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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강해(2)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본문 : 살전 1:2-3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
실라와 함께 세운 교회입니다.
당시 헬라인의 무리와 귀부인들이
교회에 나왔지만 유대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쫓아내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난 뒤에도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핍박은
계속되었습니다(야손의 고난).
바울은 다시 데살로니가를 방문하려 애를 썼지만
사정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디모데를 보내어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이
어찌 지내는지를 알아오도록 하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 디모데가
기쁜 소식을 가지고 돌아 왔습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유대인들의 갖은 핍박과 방해에도 신앙공동체....
곧 교회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놀랍고도 감격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
그리고 그 순간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 깨달음이 2절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2절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예, 그것은 자신이 떠났음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불과 3주 만에 떠났음에도 복음을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즉 바울은 자신의 노력으로만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들이 믿음을 지키고 신앙공동체를
세워가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가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런 체험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훗날 고린도교회가 분쟁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리고 그 분파 중에....
자신의 파와 아볼로의 파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렇게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고전 3:6-9>
6절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절 심는 이와 물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절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것은
사람이 할지라도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절감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사람이 전하지만 전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자라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열매 맺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최선을 다하지만
교만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기도할 때에>.....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들을 위해
선택한 것이 있습니다.
그들을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2절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바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이 중보기도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그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는지 살전3;10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살전3;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예,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하여 주야로
심히 간구하였습니다.
이러한 중보기도가 있었기에
데살로니가 교회를 비롯해 초대교회가
자라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금산교회도 목회자와 성도를 위한
중보기도가 끊이지 않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너희를 기억함은>.....
그런데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기억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2절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그 구체적인 내용이 3절에 나옵니다.
3절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이것은 아마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전할 때 바울에게
전달된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첫째,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믿음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믿음의 역사’란 ‘믿음의 행동’,
‘믿음의 일’을 뜻합니다.
사실 핍박이 오면 믿음이 드러나기 어렵습니다.
심리적으로 위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마7:21).
핍박 중에서도 믿음의 행위를 가지고 있는
참된 성도들이었습니다.
흑인 해방운동지도자였던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은 .....
흑인인권운동으로 인해 말할 수 없는
핍박과 위협을 당했습니다.
집은 두 번이나 폭파되었고 칼에 찔려
죽을 뻔 하기도 하였으며,
수많은 협박을 받았습니다.
감옥에 들어가는 일은 부지기수였습니다.
그가 무수한 어려움을 당한 이유는 .......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평등하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당한 고난이 믿음에 미친
영향을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최근 수년 동안 거쳤던 수난과
고뇌하는 순간들은 나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끌었습니다."
믿음이 있었기에 고난과 박해를
즐겨 받을 수 있었고, ....
오히려 그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더 심화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분명한 믿음은....
믿음대로 살아가는 역사를 만들어
내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
즉 믿음의 결과가 나타나던 교회입니다.
믿음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결과가 나타나야 합니다.
따라서 믿음의 역사는 습관적인 예배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형식적인 믿음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명사적인 의미가 아니라
동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같이 믿음에는
‘역사’, 곧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고 가르치면서,....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바친 사건과......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접대한 사건을
‘믿음의 행위’라고
예를 들어 가르쳤습니다(약2:21-26).
그렇습니다. 믿음과 행위는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행위를 낳고, 행위는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바울의 ‘믿음’에 대한 강조와 야고보의
‘행위’에 대한 강조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보완적입니다.
혹자는 이 사실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나는 구원받기 위해서는 일하지 않을 것인데
이는 내 주께서 다 이뤄 놓으신 때문이라.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드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나는 종처럼 열심히 일하리라.”
우리 모두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처럼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믿음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둘째,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사랑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여기의 '사랑의 수고' 라는 말에서
'수고' 는 '코포스'입니다.
'채찍으로 때리다'를 의미하는 동사인
'코프트' 에서 유래했습니다.
따라서 수고는 단순히 일을 위한
수고를 가 아니라 고통을 동반하는
수고를 의미합니다.
그런데도 수고할 수 있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본질은 '수고하며 희생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주고도 또 주고 싶은 것처럼
아낌없이 주는 것이 곧 사랑의 수고입니다.
정말 우리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낌없이 수고하듯이 주님을 사랑한다면 ...
수고와 희생이 따르는 것입니다.
성도님들 !
오늘 주님께 바쳐지는 이 시간,
하나님 앞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아낌없이 드리는 것은 바로
사랑의 수고가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 여자가 고등학교 다니고
대학에 다닐 때는 더러운 것을
손에 대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때가 차서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게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자녀들을 위해서
밥을 짓고 찬을 만들고
옷을 빨아야 하는 수고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이 맛있게 밥을 먹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에는 수고가 동반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짐이 되지 아니합니다.
