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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평화의 길 1코스 제2부
숭뢰리우뢰촌-숭릉천낙성교-돌모루-
월곳공설자연장지-독립지사유경근묘-
시장곡-적두마을-수곡마을-월곶돈대-
월곶진조해루-동문로갈림목-옥포해안-
옥감마을-갑룡길갈림목-부새산고개
20241113
1.코스 소개(두루누비)
1)코스개요
- 강화 평화전망대에서 출발해 연미정을 지나 김포 문수산성 남문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 강화도의 북동쪽 해안선을 따라 걸으며 휴전선에 해당하는 한강하구 중립수역과 북한을 조망할 수 있다.
- 조선 시대 한성 방어의 최전선이었던 강화도의 역사 유적지도 함께 둘러보면 좋다.
2)관광포인트
- 북한의 생활상을 가까이에서 조망할 수 있는 강화평화전망대
- 잘 보존된 한강하구 중립수역을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연미정
- 6.25전쟁에 참전한 용사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6.25참전용사기념공원
- 조선 시대 강화해협을 지키는 요새였던 문수산성
3)여행정보(주의사항)
- 강화 평화전망대에서 6.25 참전용사기념공원까지는 민간인 통제구역이므로 신분증을 지참해야 한다.
- 강화군에서는 서울에서 출발하여 강화 DMZ 평화쉼터-연미정-평화전망대를 왕복하는 ‘DMZ 평화의 길 강화이야기‘ 여행상품을 운영 중에 있으며 사전예약을 통해 이용 가능하다.
- 주요 경로 : 강화평화전망대 3.6Km 고려천도공원 5.9Km 연미정(월곶돈대) 4.5Km 진해루 1.9Km 문수산성남문
- 시점 : 강화평화전망대 주차장, 인천시 강화군 양사면 전망대로 795
대중교통) 강화터미널에서 26번 버스 이용, 강화평화전망대 하차
- 종점 :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문수산로 8
대중교통) 김포골드라인 걸포북변역에서 3000번 버스 이용, 성동검문소 하차
2.연미정의 아름다운 풍경과 무지개 환상
제2부 : 송해면 숭뢰리에서 DMZ 평화의길 1코스를 이어간다. 동쪽 조강(祖江) 제방에는 어른 키 세 배 가까이 높은 견고한 철책이 이어지고 조강 중앙으로는 군사분계선 휴전선이 조강을 따라 흐르며 그 건너편의 북한 황해도 개풍군 땅이 아주 가까이 마주하고 있다. 분단 조국의 슬픈 현실이 가슴을 옥죈다. 이 견고한 철책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듯 언제쯤 무너질 것인가? 올해 고인이 된 싱어송라이터 김민기씨는 총을 내리고 두 손 마주잡고 녹슨 철조망을 걷어내자고 노래하였지만 강화도 조강 제방의 철조망은 쉽게 걷어낼 수 없는 철책처럼 강력해 보인다. 북한과 대적한 우리 국방력의 막강한 힘에 안도해야 하는데도 몸이 자꾸 움추려 들고 평화의길을 걷는 탐방객의 마음은 어두워진다. 김민기 가수가 부른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노래가 철책 너머 조강 하늘로 울려퍼진다. 철책을 넘어가는 쇠기러떼 꽁지 끝 무지개를 따라 서로의 마음은 오가지 못한다. 탐방객은 눈시울이 흐릿해지며 가슴에는 찬바람이 불어댈 뿐이다.
내 마음에 흐르는 시냇물 미움의 골짜기로/ 물살을 가르는 물고기떼 물 위로 차오르네/ 냇물은 흐르네 철망을 헤집고/ 싱그런 꿈들을 품에 안고 흘러 굽이쳐 가네// 저 건너 들에 핀 풀꽃들 꽃내음도 향긋해/ 거기 서 있는 그대 숨소리 들리는 듯도 해/ 이렇게 가까이 이렇게 나뉘어서/ 힘없이 서 있는 녹슨 철조망을 쳐다만 보네/ 이렇게 가까이 이렇게 나뉘어서/ 힘없이 서 있는 녹슨 철조망을 쳐다만 보네// 빗방울이 떨어지려나 들어봐 저 소리/ 아이들이 울고 서 있어 먹구름도 몰려와/ 자 총을 내리고 두 손 마주잡고/ 힘없이 서 있는 녹슨 철조망을 걷어 버려요/ 자 총을 내리고 두 손 마주잡고/ 힘없이 서 있는 녹슨 철조망을 걷어 버려요// 저 위를 좀 봐 하늘을 나는 새 철조망 너머로/ 꽁지 끝을 따라 무지개 네 마음이 오는 길/ 새들은 나르게 냇물도 흐르게/ 풀벌레 오가고 바람은 흐르고 마음도 흐르게/ 자 총을 내려 두 손 마주잡고/ 힘없이 서 있는 녹슨 철조망을 걷어 버려요/ 자 총을 내려 두 손 마주잡고/ 힘없이 서 있는 녹슨 철조망을 걷어 버려요// 녹슬은 철망을 거두고 마음껏 흘러서 가게 - 김민기 작사·곡·노래의 '철망 앞에서'(1993)
강화도 동쪽 송해면과 강화읍 지역은 조강 제방 안쪽에 수로가 흐르고 그 안쪽에 드넓은 들녘이 펼쳐지며 마을이 자리한다. 서쪽에 고려산이 우뚝하게 솟아 있고, 그 북쪽에는 봉천산이 마주한다. 평화로운 산야의 우리 국토 강화도 풍경이다. 이 평화로운 산야에 의지해 삶을 살아가는 주민들의 가슴을 찢어놓는 소리는 평화의 소리가 아닌 증오와 불신, 위협의 소리다. 그 소리부터 없애야 한다. 그 소리의 근원이 되는 빌미를 조강 양안의 서로가 각자 없애야 한다. 악(惡)은 악을 부르며 악순환이 되지만, 평화의 겨자씨 작은 선(善)은 선순환으로 이어진다. 내 아름다운 국토, 조국의 겨레가 평화를 깨뜨리는 사소함에서 벗어나면 조강의 물길을 넘나드는 소리는 얼마나 부드러울까. "대남방송, 대북방송 둘다 안돼!" 양사면 당산리 주민들의 호소문이 귓가를 울린다.
강화도는 해안을 방비하는 돈대(墩臺)들이 강화 지역 관광상품을 대표한다. 송해면 숭뢰리, 강화읍 대산리, 월곶리, 옥림리, 용정리 지역을 지나가며 돈대의 위치를 확인한다. 이 지역의 돈대는 숭뢰리의 숙룡돈대(宿龍墩臺), 대산리의 낙성돈대(樂城墩臺)와 적북돈대(赤北墩臺), 월곶리의 휴암돈대(鵂巖墩臺)와 월곶돈대(月串墩臺), 옥림리의 옥창돈대(玉倉墩臺), 용정리의 망해돈대(望海墩臺)와 제승돈대(制勝墩臺) 등 8곳을 거쳐가는데, 갑곶리 지역의 염주돈대와 갑곶돈대를 합치면 10곳이 된다. "강화도는 5진(鎭), 7보(堡), 8포대(砲臺), 54돈대(墩臺)를 설치해 톱니바퀴처럼 섬 전체를 감싸며 방어했다. ‘진’이란 지방군의 지휘부가 주둔한 진영이고, ‘돈대’는 외적의 침입이 예상되는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에 흙이나 돌로 쌓은 크고 작은 방어시설물을 말한다. 그 돈대를 지휘하는 곳이 ‘진’과 ‘보’였다. 명칭에 따라 주둔하는 군사의 숫자가 다른데 ‘진’은 지금으로 치면 대대급의 병력이, ‘보’는 중대병력이 머물렀던 곳이고 ‘돈대’는 소대급 병력이 주둔했던 곳이라고 보면 된다."(인천 보물섬에서 놀자)
이 돈대들 중 49곳은 병자호란 후 강화도 해안지역의 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해안선을 따라 축조한 것으로 1679년(숙종 5)에 강화유수 윤이제(尹以濟)가 어영군(御營軍) 2,000여 명과 경기·충청·전라 3도 승군(僧軍) 8,000여 명을 동원하여 쌓았다고 하는데 많은 돈대들이 멸실되었다. 평화의길을 따라가며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쌓은 돈대들을 확인하는 일은 전쟁과 평화의 모순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평화의길 1코스 탐방길에서 만나는 월곶돈대는 해안방비의 요충지로서 현재는 분단 조국의 현장을 구체적으로 살피는 비극이면서도 풍광 조망의 위치와 아름다운 연미정 때문에 더 빛나는 것 같다.
110여 년 전 1906년 봄날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선생은 자신이 살고 있는 강화군 불은면 두운리 두두미마을을 출발하여 시계 반대 방향으로 강화도를 순례하며 256수의 한시를 남겼다. 그는 그때 무엇을 보고 어떻게 읊었을까? 그때와 오늘의 강화 지역은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 평화의길 1코스를 탐방하며 그가 탐방한 강화 지역의 한시를 읽으면 110여 년 전과 오늘의 변화된 모습을 살필 수 있어 흥미롭다. 탐방객은 지금 화남 선생과 반대로 시계 방향으로 강화도 동쪽을 돌아가고 있다.
