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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 - 민수는 혼란스럽다
5.
본디 방송국 놈들은 사디 성향 타고났다. 남 고통받는 모습을 즐기다 못해 희열감까지 느끼는 게 틀림없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따위 전개가 말이 되나? 뭐 얼마나 대단한 그림 뽑아내겠다고, 본인이 직접 작성하는 X 소개서라며 다짜고짜 편지지 들이밀 때부터 얼추 예상은 했지. 얘넨 개짓거리 하는 데엔 아주 도가 튼 놈들이 분명하다고. 고작 이거 쓰다 되지도 않는 감성에 젖어 눈물 짜내는 인간까지 나왔겠지? 당시엔 단순 그런 그림 뽑아내기 위한 용도인 줄 알았다. 더 큰 그림 그렸으면 이게 그 주인한테까지 갈지도 모르고. 많이 쳐봐야 그 정도였다.
"X가 작성한 본인의 소개서입니다, 한 명씩 차례로 소개서를 읽어주세요... 라는데요?"
아, 이거 뭔가 존나게 잘못됐는데. 하는 생각은 그 말 듣고 난 후에야 했다. 늦어도 한참 늦은 타이밍, 뒤늦게 돌아가는 판 의심하기 시작한 김여주는 티 나지 않게 주변 인간들의 낯 훑는다. 얼떨떨한 얼굴들엔 미약한 긴장감이 배어있으면서도 어째 크게 놀란감은 없었다. 이 안에 입주한 이상 이러한 순간이 올 거라고, 모두가 알고 있던 사실을 김여주만 몰랐던 거다.
그러니까 안일했다. 단순히 놈을 다시 만나고 싶었으며, 그러한 타이밍에 운 좋게 걸려든 게 전 연인과 동거라는 자극적인 키워드 매단 연애 리얼리티 프로였을 뿐이라고. 끽해봐야 나 말고 다른 인간과도 엮일지 모른다, 운이 더럽게 없다면 그 안에서 딴 년이랑 눈맞을지도 모르고. 했던 각오는 딱 그 정도 수준.
"누구부터 하죠?"
"어... 저부터 할까요...?"
다시말해, 이 안에서 무얼 하며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얜 좆도 관심 없었단 거다.
개미친 것들. 이건 그냥 공개처형 아냐? 얼타기도 잠시 상황 제대로 인지하고 난 후엔 분개했다. 무슨 편지도 아니고, 대신 쓰는 소개서? 그럴 수 있어. 전 연인과 동거하며 다른 썸씽 만드는 프로 기획한 놈들 머릿속이 뭐 얼마나 정상적일까. 심지어는 그걸 놈이 볼지도 모른다? 오케이, 이것까지도 그러려니 한다고.
장난까나... 남들 다 보는 앞에서 공개될 줄 알았으면 그렇게까지 감정 실어서는 안 썼지. 역풍 한 번 제대로 처맞았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무작정 입주한 자신을 되돌아보기엔 이미 방송국놈들은 김여주 눈에 역적이었다. 하릴없이 카메라 너머 애꿎은 피디 얼굴만 졸라 째렸다. 초조함에 씹어대는 입술은 누구 차례 오기도 전 난장이 날 지경이었다.
"다음은..."
눈이 마주친 건 그때다. 달달 떨던 다리나 잘근잘근 씹어대던 입술이나, 정신 사나운 짓거리 단번에 멎어들었다. 입술이 얕게 벌어진다. 겁먹은 얼굴 고스란히 까발려졌다. 똘추 같은 실수가 아닐 수 없다. 표정 관리 하나 제대로 못 해? 그리도 자신할 땐 언제고.
"여주 씨 차례네요...?"
허겁지겁 시선 내리깐다. 왜 갑자기 눈이 마주쳐선, 표정이 찰나로 무너졌다. 욕을 하거나, 잔뜩 나쁜 말을 씨부려놓거나, 차라리 그런 걸 해야 했는데. 그게 자신과는 더 잘 어울리는 짓이었는데. 분위기에 취해선 잠깐 미쳤던 거다. 다 죽어가던 감정에 상황이 뭐라고 숨을 불어넣었다. 대체 누구 좆되라고.
