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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先生 遺躅地 尋訪記
記錄 李東耈
日程 : 2008.8.15(金)~16(土)
參與 : 李載根(下溪), 李昌純(溫惠). 李東耈(宜仁). 李敬熙(下溪).
經由地 : 安東→ 驪州 英陵(세종)→ 寧陵(효종)→ 보배네 집(오찬 : 두부+만두+열무국수+소주)→ 龍仁 鄭夢周 墓域→ 忠烈書院(主享 : 정몽주)→ 深谷書院(主享 : 조광조, 미훼철)→ 화성시 제부도(조개구이+소주)→ 龍仁 新葛(만찬 : 삼겹살구이+밥+소주, 노래방)→ 샹글리아 모텔(숙박)→ 敬熙自宅(조찬 : 골뱅이국 백반)→ 坡州 紫雲書院(主享 : 李珥)→ 坡山書院(主享 :成守沈)→ 오두산통일전망대→서울 송파 (오찬 : 쇠고기 버섯전골백반+소주)→ 歸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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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보름 焚香을 마치고 집에 오니 TV에는 온통 북경올림픽(29회,8.8.~8.24.)에서 금메달을 딴 수영과 유도선수를 극찬하느라 정신이 없다. 아직 가시지 않은 더위는 집에 그냥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 敬熙에게 전화하여 8시 반까지 시청정문에 기다리기를 약속하고 집에서 나섰다. 몇 번이나 가보고 싶었던 여주, 용인, 파주를 가보기 위해서다. 퇴계선조의 詩作 遺躅地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驪州에 神勒寺와 淸心樓, 龍仁에 瀁碧亭, 坡州에 臨津亭이 퇴계선조께서 詩를 남기신 곳이다. 또 용인의 충렬서원과 심곡서원, 파주의 자운서원과 파산서원을 돌아볼 수 있기도 하고, 그곳의 다른 문화유적을 살필 기회가 될 수 있다. 약속대로 시청 앞에서 敬熙와 載根씨를 만나 조금 가다가 昌純씨를 태워 중앙고속도를 타고 북쪽을 향하였다. 비가 오락가락하여 여행에 불편을 없을지 염려가 되나 그래도 이왕 나선 길 계속 달려 여주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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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에 왔으니 英陵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역시 왕능은 다르다. 넓은 묘역에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마침 국경일[光復節]이라 무료관람이라는 안내문이 매표소와 묘역 입구에 붙어 있어서 공짜로 관람을 할 수 있었다.
여주에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合葬陵인 英陵과 조선 제17대 효종대왕과 인선왕후의 寧陵이 불과 5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주말이면 가족 단위의 관람객이 많이 찾는 곳으로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수적으로 踏山하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왕조를 1백년은 더 연장시켰다고 하는 세종대왕의 영능은 回龍顧祖穴로서 王陵 중에서 제일 명당이라고 알려져 있다. 회룡고조혈은 수 백리 혹은 수 십리를 행룡한 주룡이 혈을 결지하고자 할 때는 머리를 돌려 자기가 출발한 祖宗山을 바라보고 입수하는 혈이라고 한다.
세종대왕 능은 본래 서울 강남구 내곡동 대모산 아래에 있는 아버지 태종이 묻힌 獻陵 서쪽에 있었다고 하나, 기록이 없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고 한다. 본래의 세종대왕은 지관의 권유를 받은 신하들이 그곳은 명당이 아니라고 진언했으나 부모님 묘 근처보다 더 좋은 명당이 어디 있겠냐고 하는 遺敎를 내린 대로 소헌왕후와 합장으로 헌릉 서쪽에 모셨다. 풍수가들의 말대로 세종을 그 자리에 모시고 세종의 큰아들 문종은 병으로 즉위 2년만에 승하했고, 문종의 아들 단종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나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비명에 죽었으며, 世宗의 둘째 아들 世祖는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되었으나 얼굴과 몸에 부스럼이 나는 병에 걸려 살이 문드러지는 고통에 시달렸으며,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후에 덕종으로 추증 됨)는 20세에 이유 모를 가위눌림으로 죽음을 당했으며, 둘째 아들 睿宗은 19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1년만에 병으로 죽었다. 영릉으로 옮기기까지 19년 동안 왕이 4명 바뀌었고 옮긴 후 1년까지 합하면 무려 5명이 바뀌는 凶事가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세종대왕 능이 지하에 찬물이 든 冷穴로 시신이 썩지 않고 生屍로 있기 때문에 일어나므로 이장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세조 때 徐居正(1420~1488)이 "遷葬함은 복을 얻기 위한 것인데 지존인 왕이 다시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라며 반대하여 옮기지 못하다가 예종이 즉위하자 신하들 사이에서 더 이상 이대로 둘 수 없다는 여론이 돌기 시작했다. 마침내 예종은 천장을 결심하고 전국에서 뛰어난 지사를 선발하여 세종대왕을 모실 명당을 찾으라고 명하였다. 여주와 이천 쪽으로 답사한 지관의 눈에 발견된 영릉 자리는 원래 廣州李氏인 세조 때 우의정을 지낸 李仁孫(1395~1463)의 묘택 이라는 주장과 韓山李氏로 세조 때 靖難功臣 1등으로 대제학과 영중추원사를 거쳐 漢城府院君에 봉해진 李季甸(1404~1459)의 묘택 이라는 주장이 있다고 한다.
예종실록에는 예종 즉위 원년(1468년) 12월 27일 호조판서 盧思愼 (1427~1498), 예조판서 任元濬(1423~1500), 한성부윤 徐居正 등이 驪興(驪州)에 가서 李季甸의 분묘 자리에 遷葬할 것을 정하자 임금이 鄭麟趾(1396~1478), 鄭昌孫(1402~1487), 申叔舟(1417~1475), 韓明澮(1415~1487), 洪允成(1425~1475) 등과 좌의정과 육조참판 및 승지를 불러놓고 相地官인 安孝禮에게 물어 최종 결정을 하였다고 했다. 李仁孫의 묘는 李季甸 묘의 좌측 청룡 능선에 있었는데 왕릉이 들어서면서 그 일대 십리 이내는 모두 파묘해야 하므로 그 때 옮겼다고 한다. 그러나 광주이씨 문중의 주장은 실록의 기록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 예종이 평안도 관찰사로 있는 李仁孫의 장자 李克培(1422~1495)를 조정으로 불러 세종이 편히 쉬게 할 자리를 내달라고 하자 이를 감히 거절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양보했다는 이야기다.
어떤 것이 사실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전해오는 전설 하나를 소개하면, 이인손의 슬하에는 이른바 五克子孫이라고 불리는 克培, 克堪, 克增, 克墩, 克均의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세상을 뜨자 지관을 초빙하여 영릉 자리에다 장사를 지냈다. 지관은 이 자리를 잡아주면서 아무리 가문이 번창하더라도 祭室이나 祠堂등 일체의 건물을 짓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지관의 당부대로 이 불문율은 지켜졌고 광주이씨 집안은 이인손의 큰아들 이극배가 영의정, 둘째 극감이 형조판서, 셋째 극증이 좌참찬, 넷째 극돈은 좌찬성, 다섯째 극균은 좌의정이 되어 世稱 五君 집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그 후로도 정승, 판서, 고관대작들이 줄줄이 나오는데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가문이 이렇게 번성하자 후손들은 선조의 蔭德 때문인데 제사를 모실 집 하나 없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의견을 모은 다음 묘 아래에다 커다란 제실을 지었다.
한편 세종대왕의 새로운 능 자리를 찾기 위해 선발된 지사들은 漢陽에서 백리 안에 있는 땅을 모조리 찾아보았으나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임금의 능은 원칙적으로 도성에서 1백 리를 넘지 않아야 하는데 이는 임금이 성묘하러 행차하였다가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여주 이천 쪽으로 새로운 陵자리를 찾으러 나온 安孝禮 일행이 산천이 수려하고 강물이 맑은 여주 북성산에 오르게 되었는데 갑자기 소낙비가 내리고 천둥 번개가 치는데, 비를 피하기 위해 달려가다 보니 재실 위에 있는 묘가 빗속에서도 서기가 비추는 것이었다. 걸음을 멈추고 보면 볼수록 천하의 명당이었다. 지관들은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한양으로 돌아와 임금께 여주에 天下大明堂이 있다고 아뢰었다. 곧 어명에 의해서 영릉을 이장할 자리로 결정되었고 그 자리에 있는 묘는 파내게 되었다.
영릉을 조성하기 위해서 땅을 파니 당연히 동방의 성인이 묻히는 곳이라는 뜻의 "當葬東方聖人"이라고 쓰여 있는 표석이 나왔다고 한다. 이것은 권력의 힘을 빌려 남의 묘를 강제로 이장시키고 차지한 것에 대한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지어낸 이야기로 추측된다. 또 하나의 전설은 이장을 위해서 묘를 파자유골 밑에 "이 자리에서 연을 날려 하늘 높이 떠오르거든 연줄을 끊고, 연이 떨어진 자리에다 이장하라"라는 秘記가 나와 그대로 실행하자 연은 약 십리쯤 날아가다 떨어졌다고 한다. 그 자리에다 이장을 했음은 물론이고 지금도 그 마을은 연이 날아가다 떨어진 자리라 하여 연하리라 불리고 있다.