화남 선생이 현 송해면 숭뢰리 지역을 읊은 칠언절구 2수를 읽어 본다. "어래현 위쪽의 물안개가 드리운 곳은, 삼백 년 이전에 임금 머문 터였네. 뇌곶동 사람들이 아직도 우러러보기에, 지금껏 묵힌 밭을 일굴 생각 못한다네. 御來峴上洛雲垂(어래현상낙운수) 三百年前殿坐基(삼백년전전좌기) 雷串洞人猶仰慕(뇌곶동인유앙모) 至今不敢起耕菜(지금불감기경채) ○뇌곶(雷串)은 돈대 뒤에 있다. 인조 정묘년(1627)에 임금이 행차하였을 때 임금의 가마가 임시로 자리했던 터가 있고, 그 남쪽에 임금이 오신 고개인 어래현(御來峴)이 있다. 주민들이 지금도 전좌기(殿座基)라 부르며 감히 개간하거나 경작하지 못한다. - 뇌곶동(雷串洞)" 화남 선생이 읊은 '뇌곶동(雷串洞)'은 현재 송해면 숭뢰리 우뢰(雨雷)마을, 우뢰촌이다. 평화의길을 따라가며 숭뢰리 금동산 오른쪽 자락의 우뢰촌을 확인한다. '뇌곶(雷串)은 돈대 뒤에 있다'에서 돈대는 숙룡돈대(宿龍墩臺)를 나타내며 그 위치가 가늠된다.
"숙룡교 아래쪽에 우래촌이 있는데, 늘어선 버들가지 낮은 담을 쓸고 있네. 일찍이 내 형님이 이곳에 살았는데, 봄바람이 살구나무정원에 저절로 돌아오네. 宿龍橋下雨來村(숙룡교하우래촌) 列柳枝枝拂短垣(열류지지불단원) 曾有年兄居此地(증유년형거차지) 春風歸自杏花園(춘풍귀자행화원) ○우래촌(雨來村)은 작은 지명이다. 진주(晉州) 유씨(柳氏)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유인근(柳仁根)은 나와 연방(蓮榜)을 함께 하였기에 형이라 부른다. - 숭릉동(崇陵洞)" '숭릉동(崇陵洞)'시를 읽어 보면, 숭뢰리 지역은 버드나무와 살구나무가 많았으며, 진주 유씨들의 집성촌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도 봄날 이런 풍경을 보여줄까? 현재에도 이곳에는 진주 유씨들이 많이 살고 있을까?
송해면 숭뢰리를 지나 강화읍 대산리로 넘어간다. 대산저수지는 숭뢰저수지라고도 불리는데, 저수지 북쪽 대부분이 숭뢰리 지역이며, 남쪽 일부가 대산리 지역에 속한다. 대산저수지 남동쪽에 낙성돈대(樂城墩臺)가 있었는데, 저수지 제방을 쌓으면서 멸실되었고, 그 서쪽에 숭릉천이 흐르며 낙성동(樂城洞)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화남 선생의 칠언절구를 읽어본다. "신성동 입구에 권농가가 들리는데, 머리에 황관 쓰고 도롱이를 등에 졌네. 금년 양식 풍족하다 서로들 말을 하고, 지난 겨울 그물뜨기로 돈도 많이 벌었다네. 神城洞口聽農歌(신성동구청농가) 頭着黃冠背着袋(두착황관배착대) 相語今年根道足(상어금년근도족) 前冬結網受錢多(전동결망수전다) ○낙성동(樂城洞)은 옛날에는 신성동(神城洞)이라고도 했다. 낙성돈(樂城墩) 낙성포(樂城浦)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물을 짜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 - 낙성동(樂城洞)" 낙성동은 강화읍 대산리 납성개 옆 마을을 이르며, 납성개를 한자로 표기하여 신성포(申城浦)라 하였는데, 신성포(神城浦)를 낙성포(樂城浦)로도 불렀다고 한다. 숭릉천 낙성교를 건너며 왜 다리 이름을 낙성교라 이르는지는 화남 선생을 통하여 분명히 알게 된다. 이 시를 통해 보면, 현재 대산저수지 위쪽까지 바닷물이 들어와서 포구를 형성하였고, 낙성포구 사람들은 그물을 짜는 일을 생업으로 삼아 돈을 많이 벌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시장곶(矢場串) 배수갑문(대산배수갑문)이 있는 곳에 제방이 축조되어 숭릉천은 현재의 대산산저수지 옆 낙성포라고도 불리는 옛 납성개(申城浦)를 지나서 시장곶배수갑문을 통과하여 바다로 유입된다. 고려산과 봉천산에서 흘러내리는 숭릉천의 지난날 하구(河口) 모습과 포구 풍경이 어느 정도 그려진다.
강화읍 대산리 숭릉천 낙성교를 건넌다. 시장곶(矢場串) 배수갑문(대산배수갑문) 위쪽 시장곶(矢場串)에 있는, 돌모루돈대라고도 불리는 적북돈대(赤北墩臺)를 어림하며 돌모루마을을 지난다. 돌이 많다고 하여 돌모루라고 이르는 마을에서는 땅콩과 강화순무를 수확하는 농부들이 보이며, 그 서쪽에는 대산리 드넓은 들녘이 펼쳐져 있다. 그런데 돌모루마을에는 야영장인 듯한 조립식 건물들이 즐비한데, 야영장을 표시하는 안내판은 없다. 다른 용도의 건물일까? 돌모루마을 해안북로 빈터에 검은콩을 말리는 모습이 정답다. 가을 햇볕이 콩맛을 더 깊게 맛들이리라.
돌모루고개를 넘어서 월곶리 지역으로 넘어왔다. 월곶리(月串里)를 강화 지역에서는 예전에 쓰듯이 평상적으로 월곳리라 적고 있고, 갑곶리(甲串里)도 갑곳리라 적는데, 공식적으로는 월곶리, 갑곶리로 표기하고 있다. 정상적 표준어로 통일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지역 주민들은 어떤 생각일까? 월곳 공설자연장지 입구를 거쳐 월곳삼거리 버스정류장을 지나 시장곡마을로 돌아가는 길가에 독립지사 송암 유경근 선생(1877∼1956) 묘소가 있다. 묘소 앞에 유경근 선생의 생애를 기술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작성자는 손자 유부열씨다. 그런데 유부열(78세)씨가 2019년 10월 <독립지사 송암 유경근 선생 일대기>를 발간했음을 알았다. 손자 유부열씨는 독립지사 송암 선생의 업적을,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 독립운동,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건군운동이라고 요약하는데, 그 업적이 조상의 빛나는 업적이면서 조국의 참다운 사랑의 길이기를 바란다.
해안에 넓은 활터(射場)가 있어서 사장골이라고도 이르는 시장곡(矢場谷)마을 구릉에 있는 사장골돈대, 시장곡돈대라고도 불리는 휴암돈대(鵂巖墩臺)를 어림한다. 멸실되었으며, 민통선 안쪽이라 그 흔적을 찾아가기도 어렵다고 한다. 적두마을(월곶교회) 버스정류장을 지나면 헤어졌던 조강(祖江)과 재회하게 되고, 철책 너머에 반가운 유도(留島)가 보인다. 유도는 한강 하구의 섬으로, 위쪽은 한강, 왼쪽은 조강(祖江), 오른쪽은 염하(鹽河)이다. 한강과 조강과 염하강의 꼭지점을 이루는 섬이다. 이제 민통선 바깥쪽의 월곶돈대 연미정이 가깝다. 해안북로를 따라 서쪽 구릉 아래에 자리한 강화읍 월곳리 적두마을, 수곡마을(숫골, 숫굴마을)을 살피며 연미정 민통초소를 나간다. 그 남동쪽 언덕에 월곶돈대(月串墩臺)가 있으며 그 안에 연미정(燕尾亭)이 있다. 월곶돈대 연미정으로 오르는 아래에 '장무공황형장군택지비(莊武公黃衡將軍宅址碑)'와 황형택지(黃衡宅址) 설명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월곶진(月串鎭) 조해루(朝海樓) 위쪽이며 월곶돈대(月串墩臺) 아래쪽에 황형 장군의 옛 집이 있었다고 한다.
