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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하나님의 심판 (1절)
하나님은 진노하시며 진영 끝에 불을 보내십니다.
왜 진영 끝일까요?
③ 모세의 중보 (2절)
백성은 하나님께 직접 부르짖지 않고
모세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모세가 기도하자 불이 꺼집니다.
모세는 본서 전체에서
역할을 수행합니다.
후에 그리스도의 중보를 예표하는 인물로도 이해됩니다.
④ 다베라 (3절)
그 장소 이름을
다베라(Tab'erah)
라고 부릅니다.
뜻은 "불타오름"입니다.
성경에서 지명을 사건의 이름으로 부여하는 것은 그 사건을 기억하고 교훈으로 삼기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Ⅱ. 불평의 확대 (4-6절)
여기서 이야기가 한 단계 더 심각해집니다.
① 섞여 사는 무리 (4절)
본문은 먼저 "섞여 사는 무리"를 언급합니다.
이는 출애굽 당시 함께 나온 비이스라엘인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출 12:38).
본문은 민족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태도가 공동체 안으로 퍼졌음을 보여줍니다.
② 탐욕 (4절)
불평의 시작은 "탐욕"입니다.
히브리어는 "강한 욕망을 욕망하다"라는 강조 표현입니다.
즉, 단순히 배고픈 것이 아니라 욕망에 사로잡힌 상태입니다.
③ 집단적 전염 (4-5절)
처음에는 일부였지만
곧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전체 공동체가 참여합니다.
이것은 죄가 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빠르게 확산되는지를 보여줍니다.
④ 애굽에 대한 왜곡된 기억 (5절)
백성은 애굽의 음식들을 나열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들은 노예 생활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죄는 과거를 미화합니다.
고통은 잊고 즐거움만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 불평의 특징입니다.
⑤ 만나를 멸시함 (6절)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 말은 단순히 음식이 지겨웠다는 의미를 넘어, 하나님의 공급 자체를 하찮게 여기는 태도를 드러냅니다.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상징인데, 백성은 은혜보다 욕망을 더 크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Ⅲ. 만나에 대한 설명 (7-9절)
흥미롭게도 불평 직후에 성경은 만나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왜일까요?
이는 백성의 평가와 하나님의 실제 공급을 대비시키기 위한 문학적 장치입니다.
① 만나의 모양 (7절)
만나는 평범한 음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양식임을 강조합니다.
② 만나의 조리 (8절)
백성은
즉, 다양하게 활용 가능한 음식이었습니다.
불평처럼 먹을 것이 전혀 없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③ 만나의 맛 (8절)
기름 섞은 과자의 맛과 같았습니다.
이는 맛없는 음식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풍부하고 좋은 음식임을 나타냅니다.
④ 하나님의 지속적인 공급 (9절)
밤에 이슬이 내릴 때 만나도 함께 내렸습니다.
이는 만나가 우연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매일 신실하게 공급하시는 은혜임을 보여줍니다.
백성은 그 은혜를 일상적인 것으로 여기며 감사 대신 불평을 선택했습니다.
민수기 11:1-9은 '불평'과 '은혜'를 의도적으로 대조합니다.
백성은 하나님께서 매일 만나를 통해 신실하게 공급하고 계심에도 현재의 은혜보다 과거의 욕망을 더 크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단순히 음식에 대한 불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을 신뢰하지 못하는 마음이 어떻게 탐욕과 공동체적 불평으로 확산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어지는 11:10-35에서는 이러한 불평이 더욱 심화되어 모세의 탄식과 메추라기 사건으로 이어지며,
본문(11:1-9)은 그 전개를 여는 서론이자 신학적 배경 역할을 합니다.
감사를 잃으면 만나도 지루해집니다
본문: 민수기 11:1-9
오늘은 맥추감사절입니다.
맥추감사절은 구약에서 보리와 밀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며 감사했던 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씨를 뿌리게 하시고, 햇빛과 비를 주시며, 마침내 추수하게 하신 은혜를 기억하는 날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맥추감사절은 단지 농경사회의 절기를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상반기 동안 우리 삶을 붙드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보며 감사하는 신앙의 절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합니다.
왜 어떤 사람은 같은 환경에서도 감사하고, 어떤 사람은 같은 환경에서도 불평할까요?