세종대왕을 이 자리로 모신 뒤 임금에 오른 의경세자 둘째 아들 자을산군 成宗은 25년간이나 在位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聖君이 되었으며, 반면에 영릉 자리를 빼앗긴 광주이씨 이인손의 후손들은 새로운 묘 자리가 발복하기 까지 數많은 禍를 당했다고 한다. 이인손의 막내아들 이극균은 좌의정에 오른 뒤 연산군의 폭정을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나중에는 부관참시까지 당했다. 이극균의 아들인 남양 부사 이세준과 이극감의 아들 이세좌는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가지고 갔다는 죄명으로 처형당했으며, 이세좌의 아들 수원, 수형, 수의, 수정 등 4형제는 참수 당했고, 세좌의 동생 이세걸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른바 甲子士禍로 광주이씨 이인손의 후손들은 30여명이 화를 당했다.
광주 이씨 집안은 쑥대밭이 되다시피 했지만 얼마 후 다시 번창하여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李浚慶(1499~1572)을 비롯하여 선조 때 鰲城 李恒福( 1556
~1618)과 문장과 벼슬에서 쌍벽을 이루었던 漢陰 李德馨(1561~1613)이 영의정을 지냈으며, 예조참판 이극기, 이조참판 이중경, 병조판서 이윤우, 판서 이원정, 대사성 이정립 등이 나왔다.
그렇다면 영릉은 과연 얼마만큼의 천하명당인가? 영릉에 들어서면 마음이 푸근해지면서 편안함을 느낀다. 영릉을 감싸고 있는 청룡 백호는 완벽에 가깝도록 혈을 감싸고 있어 保局을 이루었다. 보국 안의 명당은 잔디로 잘 조성되어 있는데 평탄하고 원만하여 혈의 생기가 조금도 흩어지지 않고 和氣로 가득 차있다. 능이 있는 穴場은 肌附鋪氈하여 단단하면서도 크고 후덕하다. 능 뒤 입수도두에서 보는 주룡은 마치 거대한 용이 꿈틀거리며 여의주를 물고 금방이라도 승천할 듯 기세 왕성하여 감탄을 자아낸다. 능 앞으로 전개되는 경치는 장관을 이룬다.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 83-1번지에 위치한 세종대왕의 영릉은 동쪽에 있는 寧陵<제 17대 효종과 인선왕후의 능)과 함께 사적 제 19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면적은 200만 8,536 제곱미터에 이른다. 조선왕릉 최초의 합장릉인 영릉은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玄宮의 석실제도도 灰隔으로 바뀌었다. 이는 예종이 부왕 세조의 광릉을 조영하면서 세조의 유언에 따라 병풍석을 생략하고 석실을 회격으로 바꾼 뒤여서, 영릉을 천장하면서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능침 주위로 12칸의 난간석을 둘러 보호하고 있으며 능침 앞에 혼유석 2개를 놓아 合葬陵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영능입구 좌측에 세종대왕의 치적을 설명하는 전시관이 있고 당시 과학기술을 밝혀주는 발명품의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어 업적을 기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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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대왕의 능은 '寧陵'이다. 세종대왕능인 '英陵' 에서 불과 5백 미터정도의 거리에 또 '寧陵'이 있다. 효종 내외의 무덤이다. 숲길을 지나 오른쪽으로 살짝 접어들며 홍살문을 지난다.
홍살문은 신성한 곳에 붉은 칠을 한 나무로 설치하는데 왕릉 입구에는 이처럼 홍살문을 세우고 뾰족한 화살모양의 살대를 만들어 나라의 위엄과 법도의 곧고 바름을 상징하였다고 안내판에는 소개하고 있는데. 붉은 색은 잡귀를 물리치는 색이고 본래 정확한 명칭은 紅箭門. 여기에서 '箭'은 화살이니 민간에서 앞 글자는 音借를 하고 뒷 글자는 訓借를 해서 '홍살문'이라는 말이 굳어져 버린 것이다.
홍살문을 통하여 丁字閣으로 곧게 이어진 돌길을 지나는데 이 길을 參道라 한다. 참례하러 가는 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참도를 자세히 보면 왼쪽이 약간 넓고 높게 이어져있는데, 이 길은 神道라 하여 돌아가신 先王만이 통행할 수 있으므로 제관은 오른쪽의 낮고 좁은 길을 따라 정자각으로 나아가야 한다.
丁字閣은 하늘에서 보면 '丁'字 모양이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祭禮때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드리던 집이다. 동쪽과 서쪽에 오르는 계단이 있는 것은 東入西出이라 하여 원래 제례절차가 그렇게 진행되도록 설계한 것이다. 우리 민간에서는 봉분 앞의 상석에 제물을 차리고 절을 하는데 왕릉은 여기 정자각에 제수를 차리고 제례를 봉행한다고 한다.
정자각 안에는 크지 않은 제상과 향합과 향로가 놓아져 있는 향상이 봉분을 향해 설치되어 있고, 관람객이 볼 수 있게 진설도를 비치하였으며 정자각 밖에 진설도에 쓰여진 제수들의 명칭을 설명한 안내문이 놓여져 있다.
진설도를 보면 맨 뒤에 술잔이 여섯이고, 다음 줄에 국수 1그릇, 밥 2그릇, 시접 이며, 그 앞줄에 탕 1그릇, 꿀 1종지, 떡 1틀이고, 다음 줄은 구운두부 1접시, 김 1접시, 간장 1종지, 도라지무침 1접시 이며, 다음 줄에 양 끝에 촛대를 놓고 왼쪽에서부터 황율(마른밤), 추자, 비자나무열매, 잣, 대추를 진설하여 棗東栗西의 형식을 취하였으며, 맨 앞줄에 造菓인 유과와 약과를 紅東白西로 진설하고 있다. 내외분의 제상임에도 일반 가정의 묘사보다 매우 간소하고 검소하다고 느꼈다. 이러한 진설도는 세종대왕능의 정자각에도 설치되어 있었다.
정자각 오른편 약간 뒤쪽의 작은 건물은 비각이다. 정자각 뒤로 '岡'이라고 하는 작은 동산 모양의 높직한 오름이 있고 앞뒤를 이어 두 개의 봉분이 보인다. 岡은 언덕이란 뜻이다. '岡'은 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인데 그 의미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풍수상 땅속을 흐르는 생기는 흙을 몸으로 삼기 때문에 생기의 몸, 즉 生氣의 저장탱크 위에 왕릉 봉분이 올라타고 있어야 생기를 가장 많이 받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요, 또 다른 하나는 높고 두드러진 형상으로 일반 무덤과는 다른 절대적 왕권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왼쪽 위에 있는 봉분이 효종의 능이고 아래가 효종의 妃인 인선왕후 능이다. 효종왕릉은 同原上下封이다. 이러한 능의 배치를 두고 풍수에서는 특이한 미학으로 여긴다. 생기 지맥이 길게 뻗어 내리는 언덕의 상하에 각각의 穴이 존재하기 때문에 좌우 쌍릉을 쓰지 않고 위와 아래로 왕과 왕비의 봉분을 매김질한 풍수 걸작이라는 것이다. 위의 효종왕릉은 물론 아래의 인선왕후릉 뒤쪽에도 孕이 불쑥 솟아있고, 두 봉분 사이에는 胎가 연결되고 息이 식별되는 왕릉 풍수의 현장이어서 죽어서도 영혼이 오가는 실증을 하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上封인 孝宗王陵 뒤쪽에는 곡장이 있지만 下封인 王妃陵에 곡장이 없는 것은 왕과 왕비는 부부이기 때문에 한 방을 써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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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살문 밖을 다시 나와 入口 쪽으로 오면 齋室이 있다. 큰 규모는 아니나 건축이 아담하고 짜임새가 있으며 특히 마당의 느티나무와 천연기념물 회양목은 일품이다.
이 회양목은 잎이 두껍고 타원형이며 꽃은 4∼5월에 피고 열매는 6∼7월에 갈색으로 익는 사철 푸른 나무이다. 경북 북부, 충북, 강원도, 황해도 지방의 석회암 지대에 주로 자생한다.