화남 선생은 황형 장군 집터를 찾아서 이렇게 읊었다. "연미정 앞에는 둥근 달이 기울어 가는데, 황공의 옛집이 규모 있게 서있네. 기이한 대숲과 수천 그루 솔숲은, 그 당시 덕 배풀던 터인 줄을 알려주네. 鷲尾亭前鎭月移(취미정전진월이) 黃公舊屋別成規(황공구옥별성규) 一苞奇竹千松樹(일포기죽천송수) 認是當年種德基(인시당년종덕기) ○성종과 중종 때 창원 황씨 판서 지촌(芝村) 황형(黃衡)은 무로써 관직에 나아가 여러 번 전공을 세워서 관직이 공조판서에까지 올랐으며 일찍이 강화도로 물러나 거주하면서 월곶(月串)의 연미정(燕尾亭) 아래에다가 집을 짓고 종을 시켜 나무를 심었는데 수천 그루에 이르렀다. 어떤 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많이 심느냐?"라고 말을 하자 지촌은 "후에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임진년(1592) 난리 때에 첨병과 의병이 강도에 들어와 지켰는데 배와 목책들이 모두 마련되어서 모자람이 없게 되자 사람들은 비로소 그의 멀리 보는 식견에 탄복하였다. ○월곶에 진(鎭)을 설치한 후에는 옛 집터를 진(鎭)의 관아로 삼았다. 지금 이미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새 집처럼 견고하였다. 서로 전하기를 "바꾸려고 하면 재앙이 들었다. 섬돌 아래에는 대나무 숲이 있었는데 지촌이 직접 심은 것이다. 마도(馬島)에서 군대를 돌릴 때 옮긴 것이다."라고 한다. 공은 휘가 형(衡)이며 시호가 장무(莊武)이다. - 월곶동(月串洞)" 화남 선생 당시에는 대숲과 솔숲이 무성하였고, 황형 장군의 옛집이 규모있게 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푸른 잔디밭으로 조성되어 있다.
월곶진(月串鎭)은 조해루 문루 밖 해안 쪽으로 성벽을 두르고 있고, 월곶돈대는 해안 언덕에 성벽이 조성되어 있으며, 그 안에 연미정(燕尾亭)이 조성되어 있다. 이들이 언제 축조되었을까? 연미정이 고려 고종 강화천도기에, 월곶돈대가 조선 숙종 때, 월곶진이 그 이후에 조성되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연미정은 유도 섬에서 조강과 염하강으로 흐르는 물길 모양이 제비꼬리(燕尾)와 같다고 하여 정자의 이름을 연미정(燕尾亭)이라 하였다고 한다. 월곶돈대에서는 파주시, 북녘 땅, 김포반도, 유도섬, 강화도와 물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아름다운 풍경이 왜 슬픈 아름다움이 되는가. 임진강은 한강에 합수하고, 한강은 유도에서 서쪽은 조강으로 흐르고, 남쪽은 염하강으로 흘러간다. 군사분계선은 임진강을 따라와 한강으로 이어지고 다시 조강을 따라 흘러간다. 아픔이 보이지 않는 개성 송악산으로 날아간다. 동쪽에는 김포반도 문수산이 우뚝하게 솟아 있다.
연미정은 언덕의 단아한 정자다. 정자 좌우에 520년 수령이 넘은 느티나무 2그루가 있었는데, 북쪽의 느티나무가 2019년 태풍 링링에 의해 줄기가 부러져 현재는 남쪽 느티나무 한 그루만이 외로이 연미정을 지킨다. 그런데 부러진 느티나무 줄기 밑동에서 새싹이 돋아 자라나고 있다. 고목에서 새 가지들이 솟아 푸른 잎들을 가을날에 펄럭이는 모습은 철책 너머로 날아가는 새 꽁지 끝에 피어나는 무지개처럼 보인다. 조강과 유도섬 위 한강 그리고 임진강의 가운데를 가르는 군사분계선을 지우는 무지개는 꿈꾸는 자의 것이다. 지금까지 견고하고 강력하게만 보였던 철책을 새 꽁지의 무지개가 걷어버릴 것만 같다.
화남 선생은 연미정에서 조강과 염하강 두 강물 사이에 삼남 지방의 조운선 천 척의 배들이 떠다니던 옛날을 상상한다. 화남 선생 당시에 조운이 폐지되어 조운선 풍경이 사라진 것을 아쉬워한다. "연미정 높이 섰네 두 강물 사이에, 삼남지방 조운 길이 난간 앞에 통했었네. 떠다니던 천 척의 배는 지금은 어디 있나. 생각건대 우리나라 순후한 풍속이었는데. 鴦尾亭高二水中(앙미정고이수중) 三南漕路檻前通(삼남조로함전통) 浮浮千帆今何在(부부천범금하재) 想是我朝淳古風(상시아조순고풍) ○'연미성 조운선의 돛대'는 강화부 10경(景)의 하나이다. 삼남 지방의 조운선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모두 이 정자 앞을 경유하면 이것이 큰 볼거리였다. 지금도 정자가 여전히 있지만 조운선은 폐지되었다. - 연미조범(鳶尾漕帆)"
해안북로를 따라 강화도 동쪽 해안을 남진한다. 해안북로는 동쪽으로 염하강과 김포반도를, 서쪽으로 강화읍 드넓은 들녘과 마을을 두고 그 사이로 이어진다. 김포반도는 강화해협 염하강 동쪽에서 한남정맥 문수산을 솟구치고 그 산줄기는 북쪽 유도 앞 바다로 빠져든다. 월곶리 들녘 서쪽에 자리한 강화일반산업단지를 살피며, 황무산, 학무산, 봉재산, 고려산 등을 가늠한다. 강화도에서는 강화 최고봉 마니산이 으뜸인 줄 알았는데, 강화 북쪽과 동쪽에서 보건대 고려산과 별립산, 봉천산이 이 지역의 중심을 이루는 산봉 같다. 월곶리에서 옥림로로 넘어오면 동쪽 염하강에 제방이 축조되어 옥개방죽이라 불리며 용정리까지 이어지고, 해안북로 서쪽에는 수량이 많은 수로가 옥림와 용정리 방향으로 흘러간다. 옥개방죽에는 견고한 철책과 초소들이 설치되어 있고, 철새들은 철책을 넘어 염하강을 북쪽으로 따라 오른다. 염하강을 사이에 두고 김포반도와 강화도는 마주하는데 강화 지역 이 해안을 옥포라고 부르는 것 같다.
옥포해안 해안북로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할미산 자락에 자리하는 옥림리 옥감마을이 환하게 보인다. 옥감마을이 평화롭다. 마을 오른쪽에 옥창돈대(玉倉墩臺)가 있다고 한다. 화남 선생은 옥포동을 이렇게 노래한다. "자문촌엔 사람들이 한가로이 사노니, 속세 벗은 전원에서 산수에 기대 사네. 백발에 푸른 옷 입은 황복 진사는, 나이 들어 시를 잘 지어 강화에서 유명했네. 紫紋村裡卜居閑(자문촌리복거한) 物外田園倚水山(물외전원의수산) 白髮青衫黃上舍(백발청삼황상사) 暮年詞賦動江關(모년사부동강관) ○자문리(紫紋里)는 옥포동(玉浦洞)의 작은 지명이다. 방촌(尨村) 황희(黃喜)의 후손 황복(黃馥)은 예문에 정밀해서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 옥포동(玉浦洞)" 자문리(紫紋里)는 현 강화읍 옥림리의 도감골을 이른다고 한다. 옥포동 도감골이 환하게 빛나는 것은 아마도 글읽는 주민들 때문일 것이다.
옥림리와 용정리의 경계를 이루는 수로다리를 지나 용정리로 넘어간다. 멀리 서쪽으로는 강화읍 시가지가 보이고, 강화읍 바깥 서쪽에서는 고려산과 혈구산이 에워싸고, 강화읍 안쪽 남과 북에서는 남산과 북산이 강화읍내를 보듬는다. 강화도 노른자, 고려궁지와 강화 내성이 있는 지역이 어림된다. 갑룡길 갈림목을 지난다. 호두산 서쪽에 강화읍 용정리 용정마을이 있고, 호두산 동북쪽 자락 범위리(범허리) 마을에 망해돈대(望海墩臺)가 있다. 화남 선생은 이 지역을 이렇게 읊었다. "범위리 마을에는 안씨들이 사는데, 감나무와 뽕나무가 집주위에 늘어섰네. 날 저물면 노인은 호미 놓고 앉아서, 부지런히 공부하라고 아이들을 훈계하네. 範圍里內是安居(범위리내시안거) 枾葉桑枝左右廬(시엽상지좌우려) 老翁當晚投鋤坐(노옹당만투서좌) 戒兒勤讀古人書(계아근독고인서) ○범위리(範圍里)는 옥포동(玉浦洞)의 작은 지명이다. 강진(康津) 안씨(安氏)들이 이곳에 많이 살고 있다." 범위리(範圍里)는 고려말 간의대부(諫議大夫) 범세동(范世東)이 나라의 운명이 다한 것을 보고 이곳에 와 후진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낸 곳이라 하여 범은리라 하였는데, 와전되어 범우리라 부르며, 호두촌(虎頭村)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해안북로는 앞쪽에 두 쪽으로 절개된 고갯길로 이어진다. 이 산은 부새산으로 구릉에 제승돈대(制勝墩臺)가 있는데, 해안북로를 개통하기 위해 부새산을 절개한 것처럼 보인다. 부새산 고개 앞에서 옥개방죽은 끝나고 수로의 물은 염하강으로 유입된다. 염하강 너머에 김포반도의 한남정맥 산줄기가 뚜렷이 보인다. 평화의길은 강화도 갑곶리를 거쳐 강화해협 염하강을 옛 강화대교로 건너서 김포반도 문수산성 아래 남문으로 가야 한다.
