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을 맞아 광주(광역시)에 내려와 있습니다.
연로하신(89) 어머니가 아직도 강건하심에 감사드리고, 그분의 신앙 유산이 무척이나 감사하게 느껴지는 아침입니다.
3장
바울은 말세에 나타날 현상들에 대하여 무려 19가지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말세에 나타날 현상들은 당연히 마귀로 인해 발생하는 일들이요, 그의 영향을 받은 거짓 선생, 이단 등에 의해 확산되었고, 또한 그 흐름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시점이 지금으로부터 2000여년 전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부터가 ‘말세’이긴 하지만, 여러 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2000년 전에도, 또한 그 이전에도 오늘날 볼 수 있는 현상들이 이미 존재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시기하여 살인을 저지른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죄의 본성에 의한 인간의 행위는 어제 오늘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19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자기를 사랑하며, 2) 돈을 사랑하며, 3) 자랑하며, 4) 교만하며, 5) 비방하며, 6) 부모를 거역하며, 7) 감사하지 아니하며, 8) 거룩하지 아니하며, 9) 무정하며, 10)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11) 모함하며, 12) 절제하지 못하며, 13) 사나우며, 14)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15) 배신하며, 16) 조급하며, 17) 자만하며, 18)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19)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합니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이런 일들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으나,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도덕, 윤리 기준이 무너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면 더욱 안타깝습니다. 과거에는 볼 수 없던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회가 대단히 위험해지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그럼에도 대다수는 아는 지 모르는 지 침묵하고 있습니다.
5절 끝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돌아서라”는 말은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에서 의도적으로 피하라’는 말입니다.
매우 무거운 충고/권면/명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을 가리지 말고 만나야 하는 전도자/사역자의 입장에서는 특히 그렇습니다.
바울은 한 어리석은 여자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거짓 선생들은 이처럼 취약한 대상을 먹이감으로 삼아 영혼을 강탈하는 수법을 쓰고 있었습니다. 마귀의 수법 중 가장 전형적인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많은 사람들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면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3:8의 “얀네와 얌브레”는 출애굽기 7:11에 등장하는 애굽의 “현인들과 마술사들”을 가리키는데, 출애굽기에 그들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유대 전통에 등장하는 이름들입니다. 그들과 모세의 관계가 거짓 선생들과 디모데의 관계에 대비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거짓 선생들이 제아무리 교묘하게 속임수를 쓴다 해도 거짓은 진리의 거울 앞에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을 대하는 사역자/전도자가 ‘진리를 따르고 있느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경각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10-11절은 거짓 선생들과 확연히 대비되는 바울의 모습입니다.
그의 교훈(teaching)과 행실(way of life), 의향(purpose)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 박해를 받음(persecutions), 고난(sufferings),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 등은 차별화를 넘어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그러한 실증과 더불어 주어지는 3:12에는 힘이 실립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이 말씀이 우리를 찌르는 것은 No persecutions는 No godly life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진리에 속하지 않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3:1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더욱 악하여진다’는 점이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남의 일로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어느 순간 영적 교만에 빠져 자신을 제외하고 남에게만 손가락질을 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해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고, 성경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3:15, 성경은 능히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합니다(…make us wise for salvation…).
성경은 “교훈(teaching)과 책망(rebuking)과 바르게 함(correcting)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training in righteousness)”(3:16)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이 살아 역사하신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들을 가리킵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우리는 온전하게 되고(may be competent, proficient)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equipped for every good work) 됩니다.
반대로 우리가 성경 말씀을 길잡이로 삼지 않는다면? 그것은 상상하기에도 끔찍한 일입니다.
4장
바울이 강조하는 디모데의 최우선 순위는 말씀을 전하는 것(preach the word)이었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에 내포된 의미는 단지 공동체 안에서뿐 아니라 공동체 밖에서도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 자신뿐 아니라 모든 사역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최우선 순위가 되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correct/reprove, rebuke, encourage/exhort)”(4:2b)
이러한 기능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한다기보다는 말씀을 전할 때, 성령께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기능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자신의 생각과 입술을 온전히 성령께 맡기며 말씀을 전해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4:3에서 다시 한번 말세에 나타날 현상들에 대해 언급합니다.
즉 사람들이 인내하며 바른 교훈(sound doctrine)을 귀담아들을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자신들의 귀를 간지럽혀 줄 선생들을 두려고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회가 어른에게 어른 대접을 하려 하지 않고, 참된 스승을 모시려 하지 않는 대신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을 리더쉽에 세우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려는 경향을 말합니다.