원래 회양목은 작고 낮게 자라는 나무로 이와 같이 재실 내에 크게 자란 나무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생물학적인 가치가 큰 노거수 일 뿐만 아니라 1673년에 조성한 효종대왕 영릉 재실에서 300여년 동안 자라온 나무로서 그 유래 및 역사성이 매우 깊다는 설명이 있고. 2005년 4월 30일 천연기물 제459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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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능 입구의 오른쪽에 생수를 받을 수 있는 시설이 있다. 여러 사람들이 물을 받고 있고 받기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하여 있어 우리일행도 두 왕능을 돌아보느라 갈증도 느껴져 생수를 얻어 마셨다. 물맛이 매우 좋았다. 물이 물맛이지 라고 하겠지만, 우선 깔끔하고 단맛이 나는듯하면서 시원한 느낌이었다. 이제까지 어디의 생수도 이 맛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일행 모두가 같은 느낌이라 하였으니 좋은 물은 틀림이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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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왕능의 관람을 마치고 새벽같이 먹은 아침밥은 시장기를 부르고 있어 이 고장의 특색있는 식단을 찾아간 곳이 보배네 집이다. 이 집에는 직접 빚은 두부와 만두 그리고 국수이다. 이 지방에서는 소문이 남 집이고 손님도 많다고 경희가 소개를 한다. 과연 손님이 많다. 구석에 손님이 금방일어서서 상도 치우지 않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들은 대로 만두와 두부 국수를 주문하여 먹었다. 별 맛은 없었으나 특별한 것은 맞다고 생각되었다.
이 자리에서 이번여행의 경비지출을 위한 회비를 징수하고 지출방침을 결정하였다. 각자 일정금액씩을 모아 숙식은 물론 제반경비를 지출하고 지출한 근거는 기록하지 않기로 하였다. 회계는 여행을 기획한 東耈가 하고, 敬熙는 회비를 부담하지 않고 차량운행과 안내를 책임지기로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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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기를 해결하고 곧장 이 지역의 名刹이도 하지만 퇴계선생의 유촉지이기도 한 신륵사에 갔다.
퇴계선생께서 35세(1535,중종30) 6월 하순에 왜인 호송관으로 차출되어 동래로 가시는 길에 여주 신륵사에 들러 당시 여주목사 李純1)과 훈도 李畬(1503~1542,본관 韓山, 자 有秋, 호 松崖)와 「皇極經世書의 觀物內篇과 周易參同契」의 수련법에 대해 논의2)하시고 그때 감회를 다음과 같이 읊으셨다.
與驪州牧使李公純訓導李畬遊神勒寺
京洛豊塵一夢悠 서울의 풍진이란 한 꿈이 멀었으니
從公聯作靜中遊 애오라지 임을 따라 고요한 곳 노닐과저
江山曉作雙眸畵 강산은 새벽되니 두 눈에 그림이고
樓閣晴生六月秋 개인 빛 누각들은 유월에도 가을이라
問數可能探理屈 수학을 의론하니 이굴을 더듬었고
談仙直欲謝時流 신선을 얘기하다가 시속교제 끊으련다.
歸來穩放輕舟下 조용히 돌아올제 가벼운 배 저어 내려
自喜猶能近白鷗 해오라기 가까이 오니 마음 홀로 기쁘더라.
* 理屈 : 張橫渠(北宋 性理學者)의 著書 「經學理窟」 임, 이치의 근원을 의미 함
<출처 : 退溪學硏究院, 退溪全書1,1993.29p>
이때 위 詩 외에도 尙州의 觀水樓(현 의성군 단밀면 낙정리 낙동강변에 있음, 先生詩 揭板), 星州의 臨風樓(현 없음), 密陽의 嶺南樓(현 밀양시 내일동 밀양강변, 선생시판은 없음)에서도 詩를 지으셨다.
신륵사는 신라 眞平王 때 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 懶翁, 惠勤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하며,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英陵願刹로 삼아 報恩寺라고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신륵사로 부르게 된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 “미륵(혜근을 가리킴)이, 또는 혜근이 신기한 굴레로 龍馬를 막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건너 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 이 때 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순해졌으므로, 神力으로 말을 제압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 때부터 甓寺이라 불려지기도 하였다는데, 이는 경내의 東臺 위에 있는 多層塼塔을 벽돌로 쌓은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가던 날이 백중날이라서 그런지 사찰경내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무슨 행사를 치렀는지 몇몇 스님들이 행사장 뒤처리를 하고 있다. 신륵사는 전국의 사찰 가운데 경치가 좋기로 이름난 곳이다. 경내를 한 바퀴 돌아 九龍樓에 올라 혹시 퇴계선조 詩 편액이 걸렸는지 살펴보았다. 구룡루를 읊은 詩 편액이 몇 점 걸렸으나 퇴계선생의 시는 없었다.
그리고 퇴계선생과 당시 여주목사 등 여러분이 노닐며 토론하신 자리인 듯 한 강변 절벽위에 서있는 江月軒에 나갔다. 강월헌은 6각형의 정자로 남한강변에 가파른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주변 경치가 뛰어나 南漢江의 물줄기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현재 위치는 신륵사에서 입적한 고려 말의 고승 惠勤(1320~1376)의 다비 장소였는데, 그의 門徒들이 정자를 세우고 혜근 생전의 당호인 강월헌이라고 이름 붙였다. 본래의 누각은 혜근의 다비를 기념하여 세운 3층 석탑과 거의 붙어 있었으나 1972년 홍수로 옛 건물이 떠내려가자 1974년 3층 석탑보다 조금 더 아래쪽에 철근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다시 지었다고 한다. 정자 아래 건너편에는 여름을 즐기는 피서객이 형형색색의 물결을 이루며 일렁이고 강에는 황포돛대가 떠서 정취를 더하고 있었다. 넓은 암반위에 앉아 473년 전 퇴계선생과 그 일행이 노니시던 그날을 체험하고자 하였으나 워낙 감정이 없으니 체험이 제대로 되지를 않아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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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또 다른 곳에 퇴계선생의 詩作遺蹟이 있다고 하여 찾아보았다. 선생 47세(1547, 명종2) 9월에 휴가를 마치고 조정의 부름을 받으시어 上京길에 驪州牧에서 하룻밤을 묵으시며 시를 지으셨다는 淸心樓를 찾아보았다.
청심루는 驪州八景의 하나로 청심루 달빛이 유명하였다고 한다. 본래 여주목의 객사 뒤에 있었던 누각으로 주변의 노거수와 남한강의 백사장과 어우러져 빼어난 경관이 었으나 1946년에 燒失되었다고 한다. 지난 2004년 10월부터 향토사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복원을 추진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복원이 되지 않고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선생께서 지으신 시는 다음과 같다.
宿淸心樓 秋赴
沙彌撞鐘一山暮 사미승이 치는 종소리에 온 산 어둠이 깃드는데
江域鼓角迎歸櫓 강가 성곽의 북과 호각소리 돌아오는 배를 맞네.
望中燭影橵如星 바라보이는 등불그림자 별과 같이 흩어지고
淸心樓高啓窓戶 청심루 높은데 창문은 열려 있네.
使君置酒慰客愁 고을원님 술을 차려 나그네 시름 위로하는데
笛聲憤怨霜氣秋 피리소리 원망 품은 듯 서리는 가을 하늘을 나네.
酒闌人散江月出 술이 거나하여 사람들 흩어지고 강위로 달이 돋으니
夢騎白鷗遊蓬丘 꿈속에서 흰 학 올라타고 봉래산 노닐겠네.
<출처 : 退溪學硏究院, 退溪全書12,1993.199p>
상경도중에 양재역벽서사건 소식을 들으시고 조정의 어수선한 현실을 벗어나 明哲保身하려는 뜻을 부친 “古意”라는 시제의 시를 지으시기도 하셨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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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에서의 찾아 볼 곳을 다 찾아보았으니 용인으로 출발하였다. 용인의 첫 순례의 대상인 충렬서원을 찾아가기로 하고 네비게이션에 찍어 열심히 찾아간 곳이 크고 작은 도로가 복잡하게 얽힌 면소재지 같은 마을이었다. 네비게이션은 목적지에 도착하였다고 안내를 하나, 충렬서원의 안내간판이나 표지석도 보이지 않았다. 이리 돌고 저리 돌라 찾아가니 鄭夢周(1337~1392) 묘소이다. 묘소까지 올라가지는 않았지만 墓域은 넓직하게 정비하고 관리하는 건물들이 별도로 있어서 왕능 같기도 하였다. 정몽주 묘소를 이곳에 정하게 된 전설이 있다.
개성에서 고향인 경상도 영천으로 이장하기 위한 행렬이 용인 수지의 풍덕리에 잠시 쉬고 있는데 갑자기 돌풍이 불어 銘旌이 높이 날아 가다가 떨어진 곳에다 이장을 했다고 한다.
서원을 찾기 위해 묘역에서 돌아 나와 마을의 가게에 물었더니 초등학교 옆에 있다고 하여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마을을 몇 바퀴나 돌다가 겨우 찾았다. 작은 골목을 꼬불꼬불하게 들어가 산 아래에 있었다, 입구 골목에는 서원이 개인재산권을 침해한다며 재산권을 돌려달라는 현수막이 걸려있어 마을 주민과 서원이 갈등이 있음이 짐작된다. 그래서 인지 마을주민들이 서원에 대한 인식이 별로 좋지 못한 것 같다.
서원은 1576년(선조 9)에 정몽주와 趙光祖(1482~1519)의 덕망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수지의 죽전에 건립하였다고 하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5년(선조 38)에 이곳 모현면 능원리에 옮겨 중건하였다. 이때 정몽주와 함께 손자 雪谷 鄭保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직한 竹窓 李時稷(1572∼1637)을 배향하였고, 趙光祖의 위패는 심곡서원이 건립되어 그 곳으로 옮겨 배향하였다. 그리고 1609년(광해군 1)에 사액되었으나 1871년(고종 8)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24년 복원되었다.