까고 말하자. 사실 누군가 볼 줄 알았다. 차마 얼굴 보고 못 할 말 거기에 지껄인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선택이었고. 사랑 고백은 아니었다. 양심 없게도 고해성사였다.
아주 그냥 정신이 나간 거지. 다급히 종이 펼쳐 든다. 어울리지 않게 손끝이 잘게 떨렸다. 봤을까? 긴장이라기보단, 같잖은 자존심에서부터 파생된 수치심. 순간이지만 밑창이 까발려진 기분. 김여주는 오로지 눈앞의 종이 쪼가리만 담아냈다. 본인의 차례인 걸 다행이라 해야 할까. 덕분에 시선 피할 구실은 되었으니. 뭐 좋은 말은 못 듣겠지만서도, 밭는 숨결에 미세하게 균열이 일었다.
"여주는,"
그 잠깐 새 목구멍이 말랐나. 쩍쩍 갈라진 듯 무시하기 힘든 갈증이 일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짧은 공백 사이 빠르게 소개서를 훑었다. 동시에 미간이 옅게 구겨진다. 잇새로는 참지 못한 헛웃음이 터졌다.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좋은... 사람입니다."
이건 반칙이지. 비겁하게 발을 빼네?
6.
무뚝뚝하지만 알고 보면 섬세하고 여린 사람. 안 그런 척 배려심이 넘치고, 또 사랑을 받는 것도 주는 것도 잘하는 표현에 거침이 없는 사람. 무엇보다, 시작을 알린 '좋은 사람'이라는 키워드에서 끝난 거다.
놈이 발을 뺐다. 이딴 식으로 까발려질지 알고 쓴 건지 모르고 쓴 건지 모르겠지만 진심이라곤 조금도 담기지 않은 통상적인 문장들 뿐이었다. 섬세하고 여려? 배려를 했다면 널 그렇게 버리고 떠났을까. 김여주는 염치없이 사랑만 받았다. 표현에는 존나 야박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가이딩 받으라는 말로 대신했다. 감정은 양가적이기 짝이없어 애정하는 동시에 증오했다. 졸렬하게도 살고 싶었다. 지구 반대편에서도 알 수 있는 놈의 생사여부는 썩 좋은 빌미가 됐다. 발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언뜻 봐도 좋은 인간은 아니었다.
이 안에서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 문장을 뱉어냈을 땐 더 굳어질 수 없을 만치 얼굴 근육이 뻣뻣하게 얼었다. 누구 하나가 툭 치기만 해도 이성의 끈 끊어질 듯싶었다. 양심도 없이 열이 뻗친다. 좋은 사람을 만나? 마음에도 없는 소리 잘도 지껄이네. 놈이 괘씸해 참을 수가 없었다.
"넘어가죠."
고개를 치켜들면 기다렸다는 듯 눈이 마주친다. 언제부터 쳐다보고 있었지? 그딴 의문은 가질 새도 없었다. 먼저 눈 피하면 뒈질 상황에 놓인 것마냥 시선 받아냈다. 지은 죄고 뭐고 적어도 지금은 지기 싫어서. 전혀 그렇지 않은 인간을 그렇게 서술했다. 그저 좋게 포장해 주려는 의도는 눈곱만치도 없을 게 뻔하니 웃긴 거다. 남은 이유야 하나 아닌가?
놈이 제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그 정도로 미운가. 용서는커녕 없는 사람을 내세울 정도로?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바로 다음 차례가 놈이었다. 수치심으로 후끈대던 목덜미는 싸늘하게 식은 지 오래다. 공개처형이라며 당장이라도 탈주하려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팔자 좋게 상체나 의자 등받이로 기댔다. 잘난 얼굴 뚫어질 듯 응시한다. 잇새로는 소리 없는 실소가 터진다. 문득 김여주는 지금의 상황이 우스운 촌극과 다를 바 없이 느껴졌다. 봐, 정말 네 말처럼 됐잖아.
