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뜨고, 바람도 좋은데... 그런데 황사가...건강들 잘 챙기시를 바랍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그의 권위를 대변하는 대리자로 데살로니가로 보냅니다. 디모데의 임무는 데살로니가의 회심자들을 ‘굳건하게 하고’ ‘위로하는’ 것입니다(2절). 당시 데살로니가에서는 예수를 영접하고 신앙생활을 할때에 시련들(박해 및 추방 등)이 있었습니다(3절). 이런 시련들이 있을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바울과 그의 일행들이 미리 고지를 했지만(4절), 그러나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이 그들의 고난을 바라보아야 하는 방법을 적절히 이해했는지를 분명히 확신할 수 없었기에, 또한 그들이 데살로니가에 투자했던 모든 수고가 아무런 소용이 없어질까봐 그들의 ‘믿음’을 살피기 위해서 디모데를 보냈습니다(1-5절).
디모데는 돌아와서 그들의 ‘믿음과 사랑’에 대해서 보고를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인들이 환난으로 인해 심각하게 시험을 받았을 때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으로 인내하였을 뿐만 아니라, 크리스챤 행동의 적절한 기준(사랑)을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바울과 그의 동료들에 대한 매우 긍정적인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했습니다(6절). 보고를 들은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데살로니가인들로 인해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안도와 위로의 감정을 드러내면서 기뻐합니다(7-9절). 데살로니가인들의 신실함이 가져다주는 기쁨인 듯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런 기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감사와 더불어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축원합니다(10-13절).
4장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이전에 말했던 교훈들에 대해서 그들이 잘했다는 것을 얘기하면서 앞으로 해야 할 더 많은 것들이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1-2절).
데살로니가인들에 대한 바울의 방향은 거룩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성적인 도덕성이라는 단일한 양상에 초점을 맞춥니다(3절). 이 주제는 이교문화에서 최근에 개종했던 사람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성적인 정결함은 아내들에게 요구되었고, 남편도 역시 덕성으로 제기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존재했던 성적인 관습과 행위의 폭넓은 범주에 비추어볼 때, 당시 결혼 이전이나 혼외적인 활동의 넓은 범주가 관용되었고, 심지어 가끔 격려되기도 했다는 것, 그러한 배경에 비추어,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성적인 부도덕을 삼갈’것을 조언합니다(3b). 그러면서 부도덕을 삼가는 중요한 수단들을 4-6절에서 얘기합니다. 성적인 활동이 아내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시행되어야 하고(4-5절), 공동체에서 다른 배우자에 대한 간음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6절). 성적인 비행은 공동체내에서 가족관계와 연합의 감정에 상당한 위협을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7-8절에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소명은 ‘거룩함’에 대한 요청이라고 합니다. 이 윤리적인 기준은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하고 있기때문에 이 교훈을 거부하는 모습은 사실상 하나님을 배격하는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8절).
바울은 9-12절에서 ‘형제 사랑’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현재 잘하고 있지만, 더욱 힘낼 것을 권하면서 특별히 ‘조용한 삶을 살며, 자기일을 하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합니다(11절). 11절의 의미는 논쟁이 되는 부분이지만, 데살로니가인들에게 공개적인 장소에서의 분쟁 및 소란을 가능한 한 피하고, 회중의 필요와 세움의 일에 집중하고, 주어진 일에 부지런히 살아갈 것을 조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서 비크리스챤들에 대해 존중을 얻는 방식으로 좋은 영향력을 미칠 것을 권면하고 있는 듯합니다(12절).
13-18절은 바울의 파루시아(주의 오심)와 부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시 데살로니가의 일부 교인들은 죽음(‘잠’)을 삶의 소망이 사라진 것으로 믿고 있던 이교 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파루시아 이전에 동료 신자들의 죽음으로 인해 상당히 낙심했으리라 여겨집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죽음과 장래에 대한 신자들의 운명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제공하면서 소망없는 사람들이 슬퍼하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슬퍼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3절). 그 이유는 파루시아 이전에 예수안에서 죽은 자들도 부활이 있고, 여전히 살아 있는 자들은 함께 끌어 올려져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기 때문입니다(14-17절). 곧, 예수 안에서 ‘모든’ 신자들은 재림의 시간에 죽었든지 살았든지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걱정하지 말고 소망 가운데 서로 격려하라고 하십니다(18절).
그러므로... 오늘도 예수 안에서 기쁨이 넘치는 삶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첫댓글 성도의 거룩함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거룩은 세상의 느슨하고 낮은 윤리기준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준을 따라 사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결혼한 자는 배우자를 귀하게 여기고 결혼의 테두리 안에서 성생활을 즐기는 것이 거룩일 수 있습니다.(4:1-6)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이 자랑하는 가치에 동의하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그 자체로도 여러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를 따라가는 성도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는 고난은 이미 성경에도 약속된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과 동역자들의 사역이 환난 중의 성도를 흔들리지 않게 하도록 하는 것(3:3)이라는 바울의 말을 통해, 성도의 고난당함을 미리 아시고 위로할 자를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의 일하심도 봅니다. 고난중에도 위로가 있습니다.
바울은 환난 중에 있는 데살로니가 성도의 방문길이 막혔을 때, 포기하지 않고 디모데를 보내어 그들을 굳게 하고 위로합니다.(2:14,17-18, 3:1-3) 하나님의 위로는 이런 사랑의 행동가운데 드러납니다. 우리의 사랑도 어떤 환경에서도 상대의 유익을 위한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맞닿아 있는 사랑이길 기대합니다.
고난중에도 주님의 위로가 있다는 것! 아멘입니다. 그러므로 늘 소망가운데 살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이 거룩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말씀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이 윤리적 기준이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하고 있다는 대문글의 지적이 참으로 옳다는 생각이 드네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 11:45). 곰곰이 생각해보니 율법을 지킴으로 얻는 의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 얻게 되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의는 결코 같을 수 없겠어요. 할 바를 다하고 칭찬받기를 기다리는 종의 마음과 아버지를 기뻐하는 아들의 마음... 이렇게 두 그림이 문득 떠오르네요
우리의 윤리적 기준이 하나님이 성품에 근거하여 '거룩'으로 나아가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영적으로 어린 그리스도인들을 양육하는 과정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들이 끝까지 믿음의 길을 잘 걸어갈 수 있도록 먼저 믿음의 본을 보이며 위로하고 격려하여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흔들리지 않는 삶으로 승리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입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사 은혜가운데 지치지 않고 영적으로 어린 성도들을 잘 양육해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과 영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유지하기를 바라는 바울의 마음이 절절하게 묻어나있는 편지네요.
믿음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가정생활의 정결함을 유지하고 부활의 소망을 간직하며 이웃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는 크리스찬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바로 위와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아멘입니다.^^
1.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소명은 ‘거룩함’에 대한 요청
2.윤리적인 기준은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하여 나아갈 수 있기를... always...아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