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1:13 -29
1절부터 12절까지 말씀을 통해서 골로새 교인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인사와 이들이 에바브라를 통해 복음을 알게 되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감사하는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죄사함을 받았다’는 14절 말씀에 이어 그 ‘죄 사함을 주신 이’가 누구인지, 그 분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5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우리에게 죄사함을 주신 이,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으면 인간은 볼 수 없습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을 예수님을 통해서 볼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지 몰라봤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조차 예수님이 부활하기 전까지 몰라봤습니다. 아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분이 주님이신지를 몰라봤습니다. 그런데 다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만나자마자 한 눈에 알아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입니다. 요한복음 1:29절입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지금 이 만남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첫 번째 만남입니다. 어떻게 남들은 직접 보고도 알지 못했던 주님을 세례 요한은 본 즉시 알아볼 수 있었겠습니까? 그 이유를 세례 요한이 직접 밝혀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3~34절입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자신이 눈으로 보고 안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성령께서 알려주셨기 때문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성령께서 알려주지 않았기에 몰라본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누차에 걸쳐 제자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문제는 제자들이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요한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주님을 버리고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하지 않겠습니까? 성령께서 알려 주셨는데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기에 몰라보는 건 아니겠습니까?
마태복음 5장 8절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내가 지금 하나님을 볼 수 없었다면, 그것은 내 마음이 욕심과 정욕으로 더럽혀져서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 내 삶을 온전히 의탁함으로 세상의 욕심과 정욕으로 더럽혀지지 않은, 즉 청결한 마음을 간직할 때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욕망으로 가득한 사람의 눈에는 그 욕심이 투영된 우상만을 볼 뿐, 절대로 하나님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의 헛된 욕심과 정욕을 제거해야 합니다. 어떻게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16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만물’에 대한 설명이 16절 하반절에 나옵니다.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이 모든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이 모든 만물 속에는 나 자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창조된 존재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 정체성에 대해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설교와 능력에 감화받은 숱한 사람들이 그를 ‘그리스도’라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1:20)‘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요1:27)‘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처럼 고백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나는 그 분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동일한 고백을 하고 있지만, 동일한 삶을 살지는 않습니다. 고백만 하고 삶으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정체성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과 나의 차이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는 정체성을 지니고 사느냐 아니냐에 달렸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확고부동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 안에 세상의 헛된 욕심과 정욕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제거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입술의 고백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삶의 실천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말과 삶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창조된 존재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자가 될 수 있습니다.
20절,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하목하게 되기를.. 본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은 화평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인간만 화평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다스림 아래 있는 땅의 것, 하늘의 것도 화평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쏟으신 그 피로 말미암아 만물이 화평을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실로 실낙원의 회복이며, 에덴동산으로의 복귀입니다.
십자가의 목적은 화평이고 화목입니다. 내 삶의 자리가 아직도 화평과 화목이 아니라면, 십자가의 은혜가 내 삶의 자리까지 내려오지 못한 것입니다. 입술의 고백만으로 그쳐있다면, 삶의 실천으로 승화되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내 안에 세상의 헛된 욕심과 정욕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은 아닙니까? 그로인해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예수님이 내 곁에 계심을 알아차리지 못한체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28~29절,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목적이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이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 인간에게 완전이란 어울리지 않는 단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이 복음을 전파하는 목적이라고 밝힙니다. 그런데 완전한 자로 세우는 주체가 사도 바울이 아니라, 사도 바울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 즉 성령이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이 하는 일에 완전은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하시는 일은 완전합니다. 바로 그 분이 완전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길 원하시는 성령님께 우리의 삶을 의탁하십시다. 그래서 십자가의 화평과 화목이 내 삶의 자리에서 아름답게 결실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일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현실이 될 것입니다.
기도
사랑의 주님, 사순절 넷째 주간을 보내며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세상의 욕심과 정욕을 제거하길 원합니다. 욕심과 정욕으로 인해 화평과 화목이 내 삶의 자리에서 결실되지 않고 있다면, 과감히 결단하여 삶으로 실천으로 나아가게 해 주옵소서. 결단하고 나아갈 때, 성령께서 역사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