"...는 제가 헤어짐을 후회한 유일한 남자입니다."
이 안에 나만큼 사랑을 표현한 사람이 있기나 해?
7.
김여주가 쓴 X 소개서_
사랑은 무식해야 한다는 신조가 있어요. 표현에 거침없고 본인 감정에 대책이 없어요. 돌려받지 못해도 일단 표현하고 보는 성격이에요. 그래서 그런가, X와 연애를 하는 내내 저는 부족함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 그게 다 얘 노력이었는데 그걸 그땐 제가..
취중진담 자주 해요. 좀 취했다 싶으면 안에 담아뒀던 말 다 꺼내는데 두서는 없어도 항상 그랬던 거 같아요. 사랑 고백? 근데 전 항상 타박만 했거든요. ‘나도’ 하는 게 뭐 그렇게 힘들다고. 헤어지고 나니 그게 좀 기억에 남더라고요. 혹여 술 취한 애 앞에 두고 저랑 같은 입장 되신다면 마냥 농담으로 듣지는 마시라고요. 떠보는 말 아닐 거거든요. 술에 취해서까지 마음에도 없는 말 하는 애는 아니라. 알아주려면 마찬가지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나야 할 텐데. 누가 되든 나보다는 표현하겠지 싶다가도.
X는 제가 헤어짐을 후회한 유일한 남자입니다. 사실 그냥 인생에 후회라는 걸 그때 처음 해봤어요. 조금만 덜 싸울걸. 조금만 더 표현할걸. 잘해줄걸. 예뻐해 줄걸. 좋은 말만 해줄걸.
누군가 얘 옆에 있게 된다면, 후회랑은 담쌓은 사람이었음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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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환연 보는 사람 • 전국 센터 잡담
조회 392 댓글 55
김여주 나오는데...?
댓글 55
?
이 뭔?
개소리 ㄴ
김여주 강원도에서 소 잡고 다니는 거 내가 봣음
ㄴ 멧돼지들이 괴로움에 몸부림치는거 나도봣슈
ㄴ ㅅㅂㅋㅋㅋㅋㅋㅋ
먹금력 ㅆㅅㅌㅊ
ㄴ ㅇㅈㅋㅋㅋㅋㅋ
아니 얘들아 ㅅㅂ 진짜라고 문명과 단절되어 사냐? 우리가 외부 친구가 없지 휴대폰이 없어?
ㄴ 씹ㅋㅋㅋㅋㅋㅋㅋ
ㄴ 근데 진짜 ㅋㅋㅋ 니네 신문도 안 봄?
ㄴ 그거 신문에 안 나오는 건데
ㄴ 말이 그렇다는 거잖아;
ㄴ 어떻게 말이 글케 되냐고..
ㄴ ㅋㅋㅋㅋㅋㅋㅋㅋ근데 진짜 신문 1면에 나야되는 거 아님? 김여준데?
ㄴ 김여주가 뭔데
ㄴ 뭐긴.. 사랑에 미친 여자지..
ㄴ ㅇㄱㅁㄷ
ㄴ 하.. 난 그만 말할란다..ㅜ
ㄴ 존나 어지아파 내 사랑도 아닌데 대갈 빠갈날거같애
ㄴ 과몰입 심하다
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단체로 돌앗나
아니 얘들아.. 이게 이렇게 유쾌할 일이 아님; 쟤네 재결합 말이 됨?
ㄴ 한다고 한 적 없지 않나?