3.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6.5km
전체 소요 시간 : 4시간 7분
해안북로의 자전거도로를 따라 강화읍 7km, 월곶리 3km 지점의 송해면 숭뢰리 도로표지판을 지나간다. 중앙 뒤에 김포시 월곶면 문수산이 보이는데, DMZ 평화의 길 1코스 종점은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 문수산성 남문 아래이다.
도로표지판과 수문을 지나 송해면 숭뢰리 우뢰촌마을을 가늠한다. 그 왼쪽 뒤의 산은 금봉산인 듯하며, 왼쪽의 마을은 금굴마을인 듯. 오른쪽 산자락에 숭릉돈대(崇陵墩臺)라고도 불리는 숙룡돈대(宿龍墩臺)가 있었다. 숭뢰리는 숭릉(崇陵)의 숭(崇)자와 우뢰(雨雷)라는 마을의 뢰(雷)자를 따서 숭뢰리(崇雷里)라 부르며, 고려시대 숭릉(崇陵)이라는 아기능이 있었는데 도굴되었다고 한다.
오른쪽은 송해면 우뢰리 금굴마을인 듯하며, 그 왼쪽에 대산저수지 제방이 길게 이어진다. 중앙 오른쪽에 고려산이 솟아 있고, 그 왼쪽 혈구산을 가늠한다. 숭뢰리 들녘에는 하얀 곤포사일리지들이 군데군데 모여 있다.
송해면 숭뢰리에서 강화읍 대산리로 넘어간다. 이 지역은 북산 밑에 길게 장방형으로 이루어져 있어 대산리(大山里)라 칭한다고 한다. 바로 앞에는 공용기지국 무선설비가 있으며, 중앙 맨 뒤에 문수산이 보인다.
대산리(大山里)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리(里)이다. 마을이 평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으로 숭뢰저수지(대산저수지)가 있다. 자연마을로는 넘말, 돈대납성개, 돌모루, 벌말, 소산이가 있다. 넘말은 마을이 소산이 서쪽, 등성이 너머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돈대납성개는 납성개의 아래에 있는 마을로 낙성돈대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돌모루는 마을에 돌이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벌말은 마을 앞에 큰 벌판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소산이는 대산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송학골 위쪽이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특산물로는 호박고구마, 강화순무, 화문석이 있다. - 두산백과
강화읍 대산리 지역으로 넘어와서 걸어온 송해면 숭뢰리 지역을 돌아본다. 왼쪽 금동산 자락에 우뢰촌마을이 자리한다.
강화읍 대산리 들녘 오른쪽에 대산저수지 제방이 보이며 그 왼쪽에는 숭릉천 수로가 이어진다. 왼쪽의 돈대납성개 마을은 납성개의 아래에 있는 마을로 낙성돈대(樂城墩臺)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낙성돈대는 대산저수지(숭뢰저수지) 제방을 쌓으면서 사라졌고, 이 일대를 낙성동(樂城洞)이라 일렀는데, 이전에는 신성동(神城洞)이라 일렀다고 한다.
해안북로 자전거도로를 따라 평화의길 이정목을 지나간다. 왼쪽에 시장곶(矢場串), 중앙의 구릉 뒤에 문수산이 살짝 보인다.
강화읍 대산리 들녘 뒤쪽에 숭릉천 둑방이 이어지고, 오른쪽 위는 송해면 숭뢰리 들녘이다. 중앙에 보이는 마을이 대산리 돈대납성개마을, 그 오른쪽 대산저수지에 낙성돈대, 맨 오른쪽에 숭뢰리 금굴마을을 어림한다. 뒤에 고려산과 혈구산(왼쪽)이 솟아 있다.
해안북로 자전거도로가 도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바뀌었다. 왼쪽에 바다로 돌출한 시장곶(矢場串)에 돌모루돈대라고도 불리는 적북돈대(赤北墩臺)가 있으며 앞에는 숭릉천이 흐른다.
해안북로를 따라 숭릉천의 낙성교를 건넌다. 숭릉천은 왼쪽의 배수갑문을 통해 조강(祖江)으로 유입한다.
숭릉천 오른쪽 뒤에 대산저수지(숭뢰저수지)가 보이며 그 뒤 숭뢰리 금동산과 금굴마을이 보인다. 이 일대를 낙성동(樂城洞)이라 이르는 듯. 맨 오른쪽에 혈구산과 그 오른쪽에 고려산, 중앙 맨 뒤에 교동도의 화개산, 오른쪽 맨 뒤에 별립산이 솟아 있다.
숭릉천(崇陵川)은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하점면 부근리 고려산에서 발원하여 강화읍 대산리 시장곶 돈대 옆의 대산배수갑문을 통해 염하로 유입하는 하천이다. 『강도지』에 '오리천(五里川)'이라 표기되어 있으며 "근원은 고려산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흘러 하포(蝦浦)로 들어간다. 시인 권필(權韠)의 옛 무덤이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오류천 하구를 하포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지지자료』에 오류천(五流川)이라는 한자 표기와 함께 '오리내'라는 우리말 지명이 확인된다. 주요 지류로는 부근리 고려산에서 발원한 부근천과 송해면 하도리 고려산에서 발원하는 오류상천, 그리고 송해면 하도리의 짐작천이 있다. 하천 하구의 대산배수갑문은 1957년에 완공된 것이다. 유역 내에 지방문화제 31호인 강화 대산리 지석묘와 향토유적 20호인 석주 권필 유허비가 소재한다. -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숭릉천이 시장곶(矢場串) 배수갑문을 통해 서해 바다 조강(祖江)으로 흘러들며, 시장곶에는 적북돈대가 있다.
다리 이름이 낙성교가 된 것은 이곳의 지명 낙성동(樂城洞)에서 왔을 것이다.
해안북로 낙성교 남쪽에 평화누리길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평화전망대 6.75km, 강화대교 6.60km 지점이다. 해안북로 오른쪽에 해물류 음식점 '대성수산'이 보인다.
구릉 아래쪽 지역은 돌이 많다 하여 돌모루라고 이르는 마을이다. 평화의길은 돌모루고개를 넘어 월곳리로 내려간다.
해안북로 서쪽 돌모루에 조립식 주택들이 즐비하다. 오른쪽 뒤에 송해면 숭뢰리 금동산과 대산저수지가 가늠된다.
돌머루 버스정류장 길가에 검은콩을 말리고 있다. 돌모(머)루고개를 넘어 강화읍 대산리에서 월곳리로 내려간다.
돌모루고개에서 뒤돌아서 숭릉천 낙성교를 건너 따라온 해안북로를 돌아본다.
돌모루고개를 넘어 월곳리로 내려오면 월곳 공설자연장지 입구가 나온다. 중앙 뒤에 김포시 월곶면 문수산이 솟아 있다.
월곳 공설자연장지 입구의 평화누리길 이정목에 강화대교 6.16km 지점을 알리며 이곳을 대산리라고 잘못 적어 놓았다.
돌모루고개는 강화읍 대산리와 월곳리를 경계한다. 고갯길 오른쪽에 월곳 공설자연장지 입구가 보인다.
해안북로에서 서남쪽을 바라본다. 앞쪽은 월곳리, 뒤쪽은 대산리 지역이며, 맨 뒤 중앙에 고려산, 그 왼쪽에 혈구산이 보인다.
해안북로 월곳삼거리 버스정류장을 지난다. 오른쪽에 해안북로567번길이 있다.
월곳삼거리 버스정류장을 돌아가면 왼쪽에 독립지사 유경근 묘소가 있다. 오른쪽 뒤에 김포의 문수산이 보인다.
무덤 앞에 유경근 선생 묘비, 그 왼쪽에 장남 유정식 선생과 며느리 전종임 여사의 나무와 나무비, 왼쪽 앞에 유경근 선생 생애안내판이 있다. 유경근 선생의 손자 유부열씨의 기사를 옮겨온다.
중부일보. 2024년 9월 29일 이영관 시민기자 = ‘독립지사 송암 유경근 선생(1877∼1956) 일대기’의 저자 유부열(78세)씨는 선생의 손자이자 전직 고등학교 교장이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70세에 집필을 시작해 4년 만에 책이 나왔다. 그런데 이게 완성이 아니다. 책 발간 후에도 새로운 사실(事實)을 5가지나 발견했다. 지금도 일대기 작업은 진행 중인 것이다. 저자를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 자택에서 만났다. 일대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동기부터 물었다. 이 작업을 손자 세대에서 하지 않으면 선생의 애국운동이 묻혀버릴 것 같아서라고 한다. 또 선생의 일생을 기록으로 남겨서 후손들이 본받게 하려는 의지도 작용했다. 대한제국기 전후부터 한일 강제병탄, 광복 전후, 6.25 전후까지 선생의 교육 구국운동과 독립운동, 건군운동 등 선생의 위대한 애국정신과 활동을 널리 알리고 기리기 위함이라고 담담히 말한다. 저자는 이 책을 펴낸 큰 뜻이 있다. 첫째, 선생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 사실을 밝혀 독립운동 관련 국가기관이나 연구기관에 자료를 제공하고 둘째, 독자에게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심어주기 위함이라고 밝힌다.