구조는 사우·서재 각 2칸, 문루 3칸로, 문루 위층은 강당이며, 門廚房과 고직사 등을 갖추었다고 하나 현재는 홍살문과 외삼문, 내삼문, 사당은 깨끗하게 단청을 하여 일직선을 이루어 배치되었고, 서재나 문루는 없다. 사당과 나란히 그 오른편에 강당인 듯한 건물이 있으나 굳게 잠겨있어 열어 볼 수는 없었다. 규모는 협소하게 느껴지고 주변 환경도 정돈되지 못하였다. 향사는 3월과 9월 中丁에 치러진다고 하고 1972년 5월 4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어렵게 찾은 것에 비하여 잠겨있어 들어가 볼 수도 없었고 규모나 주변경관이 기대한 만큼 되지 못해 기분이 씁쓸함을 버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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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深谷書院을 찾아 자동차를 달렸다. 심곡서원은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신도시의 아파트촌 속에서 찾았다. 외삼문과 담장을 보수하기 위해 해체를 하고는 휴일이래서 그런지 공사는 하지 않고 있다. 안내문에는 「 1972년 5월 4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다. 1650년(효종 1) 趙光祖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을 설립하고 위패를 모셨다. 조광조의 무덤이 있는 龍仁에서는 일찍부터 서원을 세우기 위한 논의가 있었으나 재력이 넉넉하지 못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慕賢面의 鄭夢周를 배향한 忠烈書院에 入享하였다가 이 서원이 설립되면서 위패를 옮겨왔으며 梁彭孫을 추가 배향하였다. 같은 해 ‘심곡’이라는 賜額을 받았다.
건물은 사당·日昭堂·재실·장서각·내삼문·외삼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은 지붕의 좌우에 방풍판을 단 겹처마이다. 일소당은 강당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합각지붕에 겹처마이며, 목판벽으로 각 칸마다 板子門扉를 달아 사면을 다 개방할 수 있다.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과 강론에 사용된다.
재실은 정면 4칸, 측면 반 칸의 합각 홑처마이며, 원생이 기거·면학하던 곳이다. 내삼문은 박공지붕집의 3칸 솟을대문이며, 장서각은 맞배지붕에 홑처마로 67종 486책을 소장하였으나 1985년 도난당해 현재 ‘靜庵集’과 ‘朝鮮史’ 등만 전해진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의 하나로서 해마다 2월과 8월 中丁日에 향사를 지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단은 서원 전경을 돌아보았다. 홍살문, 외삼문, 강당인 일소당, 내삼문, 사당이 일직선을 이루어 일반적 서원의 배치원칙을 맞추었다. 그러나 동서재가 보이지 않고 장서각은 있었다. 그리고 일소당 앞 좌우에 오래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가 서원의 역사를 설명하는 듯 서있었다. 소설가 최인호가 쓴 유림이라는 소설에 연못이 있다고 했는데 연못이 라기는 작은 웅덩이 같은 곳이었다. 사당 앞에까지 갔으나 일소당과 사당이 잠겨있어 충렬서원과 같이 더 살펴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주변을 돌아보니 협문이 있고 그 협문과 이어진 주택이 서원에 부속된 廚舍인 것 같아 찾아가서 문의를 하였더니 관리인이 거주하며 서원을 찾는 손님을 맞이하는 사람이 있었다. 안동에서 왔다고 하니 奉審錄이라는 작은 책자를 들고 열쇠꾸러미를 들고 나오며 謁廟를 하도록 안내를 하겠다고 하였다.
우리 일행은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안내를 따랐다. 관리인이 낮술을 마셨는지 술 냄새를 풍기고 있어 점심에 반주를 하셨느냐고 물었더니 書院有司들이 오늘 분향을 위해 모여 점심식사를 하고 조금 전에 떠났다고 하였다. 그래서 충렬서원을 찾느라고 지체하지 않았다면 이곳 서원의 유사들을 만나서 더 많은 것을 알아 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곳 서원에서는 초하루 보름날 낮 11시에 上,下有司들이 함께 모여 분향을 하고, 享祀는 음력 2월과 8월의 中丁日에 치르나 올해는 下丁(음력 8.25.)에 지낸다고 하였다. 아마 중정일이 추석과 겹치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관리인이 먼저 내삼문의 서쪽 문으로 들어가 동쪽 문을 열며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이곳 서원은 동문으로 들어와 서문으로 나간다는 것이다.
사당에도 동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하였다. 사당안은 마루를 깔았으며 깨끗하게 청소를 하였으며 주벽에 趙靜庵의 위패와 影幀을 모셨고 동쪽 벽에서 서향으로 梁彭孫의 위패를 모셨다. 구석에 초석을 말아 둔 것이 있어 사당밖에 拜席을 마련할 줄 믿고 있었는데 관리인이 사당 안에서 위패를 향해 배례를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다시 여기서 알묘를 합니까? 라고 물으니 관리인이 그렇다고 하여 모두 조정암 위패 앞에서 분향을 하고 배례를 하고 양팽손 위패 앞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배례를 하고 사당에 비치된 방명록에 방명을 하였다. 언젠가 누구가 말했는지 기억에 없으나 경기도의 서원은 사당이 사찰의 법당과 같이 사당에서 절을 한다고 말한 것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梁彭孫(號 學圃, 1488~1545)은 정암과 같은 해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도의지교를 맺고 정암이 정치의 개혁을 추진하다가 반대의 무리에 의하여 실패하여 유배를 당할 위기에 처해지자 유배의 부당성을 간곡히 주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로 인하여 관직에 파면당해 낙향하여 글씨와 그림으로 소일하였고, 정암의 유배지를 드나들며 벗이 되어 주기도 하였으며 사사되는 현장을 지켜보며 시신을 거두었던 인연으로 이곳에 종향된 것으로 짐작된다. 사당에 알묘를 마치고 나오니 관리인이 일소당를 열어 관람을 시켜 주었다.
일소당에서 책상이 줄지어 있었고 책상마다 위에는 물이 마르지도 않은 벼루가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붓글씨를 가르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벽에 중건기와 학규의 편액이 걸려있어 살펴보았더니 학규에 ‘陶菴先生本院學規’라는 제목이 쓰여져 있어 숙종조 성리학의 대가인 陶菴 李縡(1680~1746)가 學規를 지은 것으로 확인된다. 이재는 용인지방의 서원발전에 힘을 썼고 충렬서원과 심곡서원의 學規를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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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에 瀁碧亭이라는 곳에서 퇴계선생께서 지으신 詩가 선생문집 續集에 실려 있다. 양벽정은 1497년(연산군 3)에 용인현의 객관 동편에 현령 金祐가 지었다4)고 하나, 용인시청 인터넷 홈페이지 문화관광사이트에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하여 문화재과에 문의한바 용인시 관내에 양벽정이 없다는 회신이 있었다. 그렇다고 다른데 물어볼 수도 없었다. 선생께서도 직접 정자에 오르시지는 아니하시고 趙士秀(1502~1558, 本貫 漢陽, 字 季任, 號 松岡, 諡 文貞)의 시를 次韻하신 것 같다.
瀁碧亭次趙季任 양벽정의 조계임의 시를 차운하다.
高作亭闌小作塘 정자를 높게 짓고 연못을 작게 만들어
座中猶可數魚行 자리에 앉아서도 물고기 무리를 셀 수 있네.
藕根不被年災盡 연뿌리는 흉년이나 다 없어지지 않아서
稀葉田田尙帶香 드물게 뜬 연잎에는 아직도 향이 남았어라.
細泉飛雪灑橫塘 가는 샘물이 흩날리는 논처럼 연못에 뿌려지고
苦竹依林未著行 고죽이 숲에 가리어 줄지은 모습이 드러나지 않네.
水鳥不知官事在 물새는 관청일을 알지도 못하고
往來長占白蘋香 오가면서 오래도록 흰 마름 향내를 맡았네.
<출처 : 退溪學硏究院, 退溪全書12,1993.34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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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에서는 충렬서원과 심곡서원 답심까지를 오늘 여행의 목표를 삼았다.
그러나 숙박할 곳으로 찾아 들기란 아직 시간이 이르다. 일행들의 의견이 분분하다가 수원성을 돌아보자고 하여 수원을 향하다가 다시 제부도에 가자고 하여 제부도에 갔다.
제부도는 바닷물의 조수에 의하여 육지와 연결되는 길이 물속에 들었다 나왔다 하는 것으로 모세(Mose,이스라엘의 종교적 지도자)의 기적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섬으로 유명하다. 상당한 시간을 달려 도착하니 제부도와 연결되는 마을에는 차들이 밀리고 많은 식당과 상점들 그리고 숙박업소가 관광객을 誘引하고 있었다.