ㄴ 동태눈깔 생태 됐더만 뭘 더 말함
ㄴ 그이는 눈으로 얘기해
ㄴ 하시발 드디어 터졋다 내 도파민
ㄴ ㄹㅇ 도파민 미쳣음 혐관 됐지만? 오히려 좋아
야 나 지금 보는 중인데 김여주는 소개를 하는 거냐 고해성사를 하는 거냐
ㄴ 엑스 소개는 뒷전이고 고해성사하기 바쁘심
ㄴ 진심ㅋㅋㅋㅋㅋㅋㅋ 그녀는 죄를 뉘우치셨어
ㄴ 이제 그만 용서해주자
ㄴ 니가 먼데
ㄴ 나? 그이 심장..
ㄴ 시발 아ㅜ
ㄴ 하 존나웃겨ㅠㅠㅠㅠㅠ
존나 짜증난다 나 신입이라 니네 먼 얘기하는지 하나도 모르겟다
ㄴ 세월 미쳣다 ㄷㄷ 김여주를 모르는 시대가 옴;
ㄴ 김여주 혹시 대통령이라도 했었냐?
ㄴ 대통령은 재민이가 할 거야 와꾸로 세계정복
ㄴ 재민이야말로 대통령이 될 재목이지
ㄴ 나재민 아니면 누가 대통령함?
ㄴ 개나소나 다 하던데..시발..
ㄴ 꺄악ㅋㅋㅋㅋㅋㅋ 기개 미쳣다ㄷㄷ
야 근데 나재민의 까대기 다들 어떻게 생각함?
ㄴ 삼천궁녀 자리에 김여주도 껴보시겟다 그거지..
ㄴ 여주는 안 넘어가 강인한 여성이기 때문임
ㄴ ㅇㅈ
ㄴ 아니 근데 까대기가 꽤 진심인 것 같던데..
ㄴ 나도 좀 놀람;; 대체 언제부터...
ㄴ 그분한텐 죄송하지만.. 재민여주 주식삼 ㅠ
ㄴ 맛집이던데..
ㄴ 심지어 나재민 멀티잖아
ㄴ 휴우~^^ 한숨 돌렸다 이제 센터 박살 안 날듯!!
ㄴ 전엔 박살남?
ㄴ 조롱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김여주랑 걔 엑스 사랑싸움에 훈련 B동 박살났어 ㅋㅋ
ㄴ 시발 ㅋㅋㅋㅋㅋ스케일봐;;
Q. 소개서를 읽고 난 후 기분이 어땠죠?
A. 웃겼죠.
Q. 어떤 점이요?
A. 후회하는 척하잖아요. 무릎 꿇고 빌어도 안 잡히던 게.
짭승연애부제.. 망한 사랑 이야기
8.
좆창난 분위기는 쉬이 돌아올 생각 않는다. 마지막 타자였던 놈의 목소리가 끝맺음 된 동시에 어쩐지 싸한 분위기 형성됐다. 썩창난 누구 표정, 눈치보는 몇몇, 아직 덜 멈춘 눈물에 훌찌럭거리는 소리까지. 총체적 난국의 한복판에서 김여주는 팔자 좋게 관망한다. 집안 꼴 자알 돌아간다. 방관자적 태도로 임했다.
시계 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지금은 그게 뭐라고 대단한 소음이라도 되는 양 거슬렸다. 다 끝난 것 같은데 이쯤에서 일어나야 하나. 미처 일어서기도 전 의자 다리 바닥 긁는 소리가 앞서 막았다. 누구 할 거 없이 고개가 틀어진다. 당연하게도 소음의 근원지였는데, 시선 끝 걸리는 얼굴이 의외람 또 의외였다.
"어... 그게, 매, 맥주가 다 떨어진 거 같아서…"
커다랗게 뜨인 눈은 주변이 다 발갛게 달은 상태였으며, 목소리는 염소 새끼마냥 흔들리는 게... 지가 말하고도 당황한 게 틀림없다고. 아차 했는지 걔는 급히 제 입 틀어막았다. 어떻게든 분위기 풀어보려 한 짓인 거 같은데 다른 의미로 싸늘해졌다. 저건 또 뭐 하자는 거야. 김여주는 무감한 시선으로 한껏 겁먹은 얼굴 구경했다. 수습이 안 되는 상황이 썩 난감한 듯한 낯. 그러니까 전혀 의외의 얼굴. 그저 이 상황 끝나는 순간까지도 눈물이나 질질 짜낼 줄 알았던 백다연.
