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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에서 야고보는 ‘혀’가 악하게 쓰일 수 있는 강력한 도구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선생이 되고 지도자들이 되고 싶어하는데, 그것은 교회 안에서 갈등을 야기할 수 있는 위험한 충동이라는 것이 야고보의 주장인 듯 합니다. 가르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선생(야고보는 자신을 그 선생들에 포함시키고 얘기하고 있음)은 ‘더 큰 심판을 받을 수’있다고 합니다(1절).
모든 사람은 다 범죄하고 혹은 실수합니다. 그런데 혀를 사용할 때 가장 쉽게 실수하는 것 같습니다. 만일 자기 혀를 전적으로 통제해서 그 영역에서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기를 잘 통제하여 온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혀가 신체에서 통제하기가 가장 힘든 부분이기 때문입니다(2절).
야고보는 이 사실을 증명하는 일련의 예를 듭니다.
말은 그 입에 물린 재갈로 통제되고, 배는 키 하나로 통제됩니다. 이처럼, 혀도 작지만 강력하다는 겁니다(3-5절). 그러면서 야고보는 논증의 방향을 바꿔 혀를 삼림을 화염에 싸이게 만들 수 있는 불씨에 비유하는데, 그러한 불씨의 근원은 지옥이라고 합니다. 야고보는 부정적인 관점에서 혀를 보고 있는 듯 합니다. 그가 생각하는 혀는 타락에 의해 부패한 ‘혀’로써 많은 죄악이 말 한마디로 시작된다(모든 죄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는 것입니다(5-6절).
불행하게도, 혀는 너무도 강력해서 길들이기가 어렵습니다. 많은 짐승들을 길들이는 아무리 좋은 솜씨를 다 갖추었다 해도, 자신의 혀를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것입니다(7-8절).
우리는 혀를 사용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그런 다음에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악한 말을 합니다. 야고보는 이것이 마땅치 않다고 합니다(9-10). 야고보의 시대에, 왕이나 황제의 동상에 대고 욕하거나 저주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은 마치 황제의 면전에 저주를 한 것처럼 취급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모욕하는 것 역시, 마치 하나님 자신을 모욕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11-12절에서 요점을 위해 두 가지 예를 들고 있습니다. 두 종류의 물이 같은 샘에서 흘러나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과 그 나무의 본성에 따라 자라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열매를 얻게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말로 욕을 하거나 저주를 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야고보는 우리를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게 합니다. 과연 누가 이 무시무시한 혀를 통제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이 힘으로부터 자유를 얻어 완전함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가운데서 야고보는 혀에 대한 해독제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입니다(13-18절).
하나님이 지혜를 가진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선행’이라는 특징을 갖고, 또한 ‘지혜에서 오는 온유함’을 보여 줄 것입니다(13절). 그러나 야고보가 알고 있던 교회들 가운데서 말다툼을 벌이고 있던 어떤 선생들과 몇몇 사람들은 이와는 아주 달랐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독한 ‘시기’와 ‘이기적인 야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자기들의 시기심을 ‘열심’이라고 불렀지만, 그러나 이 열심은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 열심에는 온유함이라는 특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열심은 ‘변장한 시기’로서 야고보는 ‘이기적인 야심’(야고보의 관점에서 당시 이들은 교회 전체의 하나됨을 위해서 서지 않고 오히려 집단이나 파당을 형성하고 있어기 때문에 야고보가 사용하는 말은 ‘파당 의식’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고 함)이라고 묘사하고, 세상에 속한 것이면서 마귀에 속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거짓된 지혜의 영은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을 이끌게 된다는 것입니다(14-16절).
그러므로 이 거짓된 지혜와 혀의 악에 대항하는 유일한 참된 보호책은 ‘하나님의 지혜’(하나님의 성령)입니다(17-18절). 이는 바울이 성령의 열매로 제공하는 있는 목록(갈 5:22-23)과 매우 비슷한 것 같습니다.
4장
야고보의 편지를 받게 될 그리스도인 공동체 가운데는 다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러한 싸움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님을 매우 분명하게 밝히고, 그 일에 개입된 자들에게 회개하고 용서받을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1절).