바닷길은 육지와 이어지는 것은 하루에 두 번이다. 날마다 이어지는 길이 나타나는 시간이 다르다. 오늘은 낮에는 오전 6시경에서 오후 2시경이고 저녁에는 오후 5시 반경에서 내일 새벽 2시 경이다. 그렇다면 오후 6시가 넘었으니 제부도에서 숙박을 하거나 아니면 밤에 나와야 한다. 일단은 열린 바닷길을 자동차로 통과하여 제부도에 들어갔다. 등대주변에 차를 세우고 주변을 돌아보니 많은 관광객들이 물 빠진 갯벌을 바라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일행은 등대를 돌아보고 여기까지 왔으니 조개구이를 맛보지 않을 수 없어 등대 앞 비닐포장 가게 들어가 조개구이를 청하여 맛보았다. 조개가 많이 나오는 계절이 아닌지 비싼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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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섬에서 숙박을 하지 않으려면 너무 늦기 전에 나가서 숙박지를 정하는 것이 오랜 시간동안 운전하느라 고생한 敬熙가 편할 것 같아 섬에서 나와 숙박지를 찾아 또 달려간 곳이 新葛이라는 新都市이다. 이곳 ‘샹글리아’ 라는 모텔에 숙박하기로 정해 놓고 모두 저녁식사를 하러 나가서 모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청송의 달기약수로 닭백숙을 한다고 창문에 써진 식당으로 들어갔다. 객지에서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더니 청송 달기약수라는 글자만보고도 모두들 다른 의견 없이 들어왔다. 여기서 청송이 어디라고 약수를 가져오느냐고 물어보니 택배로 물이 온다니 그래도 돈벌이가 되는지 모두들 의문이었다. 어째든 약수가 지금은 없어서 닭백숙은 안된다고 하여 다시 나갈 수도 없어서 돼지고기 삼겹살과 밥을 먹기로 하고 자리에 앉았다. 시장이 반찬이래서 그런지 몰라도 삼겹살 맛이 좋았다. 소주를 반주로 하여 밥을 먹고는 우리나라 술꾼들의 공통적으로 가는 곳에 우린들 例外일 수 없었다. 간판도 모르는 노래방으로 들어가 각기 나름대로 고함을 지르며 온갖 몸짓으로 客苦를 풀고는 모텔로 돌아와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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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되자 敬熙가 이곳에 1인분에 3,000원밖에 하지 않는 유명한 해장국집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자고 하면서 운전해 가는 곳이 바로 자기 집이었다.
천여세대가 운집한 아파트촌은 높지 않은 산속에 위치하여 조용하고 청량한 곳이었다. 창문을 열면 자연의 和音을 들으며 신선한 바람을 맞을 수 있다니 복잡한 서울 근교에서 이런 곳에 둥지를 틀었으니 敬熙 재주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한옥의 대청과 같은 거실과 2칸 장방을 같이 넓은 사랑방이 좋다. 정갈하게 차린 아침상은 메인매뉴는 골뱅이국이었다. 골뱅이국이 해장국으로 제일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았을까? 金선생의 정성에 감사할 따름이다. 옛날 연애할 때 김선생은 기억이 가물가물해져가는데 모처럼 뵙게되니 반갑기도 한데 아침상까지 받으니 惶恐이 無知할 수밖에 없다. 안동에서도 골뱅이국을 많이 먹어 봤지만 이 집 골뱅이국 맛을 느껴보지 못한 것 같다. 아마도 골뱅국 식당을 개업한다면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라 생각되지만 권하지는 못했다. 일정이 촉박하여 일어서지 않을 수 없어 아쉬움을 남기고 아파트를 나왔다. 비가 오기 시작한다. 예보에 많은 비가 올 것이라 했으니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일정은 파주에 있었다는 임진정을 찾아보고 자운과 파산서원을 심방하면서 다른 문화유적도 관광하고 안동까지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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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향하는 고속도로에는 체증을 염려했으나 그리 심하지는 않았다. 차창에 스치는 빌딩 숲은 視野를 짖 누르듯 위용을 뽐내고 있다. 빗줄기가 예사가 아니다. 도로에 물이 고여 달리는 차들이 튕기는 물보라가 속도를 조절이라도 하는듯하다. 적당히 서울 외곽을 돌아 自由路를 달려 파주로 갈 것으로 짐작했으나 점점 동쪽으로 달리고 있어 물었더니 자유로에는 교통이 밀릴 것 같고 네비게이션이 이 길을 가르치고 있어서 이 길로 간다고 한다. 그렇다면 의정부 가까이 있는 望月寺에도 가자고 할 걸, 망월사의 주지가 의인 딸네인 성법스님이고 일본 정행사에 퇴계선생 현창비를 건립하는데 주도를 한 사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차는 의정부를 거쳐 楊洲를 지나고 있었다.
쏟아지던 빗줄기는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우리를 태운 차는 경기도 북부지역의 돌고 돌아 자운서원 앞에 도착하였다. 자운서원은 파주시 법원읍이라 곳에 있는데 여기도 온통 아파트 군락을 헤집고 작은 고개를 넘으니 높지 않은 산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경기도청에서 세운 율곡교육원이 자운서원 앞 도로에 붙어있어 가까운 곳에 자운서원이 있음을 짐작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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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雲書院 앞은 주차장이 넓고 주변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으며 서원의 경내에도 넓은 잔디밭으로 되어 있어 마치 牙山에 있는 顯忠祠와 같이 70년대에 성역화 사업을 하였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느낌은 적중했다. 입구의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사고 안동서 왔다며 안내를 요청했더니 관리소장이라는 분이 안내를 하겠다며 사무실에서 나와 안내를 시작하며 맨 먼저 하는 말이 이 서원은 朴正熙(1917~1979)大統領 시절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李厚洛(1924~ )씨가 1972년에 대통령의 특사로 북한을 방문하여 당시 북한 수상인 金日成(1912~1994)을 만난 자리에서 율곡선생을 높이 받들며 그 유적을 성역화하여 국민들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돌아와 대통령께 복명을 하였더니 대통령이 남한의 율곡선생의 유적인 파주의 자운서원과 강능의 오죽헌을 성역화 하도록 지시하여 1976년에 현재와 같이 조성하였다고 하였다.
紫雲書院은 본래 1615년(광해군7)에 창건하여 1650년(효종1)에 사액을 받았으며, 1713년(숙종39년)에 沙溪 金長生(1548~1631)과 玄石 朴世采(1632~1695)을 追配하였다가 1868년(고종5)에 훼철되었다. 그 후 제단을 설치하여 향사만 치르다가 1950년 동란으로 폐허가 되어 廟庭碑만 남아 있었다고 하였다.
정문인 외삼문을 들어서면 크게 공원구역이 있고, 더 들어가 왼쪽 계곡이 서원구역이고, 오른 쪽 언덕이 율곡선생 가족 묘역이다. 공원구역에 넓게 잔디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좌측 언덕에 율곡선생 신도비각이 있다. 신도비에 탄흔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도 동란당시 격전의 장소였던 것이다. 우측에는 율곡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이곳은 율곡선생과 신사임당 등 가족들의 유품들의 복제품을 전시하여 관람하도록 한 시설이다.
서원은 외삼문을 들어서면 동․서재가 있고 강당인 講仁堂이 있다. 강인당 오른쪽 뒤에 묘정비가 세워져 있다. 묘정비는 서원을 창건한 내력을 尤庵 宋時烈(1607~1689)이 지은 비문을 谷雲 金壽增(1624~1701)이 쓴 것을 새겼다. 내삼문에 들어가니 사당에 文成祠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왼쪽에 관세위, 오른쪽에 망료위를 돌을 다듬어 영구시설로 만든 것이 특이하다. 사당현판을 붙인 도리 안쪽에 ‘紫雲書院’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관리소장의 설명에 의하면 성역화 사업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의 글씨라고 하였다. 그런데 낙관이 있었으나 지운흔적이 있어 여기에도 정치적 위력(?)이 발휘되었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사당에는 마루가 깔려 있고 깨끗하게 청소가 되었다. 가운데 율곡선생의 위패와 영정을 모셨고, 좌우측 벽에서 가운데를 향하여 사계 김장생과 현석 박세채를 모셨다.
율곡선생 위패 왼쪽에 신사임당의 초충화 병풍을 진열하였고 위쪽 벽에 고산구곡가(율곡 42세 작)의 액자가 걸려 있다. 위패에 ‘栗谷李先生位’라고 쓰여져 있었다.
자운서원에는 향사를 매년 음력 8월 중정에 모셨으나 최근에 파주시의 민족축제인 栗谷文化祭때 치른다고 하였다. 초헌관으로 坡州市長을 추대하다가 작년부터는 京畿道知事를 초헌관으로 추대한다고 한다. 그리고 덧붙인 설명에 내년에 경기도에서 많은 예산을 투입하여 경기도민의 교육장으로 확장할 게획이라고 하여 도지사의 각별한 관심을 가진 것을 알 수가 있었다.
● 紫雲書院 享祀 笏記 자운서원 향사홀기
○執禮以擧案 獻官及諸執事 諸生先就外位
•집례자가 제관과 제집사를 호명하고 개식 안내를 한다. 헌관과 제집사 그리고 제유생은 밖에서 열지어 세운다.