싸하게 흘러가는 분위기 누구 하나 무마할 생각 없는 듯 정적만 흐르던 때였다.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적막을 깨트린다. 나름 참아내다 터진 모양인지 소리는 반쯤 막혀 있었다. 시선이 자연히 그리로 흐른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여주는 별 생각 없었다. 그저,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웃긴 게 저 하나뿐은 아니었던 모양이지. 뭐 그런 생각. 아니 그렇잖아, 망한 분위기 나름 풀어본다며 던진 말이 고작 편의점 팟 구하기라니. 발상 한 번 깜찍하지 않냐고. 한가롭게 백다연을 귀여워하기까지 했다, 정말 안일하게도.
"그러게요. 맥주가 다 떨어졌네."
"어... 어... 네, 네 그쵸...."
"사러 갈래요? 분위기도 별론데."
놈의 관심이 그리로 흐를 줄도 모르고 말이다.
9.
"확실히 사람이 많아서 그런가, 나름 사 온다고 사 왔는데 모자라네요."
"어... 네, 그러게요...."
"다들 배는 부른 거 같긴 한데, 술은 또 부족한 거 같아서. 그냥 많이 사갈까요?"
"어... 네, 그게 좋을 거 같아요...!"
"안주는 뭐, 가벼운 과자 정도?"
"어... 네,"
"그게 좋을 거 같다고요?"
눈치란 게 있음 끼어들지 말았어야 할 자리다. 호기롭게 편의점 팟 구했으나 분위기에 본인 혼자 떠밀린 반 타의적 선언이었으며 딱히 그 자리에서 편의점 메이트를 염두에 두진 않은 듯 보였다.
놈은 그 상황에서 자진했다. 귀여워하는 의도 다분한 웃음에서 훈내가 작렬하니 심기가 비틀리다 못해 토악질이 나올 거 같았다. 지가 언제부터 그렇게 웃었다고, 입꼬리 제대로 간수 안 하냐? 눈치 재기하고 껴든 건 그래서다. 단순 심사 꼬여서. 양심도 없이 편의점 팟 응했다. 심지어는 놈이 알 수 없도록 백다연 상대로 몰래 펼친 공작이었다. 외출을 위해 옷을 갈아입고 온 놈은 제 얼굴 담아내기 무섭게 표정 굳혔다. 당장 입주 때까지만 해도 모르는 척 잘만 하더만 고해성사인지 소개서인지 모를 종이짝이 심기를 퍽 거스른 모양이었다.
가죠 이제?
물론 김여주는 그러거나 말거나였다. 이 정도의 철판도 못 깔 작정이었으면 애당초 이 판에 뛰어들지도 않았을 테다.
그리하여 현재. 말은 김여주가 팔 할 이상 했다. 백다연은 반쯤 얼어 적당히 맞장구만 쳤다. 당장도 그랬다. 맥주 모자랐다는 말도 배는 불러도 술은 부족하다는 말도 전부 김여주가 했다. 물만 마셔도 체할 분위기에서 안주 찾는 여유까지 모조리 얘 몫이었는데 마지막 백다연 말 예측하는 배워먹지 못한 훈남스킬만 놈이 썼다. 개새낀가 진짜? 제 말만 철저히 무시한 거다.
"근데 두 분이서 갈 거 제가 괜히 껴든 거 같기도 하고요."
"......."
"맞죠?"
생각머리 삐딱선 탄다. 작정하고 정색하면 헤픈 웃음 한 번이라도 더 흘려야지. 내 말 무시하면 열을 받게 해서라도 말꼬 터야지. 김여주는 제가 한 말 철저하게 지켰다. 인위적인 웃음은 상시 입가를 떠나지 않았으며, 놈이 열받을 포인트 제대로 집어 거듭 물었다.