야고보가 보았던 교회는 ‘싸우고 다투며, 싸우고, 살인하며 시기하고’ 있었습니다. ‘살인한다’는 말은 아마도 말로 죽이는 일을 가리킬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 싸움들이 ‘너희의 정욕들’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추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다툼은 소득이 없고,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지 않고, 자기들의 뜻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동기는 자기 욕심이나 ‘정욕’입니다(2-3절).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자신들의 소욕에 따라서 살아간다는 점에서, 그들은 ‘간음하는’(‘간음하는 여자들’의 표현, 그들이 모두 여자였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신부였듯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점에서 이렇게 표현한 것임) 것입니다. 다른 연애 상대를 따라가는 것은 하나님에게 신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과 벗’이 되고자 애쓰는 사람은 실제로는 하나님의 ‘원수’인 것입니다(4절).
그러나 야고보는 하나님이 회개하는 신자들에게 그들을 정죄하기보다는 ‘더욱 큰 은혜’를 주신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잠언 3:34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곧, 회개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5-6절).
야고보는 그러한 겸손이 어떤 모습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1. 하나님께 순종, 2, 마귀를 대적하는 것, 3. 하나님을 가까이하여 마음을 순전하게 만드는 일, 4. 회개 등이 있습니다. 그렇게 할때에 야보고는 하나님이 회개를 받아주시고 사랑으로 응답해 주사, 주님 사랑의 따스함 가운데 올려 주실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7-10절).
야보고는 11-12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피차 비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비판적인 말들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무질서하게 만듭니다. 바울(고후 12:20)도, 베드로(벧전 2:12, 3:16)도 이에 동의할 것입니다. 야고보는 비판하면서 그 사람이 한 사람의 재판장으로 행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재판장은 법아래 있지 않고, 법 위에 앉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재판장이신데, 그러므로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하나님을 밀어내고 자신들이 재판장의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 자가 되어 버리는데, 당신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입니다.
야고보는 ‘혀’라는 주제를 마무리짓고, 13-17절에서는 부를 통해서 오는 시험으로 나아갑니다. 야고보는 이들을 부자하고 부르지는 않지만 외국과 무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음은 분명합니다(13절). 본문의 사업가들은 지극히 정상적인 사업가들로 보입니다. 야고보가 이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계획을 추구하고 돈을 사용할 때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허탄한 자랑을 한다’(더 나은 번역은 ‘자기들의 우월의식 가운데 으스댄다’임/피터 네이비스)는 야고보의 논평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지 않으신 계획을 제시하면서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지 않은 삶에 대한 통제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고, 자기들이 하게 될 굵직한 거래에 대해서 자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15-16절). 이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다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며, 자기가 행하여야 할 선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즉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하나님에게 문의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들은 선을 행하고 있지 않고 그래서 죄를 짓고 있다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그들은 정직한 사업가들이지만).
야고보가 잠언을 인용하는 것 같은데 부자들에게 참으로 정곡을 찌르는 듯 한 말씀입니다.
뿐만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도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써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의 기쁨이 되는 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첫댓글 야고보서의 수신인을 생각해볼때, 간음한 여인이라 꾸짖는 대상은 교회안에 있으면서 세상과 벗되어 살고있는 성도일 것입니다. 자신의 정욕을 쫓아 사는 이는 아무리 욕심을 내어도 다툼과 싸움만 열매맺는, 영적으로 가난한 상태에 머물뿐입니다. 그 어떤 영적 파산상태보다도 훨씬 큰 은혜를 주실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 자리에 그저 머물고 있다면 그건 순전히 그들의 책임이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슬퍼하며 당신께 나아가는 자는 만나주시고 높여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4:1-10)
또한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는 있어도 미래를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인생의 불확실성에 대한 깨달음이 우리를 공포나 무력감으로 몰아가는 대신에 주의 뜻대로 모든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더 의지하게 만든다면 불확실한 인생도 복입니다.(4:13-16)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를 가진 자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화평과 관용, 긍휼, 선과 의의 열매를 맺을 것이라합니다. 우리가 교만과 정욕을 물리치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지혜가운데 살고 있는지의 여부도 오늘 우리가 무심코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운데 드러날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지혜'가 정말로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 지혜 가운데 항상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혀(말)로 인한 화와 재앙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교훈의 말씀을 새겨서 입은 가급적 닫고 귀는 열어서 말씀을 듣고 겸허한 마음으로 실행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아멘입니다. 혀를 단속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는 것 같아요~ 불평과 불만 등, 우리의 안 좋은 감정들을 말씀으로 잘 컨트롤하여 주님께 기쁨이 되는 도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