불쾌한 산물같습니다.(5:16-23)
구원은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 지으심을 받은(6:15) 후에는 성도라는 이름에 맞게 살 것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으로서 죄를 짊어진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으신 예수를 따르는 성도는 자신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입니다.(5:24) 육체를 떠나 성령을 따라 사는 일은 십자가를 비유로 들만큼 고통스러울 수 있음을 알려주는 것같습니다.
그러나 필요이상으로 겁낼것 없는 것은 성도는 세상과 사탄의 영향력에서 자유한 몸이기 때문입니다.(5:1) 또한 우리가 성령안에 거할때 성령을 따라 살수있는 힘도 주십니다. 자유로 부름받고 성령을 따라 살라는 말씀앞에 작아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내가 “사랑”과 “자유”의 사람이다 선포하며 오늘을 시작합니다.
자유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우리 자신이기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점점 더 큰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얽매이거나 형식적인 신앙이 아닌 성령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며 그 인도하심에 응답하며 사랑하고 나누며 세우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날마다 성령 안에서 새로워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영원한 언약의 표징으로 주셨던 할례를 지키는 일은 당시 나라를 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목숨처럼 소중한 일이었을 거예요 (창 17:11,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하지만 갈라디아서는 원래 중요한 것은 할례를 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지녔던 "믿음"이었다고 말씀해요.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 믿음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어요. 믿음은 지식뿐 아니라 매우 관계적이고 행위를 수반하는 지정의를 품은 개념 같습니다. 이 일은 우리의 결단과 능력으로 시행되는 것이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할 수 있다고 말씀해요(5:18).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아야 하고, 포기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면 거두게 된다는 말씀이 격려와 위로가 됩니다 (6:9).
그렇습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매 거두게 됩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닌 주의 은혜로 구원받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믿는자로서 이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삶속에서 낙심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옳바른 믿음의 길을 걸어가기를 원합니다.
주의 은혜로 구원받게 하신 것 기억하고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오늘 한 걸음 내딛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