그제야 시선이 저에게로 떨어진다. 언제 그랬냐는 듯 싸늘했다. 개같이 싸워도 애정으로 그득 채워져 있던 눈이다. 어쩔 땐 그 눈만 마주해도 숨이 막혔다. 배려를 이렇게 하나? 절 담아내는 시선 속 애정은 한 톨 찾아낼 수 없다. 김여주는 그저 물끄럼 응시했다. 생각보다 더하긴 했으나 각오하고 있던 바였으니 크게 어렵진 않았다.
"글쎄요. 그런 거 같기도 하고."
"......."
"장난인데 안 웃네."
그저 불안할 뿐이지. 염오, 분노, 제아무리 끝이 더러웠다 해도 한때 사랑했던 사이에 갖기에는 다소 추저분한 감정들. 가끔은 그러한 것마저도 잃을까 불안한 거다. 어쩔 때의 김여주는 사랑보다도 증오가 짙다 느꼈다. 사랑이 없어진 지금 그나마 남은 것마저도 흐려지면 어쩌지? 이기적인 생각머리에 신이 공노한 건가. 누구 하나가 먼저 시선을 피하기도 전 울린 진동 소리가 적막을 깨트린다. 가장 먼저 휴대폰을 꺼내든 인물은 백다연이었는데 헙, 숨을 삼키기도 잠시 눈길이 놈을 향했다.
"......?"
손을 뻗은 건 잠시간의 망설임 후에서였다. 미처 메시지를 확인하지 못한 김여주는 그저 돌아가는 꼴만 멀거니 바라본다. 당황? 분노? 무엇에도 속하지 못한 기분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그저 놀란 듯 조금은 크게 뜨인 놈의 눈을 한 번, 다시 돌아 난감한 듯한 백다연의 낯으로.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자신은 또 다시 완벽한 타인으로. 마치 자신의 존재는 까맣게 잊은 듯 서로만을 바라보는 둘을 응시하다 다급히 꺼내든 휴대폰은 후더운 공기에 열이 바짝 오른 상태였는데, 액정으로 떠오른 메시지는 그랬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이드의 손을 잡으세요. 앞으로 일주일간 당신의 파트너가 됩니다.]
정말 좆같게도, 사람 엿멕이는 방법은 각양각색이라.
10.
→ 가이드
[앞으로 삼 주간 여러분은 파트너 외의 다른 사람에게 가이딩을 받지도 하지도 못하게 됩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센티넬의 손을 잡으세요. 앞으로 일주일간 당신의 파트너가 됩니다.]
→ 센티넬
[앞으로 삼 주간 여러분은 파트너 외의 다른 사람에게 가이딩을 받지도 하지도 못하게 됩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이드의 손을 잡으세요. 앞으로 일주일간 당신의 파트너가 됩니다.]
환승연애 입주 룰 1, 파트너
센티넬은 자신의 파트너 외 다른 사람에게 가이딩을 받을 수 없다. 이는 가이드 역시 마찬가지.
가이딩을 거부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센티넬의 수치가 20% 이하로 떨어질 시 양측 모두에게 페널티가 주어진다.
한 번 파트너가 성사된 이상 일주일간 변동은 불가하다.
슈프림팀 & 영준 - 왜
11.
- 자주 싸웠을 때요? 뭐 아무래도... 가이딩 때문에?
- 센티넬끼리 연애하는 거 본 적 있으세요? 흔하진 않아요. 사실 거의 없다 봐도 무방하죠. 근데 제가 또 흔하진 않은 케이스라. 이게, 어감이 좀 그렇긴 한데 표현할 길이 이것밖에 없어서,
- 몸정이 제일 무섭다잖아요. 비슷해요.
