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기 유고시집, 『만림산기』, 동학사, 2018.7.31.
◇약력
1936년 경남 고성 출생
호는 정암(靜庵)
가톨릭 세례명 김 베드로
진주사법 졸업
장학사, 교장으로 정년 퇴임
1991년 《현대시조》 신인상 당선으로 데뷔
2018년 4월 1일 교통사고로 별세
2018년 유고시조집 『만림산기』발간.
□ 서시
노정路程
오늘도
길을 간다
등불 들고 밤길 간다
가야할
길이 멀고
때로는 엇갈려서
등불로
못 밝히는 밤
별빛으로 밝힌다
2018년 이른봄
정암 김춘기
촛불
손 모아
기도 올려
어둠을 불사르고
햇살을 닮으려고
오늘도 묵상한다
끝없는
나의 갈 길에
흔들대는 꽃대여
보성 차밭
연주는
필하모니에서
악보는 보성 차밭이다
오선을
줄줄이 그은
차밭 이랑 보포 위에
관객은
콩나물 음표
환호 합주 무대다
만림산기望林山記
토성土城에 묻어 놓은
허물어진 함성인가
억새 억수로 자라
산새 넑인 양 날고
만림산
달 뜨지 않아도
가슴 안에 사는 산
두루미 진을 치던
은빛 날개 아른하고
빨래터 내 누님이
이고 가던 흰 구름은
만림산
흐른 그림자에
바람으로 일렁인다
감돌아흐르는 부름내
메말라 가는 젖가슴
마지막 피를 짜아
목을 적시고 있어
만림산
그 고향의 앞산
떠날 채비를 하네
□만림산 : 망림산이라고도 함.
전신주電信柱
팔 올려 손을 뻗어 홀로 선 고달픔이
낮밤을 디디고 선 십자가 모습인가
목줄을 풀고 싶은 마음 바람조차 메이고
기둥을 스친 바람 살을 깎는 울음 내고
오가지도 못하는 몸 발 묶여 앓는 꿈을
길섶은 내 고향으로 눈을 좁혀 달랜다
털옷도 내 던지고 숨은 듯 훌쩍 서서
시야를 듣고 막는 한 조각 침묵으로
전선電線에 흐르는 강물 내 몸으로 지킨다
별을 보며
마음을 채운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초저녁 머리맡에 반짝이는 별이었다
하나 둘 나와 앉으며 눈을 뜨는 별이었다
별들은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기도한다
하늘은 말씀대로 궁창을 연 바다 속에
머너 먼 눈빛 초롱등 꽃잎으로 드리웠다
죽어서도 임의 곁에 울먹이며 엎드렸다
통성의 별빛 작열 영글어진 보석으로
숨 벗은 영생의 몸을 하늘 가득 드리웠다
눈부신 별빛기도 구원으로 뿌렸을까
생명도 가난하면 별빛 되게 하셨다면
이 밤을 놓칠 수 없어 별빛 되어 가는 거다
북두칠성 이미지
주님 모신 북극성을 맴도는 일곱 별이
매일매일 바라보며 쉼 없이 기도한다
믿음이 칠성 같아라 주님 받든 신도여
삼위일체 테를 돌 듯 지켜 도는 북두칠성
십이사도 닮은 뜻을 전하려는 시도려니
영원한 구원의 생명 안내하는 사도별
북극성 푸른 하늘 불꽃 같은 칠성별들
유성도 내 탓이 구름 껴도 내 탓이요
은은한 억만 리 음성 별빛으로 비춘다
고구려는
하늘도 놀라워라
동북공정東北工程 대도大盜 소리
황사인가 폐수인가
금수강산 먹칠인가
한배달
고구려의 넋
먼동 터온 내 나라다
괴 짐승 늑대 얼굴
동북공정 괴함怪喊
공갈이냐 협박이냐
테러폭탄爆彈 전염이냐
한민족
고구려의 혼
강토 지킨 내 나라다
가고파 시비의 시비是非
내 고향 마산 역전 가고파 비 고향 노래
노산은 매국노 비 못 세운다, 철거의 말
지난 날 일제 치하의 금지노래 같으다
언제나 가고 파 시, 눈앞에 스며들면
고향산천 그리움이 민족화합 이루는데
지나간 국치 수난을 다시 주려하는가
한길로 안 살았다, 갈팡질팡 몸 사렸다
노산은 궁지 쓴 채 구천에서 다문 말씀
못 죽고 몸 아꼈다는 판정, 당치 말라 너희들은
불확정성 원리 따라 절대철학 지났는데
노신 시인 친일파라, 확정짓는 절대성에
웃는다, 푸른 하늘도 찡그리며 웃는다
지금, 독도는 말한다
내 모습 고래 지느러미 자맥질로 멈춘 바위
태고 적 그때부터 고조선 파수로서
동해의 수호신 영令을 받아 홀로 부른 이름이다
구렁이 넘실대는 왜구 떼 넘나들며
징을 박은 파도 날려 폭풍 쓸어 쫓았지만
달아난 후손 꽃뱀들 제 땅이라 날름댄다
입 다문 독도 바위 어금니로 깨물었다
내 발목 수푹 지진 너희 땅속 잠입했다
어차피 살인광선을 자초하던 그들이니
□ 작품 해설
영생을 꿈꾸며 가꾼 절차탁마의 시편들
이우걸(한국시조시인협회 전이사장)
1.
