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후강해 (2)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본문 : 살후1:3-4
하얀 백지 위에 사인펜으로
선을 하나 그어보십시오.
그 후에 그 선에는 손을 대지 않고
그 선을 짧고 가늘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옆에 사인펜으로 더 굵고
더 긴 선을 여러 개 그으면 됩니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본래의 선은
짧고 가늘게 보일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자꾸 그 문제에 집착하면 문제가 더 크게 보입니다.
자꾸 불평하다 보면
또 불평할 일이 생깁니다.
불평이 불행을 낳고,
불행은 또 다른 불평거리들을 생산해냅니다.
악순환의 연속입니다.
늘 불평,
불만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사람 가운데
감사할 일이 없겠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늘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보면 그 사람에게도 불행한 면,
문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그런데 늘 감사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려운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감사할 것이 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문제는 어떤 것을 크게 보느냐입니다.
불평할 거리를 찾는 사람에게는
평생 불행한 일만 보입니다.
불평의 악순환입니다.
그러나 늘 감사할 것을 찾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거리가 찾아집니다.
감사의 선순환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까?
그 옆에다 감사의 줄을 더 굵고
더 길게 그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문제가 별 것이 아니게 됩니다.
감사는 문제를 작게 만들고,
결국 해결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성도님들이
늘 감사의 선순환을 만드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사도 바울은 늘 감사를
입에 달고 다닌 사람입니다.
그에게 문제가 없었겠습니까?
역경이 없었겠습니까?
사실 그는 누구보다도 더 많은 수고와
고난을 겪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늘 감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심지어는 감옥에서도
감사하고 기뻐하였습니다.
빌립보 감옥에서도 실라와 더불어
찬양할 때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억울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갖혔어도 거기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밤중에 찬양을 올렸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곳이
꼭 좋은 환경일 필요는 없습니다.
때로는 감옥이 가장 좋은
복음 전파의 장소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어져도 감옥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간수의 생명을 염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 때문에 오히려 간수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일로 인하여 간수의 온 집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훗날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빌립보 교회에 쓴 편지에서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빌1:3-4절>
3절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절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오늘 본문 3절을 보십시오.
3절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지금 바울은 디모데로부터
데살로니가교회가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너무 너무 기뻤습니다.
환난 중에도 그들의 믿음이 자라고,
사랑이 풍성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기뻐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리고 인사말이 끝나자마자
제일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표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바울은 자신의 고난과 궁색한 삶을
바라보고 원망할 거리를 찾지 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과 사랑 가운데
세워진 것으로 감사가 넘쳤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평생 감사하며
산 비결입니다.
또한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가 그 핍박 속에서도 믿음과
사랑의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은
자신이 잘 가르쳐서도 아니고,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똑똑하고 잘났기 때문도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의 선교 사역의 결과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데살로니가교회의
아름다운 열매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하신
일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위협을 당하면서까지
교회를 위해 헌신 하였지만.....,
자신이 이룬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항상’, '당연함'>.....
특별히 바울은 감사와 관련하여
두 가지 단어를 함께 쓰고 있습니다.
첫째는 ‘항상’이라는 말입니다.
둘째는 '당연함'이라는 말입니다.
‘항상’이라는 말은 감사는 조건을
초월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살전 5장18절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당연함'이라는 말은 감사는
성도에게 주어진 끊임없는
의무라는 뜻입니다(엡5:20).
우리는 이러한 감사를 다윗의 시를 통해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시23:1-6>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절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1절에서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였고,....
특별히 4절에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다윗의 고백은 왜 우리가 하나님께
‘항상’, 그리고 ‘당연히’ 감사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어느 순간이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요,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듯
인생이 순탄치 못하고 어려운 고비가 있어도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감사의 비결입니다.
<감사는 명령>
감사가 당연한 것이기에 성경은
감사에 대해 기록하면서
모두 명령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감사하면 좋겠다”고 쓴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모두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처럼 명령문으로 쓰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430년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시키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눈앞에 위험과 고난이 닥칠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은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왜 우리를 애굽 땅에서 끌어내어
이 사막에서 죽이려하는가”하고 불평하였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피할 길을 내시고(홍해),
생명을 보존시켜 주셨습니다(물, 만나).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별로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40년 동안 매일 내렸기 때문에
감사보다는 당연하게 생각했고.....
나중엔 박한 음식이라고 불평했습니다.
고기를 먹게 해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메추라기를 보내셔서
한 달 동안 질리도록 먹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셔서 합니다.
메추라기를 보내신 하나님은 그 고기가
씹혀 넘어가지 전에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감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면 더 좋은 것으로 주실 텐데
원망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아예 ‘감사’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다마
‘명령문’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우리는 죄(애굽의 노예)에
구원받았습니다(출애굽 – 십자가의 은혜).
지금은 가나안(천국)을 향해 가고 있는
광야를 지나고 있습니다.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분명해지지 않습니까?
광야를 지나는 동안 고난과
역경이 없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하는 것입니다.
불평하면 망하고, 감사하면 삽니다.
<감사는 마음의 태도>
그렇습니다. 감사는 조건이 아니라
마음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길은 여기에’라는 소설을 써서
전 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준 일본의 유명한 소설가
‘미우라 아야꼬’는 반평생을 병으로 살았습니다.
폐결핵, 척추카리에스, 습진, 파킨스병,
암 등 갖가지 질병 속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고통 속에서
위대한 작품들을 만들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지은 “아프지 않으면”
이라는 시의 내용입니다.
“아프지 않으면 드리지 못할 기도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듣지 못할 말씀이 있다.
아프지 않으면 접근하지 못할 성소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우러러 뵈지 못할
거룩한 얼굴이 있다.
아아, 아프지 않으면 나는 인간일 수 없다.”
그녀는 오히려 아픔이 있었기에 기도할 수 있었고,
노래할 수 있었고, 믿음이 생겼노라고 고백합니다.
그녀는 아파 누워 있는 병실에서
“내가 어떻게 하면 주위의 환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비록 나는 아프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항상 기쁨을 보여 주리라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병실에 있으면서 절대로 원망이나
불평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간호사가 오면 고통 중에도 부드럽게 웃었고,
옆에 있는 환자들을 오히려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병주머니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든 감사를 드렸습니다.
신앙인의 감사는 소유의 다소에
따라 하는 감사가 아닙니다.
고통의 유무에 따라 하는 감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고통과 슬픔과 아픔 속에서
감사하는 것이 진정한 감사입니다.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는 무엇이든지
감사를 드렸습니다.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열매가 없고, 밭에 식물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감사하고
즐거워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을 보고 비교하면서
내가 우위에 있다고 드리는
상대적 감사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드리는 감사입니다.
처해진 환경이나 상황과 관계없이
무엇이든지 감사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감사하는 자의
어려움은 반드시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감사하는 신앙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맺는 말씀 - 감사는 성도의 표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는 성도의 표식입니다.
로마서 1장 21절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알기는 알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감사치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보다 못한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성도’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성도가 아닙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참 성도입니다.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믿음이 성장 했는가를 판단하는 척도는
‘감사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기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감사가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계속 요구만 할 뿐입니다.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충족될 때까지 떼를 쓰고 웁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자라면
감사할 줄 압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어릴 때는 감사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성장하고 성숙해지면
스스로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의 성장과 감사는 정비례합니다.
바라기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어떤 조건에서든지 먼저 감사를 찾아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감사의 선순환이 일어나고...
저와 성도님들의 일생이 감사로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