○贊者引 初獻官 陞自東階 點視陳設訖 還出
•찬자는 초헌관을 동쪽 계단으로 인도하여 올라와 진설된 것을 점검하고 돌아 나가시오.
○大祝入 開櫝啓蓋
•대축은 들어가서 신주를 열고, 모든 뚜껑을 열고 添 : 점촉하고 중문과 바깥 중문을 여시오.
○執禮贊者司稅, 先就拜位, 皆再拜 各就位
•집례, 찬자, 사세는 먼저 올라가서 재배하고 손을 씻고 자기 위치로 가서 서시오.
○唱笏 始作
○贊者引 大祝及諸執事 入就拜位, 皆再拜 皆詣 盥洗位 盥手洗手 各就位
•찬자는 대축과 제집사를 인도하여 절하는 자리로 들어오게 하시오. 전부 재배를 시킨 후, 손 씻는 자리로 인도하여 손을 씻게 하고 각자의 자리로 서게 하시오.
○贊者(謁者)進 初獻官之左 請行事
•찬자는 초헌관의 앞좌측에서 행사를 청하시오. 添:有司 謹具請行事(유사 근구청행사)
○贊者引 獻官及諸生, 入就拜位 皆再拜
•찬자는 헌관과 제유생을 인도하여 들어와 모두 재배 시키시오.
⊙行 奠幣禮 폐백(모시18자)을 올리는 의식
○贊者引 初獻官 詣盥洗位 搢笏 盥手 帨手 執笏
•찬자는 초헌관을 손 씻는 곳으로 인도하여 홀을 꽂고 손을 씻게 하고 홀을 잡도록 하시오.
○引詣 栗谷先生 神位前 跪
•율곡 선생 신위전으로 인도하여 무릎 꿇어앉게 하시오.
○奉香 獻官之右 西向跪, 奉爐獻官之左 東向跪
•봉향은 헌관의 우측에서 서향하여 무릎 꿇어 앉고,
•봉로는 헌관의 좌측에서 동향하여 무릎 꿇어앉아 향과 향로를 받드시오.
○搢笏 三上香
•초헌관은 홀을 꽂고 향을 세 번 사르시오.
○奉香, 奉爐 少退立
•봉향 봉로는 조금 물러나서시오.
○大祝 獻官之右 西向跪 奉幣授獻官 獻官執幣 獻幣 以幣授大祝
•대축은 헌관의 우측에서 서향하여 무릎 꿇어 앉으시오.
•폐백을 받들어 헌관에게 주시오, 헌관은 폐백을 받아 헌폐하고 대축에게 주시오.
○大祝 獻官之左 東向跪 受幣奠于 神位前
•대축은 헌관의 좌측에서 꿇어 앉아 폐백을 받아 신위전에 올리시오.
○獻官 執笏 俯伏興 헌관 집홀 부복흥
•헌관은 홀을 잡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시오.
○次詣 沙溪 金先生 神位前 跪
•다음에는 사계 김선생 신위전에 무릎 꿇어 앉으시오.
○奉香 獻官之右 西向跪, 奉爐獻官之左 東向跪
•봉향은 헌관의 우측에서 서향하여 무릎 꿇어 앉고,
•봉로는 헌관의 좌측에서 동향하여 무릎 꿇어앉아 향과 향로를 받드시오.
○獻官 搢笏 三上香
•초헌관은 홀을 꽂고 향을 세 번 사르시오.
○奉香, 奉爐 少退立
•봉향 봉로는 조금 물러나 서시오.
○大祝 獻官之右 西向跪, 奉幣授 獻官
•대축은 헌관의 우측에서 서향하여 무릎 꿇어 앉아서, 폐백을 받들어 헌관에게 주시오.
○獻官執幣 獻幣 以幣授大祝, 大祝 獻官之左 東向跪 受幣奠于 神位前
•헌관은 폐백을 받아 헌폐하고 대축에게 주시오.
•대축은 헌관의 좌측에서 꿇어앉아 폐백을 받아 신위전에 올리시오.
○獻官 執笏 俯伏興
•헌관은 홀을 잡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시오.
○次詣 玄石 朴先生 神位前 跪
•다음은 현석 박선생 신위전에 무릎 꿇어 앉으시오.
○奉香 獻官之右 西向跪 奉爐 獻官之左 東向跪
•봉향은 헌관의 우측에서 서향하여 무릎 꿇어 앉고,
•봉로는 헌관의 좌측에서 동향하여 무릎 꿇어 앉아 향과 향로를 받드시요.
○獻官 搢笏 三上香
•초헌관은 홀을 꽂고 향을 세 번 사르시오.
○奉香奉爐 少退立
•봉향 봉로는 조금 물러나 서시오.
○大祝 獻官之右 西向跪 奉幣授 獻官
•대축은 헌관의 우측에서 서향하여 무릎 꿇어 앉아 폐백을 받들어 헌관에게 주시오.
○獻官執幣 獻幣 以幣授大祝, 大祝 獻官之左 東向跪 受幣奠于 神位前
•헌관은 폐백을 받아 헌폐하고 대축에게 주시오.
•대축은 헌관의 좌측에서 꿇어앉아 폐백을 받아 신위전에 올리시오.
○獻官執笏 俯伏興
•헌관은 홀을 잡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시오.
○引降復位
•헌관을 제자리로 인도하여 내려 가시오.
⊙行 初獻禮; 초헌관이 첫 번째 술을 올리고 축을 읽는 의식
○贊者引 初獻官詣 栗谷先生 罇所 西向立, 奉爵, 奠爵, 司罇升 由司罇 擧冪酌酒
•찬자는 초헌관을 인도하여 율곡선생의 술항아리 앞에서 서향하여 서시오.
•봉작, 전작, 사준은 올라와서 사준은 보자기를 거두고 잔에 술을 따르시오.
○引詣 栗谷先生 神位前 跪 搢笏
•율곡선생 신위전에 인도하여 꿇어앉게 하시오. 홀을 꽂으시오.
○奉爵 受爵 獻官之右 西向跪 以爵授獻官
•봉작은 잔을 받아 헌관의 우측에서 서향하여 꿇어앉아 헌관에게 잔을 주시오.
○獻官執爵 獻爵 授奠爵 奠爵以爵受 奠于神位前
•헌관은 잔을 받아 헌작하고 전작에게 주면 전작은 잔을 받아 신위전에 올리시오.
○執笏 俯伏 興
•홀을 잡고 구부렸다가 일어나시오.
○次詣 配位罇所 西向立
•다음은 배위 술독에 가서 서향하여 서시오.
○擧冪酌酒
•보자기를 거두고 술을 따르시오.
○引詣 沙溪 金先生 神位前 跪 搢笏
•사계선생 신위전에서 꿇어앉고 홀을 꽂으시오.
○奉爵 受爵 獻官之右 西向跪 以爵授獻官
•봉작은 잔을 받아 헌관의 우측에서 서향하여 꿇어앉아 헌관에게 잔을 주시오.
○獻官執爵 獻爵 授奠爵 奠爵以爵受 奠于神位前
•헌관은 잔을 받아 헌작하고 전작에게 주면 전작은 잔을 받아 신위전에 올리시오.
○執笏 俯伏 興
•홀을 잡고 구부렸다가 일어나시오.
○次詣 玄石先生 神位前 跪 搢笏
•다음은 현석선생 신위전에서 꿇어앉고 홀을 꽂으시오.
○奉爵 受爵 獻官之右 西向跪 以爵授獻官
•봉작은 잔을 받아 헌관의 우측에서 서향하여 꿇어앉아 헌관에게 잔을 주시오.
○獻官執爵 獻爵 授奠爵 奠爵以爵受 奠于神位前
•헌관은 잔을 받아 헌작하고 전작에게 주면 전작은 잔을 받아 신위전에 올리시오.
○執笏 俯伏 興
•홀을 잡고 구부렸다가 일어나시오.
○奉爵, 奠爵, 司罇 降復位
•봉작, 전작, 사준은 내려가시오.
○引詣 栗谷先生 神位前 跪 搢笏
•헌관은 율곡선생 신위전에 꿇어앉고 홀을 꽂게 하시오.
○大祝 獻官之左 東向跪 俯伏 獻官 以下 皆 俯伏 讀祝
•대축은 헌관의 좌측에서 동향하여 꿇어앉아 독축하고 헌관 이하 모두 부복하시오.
○執笏 俯伏 興 引降復位
•홀을 잡고 일어나 제자리로 내려 가시오.
⊙行 亞獻禮 ; 아헌관이 두 번째 술을 올리는 의식.
○贊者引 亞獻官詣 盥洗位 搢笏 盥手帨手 執笏
•찬자는 아헌관을 인도하여 관세위로 가서 홀을 꽂고 손을 씻고 홀을 잡으시오.
○引詣 栗谷先生 罇所 西向立, 奉爵, 奠爵, 司罇升 由司罇 擧冪酌酒
•율곡선생의 술독에서 서향하여 서시오.