저자는 퇴임 후 지난 2009년부터 2018년 말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자료를 조사하고 수집하는데 집중했다. 그는 이미 알려진 내용의 근거자료나 새로 조사 수집한 자료에 멈추지 않고 궁금한 것을 조사 수집하기를 반복했다. 국내는 물론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블라디보스토크 옛 신한촌까지 방문했고 관계자들을 면담했다. 독립운동을 한 후손들도 만났다. 그가 일대기 집필 시 가장 유의했던 점은 사실에 근거하여 기술한다는 것이다. 한 점의 꾸밈이나 과장, 그리고 오류도 없이, 있는 그대로 투영되어 글을 쓴 나 자신은 물론, 할아버님께 한 점 부끄럼없는 기록으로 남겨지기를 기도하면서 글을 썼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10월 27일 조부님의 탄신일에 <독립지사 송암 유경근 선생 일대기>를 발간, 헌정했다.
독립지사 송암 선생의 업적을 요약 정리하면 첫째,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 둘째, 독립운동, 셋째,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건군운동이다. 그는 앞으로 독립운동 자료 발굴에 계속 정진할 것이며 순국선열의 독립정신 선양 활동을 전개하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일을 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후손들이나 국민들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목숨을 바쳐 독립운동을 펼친 선열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역사는 역동적인 생명체라고 한다. 역사에 얽매이는 민족 또한 미래가 없다. 대한민국 전 국민이 자유통일에 동참하자고 역설한다.
손자 유부열씨가 2023년 4월 23일 독립지사 유경근 선생의 생애를 기록한 안내판 내용을 읽어 본다.
선생은 1877년 10월 27일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월호부락에서 유한련(진무천총 유치현의 아들)과 밀양 변씨(죽산부사 변종하의 3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년시절 이미 신사조에 눈을 뜬 진무천총을 지낸 조부 유치현으로부터 한학, 양명학은 물론 신학문을 배웠다. 1885, 6년. 배재학당에서 신학을 수학, 이승만 등을 만남. 감리교에 입문하여 정동교회, 상동교회를 다니며 최병헌, 현순, 손정도, 전덕기, 이필주, 이상재, 강매, 민강 등과 교유하였다. 1900년 김마리아 여사(김해 김씨 복경의 장녀)와 결혼하였다. 1903년 광창학교를 설립한 후. 1904년 월곳교회를 설립·헌납하였다. 의형제 이동휘와 육영학교(보창학교의 전신)를 공동설립하고, 교명을 월호보창학교(1905), 광명학교(1909)로 개명하면서 기호흥학회 강화군지회 회원으로, 영정포보창학교 등의 겸임 교장으로, 1913년까지 교육구국운동, 주민계몽을 통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 대한자강회원, 1907년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 1912년 3월 26일 배재학당 동창인 이승만의 미국 망명 때 인천항에서 승선을 주선하였다. 1913년말 서울 관철동 256번지 조선여관에 독립운동아지트(이하 조선여관아지트)를 구축하고, 1914년부터 이동휘의 나자구사관학교 등에 독립군지원자를 모집·밀송하는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강화·김포지역 독립운동동지를 규합하였고, 1916년부터 금광업을 시작하였다. 1919년 2월초 밀입국한 신한청년당 선우혁으로부터 국내(서울) 교통연락책을 맡은 후, 3.1운동 준비과정에 깊이 참여하여, 3.1운동 강화·김포지역 책임자가 되었다. 1919년 3월초 조선여관아지트에서 규합한 독립운동동지들을 강화남부지역(조종환, 황도문)과 강화북부지역(문종석, 오영섭, 손진수, 윤인혁), 김포지역(정인섭)의 주모자로 밀파하고, 월호보창학교 제자 박길양, 유용갑, 최성창 그리고 지역의 인적네트워크를 총동원하여 강화 3.18독립만세운동과 김포 3.23오라니장터독립만세운동을 성공적으로 주도하였다. 3월 29일 월곳리 월호부락 상산(강화읍 월곳리 305번지)에서 월호보창학교 제자, 월곳교회 교인과 주민 등 100여명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하였다. 4월 11일 상해임정 출범과 동시에 임정·국내(서울) 교통연락책을 맡았고, 4월 하순 조선민족 대동단(이하 대동단)의 군인단총대가 되었으며, 5월초 상해임정 군무총장 이동휘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인근 독립군양성소에 지원자를 보내달라는 연락을 밀파된 김진상으로부터 받고, 조선여관아지트에서 조종환, 윤종석, 손진수 등과 함께 국내에서 지원자를 모집하여 파송하던 중 7월 21일 밀정(조규상)의 밀고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9월 상해임정은 대동단과 연계하여 제2독립선언을 추진하면서, 안동교통사무국장 선우혁이 찾아온 사람을 만나라는 밀서를 선생에게 조선여관아지트로 보내왔고, 상해임정 특파원 명제세, 이종욱이 선생을 찾아왔다. 이때 선생의 심복 윤종석이 선생의 투옥 사실을 알렸다.
1920년 6월초 고문 후유증으로 병보석을 얻은 후, 거처를 청진동 43번지로 옮기고, 8월 24일 미국의원단의 국내입국 환영식에서 일제 고위관리 폭살과 주요기관 폭파 임무를 받고 8월 중순 서울에 잠입한 광복군총영 서울결사대장 김영철 일행의 폭탄, 권총, 실탄 등 무기를 자신의 거처에 숨겨, 거점을 제공하였으며, 11월엔 제자이며 독립운동동지인 박길양 등과 군자금을 모금, 북로군정서(연성대장 이범석)에 보내는 등 국내(서울) 교통연락책으로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광복후 이범석은 선생을 여러 차례 초청하여 예우함) 1921년 5월초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신한촌에서 독립군군관학교를 운영하던 중, 1922년 3월초 일제에 다시 체포되어 청진항으로 압송, 함흥형무소에서 약식재판을 받은 후 강릉형무소, 춘천형무소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1924년 10월초 3년 만기 출옥하였으며, 10월 24일 강화합일학교(교감 최상현)에 일백원을 의연하여, 항일교육에 힘을 보탰다. 1925년 8월 국외 독립기지건설자금 모금차 상해임정에서 밀입국한 김창숙에게 이득년을 통하여 상당액을 의연하였다.(임정은 이때 모금액을 1926년 12월 나석주 의거 지원에 사용함) 1928년 일제의 월곳교회 감시, 강압으로 강화읍교회에서 예배 지원이 중단되었고, 1934년 7월 헌납했던 월곳교회를 기독교조선감리회유지 재단이 매각할 때, 이를 다시 구입하였다. 1935년 신사참배를 거부하였고, 2월 중순 강화에서 이동휘 추도식 준비를 주관하였으며, 3월 1일 강화에 중등학교 설치를 위한 간담회 좌장으로 준비위원장을, 이듬해 3월 21일 기성회 공동부회장을 맡았다.(일제는 1945년 4월 1일에야 강화공립농업학교(4년제 4학급) 설립을 인가함) 1940년 2월 창씨개명을 거부하였고, 12월 18일 강화합일학교(교장 오영섭)에 의연하였다. 1945년 10월 19일, 미국에서 환국한 이승만의 초청을 받아 조선호텔 풀에서 33년 만에 만났고, 11월 10일 대한무관학교(초대 교장 김구) 설립을 추진한 대한군인회 고문으로 추대되었으며, 1946년 11월 20일 강화에 온 김구를 강화읍(지금의 대명헌)에서 만났다. 1951년 1월 강화보민회장으로 한국전쟁 중 주민보호에 힘썼고, 주민과 함께 강화를 지켰다. 1956년 1월 16일 오후 향년 79세로 서세, 영면하시다.(강화읍 월곶리 산16-1 선영) 1965년 2월 24일 오전 김마리아 여사 향년 82세로 서세 영면하시다.(선생의 묘 좌측) 1990년 정부에서 선생에게 독립유공자(애국지사) 애족장을 추서하다. 선생과 김마리아 여사를 평생 모셨던 장남 유정식은 1971년 7월 16일 별세하였고(향년 62세), 맏며느리 전종임 여사는 2005년 8월 29일 별세하였다.(항년 93세)
독립지사 유경근 묘를 살핀 뒤 해안북로로 나와서 보도를 따라간다. 오른쪽 뒤에 김포시 문수산이 우뚝하다.
독립지사 유경근 묘에서 나와 해안북로를 따라 월곳리 지역을 걸어왔다. 맨 뒤 별립산과 그 오른쪽 앞 봉천산이 가늠된다.
해안북로를 따라 강화읍 월곳리 사장골이라고도 불리는 시장곡(矢場谷)마을을 지난다.