- 사실 마냥 순진하게 가이딩한다고는 못 하거든요. 물론 하는 방법이야 많죠. 방사부터, 가볍게 손을 잡는다던가, 포옹까지가 아마도 많이들 생각하는 수준일 거 같은데... 그렇게 해서는 만땅 못 채워요. 가이딩의 질부터가 달라지는 거라 이게. 아무리 능력치가 좋아도 방사는 하급 앰플 수준이거든요.
- 까고 말하면 전에는 저도 이해 못 했어요. 모르는 사람이랑 입맞춤? 일반 상식선에서 보자면 다짜고짜 뺨맞아도 이상할 게 없거든요. 근데 여기서는 그게 일상이에요. 변명하자면 그 개짓거리가 내 목숨줄이니까.
- 살고 싶어 치는 발버둥이라고 하면 누구도 욕 못 해요. 본인 연인 두고 다른 인간이랑 입술 부비는 일? 허다해요.
- 근데 이게 웃겨요. 자꾸 살을 맞대다 보면 진짜 내가 얘 뭐라도 되는가 싶은 순간이 문득 찾아오거든요. 사랑으로 착각하는 상황이 자꾸자꾸 생기거든요. 가끔은 그걸 또, 믿어버릴까 싶거든요. 그건 본능이에요. 멍청한 짓이죠.
- 걔는 그 문득의 순간이나 상황 속 착각을 무서워했어요. 감정 격해지면 서로 못 할 말도 많이 했죠.
"너 그러다 정말 뒈지기라도 하면? 그럼 그거 누구 책임인데."
"김여주."
"야, 난 네 목숨까지 쥐고 흔들기 싫어. 누가 내 손에 쥐어달래? 언제 바란 적이나 있어? 싫다고. 무겁다고."
"……."
"무서워 죽겠다고 진짜...."
- 목숨 빌미로 협박도 하고.
"나도 똑같이 할까? 네 앞에서 폭주하며 뒈져야 정신을 차릴래?"
"말 그따위로 할래?"
"왜, 내가 못 할 말 했어? 충분히 가능해. 모르는 거 아니잖아 너."
"야."
"나 죽으면,"
"......."
"그건 다 네 책임이야."
- 빌어도 보고.
"신경 안 쓸게. 그냥 다 모른 척할게. 네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
"......."
"그러니까 실수라고 해. 진심 아니라고 말해."
"........"
"김여주."
"......."
"... 여주야,"
- 밑바닥을 다 보고 헤어졌어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애원 많이 했죠.
"제발...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봐."
- 다신 그런 짓 안 할 거예요.
12.
- 기분이요? X같았는데.
"아, 뭐지 이거. 상황이 되게... 별로네."
- 제가 일전에 그러지 않았나요? 애원 호소 뭐 그런 거 할 만큼 했다고. 다신 그런 짓 안 할 거라고. 그래서 전 그랬어요. 고작 걔 얼굴 다시 보겠다고 전국민 앞에서 광대놀음 할 작정까지 하면서도 전처럼 돌아가자 다른 인간 사랑하지 마라 애원할 생각은 없었어요.
"이런 건 적어도 사람 다 모인 자리에서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선택폭 너무 좁잖아요 지금."
"... 저 여주 씨,"
"지금이라도 놔요. 내가 못 본 걸로 해줄게."
- 근데 무슨 프로가 그래. 사람 어렵게 먹은 마음 뭣도 아닌 걸로 만들어.
"아님 차라리 내 손 잡던가요. 난 사실 다연 씨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는데."
"아...."
"... 진짠데."
- 자만했나 봐요. 오만했던 거죠.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어요. 전 분명히 말하지만 걔랑 다시 시작할 생각은 추호도 없거든요. 처음부터 원했던 건 하나예요. 얼굴 다시 보기. 친구라도 되면 운 좋은 거고. 솔직히 말하면, 아무렇지 않지는 못해도 얼추 견딜 수는 있을 줄 알았어요. 더 가식 떨면 새 출발 응원도 좀 해주고. 내가 그 정도로 쿨한 인간 못 된다는 거 사실 저 알고 있었거든요? 그렇잖아. 아니고서야 지금 이 미련을 왜 떨어.
