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은 산문이다. 산문은 뜻글이다.
“물건을 사려면 돈이 필요하듯 글을 쓰려면 뜻을 써야 한다.” 이것은 중국 문장가 소동파의 말이다. 수필은 붓가는 대로 쓰는 글이 아니다. 우리가 편지 한 장을 쓸때에도 말의 앞뒤와 차례를 생각하거늘 어찌 문학 작품에 있어서이랴. 발레리는 시를 춤에 비유하고 산문(수필)은 ‘도보徒步’에 비유한 적이 있다. 시는 목적 없이 흥겨우면 춤을 추지만, ‘도보’는 의도된 행선지를 따라 길을 걷는다. 수필의 경우에 의도된 행선지란 쓰고자 하는 글감의 주제의식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수필은 짧은 형식의 글이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면 주제의식이 분명해야 한다.
주제에 대하여
주제나 제재는 글속에 하나만 있는 게 좋고 주제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법위를 넘지 않아야 한다. 글의 내용이 소화 가능한 것이라야 한다. 언젠가 헤밍웨이는 글쓰기의 비결에서 자신이 써야 할 내용의 70%는 감추고 빙산의 일각처럼 30%만 드러낸다면 감춰진 부분은 독자가 찾아 읽게 한다는 것이다. 영리한 독자는 행간에 숨은 70%를 기쁘게 찾아 읽는다. 그러나 노파지심이 많은 나 같은 사람은 구구절절이 늘어놓다가 글이 그만 중언부언 되고 만다. 글감에 대한 정리가 충분하지 않은 탓이다. 많은 시간이 걸려 주제가 숙성되고 여과되었을 때 위에 고이는 물, 그것이 바로 30%에 해당하지 않을까.
수필은 인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보느냐’하는 것보다 ‘어떻게 보느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무엇이’라는 소재가 인생을 이야기하는 데 소용되는 자료에 불과하다면 ‘어떻게’는 작가가 인생과 우주를 바라보는 눈, 즉 그 작가만의 견처見處로서 주제에 대한 해석과 작가의 인생관을 그대로 드러낸다고 하겠다.
일본의 선승이자 시인인 료칸 선사는 임종에 이르러 ‘겉도 보이고(현상) 속도 보이며(본체) 떨어지는 단풍이여’로 자신의 전 존재를 구명하는 하이쿠를 남겼다. 생을 마감하며 떨어지는 낙엽은 죽되 죽지 않는, 자신의 진아眞我를 상징한다. 현상과 본체에 대한 도리道理를 색즉시공色卽是空으로 설파한다. 이처럼 새로운 해석을 위해서는 작가만의 성숙된 인생관이 요구된다. 글은 속일 수 없는 작가 그 사람이다. 자신의 키를 넘지 못한다. 좋은 수필을 쓰기가 어려운 이유도 바로 작가의 가치가 그대로 작품의 가치로 환치되기 때문이다. 인격수양과 인간에 대한 이해 그리고 내면의 풍부와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은 좋은 수필을 쓰기 위한 기본 덕목이라 하겠다.
맹난자 / 수필가. 에세이문학' 발행인 역임. 한국수필문학진흥회 회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