해안북로 540호 민가의 텃밭이 곱게 잘 정리되어 있다. 이곳을 시장곡(矢場谷)이라 이르는 듯. 사장(射場)이 있었다 하여 사장골로도 부른다고 한다. 이 구릉에 휴암돈대(鵂巖墩臺)가 있었으며, 휴암돈대는 사장골돈대, 시장곡돈대라고도 한다. 구릉 뒤쪽에는 조강(祖江)이 흐른다.
해안북로를 따라 시장곡(矢場谷. 射場사장골)을 지나오면 적두마을(월곶교회) 버스정류장이 나온다. 적두는 이 지역에서는 적디라고도하는데, 적두마을은 더 아래 오른쪽에 있다. 왼쪽에 해안이 펼쳐지고 중앙 뒤에 문수산이 솟아 있다.
적두마을 버스정류장 옆에 평화의길 이정목이 세워져 있으며, 그 오른쪽에 조강 해안의 넓은 터로 나가는 입구가 있다. 왼쪽 구릉에 휴암돈대가 있었을 것이며, 해안에 넓은 활터(射場)가 있어서 사장골, 시장곡(矢場谷)이라 이르는 듯.
월곳리 적두 해안 철책 너머에 유도(留島)가 보인다. 유도 위쪽은 한강, 왼쪽은 조강(祖江), 오른쪽은 염하(鹽河)이다.
강화읍 월곳리 적두마을 앞을 지나 수곡마을 앞 해안북로를 따라 월곶돈대 연미정으로 이어간다. 수곡마을은 숫골, 숫굴마을로도 불리며 오른쪽 연미정길36번길은 수곡(숫골, 숫굴)마을로 이어진다.
해안북로를 따라, 오른쪽 뒤 구릉의 휴암돈대 아래 사장골마을, 왼쪽 뒤 적두마을을 지나 수곡(숫골)마을 입구로 왔다.
강화읍 월곳리 적두마을이 중앙 뒤에, 수곡(숫골)마을이 왼쪽 뒤에, 마을에는 펜션들과 와인양조장 연미정와이너리가 있다.
해안북로를 따라 앞에 보이는 연미정 민통초소로 이어간다. 민통초소 뒤 월곶돈대(月串墩臺) 안에 연미정(燕尾亭)이 있다.
연미정 민통초소 옆 전시장에 대장군포와 철신포 등 화포모형물이 조성되어 있다.
1.대장군포(大將軍砲) : 조선 전기부터 사용한 유통식 화포로써 수철(水鐵)로 주조한 것이며, 총길이 124.5cm, 통신(筒身) 길이 105.5cm, 포구 지름 11.5cm로서 통신에는 포구변대(砲口邊帶)를 제외하고 죽절(竹節)은 모두 7조가 시조(施條)되어 있다. 다른 화포와 다른 점은 그 간격이 넓고 모가 났으며 또 깊은 것이 특징이다. 약실(藥室)은 제7절에서 외반(外反)하여 굵어지다가 계선(界線)을 이루면서 다시 좁혀지고 포미(砲尾) 쪽에서는 또 외반하면서 마무리 지어진다. 손잡이는 포구쪽으로부터 제2절과 약실쪽 제1절에 각각 원형 쇠고리를 달았고, 포이(砲耳)로 죽절 좌우에 동시 주조한 형태이다. 선혈(線穴)은 역실 중앙 가장 굵은 계선 바로 뒤쪽에 직선으로 뚫었다. 이 대장군포는 최무선(崔茂宣)이 화약국을 설치하고 최초로 창제한 화포 가운데 하나이나 당시에 사용한 포라고 단정할 수 없고, 다만 명칭상으로는 동일한 화포이다. 그 규모로는 중화기에 속하며, 특수한 구조를 가진 화포이기 때문에 국방과학기술문화재로 연구할 가치가 있는 유물이다.
2.철신포(鐵信砲) : 조선시대 때 사용하던 철로 만든 신호용 화포로써 일반적으로 봉화대에서 연기를 이용하여 긴급시에 신호를 하였는데, 날씨가 흐리거나 비올 때에는 주로 신포(信砲)를 이용하였다. 신포는 최무선(崔茂宣)이 화통도감에서 제조한 각종 화기(火器) 중에도 들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말부터 사용되었으며, 방포(放砲)실험에 대한 기록은 1425년(세종 7) 11월에 처음 보이며, 1428년(세종 10)에 전국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철신포라는 명칭은 1442년(세품 24)에 처음 보이며, 성능은 약 8km 밖까지 소리가 들리는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존하는 것은 없다. 《국조오례서례》의 병기도설에 기록된 세종 때 철신포의 크기와 구조는 다음과 같다. 구조는 약통(藥筒), 격목통(激木筒), 취(嘴), 부이(附耳)로 구성되어 있다. 약통은 화약을 넣는 곳으로 이곳에 점화선을 끼우는 구멍이 있으며, 한번 발사에 사용된 화약의 양은 13냥이었다. 격목통은 약통 속의 화약이 폭발할 때 폭발가스가 새지 않도록 막아주는 구실을 하는 격목을 박는 곳으로 약통과 취 사이에 있다. 취에는 아무 것도 넣지 않으며, 부이는 손잡이로서 철신포를 움직일 때나 화약을 정진할 때 사용하였다. 크기는 전체길이가 1척3촌3리(39.94㎝)이며 무게는 70근4냥이었다. 총구의 내경은 3촌2분3리(9.9cm)였다. 《국조오례서례》의 설명과 그림을 이용하여 1979년 채연석(蔡連錫)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연미정 민통초소 옆 화포모형물 전시장과 연미정 공중화장실을 거쳐 월곶돈대 입구로 이어간다.
연미정 민통초소를 지나 화포모형물 전시장, 쉼터와 공중화장실을 거쳐왔다.
연미정 버스정류장을 지나 문화관광해설 안내소 옆에서 월곶돈대로 올라간다.
문화관광해설 안내소 옆길을 따라 월곶돈대로 올라간다.
문화관광해설 안내소 옆으로 올라오면 황형택지 아래에 '강화의 숨겨진 사진명소 연미정 사진이야기'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한강물 천리를 돌아 바다의 품으로~ : 고려시대 세워진 이 정자는 돈대 앞 물길이 제비꼬리 같다 하여 연미정이라 이름 붙여졌다. 사진은 강 건너 북한이 지척에 보이는 월곶돈대의 성곽 안이다. 500년 넘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웅장한 자태로 감싸고 있는 연미정은 곡선을 그리며 날렵하게 올라간 처마의 선, 사방으로 탁 트인 정자의 모습과 성벽 같은 돈대가 둘레를 치고 있어 아늑하고 풍광이 수려하다. 정자에 올라 바라본 고요한 아침 풍경과 해지는 석양은 가히 숨을 멈추게 한다. 귀한 사람과 연회를 나누는 마음으로 촬영에 임한다면 멋진 사진뿐 아니라 귀한 시간과 공간을 누려보는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사진촬영 : 국세선사진영상센터)
월곶돈대 아래에 장무공황형장군택지비(莊武公黃衡將軍宅址碑)와 황형택지(黃衡宅址) 설명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며, 위쪽 월곶돈대 출입구 앞에 '왕은 사랑한다 포토존', '연미조범' 게시판, '링링에 쓰러진 500년 느티나무' 안내판 등이 세워져 있다.
조선 중기 무신이었던 황형(黃衡, 1459~1520)의 옛 집터이다. 선생의 자는 언평, 시호는 장무이며 본관은 창원으로 성종 11년(1480년) 무과 및 진현시에 급제하고 1486년 무과 중시에 장원급제하였다. 이후 혜산진 첨절제사, 훈련도정, 의주 목사, 회령 부사, 함경도,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중종 5년(1510년) 삼포왜란 시 전라좌도 방어사로 제포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중종 7년(1512년) 함경도 지방에서 야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고 평안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왕이 그의 공을 찬양하며 연미정을 하사하여 이곳 월곳리에서 만년을 보냈다 한다. 택지는 월곶진을 설치한 뒤 관아로 사용하였다. - 황형택지(黃衡宅址) 설명안내판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선생의 칠언절구 '燕尾漕帆(연미조범)' 게시판이 월곶돈대 출입구 앞에 있다.
燕尾亭高二水中 三南漕路檻前通 浮浮千帆今何在 想是我朝淳古風 연미정 높이 섰네 두 강물 사이에./ 삼남지방 조운 길이 난간 앞에 통했었네./ 떠다니던 천 척의 배는 지금은 어디 있나./ 생각건대 우리나라 순후한 풍속이었는데.
고려 충렬왕~충선왕 시대를 배경으로 아름다우면서 슬픈 우정과 사랑을 그린 40부작 드라마 '왕은 사랑한다'는 2017.7.17~9.19까지 MBC월화특별기획으로 방영되었는데 드라마 일부를 연미정에서 촬영하였다고 한다.
연미정 좌우에 500년 수령의 느티나무 2그루가 있었는데, 2019년 9월 태풍 링링에 의해 북쪽의 느티나무가 쓰러졌다.