•봉작, 전작, 사준은 올라와서 사준은 보자기를 거두고 잔에 술을 따르시오.
○引詣 栗谷先生 神位前 跪 搢笏
•율곡선생 신위전에 인도하여 꿇어앉고 홀을 꽂으시오.
○奉爵 受爵 獻官之右 西向跪 以爵授獻官
•봉작은 술잔을 받아 헌관의 우측에서 서향하여 꿇어앉아 헌관에게 주시오.
○獻官執爵 獻爵 授奠爵 奠爵奠于神位前
•헌관은 잔을 잡아 전작에게 주면 전작은 신위전에 올리시오.
○執笏 俯伏 興
•홀을 잡고 구부렸다가 일어나시오.
○次詣 配位罇所西向立 擧冪酌酒
•다음은 배위 준소에 가서 서향입하시오. 보자기를 거두고 술을 따르시오.
○引詣 沙溪 金先生 神位前 跪 搢笏
•사계선생 신위전에서 꿇어앉고 홀을 꽂으시오.
○奉爵 受爵 獻官之右 西向跪 以爵授獻官
•봉작은 잔을 받아 헌관의 우측에서 서향하여 꿇어앉아 헌관에게 잔을 주시오.
○獻官執爵 獻爵 授奠爵 奠爵以爵受 奠于神位前
•헌관은 잔을 받아 헌작하고 전작에게 주면 전작은 잔을 받아 신위전에 올리시오.
○執笏 俯伏 興
•홀을 잡고 구부렸다가 일어나시오.
○次詣 玄石先生 神位前 跪 搢笏
•다음은 현석선생 신위전에서 꿇어앉고 홀을 꽂으시오.
○奉爵 受爵 獻官之右 西向跪 以爵授獻官
•봉작은 잔을 받아 헌관의 우측에서 서향하여 꿇어앉아 헌관에게 잔을 주시오.
○獻官執爵 獻爵 授奠爵 奠爵以爵受 奠于神位前
•헌관은 잔을 받아 헌작하고 전작에게 주면 전작은 잔을 받아 신위전에 올리시오.
○執笏 俯伏 興 引降復位
•홀을 잡고 구부렸다가 일어나서 제자리로 돌아가시오.
⊙行 終獻禮 ; 종헌관이 마지막 술을 올리는 의식
○贊者引 終獻官詣 盥洗位 搢笏 盥手帨手 執笏
•찬자는 종헌관을 관세위에 인도하고 홀을 꽂고 손을 씻고 홀을 잡으시오.
○引詣 栗谷先生 罇所 西向立
•율곡선생의 준소에 인도하여 서향입 하시오.
○奉爵, 奠爵, 司罇升 由司罇 擧冪酌酒
•봉작, 전작, 사준은 올라와서 사준은 보자기를 거두고 잔에 술을 따르시오.
○引詣 栗谷先生 神位前 跪 搢笏
•율곡선생 신위전에 인도하여 꿇어앉게 하시오. 홀을 꽂으시오.
○奉爵 受爵 獻官之右 西向跪 以爵授獻官
•봉작은 잔을 받아 헌관의 우측에서 서향하여 꿇어앉아 헌관에게 잔을 주시오.
○獻官執爵 獻爵 授奠爵 奠爵以爵受 奠于神位前
•헌관은 잔을 받아 헌작하고 전작에게 주면 전작은 잔을 받아 신위전에 올리시오.
○執笏 俯伏 興
•홀을 잡고 구부렸다가 일어나시오.
○次詣 配位罇所 西向立 擧冪酌酒
•다음은 배위 준소에 가서 서향입하시오. 보자기를 거두고 술을 따르시오.
○引詣 沙溪 金先生 神位前 跪 搢笏
•사계선생 신위전에 인도하여 꿇어앉아 홀을 꽂으시오.
○奉爵 受爵 獻官之右 西向跪 以爵授獻官
•봉작은 잔을 받아 헌관의 우측에서 서향하여 꿇어앉아 헌관에게 잔을 주시오.
○獻官執爵 獻爵 授奠爵 奠爵以爵受 奠于神位前
•헌관은 잔을 받아 헌작하고 전작에게 주면 전작은 잔을 받아 신위전에 올리시오.
○執笏 俯伏 興
•홀을 잡고 구부렸다가 일어나시오.
○次詣 玄石先生 神位前 跪 搢笏
•다음은 현석선생 신위전에 꿇어앉아 홀을 꽂으시오.
○奉爵 受爵 獻官之右 西向跪 以爵授獻官
•봉작은 잔을 받아 헌관의 우측에서 서향하여 꿇어앉아 헌관에게 잔을 주시오.
○獻官執爵 獻爵 授奠爵 奠爵以爵受 奠于神位前
•헌관은 잔을 받아 헌작하고 전작에게 주면 전작은 잔을 받아 신위전에 올리시오.
○執笏 俯伏 興 引降復位
•홀을 잡고 구부렸다가 일어나서 제자리로 내려가시오.
○獻官 皆再拜
•헌관 모두 재배하시오.
⊙行 飮福禮 ; 제사한 술을 마셔 복을 받는 의식
○贊者引 初獻官詣 飮福位 西向跪
•찬자는 초헌관을 음복위(壇上 東南 西向)로 인도하여 서향하여 꿇어 앉으시오.
○大祝 第一爵 及脯徹 授獻官 獻官受爵 爵 受胙
•대축은 제일 첫 번째 술과 포를 거두어 와서 헌관에게 주면 잔을 받아 술을 마시고 도마에 고기를 어루만지시오.
○執笏 俯伏 興 引降復位
•홀을 잡고 구부렸다가 일어나시오. 제자리로 내려가시오
○大祝入 徹籩豆
•대축은 들어가서 변 하나와 두 하나를 조금씩 옮기시오.
○獻官 及 諸生 皆再拜
•헌관과 제유생은 모두 재배하시오.
○闔櫝
•독을 덮으시오.
⊙行 望燎禮 ; 축문과 폐백을 태워 땅에 묻는 의식
○贊者引 初獻官詣 望燎位 北向立
•찬자는 초헌관을 망료위(단하 서북,북향)에 인도하여 북향하여 서시오
○大祝入 以篦取祝及幣 降自西階 可燎 置于坎
•대축은 들어가서 축과 폐백을 소쿠리에 담아 서쪽 계단으로 내려와 태워 땅에 묻으시오.
○引降復位
•인도하여 제자리로 내려가시오.
○贊者進 初獻官之前 告 禮畢
•찬자는 초헌관의 좌측 앞에서 예필을 고하시오.
○贊者引 獻官 及 諸生 以出
•찬자는 헌관과 제유생을 인도하여 나가시오.
○大祝 及 諸執事 皆再拜 次出
•대축과 제집사는 모두 재배하고 나가시오.
○執禮 贊者入就拜位 皆再拜而出
•집례와 찬자는(촛불을 끄고 문을 닫고)자리에 나와 재배하고 나가시오.
● 紫雲書院 享禮祝文
維歲次 干支 幾月 干支朔 幾日干支 幼學 某 取昭告于 栗谷 李先生 伏以 道全禮用 工存繼開 於萬斯年 亭此腥攂 以 沙溪 金先生 玄石 朴先生 配 尙 饗.
단군기원 4340년 정해 2월 임자삭 13일 갑자 후학 ㅇㅇㅇ는 감히 이율곡 선생님께 고하나이다. 가르쳐주신 도를 온전히 몸에 익혀서 영원히 이어 열어가겠나이다. 이에 간소한 제물을 올리오니 사계 김선생님과 현석 박선생님을 배향하여 흠향 하시옵소서.
<출처: http://cafe.naver.com/kinwltlr.16936>
사당을 나와 墓域을 돌아보았다. 묘역은 가운데 능선 앞에서부터 율곡의 아들, 율곡부모, 율곡 형 내외, 율곡부부의 순으로 모셔졌고, 오른쪽에 율곡매부 尹燮이 맨 위에 그 아래 율곡의 후손들의 묘가 있으며, 왼쪽에는 율곡의 큰 누님의 내외와 그의 후손과 율곡 후손의 묘가 있다. 관리소장의 설명에 의하면 이산이 본래 율곡의 큰 누님인 梅窓의 媤宅 산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율곡의 매부와 그 가족의 묘를 같은 묘역에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 율곡의 매부 윤섭의 묘는 자손들이 이장해 갔다고 한다. 묘역을 살펴보니 같은 능선임에도 순서가 바뀌어 있다. 즉 자식이 부모위에 묘를 썼다. 관리소장 말이 율곡선생 묘는 임금이 터를 잡았으니 그렇다고 했으나 율곡 형의 묘는 왜 부모 위에 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안내문에도 율곡이 현달하여 부모 묘위에 모셨다고 하였으나 율곡 형의 묘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여러 묘 중에도 율곡선생과 그 부모 묘역의 개절에 장대석을 깔았고 좌우에 망두석 외에 선비석을 세웠다. 율곡선생의 명성에 비해서 묘역은 소박하게 조성되어 있다. 율곡선생의 묘비석은 오래되었음에도 글씨를 읽을 수 있게 깨끗하다. 석질이 매우 좋은 돌로 보인다. 그러나 그 부모의 묘비는 크기도 비교가 안될 만큼 작고 석질도 나빠 글씨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묘역에서 내려와 구내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더위를 식히고 매점에서 판매하는 율곡선생 저술(격명요결, 자경문)을 한 권씩 사서 매표소로 오니 관리소장이 자운서원을 설명하는 안내 책자와 신도비 번역문을 주면서 혹시 안동에 방문하게 되면 안내를 부탁하여 기꺼이 수락하고 다음 답심지인 파산서원으로 향하였다.