- 근데, 그냥, 생각보다 제가 더...
"듣고 있자니 웃기네."
- 시시한 인간이었나 봐요. 걔한테 그 말을 듣는데,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알아요?"
"......."
"무슨 자격으로 이러지.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 아... 이제 정말 끝났구나. 얘랑 난 이제 진짜 뭣도 아니구나.
- 그게 생각보다 더, 처참한 기분이구나.
13.
김여주가 잡은 손 끊어낼 권리는 없어도 놈 스스로 손을 놓을 권리는 있었다. 어쩌면 그 하나가 실낱같은 희망이었는데 그를 박살 낸 게 다른 누구도 아닌 놈이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먼저 가세요. 가뜩이나 좁아진 선택폭 더 좁아질라."
"… 그건,"
"죄송한데 공유는 못 해요. 내가 가이딩 귀한 줄 아는 사람이라."
전혀 무관심한 목소리로 답하는 놈. 시선은 자신을 향하지조차 않은 채, 그저 귀찮은 짐 한시 빨리 털어내려는 듯한 무신경이.
그래요. 나도 빨리 가서 내 파트너 찾아야겠네. 아닌가, 이제 좀 취기가 올라 더 마시는 건 무리라고 했었나. 그건 도망쳤다는 말에 가까웠다. 제가 무어라 말했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한 채 김여주는 급히 등을 돌렸다. 언뜻 걱정하는 기색의 백다연이 시야로 스쳤으나 이젠 그마저도 제 알 바 아니었다. 개새끼. 진짜 못돼 처먹은 게, 언제부터 그리 가이딩에 연연했다고. 귀한 줄 알아? 그런 게 그땐 그렇게 받기 싫다 발악을 했어? 머리를 빼곡히 채우는 무수한 생각들. 모조리 놈에 관한 것들이었고 대체로 절망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하지? 여기서 뭘 더 할 수나 있나? 느릿하게 옮기던 걸음은 점차 속도를 높여 이내 뜀박질로 변했다. 당장 턱 끝까지 차오른 욕지기가 달음박질에 미친듯이 뛰는 심장 때문인지 마지막 마주했던 무감한 놈의 얼굴 때문인지 몰랐다. 그저 가쁜 숨을 연신 밭았다. 머릿속 그득 채우는 나쁜 생각들을 함께 털었다. 떨치면 차오르고, 떨치면 또 차오르고. 달은 호흡이 모자라 눈앞이 새카매질 때쯤 정신없이 나아가던 걸음이 멎었다. 손목을 잡아챈 열기 때문이었다. 거칠게 틀어지는 몸에 뒤바뀐 시야로 익숙한 얼굴이 들어찬다. 그럼 또 답도 없이 웃음이 나왔다. 웃음인지 한숨인지는 모호했으나, 잔뜩 일그러져 있는 게 놈과 닮았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너 내가 우습지."
"......."
"그러니까, 씨발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잔뜩 굳은 음성. 숨을 내쉴 때마다 성에 찬 듯 들썩이는 어깨. 사납게 치켜뜬 눈동자. 몇 번이고 달싹이면서도 결국 모진 말 한 마디 뱉어내질 못하는 입술. 비정상적으로 후더운 공기. 그 짧은 새 느슨하게 풀어진 손아귀.
"왔네, 너."
"......."
이 상황까지 와서도 배려라던가, 다정이라던가, 어쩌면 습관이 된 비참이라던가.
"온 김에 물어볼 게 있는데,"
진짜 지긋지긋해. 근데 어쩌면 난 이 지긋지긋한 게 하고 싶었나 봐.
"내가 좋은 사람이야?"
"......."
"그래 동혁아?"
있지 동혁아, 난 네가 너무 지겹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4.09.14 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