월곶돈대(月串墩臺) 출입구 앞에 월곶돈대 설명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월곶진에 속한 월곶돈대는 남으로는 염하와 연결되고, 북으로는 조강을 통하여 서해로 진출할 수 있다. 또한 과거 서울, 인천, 연백 등지로 교통할 수 있는 월곶나루가 있던 해상로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월곶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 강화유수 윤이제가 정비한 돈대로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규모는 동서 폭 47m, 남북 폭 38m이다. 서쪽 하단부에는 월곶진의 문루인 조해루를 복원하였다.
연미정 북쪽의 느티나무는 쓰러져 있고, 남쪽의 느티나무는 늠름하다. 그 앞에 보호수와 연미정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보호수 느티나무 현재의 수령은 540년 이상이 되었다. ●지정번호 : 4-9-58 ●나무나이 : 520년 이상 ●나무높이 : 25m 이상 ●나무둘레 : 4.7m ●수종 : 느티나무 ●지정일자 : 2000. 11. 27. ●소재지 : 강화읍 월곳리 242 ●관리자 : 강화읍장
연미정에서 동북쪽을 바라보면 한강, 유도(留島), 강화해협(염하), 조강(祖江)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방으로 탁 트인 연미정은 강화 8경에 꼽힐 만큼 남다른 절경을 자랑하며 달밤의 경치가 특히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옛날에는 서해에서 서울로 향하던 배가 모두 연미정 아래에 닻을 내렸다가 조류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전해지며 정묘호란 때는 인조가 후금과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연미정 앞바다는 남한의 한강과 북한의 임진강이 하나 되어 서해로 흐르는 만남의 장이자 사방이 탁 트인 시원한 풍경으로 지척의 고향을 그리워만 할 수밖에 없는 실향민의 아픔을 달래주는 곳이기도 하다. 정자에서 우측으로 바라보이는 섬 유도는 재미있고 훈훈한 일화를 품고 있다. 1996년 홍수 때 북한의 소 한 마리가 유도로 떠내려 왔는데 비무장지대라 남북 모두 손을 쓸 수 없었다. 그러나 나날이 야위어가는 소를 보다 못한 남북이 극적으로 합의하여 우리 군이 구출하였고 '평화의 소'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후 '평화의 소는 제주도 출신의 '통일염원의 소'와 부부의 연을 맺고 평화롭게 살았다고 한다. 지금 남북의 주민들은 연미정 앞바다를 사이에 두고 바라만 보는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남과 북에서 시작된 두 개의 강은 연미정 앞을 유유히 돌아 흘러 큰 바다로 함께 나아간다. 남북의 두 강물이 하나 되는 모습을 바라보는 연미정에서 미래의 남북 주민들도 평화와 번영의 바다로 함께 나아가기를 꿈꾸어 본다.
연미정 옆에 고공신장무공황형택(故功臣莊武公黃衡宅) 표석, 연미정(燕尾亭) 안내판과 위치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연미정이 있는 월곶은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서해와 인천으로 흐르는 물길 모양이 제비꼬리(燕尾)와 같다고 하여 정자의 이름을 연미정이라 하였다. 연미정은 강화 10경의 하나로 손꼽힐 정도의 절경으로, 옛날에는 서해로부터 서울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리고 조류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정자의 건립 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고려 고종 31년(1244)에 구재학당(九齋學堂)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 놓고 공부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정묘호란 때 인조가 후금과 굴욕적인 형제 관계의 강화 조약을 맺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 영조 20년(1744)에 중건되었으며, 조선 고종 28년(1891)에 중수한 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 연미정(燕尾亭) 설명안내판
연미정에서 조망하면서 북한 지역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안내도이다.
연미정(燕尾亭)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팔작지붕 겹처마로 10개의 돌기둥 위에 얹은 민도리집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연미정(燕尾亭)은 1995년 3월 2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최초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고려 제23대 왕 고종이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면학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뒤 조선시대 삼포왜란 당시 왜적을 무찌르고 1512년 함경도 지방 야인(野人)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국가에 공로가 많은 황형(黃衡)에게 조정에서 세워 하사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대부분 파손된 것을 1744년(영조 20) 유수(留守) 김시혁이 중건하였고 1891년(고종 28) 조동면(趙東冕)이 중수하였으며 1931년 유군성(劉君星)의 특지(特志)로 보수하는 등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 6·25전쟁 때도 파손되어 전후에 중수하였고, 1976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현재와 같이 복원하였다. 서남쪽 모서리의 기둥은 6·25전쟁 때 포탄에 맞아 세 동강 난 것을 붙여 다시 세운 것이다. - 두산백과
연미정으로 올라와 월곶리 서남쪽을 조망한다. 중앙 뒤에 고려산이 솟아 있다. 달뜨는 모습을 연미정(燕尾亭)에서 보는 것이 매우 아름답다고 하여, 달곶 즉 월곶(月串)이라 부른다고 하며, 왼쪽 느티나무가 있는 곳은 상산 능가사이다.
걸어온 해안북로가 보이며 그 왼쪽에 수곡(숫골)마을과 적두마을, 중앙에 시장곡(矢場谷)마을과 구릉의 휴암돈대(시장곡돈대)를 가늠한다. 건너편은 황해도 개풍군 백마산일 것이라 어림한다.
조강 건너 왼쪽 뒤는 개풍군 해평리 지역과 백마산, 중앙 뒤는 령정리 지역일 것이다. 개성의 송악산이 보이지 않는다.
중앙에 유도(留島), 그 위쪽은 한강, 그 왼쪽은 조강(祖江), 오른쪽은 강화해협(염하)로 이어진다.
유도(留島)는 한강의 하구, 왼쪽은 조강(祖江), 오른쪽은 염하강(鹽河江)으로 불리는 강화해협으로 이어진다.
연미정 앞에는 유도(留島)라는 섬이 있다. 남북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데 이 섬은 뱀으로 유명하다고. 무인도다 보니 철새와 야생동물의 천국인데 특히 뱀이 많기 때문. 1997년 북한에 발생한 홍수로 황소 한 마리가 떠내려왔고 이를 인지한 우리 당국은 군인들을 동원하여 구출하였다. 이 황소를 ‘평화의 소’로 이름을 지었고, 제주도 우도 출신 암컷 소를 ‘통일 염원의 소’로 이름을 지어 결혼시켰다. 그 결과 1998년 11월 ‘평화통일의 소’를 낳았고 그 후로 많은 자손이 번성하여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다고. - 나무위키
염하강(鹽河江)으로도 불리는 강화해협이 이어지고 염하강 건너편 중앙에 문수산이 솟아 있다. 아래는 월호마을이다.
2019년 태풍 링링에 의해 520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부러졌다. 부러진 느티나무 줄기에서 새싹이 돋아 자라난다.
해안북로가 이어지고 왼쪽에 수곡(숫골)마을과 적두마을, 중앙에 시장곡(矢場谷)마을과 구릉 해안의 휴암돈대(시장곡돈대)를 가늠한다. 바로 앞 연미정 민통초소 오른쪽에 화포모형 전시장이 보인다.
왼쪽 느티나무가 있는 곳이 상산 능가사, 월곶리 들녘이 펼쳐지고 중앙 뒤에 고려산이 솟아 있다. 오른쪽 구릉 아래에 고성동(高城洞) 마을이 있다. 고성동(高城洞)은 강화외성을 쌓을 때 이곳을 높이 쌓았다 하여 고성동이라 부른다고 한다.
아래에 황형 택지비, 그 아래 월곶진 조해루, 왼쪽에 염하, 맨 오른쪽 느티나무가 있는 능가사, 중앙에 해안북로가 이어진다.
연미정(燕尾亭)의 구조는 팔작지붕 겹처마로 10개의 기둥을 돌기둥[石柱] 위에 얹은 민도리집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에 면적은 약 40㎡이다. 사방이 바라다보이며, 월곶돈대 꼭대기에 세워져 있어 개풍·파주·김포군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자 옆에는 오래된 느티나무 2그루가 서 있다. 옛날 서해에서 서울로 가는 배는 이 정자 아래에서 만조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강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썰물 때는 물이 빠져 나가는 흐름이 눈에 보일 정도로 물살이 세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한 줄기는 서해로, 또 한 줄기는 강화해협으로 흐르는데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 하여 연미정(燕尾亭)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 두산백과
월곶돈대 안의 연미정과 성곽, 주변 풍경을 조망한 뒤 월곶돈대 바깥으로 나가며 연미정을 다시 바라본다.
황형 택지비 옆으로 내려가며 강화해협 염하(鹽河)와 월곶진 조해루(朝海樓)를 바라본다.
월곶진(月串鎭) 설명안내판 앞에서 월곶진의 문루인 조해루(朝海樓)와 월곶돈대를 돌아본다.