17
坡山書院은 紫雲書院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坡坪尹氏의 得貫地 이기도 한 곳이다. 1568년(선조 1)에 李珥(1536~1584), 백인걸 등 파주 지역 유생들의 주창으로 창건되었고 1650년(효종 1)에 賜額을 받았다. 조선말기 서원철폐령 때 남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후에 복구하였으나,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어 1966년 사당만 복원하였다.
1983년 9월 19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학자 成守琛(1493~1564)과 그의 아들 成渾(1535~1598), 아우 成守琮(1495~1533) 및 白仁傑(1497~1579)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서원은 터는 넓으나 산 아래 사당만 덩그렇게 있어 황량하다 못해 廢墟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당에 들어가는 삼문 위에 서원현판이 걸려있어 파산서원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파주의 유일한 未毁撤 書院인데 너무 홀대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운서원의 잘 정리된 경내를 방금보고 온 탓인지 모르나 잡초가 무성하여 방치된 굿당 같기도 하였다. 잡초를 해치고 祠堂에 오르니 삼문도 사당문도 잠겨있지 않았다. 주위를 돌아보아도 아무도 없었다. 문을 밀치고 사당에 들어가니 마루바닥은 먼지가 쌓여 신발을 벗기가 민망스러웠다.
사당의 좌우측에 각 두위씩 위패를 모신 祭床이 놓여져 있었다. 이곳 사당의 위패는 號와 先生이라고만 써져 있었다. 즉 우계 성혼의 위패의 경우 ‘牛溪先生’이라고 써져 있다. 사당에서 나와 우측에 비각이 있어 확인해보니 어느 집 조상의 제단이었다. 어째서 서원의 사당에 인접하여 제단을 설치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물어 볼 사람이 없으니 그냥 서원을 나왔다.
이제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어 파주지역의 別食을 찾아가기로 하고 자유로 쪽으로 달렸다.
19
달리는 차속에서 퇴계선생께서 시를 지으신 臨津亭의 터라도 봤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으나 아무도 그 곳을 아는 이가 없으니 그냥 속 알이만 할 뿐이었다. 임진정은 퇴계선생께서 41세(1541, 중종36) 9월에 경기도 災傷御使로 임명되어 9월 초부터 25일까지 하시면서 찾았던 곳이다. 이곳에서 개성을 바라보시며 休息을 하시고 다음과 같은 詩를 지으신 곳이기도 하다.
九月七日午息臨津亭
臨津渡上秋空碧 임진강 건널목에 가을하늘 푸르르고
斜日淸江暎石壁 맑은 강 비낀 해는 석벽에 비치네.
潮來潮去幾今古 밀물이 오간지 몇 천 년이 되었던고
大海西連數峯隔 큰 바다 서쪽으로 뻗어 두어 봉우리 가려있네.
盤遊狡童厭法官 감돌아 든 놀이꾼은 법당을 싫어하고
輕薄詞臣昧釁積 경박한 문신들은 쌓은 재앙 모르는 채
天轟簫鼓愁魚龍 공중에는 풍류소리 어룡이 시름하고
軼霧優倡閙細舄 나풀나풀 광대 춤에 좌석이 어지러웠네.
豈知眼中强跋扈 눈앞에 무사들이 제멋대로 날뛰던 일
遊魂已似浮烟釋 연기처럼 사라질 줄 그 뉘가 알았으랴
皺巖明鏡足垂後 추암의 맑은 거울 뒷세상에 전할 지니
驪山禍胎謬傳昔 여산을 화태라 함도 옛일이 그릇되었네.
楓林霜葉爛猩紅 단풍나무 숲 서리 맞은 잎은 문드러지게 붉은데
沙岸蘆花袞雪白 모래 언덕 갈꽃 피어 흰 눈인 양 녹아지네.
舟人只知爭渡急 뱃사공은 바삐 저어 건너기에 다투는 듯
鷗鷺無情事高格 해오라기 하염없이 높은 격만 일삼누나.
鵠山隱翳暮雲頭 저문 구름 가린 곳에 곡령이 솟았는데
憑闌客子偏傷激 난간에 기댄 객이 홀로 슬퍼하노라.
이때 파주, 연천, 포천 등지를 檢察하시고 수재로 인한 백성들의 생계대책과 관리 자녀들의 婚期를 잃지 않게 배려를 할 것을 임금께 복명하셨다.
臨津亭은 파평시 파평면 율곡리에 있는 지금의 花石亭인 듯 추정하고 있다.5)는 기록이 있었으나 미처 확인하지 못하여 화석정에 가보지 못하고 이정표만 보면서 스쳐지나왔다. 각종 인터넷 사이트나 파주시 관광안내 자료에 율곡선생 유적으로 만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사이트의 화석정의 설명을 보면 고려말 유학자 길재가 은퇴하여 후학을 기른 곳을 1443년(세종 25) 율곡선생 5대 조부인 李明晨이 세운 것을 1478년(성종 9) 율곡의 증조부 李宜碩이 보수하고 夢庵 李叔緘(조선초기 문신)이 花石亭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 후 율곡선생이 중수하여 유유자적하다가 壬亂時 燒失되었다.
임란시 소실에 대하여 栗谷선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임진강 나루에 정자를 지어 이름을 화석정이라 하고 기름에 젖은 걸레로 정자 마루를 닦도록 하였다. 그리고 臨終 때 어려움이 닥치면 열어 보라고 하며 봉투를 남겼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宣祖의 御駕가 몽진차 임진 나루에 도착하였을 때, 날이 궂고 밤이 되어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다. 이 때 대신 중 한 사람이 율곡선생이 남긴 封書를 열어보니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고 씌어 있었다. 화석정에 불이 붙자 나루 근처가 대낮 같이 밝아서 선조 일행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는 것이다.<출처 : http://www.seelotus.com/gojeon>
그 후 80여 년간 빈터만 남아 있다가 1673년(현종 14)에 율곡의 증손인 李厚址·李厚坊이 복원하였으나 1950년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었다. 현재의 정자는 1966년 파주시 유림들이 다시 복원하고 1973년 정부가 실시한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단청되고 주위도 정화되었다. 건물의 정면에는 박정희대통령가 쓴 "花石亭" 현판이 걸려 있으며 내부에는 율곡선생이 8세 때 화석정에서 지었다는 <八歲賦詩>가 걸려 있다고 한다.
20
점심 먹을 식당을 찾으며 달려 온 곳이 오두산통일전망대 밑이다. 여기까지 온김에 통일 전망대를 관람하기로 하고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셔틀뻐스로 전망대에 올랐다. 휴전선을 인접한 여러 곳에 통일전망대가 있으나 이곳이 북한땅을 가장 가깝게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과연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이 갈려 있었다. 마침 썰물이라서 강바닥은 갯벌이되어 해오라기가 휴전선과 관계없이 남북을 날으며 물고기 사냥을 하고 있었다. 육안으로 보아도 북한의 주택과 농경지가 보였다. 500원을 넣고 망원경으로 바라보니 가까이 볼 수 있으나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통일전망대에서 내려와 이 지방의 별미인 참게메운탕을 한다는 식당을 찾다가 U턴할 곳을 못 찾아 서울까지 나와서 송파구 어느 집에서 늦은 점심요기를 하고 동서울터미널에서 이번여행의 일정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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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선생 유촉지를 찾아보고자 떠난 여행은 서원순례만 하였다. 꿩 대신 닭이라고 없어진 유촉지를 우리 능력으로 찾기란 본래 가당찮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선생께서 밟으셨던 지역에서 선생께서 지으신 시를 읽어보고 선생의 體臭라도 느껴보고자 했음에 뜻을 두고, 경기지역의 書院文化를 답심한 것에 성과를 둘 수밖에 없다.
地理的으로 外侵의 피해지역이어서 서원도 예외일 수 없어 아직도 그 피해를 復舊하지 못하고 겨우 사당만 복구하여 존현의식만 치루고 있는 듯하였다. 조금 이름이 있는 서원은 당국의 예산지원을 받아 지역문화 보존차원에서 관리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가능하였다면 지역의 향토사학가와 연결이 되어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면 혹시 퇴계선생 유촉지를 찾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게 되었다면 그 지역에 대하여도 좀 더 많은 것을 듣고, 보고, 느꼈을 것인데 말이다.
다음이 또 이런 기회가 마련된다면 사전에 企劃을 잘하여 意味있는 여행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는 다짐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