성도님들 !
사도 바울의 간증을 들어보세요.
바울은 고전15:10에서는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를 했다”고 했고,.....
고후11:23에서는
“수고를 넘치도록 하였다”고 하였고......
살후3:8에서는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고후 5:13-14a>
13절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그처럼 복음 전파를 위해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면서도
계속할 수 있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시기 때문에
안하려야 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많은 어려움과 핍박 속에서 복음을 받았고
기쁨으로 복음을 위하여 수고했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을 했습니다.
리빙스턴이 어떻게 그처럼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아프리카에 가서 일생을 지냈습니까?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가
왜 독일 베를린대학 교수직을 내놓고 ....
식인종이 있는 곳에 가서 흑인들을 돌보며
손수 병원을 지으며 환자를
치료하며 살았습니까?
다미엔 신부가 왜 나병환자를 돌보며
나중에는 자신의 몸에 나병이 전염되었어도.......
죽을 때까지 그들을 위하여
끝까지 봉사했습니까?
오늘도 세계 구석구석에서 .....
이름 없이 어려운 자리에 있는 사람을 도우며 사는
사람들이 왜 그런 수고를 자진해서 합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수고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도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사랑의 수고’가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믿음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둘째,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사랑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셋째,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소망 중에 인내가 있었습니다.
여기의 '인내' 는 '휘포모네'입니다.
'아래에' 란 뜻을 가진 '휘포' 와 ...
'머물다' 의 뜻을 가진 '메노' 라는
동사의 합성어입니다.
즉 인내는 '아래에 머물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망이 있기에 아래와 같은 고통에도
인내하는 것입니다.
시련 중에도 주님을 소망하기에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탄압과 박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교회였습니다.
숲 속에서 벌목꾼들이 백년이 넘는
거목을 벌채하고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힘들게 나무를 잘랐을 때
그들은 기이한 나이테를 발견하게 됩니다.
나무의 수명을 보여주는
10개의 나이테가 있었습니다.
- 다섯 개는 다른 나이테와 달리
촘촘히 위치해 있었고,....
- 나머지 다섯 개의 나이테는 바깥쪽으로
넓은 간격을 두고 있었습니다.
벌목꾼은 조밀하게 붙어있는
다섯 개의 나이테를 보고 말합니다.
"이 나무는 5년의 가뭄기간 동안
전혀 자라지 못했군." ......
그러자 다른 벌목꾼은 다른 의견을 제시합니다.
"물론, 가뭄기간에 크게 자라지는 못했지.
하지만 가뭄으로 인해 부족한 양분과
수분을 얻기 위해 나무는
더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뿌리가 강화되면서 더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게 되었다네.......
고난을 이겨내었기에 거목이
될 수 있었던 거야.....
그 이후에 생긴 나이테가 넓은 간격을
두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일세."......
이를 듣고 있던 벌목꾼이 끄덕이며 말합니다.
"그렇다면 5년의 가뭄이 나무에게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군".
우리의 소망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있다가도 없어지고 보이다가 사라지는
세상의 소망이 아닙니다.
시간이 가면 변하는 소망도 아닙니다.
보이는 것 같으나 실상은 없는
소망이 아닙니다.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고 변하지 아니하는
실존, 곧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둔 사람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며 인내하게 됩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금산교회 성도들도 !
이 말세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의 소망을 온전히 ‘그리스도’에게 두고....
인내로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견뎌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맺는 말씀>
후안 까를로스 오르티즈(Juan Carlos Ortiz)목사는 ....
'제자입니까(Disciple)' 라는 저서에서
현대교회의 성장은 바른 성장이 아니라
몸만 커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성숙한 것이 아니라
비대해졌다는 것입니다.
3백 명 교인으로 목회 하던 그가
6백 명의 교회로 성장되자 우쭐댑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너는 교회가 자랐다고 생각하느냐?
성장한 것이 아니고 조금 살이 쪘다.......
너는 교회가 부흥했다고 생각하느냐?
부흥이 아니고 조금 비대해진 것이다.....
3백 명이 모일 때나 6백 명이 모일 때나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조금도 자라지 않은 거야".
한마디로 몸만 커진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공룡은 거대한 몸 때문에 쓰러져
지구 최초로 멸망을 당한
짐승이 되었습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는 대형화되는데
왜 세상에 조롱을 당하며
본이 되지 못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세 가지 개념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근본적인 특성을
나타내 주는 것들입니다.
현대교회가 회복하여야 할 신앙입니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충만한 교회가 되도록 힘을 다해,...
이 시대에 본이 되는 교회를 이루어 나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