월곶진(月串鎭)은 한강 하구에 위치하여 염하를 통하여 인천 방면을 거쳐 삼남지방으로 왕래할 수 있으며, 중국과도 교통할 수 있는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전쟁 이전만 하더라도 매우 번성한 포구 중의 하나였다. 원래 교동에 있던 진(鎭)을 조선 효종 7년(1656)에 강화유수 홍중보가 이곳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월곶진 주변에는 월곶돈대와 황형택지, 연미정 등의 유적이 있다. 주변에서는 상당량의 기와편과 자기편 등이 발견되고 있다.
월곶진(月串鎭) 조해루(朝海樓) 입구에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2기가 서 있다.
1.월곶진병마첨절제사박태현영세불망비(月串鎭兵馬僉節制使朴兌顯永世不忘碑) : 재임시 폐단을 막고 동민과 월곶진의 하급관리들에게 끼친 은혜를 잊지 않고자 1895(고종32)년 5월에 세운 비석이다.
2.절제사전치준애홀토졸영세불망비 (節制使田致畯愛恤土卒永世不忘碑) : 1861(철종12)년 1월 2일자로 월곶진첨사에 제수되었고,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자 청렴한 정사로 폐단을 고친 공적을 기리고자 1836년 5월에 세운 비석이다.
해안북로를 따라가다가 뒤돌아서 월곶돈대와 조해루(朝海樓)를 바라보았다. 조해루 뒤쪽 월곶진에 있었던 월호마을은, 월곶리 연미정 아래에 있는 마을로 지세가 둥근달과 비슷하고 호수에 면하여 있어 월호(月湖)라 호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수령 600년 느티나무 2그루가 있는 당산터에 자리한 한국불교 태고종 상산능가사는 조해루 맞은편에 있다.
월곶리 들녘 맞은편에 강화일반산업단지가 자리한다. 오른쪽 앞에 황무산, 중앙 맨 뒤에 고려산, 왼쪽에 학무산이 가늠된다.
해안북로 동문로 갈림길을 지나간다. 도로표지판 오른쪽 뒤에 옥림리 봉재산, 전신주 뒤에 월곶리 학무산, 오른쪽 맨 뒤에 고려산이 보이며, 월곶리 들녘 건너편에 강화일반산업단지가 자리하고 있다.
중앙의 동문로가 들녘을 가르며, 평화의길은 해안북로를 따라간다. 오른쪽에 월곶리의 황무산, 중앙 맨 뒤에 고려산, 그 왼쪽 앞에 월곶리의 학무산, 그 왼쪽에 옥림리의 봉재산인 듯. 중앙에 강화일반산업단지가 자리한다.
강화읍 월곶리에서 옥림리로 넘어와 옥개 방죽의 해안북로를 계속 따라간다. 옥림리는 고려시대의 사찰 왕림사(旺林寺)가 있어 왕림동(旺林洞)이라 하였는데 바닷가에 있는 옥포동(玉浦洞)과 합쳐 옥림리(玉林里)가 되었다고 한다.
월곶리-옥림리-용정리로 이어지는 옥포 해안에 축조한 옥포 제방의 옥개 방죽길을 따라간다. 오른쪽에는 수로가 흐르고, 강화해협(염하강) 건너편 김포반도에 한남정맥 문수산이 중앙에 솟아 있다.
옥림리(玉林里) 동쪽으로 염하강이 흐르고 제방 안쪽에 수로가 조성되어 있으며, 들녘 안쪽 할미산 아래에 옥림리 옥감마을이 자리한다. 오른쪽 산자락에 옥창돈대가 있었다. "할미산은 옥개 뒤에 있는 산으로 산의 형태가 학의 꼬리 모양과 비슷하여 학미산(鶴尾山)이라 하였는데, 와전되어 할미산으로 부른다고 전하며, 일설은 할미등처럼 생긴 산이라 할미산이라 칭한다고 한다. 수신(水神)을 모시는 당을 할미당이라 했으므로 옛날 수신제를 지내던 곳으로 추정된다." - 인천광역시사
옥창돈대(玉倉墩臺)는 월곶진 소속 돈대이다. 방형이고 둘레가 200m이다. 이 돈대는 민가 후원에서 돈대의 하단부만 확인되었다. 약 45m 길이에 3단 높이의 석벽이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기단석에서 30cm 퇴물림하여 수직바른 층쌓기로 축조하였다. 이 돈대는 경지 확장으로 인하여 멸실된 듯하다. 이 돈대 역시 망해돈과 마찬가지로 외성 내부 수로 측면에 축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옥창돈대(옥림리 115번지)는 강화도 수비체계의 중요한 방어시설로 외적의 해안 상륙을 저지하고 수도 방위의 전초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선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돈대이며 돈대 및 주변환경을 훼손하면 법적 책임을 진다는 강화군의 설명이 표지판에 기록되어 있다. 주변의 사유지 개발로 그 흔적이 많이 훼손되었지만 상층부 돈대터 및 기단의 구조 등은 지키고 보호해야 할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 강화돈대
외기러기떼가 옥개 방죽의 철책을 넘어 염하강 하늘을 날아 유도(留島) 섬으로 날아간다.
앞쪽의 수로다리를 경계로 옥림리와 용정리가 나뉘는 듯. 중앙 뒤 호두산 오른쪽 마을은 용구물마을인 듯. "용구물마을은 호두산 서쪽에 있는 마을로 용이 승천한 우물이 있어 용구물이라 부른다. 일설에는 마을 산이 용의 궁처럼 생겼다 해서 용궁물이었으나 와전되어 용구물로 칭하게 되었다 한다." - 인천광역시사
옥림리에서 용정리로 수로가 길게 이어지며, 이 수로다리를 경계로 옥림리와 용정리가 나뉘고, 뒤쪽은 강화읍내인 듯.
해안북로를 따라 왔다. 수로가 옥림리 들녘 동쪽으로 길게 이어지며 수로에서 낚시질을 즐기는 강태공들이 있다.
해안북로를 따라 강화읍 옥림리에서 강화읍 용정리로 넘어간다. 옥개 방죽에는 철책이 이어진다. 강화읍 용정리는 옛날에 용(龍)이 승천한 우물이 있다고 하여 용정리(龍井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수로 뒤에 용정리 들녘이 드넓게 펼쳐지고 뒤쪽은 강화읍내 지역이다. 오른쪽에 북산, 그 왼쪽 뒤에 고려산, 중앙 앞쪽에 남산, 그 오른쪽 맨 뒤에 혈구산을 가늠한다.
용정리 수로 뒤의 산은 호두산이며, 그 아래 마을은 범허리(범우리)마을인 듯.
강화평화전망대 11.3km, 문수산성 남문 4.3km 지점이다. 옥개 방죽은 계속 이어지고 오른쪽에 수문이 있다.
평화의길은 해안북로를 계속 따라간다. 갑룡길은 갑곶리와 용정리를 잇는 길이며 갑룡이라는 지명이 있는 듯.
옥개수로가 해안북로 서쪽에 흐르고 그 뒤에 용정리 들녘이 펼쳐지며 뒤쪽에는 강화읍내가 자리한다. 왼쪽 앞에 북산, 그 왼쪽 뒤에 고려산이 보인다. 맨 왼쪽 호두산 자락에 범허리(범우리)마을 버스정류장이 있다.
호두산 오른쪽 강화읍 용정리 243번지에 망해돈대(望海墩臺)가 있었다고 하는데, 찾기가 어렵다고 한다.
제물진(濟物鎭) 소속 망해돈대는 평면 원형이고 둘레가 110m이다. 이 돈대는 윤이제가 강화 유수로 있을 때 축성했다. 이 돈대의 면석은 제승돈대와 마찬가지로 옥포 제방 축조에 이용되어 돈대지에서는 면석을 찾을 수가 없고 단지 마을 주변에서 50×57cm 크기의 면석 1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돈대는 외성과 연결되어 있지 않고 성 내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수로 측면에 설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수로를 통하여 침입하는 외적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강화돈대
해안북로를 따라 왼쪽의 부새산 고개로 이어간다. 부새산에는 제승돈대(制勝墩臺)가 있었다.
옥개 방죽 뒤에 염하강이 흐르고 건너편은 김포반도이며 한남정맥의 문수산 산줄기가 한강 하구 유도섬으로 떨어진다.
앞의 산은 부새산이며, 부새산을 절단하여 해안북로를 개통한 듯. 도로 왼쪽 산봉에 제승돈대(制勝墩臺)가 있다고 한다.
강화읍 용정리 1-4 제승돈대(制勝墩臺)는 제물진(濟物鎭) 소속 돈대이며, 윤이제가 강화유수로 있을 때 축성되었다. 이 돈대는 염하의 수면과는 5~7m 밖에 차이가 나지 않으며, 돈대 내부는 방형이지만 전체 평면은 원형으로 추정된다. 이 돈대는 일제강점기 초까지 돈대의 면석이 완연하였다. 옥포 제방이 수해를 입어 붕괴되었을 때에 제승돈대, 망해돈대의 면석을 배로 운반하여 제방 축조에 이용했기 때문에 면석을 찾기가 쉽지 않다. 단지 땅에 묻혀 있는 면석 몇 개만이 보일 뿐이다. - 강화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