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둘째 단원(6-10) 다른 복음은 없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7).
본 단원에는 모두 여섯 절 속에, “다른 복음”이라는 말이 네 번(6, 7, 8, 9)이나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본 단원의 중심점은, “다른 복음은 없다”는 데 있습니다.
①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6상) 합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어떤 사람들이 바울이 복음의 씨를 뿌린 갈라디아 지방에 내려와, “다른 복음”의 씨를 뿌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성도들이
이를 받아드린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고 있는 바울의 심정은 참담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자신이 직접 복음을 전하여 세운 교회가 이토록
복음을 속히 떠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6하) 합니다.
② 바울은 저들의 주장을, “다른 복음”이라고 규정합니다. 어떤 점이 다른가? ㉠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이
아니라 거기에다가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첨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이점에서 주의를 환기하게 되는 것은, 그들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오늘의 표현대로 하면 그들은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주장이 어째서
틀린 것인가? 이를 2장 이하에서 논박하고 있습니다만, 이를 한마디로 요약(要約)하고 있는
것이, ㉡ “그리스도의 은혜를 떠났다”(6)는 말씀인 것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은혜란 받을 공로나 자격이 없는 무가치한 자들에게 값없이 거저 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은,
“행해야 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행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저들은, “은혜를, 은혜 되지
못하게”(참고, 롬 11:6) 만들었던
것입니다.
③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은혜란 무엇인가? 이를 4절에서 요약해서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4), ㉠ 즉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죽어주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를 믿음으로 받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전적인 “그리스도의 은혜”에 무엇인가 첨부시키려 한다면 이는, ㉡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7) 하는 “다른 복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십자가+할례=복음>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행해주신 대속에다가 인간이 할례를 보태야 구원이 온전해진다면, 그리스도의 은혜에만 돌려야할 전적인 “영광”의 일부를 자신들의 공로로 돌리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④ 사도 바울이,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8) 하고 격앙되고 분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 “다른 복음”이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복음을 불완전하고 불충분한 것으로 여겨서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을 “헛된 것”(2:21)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 또한 “다른 복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를
자랑하려는”(6:13) 교만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형제들도, “육체로 자랑”하려는 유혹 때문에,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게” 되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볼 수 없는 “믿음”보다는 볼 수 있는 “증거”(할례)를 몸에
지니기를 원하는 심리가 미혹에 빠지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⑤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8-9) 합니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숨돌릴 겨를도 주지 않고 거듭 퍼붓고 있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이같이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취급을 받게
될 것인가? 너무나 편협하고 독선적이고 교회의 일치를 해하는 자로 따돌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점을 예의(銳意)
관찰해보아야만 합니다. 먼저 바울은, ㉠ “어떤 사람들”을 저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러하기는커녕,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8상) 하고,
“우리”, 즉 자신을 제일 먼저 꼽고 있습니다. ㉡ 다음으로,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하고 그의 출신이나 신분을 불문하고, ㉢ 맨
마지막으로, “만일 누구든지”(9중) 하고
일반적(一般的)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누구든지”라는 말씀은 오늘의 설교자들도 예외일 수는 없다는 말씀이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분개는
사사로운 감정의 발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와 감격, 복음에 대한 열정, 영혼 사랑에서 우러나온 의분이었던 것입니다. 로마서 9:3절을
보십시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하고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도 원하는 바로라 고 말씀하고 있는 바울이 사감(私感)에 의한
저주를 했겠습니까?
복음을 보수하려는 열정
① 그러므로 바울의 의분은 반감을 일으키게 되기는커녕 우리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현대교회의 치명적인 병폐 중 하나가 사탄에 대한 적개심의 상실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적개심은커녕 마귀라는 말을 하면 듣기 싫어하고 비웃고 조롱합니다.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악령(惡靈)을 부인하게 되면 종래는 성령(聖靈)도 부정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뱀)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창 3:15)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도, “심령에 통분이 여기셨다”(요 11:33)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아테네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행 17:16) 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적개심이 있습니까? 비진리를 전파하는 자에 대한 의분이 있습니까? 분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결국 사랑의 열정도 없다는 증거입니다.
② 복음에는 여러 길이 있다던가, 다른 복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유일(唯一)한 것이라는
점, ㉠ 이는 신약시대에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신구약을 통틀어서도 다른 복음, 다른 길은 없다는 점을 깨닫는다는 것은 중요한 요점이 됩니다.
바울은,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정하실것을성경이미리알고먼저아브라함에게 <복음을전했다>”(3:8)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놀랍게도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라”(창 22:18) 하고
세워주신 메시아언약을 의미합니다.
㉡ 그러므로 모세도 유훈(遺訓)하기를,
“유월절 제사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각 성에서 드리지 말고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예루살렘)에서 네가
애굽에서 나오던 시각 곧 초저녁 해질 때에 드리라”(신 16:5-6)고 명했던
것입니다. 이는 구원의 근거(根據)가 오직,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을 당하신”(고전 5:7) 갈보리
십자가에만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③ 하나님이 계시하여 주신 복음을 변개하려는 시도는 구약시대에도 있었음을 주목해야만 합니다. 유다 왕 아하스때에 하나님이 정해주신 번제단의 식양을 이방 앗수르의 우상 제단의 식양대로 바꾼 것과, 물두멍의 위치를 제자리에서 옮긴(왕하 16:10-18) 것이 그 한 예입니다.