결국 그것은 “사욕(their own desires)”(4:3)을 따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과는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4:4)르게 됩니다.
바울은 그때 벌써 포스트모던이즘의 도래를 내다본 것 같습니다.
그러한 경향/현상/흐름에 대한 바울의 권면은 자신의 모범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맡은 바 직무를 다하라는 것인데, 그러한 모습은 바울의 삶 자체였습니다. 바울 자신이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러한 권면이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살아온 것은 그가 면류관(4:8)을 바라보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상을 바란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음을 이야기합니다.
4:6
이 구절(“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은 바울 스스로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로마 감옥에서 풀려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고, 나이나 체력적인 면에서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바울의 다음 고백을 듣고 본받기를 원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4:9
필요한 것은 속도입니다.
바울은 두 번이나(4:9, 21) 디모데에게 “속히”(4:9), “어서”(4:21) 오라고 합니다.
그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한편 안타깝고, 한편 두 사람 간의 친밀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데마는 골로새서 4:14과 빌레몬서 24절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그가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떠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이 또한 보통 신앙인들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인간의 안전 욕구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가 좀 더 안전하다고 생각한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의 경우를 반면교사로 삼아 순종의 길을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4:11,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1차 전도/선교여행 때 결별했던 마가와의 화해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또한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때로 우리는 어떤 사람과 의견 차이 등으로 거리가 멀어질 수도 있지만 십자가 앞에 설 때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대하신 관용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결별은 끝이 아니어야 합니다. 미래를 위한 디딤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이 구절 또한 바울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줍니다. 바울을 변호해줄 증인이 없을 정도로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에 제자들이 다 도망한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빌라도 행전”이라는 곳에 보면, 과거 예수님으로부터 병고침을 받는 등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빌라도에게 찾아와 예수님을 위해 탄원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지만, 정작 그 자리에 제자들은 없었습니다.
4:17-18, 바울의 마지막 진술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부분에서 복음을 향한 그의 열정을 다시 한번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끝까지 이방인의 구원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하나님은 하고자 하는 자에게 힘을 주시고, 새로운 길을 보여 주시고, 또한 그 길을 열어주십니다. 아멘. 동시에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남은 힘을 쏟고 있는 바울의 ‘거룩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바울이 다음과 같은 확신을 갖는 것은 합당합니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아멘 아멘…
이 아침에 여러분 모두에게 바울의 음성이 생생하게 들려지기를 소망하며 이 글을 맺습니다.
첫댓글 신앙생활을 할수록 예전보다 훨씬 너그러워지고 긍정적이 됩니다. 그러나 자신과 돈을 사랑하고 교만하고 쾌락을 사랑하고…말세의 모습은 경중의 차이가 있을뿐 지금도 우리 안에 조금씩 한자락을 차지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예전보다 좀 더 나아진 모습에 스스로를 이만하면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하고픈 유혹이 늘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이 그것을 넘어 나의 부패한 속사람을 깨닫게하고 꾸짖으며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의 길로 인도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는 자입니다.
진리와 빛되신 말씀아래 믿음과 사랑, 인내로 살면 사람들에게 칭송받을 것 같지만, 성경은 박해와 고난을 이야기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것이라 합니다.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박해한 것처럼 오늘도 경건의 빛안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인정대신 박해를 만날것입니다.(3:10-12, 요3:19) 디모데에게 고난을 받으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한 바울의 말대로,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 경건하게 내 삶의 책임을 감당하는 일을 고난중에도 멈추지 않음으로 의로우신 재판장앞에 부끄럽지 않길 바랍니다.
성도의 고난은 자신에게도 주변 사람들에게도 깊은 회의감을 불러일으키곤 하는데, 오늘 말씀이 큰 위로와 답이 되어주었습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4:16-17)"
보이지 않으시는 주님이 그때도 우리 곁에 서셔서 힘을 주고 계심을 굳게 신뢰합니다.
이세상 풍조를 좇는 자가 되지 않는 진리를 바르게 알아 마음의 요동침이 없기를 다짐해봅니다 믿음을 지켰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자되기를 기대합니다
말씀을 통해 온전하게 되고 모든 선한일을 행하게 될 능력을 갖추기를 원합니다.
세상 풍조가 아닌 주의 말씀을 귀하게 받고 입에단 꿀송이처럼 마음에 새기며 실행할수 있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