생은 덧없고 유한하다. 이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것을 의식하고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자기가 관심을 가진 욕심의 세상에 그만큼 깊이 몰입하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미 고인이 된 김춘기 시인의 삶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남겨놓은 시편들을 읽으면서 그의 일상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다 알 수 없지만 그의 창작세계에서 항상 영생의 꿈을 향해 걸어간 발자국들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령 그의 서시 「노정路程」을 읽어봐도 어렵지 않게 그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오늘도
길을 간다
등불 들고 밤길 간다
가야할
길이 멀고
때로는 엇갈려서
등불로
못 밝히는 밤
별빛으로 밝힌다
-「노정」 전문
“등불 들고 밤길 간다”는 것은 우매한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는 하루하루를 조심스럽게 간다는 시적 표현일 것이다. 그리고 예측할 수 없이 가야하는 인생의 길이란 멀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해서 인간의 지혜(등불)로 또는 하늘(별빛)의 도움으로 바른 길을 가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 이러한 노력이 그의 시조의 특징일 수 있고 또 그의 인생관일 수도 있다. 이러한 태도는 적어도 유일회적 생에 대한 실패 없는 삶을 영위해 보려는 한 인간의 건강한 열망이며 그런 건강한 삶을 가식 없이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지는 예술적 영생을 이상으로 실현하려는 시인이나 구원을 꿈꾸는 종교인에게는 더욱 강하게 자리 잡게 되는 바람직하고 자연스런 덕목이라고 생각된다.
2.
주님 모신 북극성을 맴도는 일곱 별이
매일매일 바라보며 쉼 없이 기도한다
믿음이 칠성 같아라 주님 받든 신도여
삼위일체 테를 돌 듯 지켜 도는 북두칠성
십이사도 닮은 뜻을 전하려는 시도려니
영원한 구원의 생명 안내하는 사도별
-「북두칠성 이미지」 일부
「북두칠성 이미지」 뿐 아니라 여러 작품에서 그는 지상과 하늘을 동시에 노래하는 경우가 많다. 그 경우 역시 과학적 안목보다는 종교적 관점으로 노래한다. 이 작품에서도 북극성을 “주님”으로 칠성을 “십이사도”처럼 보고 있다. “영원한 구원의 생명”을 “안내하는 사도별”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유성현상이 생기거나 구름이 끼는 경우마저 화자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상의 전개과정을 살펴볼 때 김 시인의 영성적 신앙체험이 우주적 상상력으로 확대되어 있다. 다윗이 <시편>에서 노래한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도다.”라든가,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라고 한 시구가 연상되어 오기도 한다. 이러한 우주관적인 신앙적 체험을 통하여 써진 그의 시가 우리 독자들에게 영성적인 감응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만림산기」
「만림산기」는 김 시인의 뛰어난 수사 능력을 유감업이 보여준다. 지금까지 살펴본 시편 중에서 가장 수일한 작품이다. 풍경묘사가 그렇고 추억을 이미지화하는 능력도 올람다. “빨래터 내 누님이 / 이고 가던 흰 구름은 / 만림산 / 흐림 그림자에 / 바람으로 일렁인다”는 아주 빼어난 가구로서 김춘기 시인의 서정적인 시조미학을 잘 드러낸 백미라도 볼 수 있다.
이 만림산이 한 때는 벌목으로 인해 민둥산이ᄋᅠᆻ는데 녹화사업으로 지금은 숲이 조성되었다. 이 산을 끼고 부름내가 감돌아 흘러간다. 옛날엔 수량이 풍부해서 여름이면 멱을 감기고 하고, 여인네들 빨래터가 되었다. 그리고 냇물에 만림산 그림자가 드리우기도 했다. 그 부름내가 지금은 건천이 돼 버린 것이다. 특히 셋째 수는 주제연으로써 김춘기 시인의 그러한 정서가, “메말라 가는 젖가슴”이라든가 “만림산 / 그 고향의 앞산 / 떠날 채비를 하네”에서처럼 애틋하게 노정되어 있다.
이러한 현재적 실상묘사를 통해 시적 자아의 자연회복에 대한 희원의 정서가 잠영됨으로써 독자들 내지 향민들에게 경각심을 간접화한다. 맑은 내가 풍요롭게 흐르던 시절, 두루미가 만림산 솔숲에 둥지를 틀어 은빛 날개가 수면에 그림자 지던 과거 시간을 그리워하고, 이런 풍경을 다시금 되찾고자 하는 열원이 시의 행간에 진득하게 묻어나고 있다. 「만림산기」는 고향을 사랑한 한 시인의 면모가 애잔하게 그려져 있는 명편이라고 해도 과한 말이 아닐 것이다.
3.
-「고구려는」
고구려 등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의 역사왜곡 프로젝트가 동북공정이다. 더 넓게 얘기하면 동북변경지역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기 위한 프로 젝트다. 중국의 고구려, 발해 등 우리만족 역사에 대한 노골적인 왜곡, 변조사건을 좌시할 수 없는 도발이다. 그 사건에 대한 시인의 분노가 「고구려는」에 감겨 있다.
5.
연주는
필하모니에서
악보는 보성 차밭이다
오선을
줄줄이 그은
차밭 이랑 보포 위에
관객은
콩나물 음표
환호 합주 무대다
-「보성 차밭」 전문
「보성 차밭」은 시작적 효과를 살려놓은 작품이다. 초록 가득한 잘 정돈된 밭이랑을 보표로 묘사했고, 차밭을 구경하고 있는 관광객을 콩나물 음료로 비유했다. 참신한 비유적 이미지가 생동감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