복음을 변개하려는 시도
① 그렇다면 다른 복음을 전한, “어떤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들이란 말인가? 이점을 살펴보아야 함은 현대교회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어떤 사람들”은 없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경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 두 방면이 있습니다. 먼저 부정적인 면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고후 11: 13-15)이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들”이란, “의의 일군으로 가장한 사단의 일군”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부정적인 면입니다.
② 그런데 이에 못지 않게 경각심을 가져야할 점은 긍정적인 면입니다. 바울은 안디옥에서 있었던 일(2:11-14)을
진술합니다. ㉠ “야고보(예루살렘 교회 초대
감독)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는” 일이 있었다고 전해줍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교제를 하지 않은 척
어찌하여 물러갔는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어떤 이들이 무할례자들과 교제함을 불법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행 15:1) 하고
주장하는 할례당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들의 잘못을 교정해주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도리어 이들을 “두려워하여 물러갔다”는 것은,
베드로가 말로는 “다른 복음”을 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행동으로는,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한”(2:14)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바울의 동역자인, ㉡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다”(2:13)고 말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모든 자 앞에서” 면책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을 몽땅 “사단의 일군”이라 말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긍정적인 면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이 우리에게, “다른 복음”에 대한 심각성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어떤
사람들이 누구일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③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느냐 하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어떤 사람들”로 인하여 예루살렘 교회가 공의회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여 “많은 변론”(행 15:5-6)이 있었다고
사도행전은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 성령께서는 일치 가결하여 여러 이방인 교회에 편지하기를,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미혹하게 한다 하기로”(행 15:24), 이렇게
결정하도록 역사해 주셨던 것입니다. ㉡ 이상의 정황으로 볼 때 갈라디아 교회에 와서 다른 복음을 전한 “어떤 사람들”이란 밖에서 들어온
불신자들이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에서 내려온,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란 베드로가
“두려워하여 물러갈” 정도로 대단한 비중이 있는 사람들로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갈라디아 성도들이 바울이 전하여준 복음을
속히 떠나 그들이 전해주는 다른 복음(6)을 좇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느냐 하면, 어느 시대나 복음을 변하려는 사람들은 교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나바같은 신실한 사람들까지 유혹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누구인가?
① 그렇다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예루살렘 교회의 어떤 사람들이 어찌하여 다른 복음을 전하게 되었을까? 하는 물음을 갖게 합니다. 이에 대한 답을 고린도 후서 3:12-18절에서 구할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모세가 수건을 얼굴에 씀으로 발하는 광채를 가리웠던 이 사실을 들어서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고후 4:4)를 보지 못하는 자들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하고 말씀합니다. 구약시대에도 복음은 있었습니다. 다만 의문(儀文)이라는 수건에 가리워 있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실체가 오심으로,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골 1:26) 밝히 나타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 “오늘까지도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하고 탄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중에, “오늘까지” 마음의 수건이 벗어지지 않고 있는 어떤 자는 없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만일 구약성경에서 교훈이나 축복은 보면서도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수건이 벗어지지 않았다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증거입니다.
②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란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 “형제인가? 아닌가?”, 하는 물음을 갖게 합니다.
㉠ 이들은 자신들을 신령한 자로 자처했을지라도 바울이 지적한 바,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 한,
“육신에 속한 자”로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증거합니다. ㉡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7
-18).
③ 이들이야말로,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들”(히 5:12)인 어린 아이들인 것입니다. 이제 분명한 것은 이들은, ㉠ “가르침을 받아야 할 자들”이지 가르칠 수 있는 “교사”는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의 공회원들 중에 이러한 육신에 속한 자, 즉 영적으로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이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바울이 선교한 각 지방에 내려와서, “다른 복음”을 가르쳤다는데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에, 총회에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원인이 이와 같은 육신에 속한 자들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④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0)고
말씀합니다. ㉠ 여기에 거짓 교사들(거짓선지자)과 참 종의
특성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사람들에게 영합하여 듣기에 좋은 말만하고 그리하여 사람들을 기쁘게 해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혹하게
되고 인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누가 너희를 꾀더냐”(3:1) 하고 이것이 미혹임을
말씀합니다. ㉡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6) 하고
경계하셨던 것입니다.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렘 5:30-31).
⑤ 그렇다면 현대교회를 향해서도 두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첫째는, ㉠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는 “어떤
사람들”은 없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 대하여 분개하고 있는가 대답해야만 합니다. 그 “어떤 사람들”이 교계에 인기 있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둘째는, ㉡ 이 시대에 “다른 복음”은 없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점을 갈라디아서에 의하여 계속적으로 검증해
보게 될 것입니다만, 초대교회 당시에 이처럼, “어떤 사람과, 다른 복음”이 위협적이었다면 그로부터 2000년이나 지난 현대교회 내에는, “어떤
사람과, 다른 복음”이 더욱 만연되고 있을 것이라는 경각심을 갖게 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
다원주의” 사상을 들 수가 있습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교회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자들이 이를 주장합니다. 그리고 신학생들은
이에 분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옹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려해야할 만한 사실은 현대교회의 주도적(主導的)인 관심이,
“복음 진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성장”에 있다는 점입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설사,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다하여도
바울처럼 분개하여 복음을 변명하려는 사람을 찾아보기란 쉽지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꿩 잡는 것이 매라는 성장위주의 사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 교회가 몇 명이 모이느냐? 어떤 설교, 무슨 프로그램으로 단 기간에 그토록 많은 꿩을 잡을 수가 있었는가 하고 그
비법을 전수 받기 위해서 그를 추종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갈라디아서는 현대교회를 향해서도,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8-9) 말씀하고 있음을 명심해야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