감사하는 사람은 특별히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반대로 불평하는 사람은 반드시 더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감사와 불평의 차이는 환경의 차이가 아니라 시선의 차이입니다.
감사는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것을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반면 불평은 아직 내게 없는 것만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감사는 "이만큼이나 주셨습니다"라고 말하지만, 불평은 "왜 이것밖에 없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감사는 받은 은혜를 기억하지만, 불평은 부족한 것만 계산합니다.
그래서 똑같은 식탁을 앞에 두고도 한 사람은 "먹을 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고,
다른 사람은 "먹을 것이 이것뿐인가?"라고 불평합니다.
똑같은 가정을 두고도 한 사람은 "가족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가족의 부족한 점만 바라봅니다.
똑같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다른 사람은 불편한 것만 찾습니다.
결국 감사와 불평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고, 형편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민수기 11장은 바로 이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결코 은혜가 부족했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며,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매일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이셨습니다.
그들은 기적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입에서는 감사가 아니라 원망이 나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만나보다 아직 주어지지 않은 고기를 더 크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기억하는 대신 부족함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너는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느냐?
내가 베푼 은혜를 바라보고 있느냐,
아니면 아직 없는 것만 바라보고 있느냐?"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시선이 부족함에서 은혜로,
불평에서 감사로 옮겨지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감사를 잃으면 은혜도 당연해집니다. (1절)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백성이 하나님을 향하여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단순히 불평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원망을 들으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원망을 심각하게 여기셨을까요?
그 이유는 그들의 원망이 단순히 음식이나 환경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는 태도였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기록된 시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애굽의 노예였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단 하루도 자유를 얻을 수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열 가지 재앙을 통해 그들을 구원하셨고,
홍해를 갈라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셨습니다.
광야에서는 구름기둥으로 낮을 인도하시고, 불기둥으로 밤을 밝히셨습니다.
마실 물이 없을 때는 반석에서 물을 내셨고, 먹을 양식이 없을 때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들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그 은혜에 익숙해졌습니다.
처음 만나를 보았을 때 백성들은 놀랐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며 신기해했고,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 주셨다는 사실에 감격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만나'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자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또 만나입니다.
저녁이 되어도 만나입니다.
내일도 만나이고, 모레도 만나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적에 익숙해졌습니다.
은혜는 변하지 않았는데,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처음 직장을 얻었을 때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일할 수 있는 직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왜 일이 이렇게 많습니까?"
"왜 월급은 이것밖에 안 됩니까?"
불평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결혼했을 때는
"이 사람을 만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눈물로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감사는 사라지고, 상대의 부족함만 보이기 시작합니다.
건강할 때는 건강이 당연한 줄 알고 살아갑니다.
병원을 찾게 되어서야 건강이 얼마나 큰 선물이었는지 깨닫습니다.
주일마다 예배드리는 것도 그렇습니다.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평소에는 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을 잃을 위기에 처하면 비로소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사람은 계속되는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가장 큰 적은 가난이 아닙니다.
감사의 가장 큰 적은 익숙함입니다.
익숙함은 은혜를 평범한 일상으로 만들고, 평범한 일상은 결국 당연함이 됩니다.
그리고 당연함은 감사를 빼앗아 갑니다.
감사가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들어옵니까?
원망입니다.
감사가 떠난 마음은 반드시 불평으로 채워집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풍성하게 가지고도 불평하며 살고,
어떤 사람은 부족한 가운데서도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환경의 차이가 아니라 마음의 차이입니다.
신앙은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느냐보다 받은 은혜를 얼마나 기억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고, 감사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할 수 있습니다.
맥추감사절은 하나님께 새로운 은혜를 달라고 요구하는 날이 아니라,
이미 베풀어 주신 은혜를 다시 기억하는 날입니다.
지난 6개월을 돌아보십시오.
큰 사고 없이 여기까지 오게 하신 것도 은혜입니다.
가정을 지켜 주신 것도 은혜입니다.
일할 수 있는 힘을 주신 것도 은혜입니다.
예배할 수 있는 믿음을 지켜 주신 것도 은혜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새로운 기적을 기다리느라 이미 받고 있는 기적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은혜를 거둔 것이 아니라, 네가 감사를 잃어버린 것은 아니냐?"
맥추감사절은 잃어버린 감사를 회복하는 절기입니다.
감사가 회복될 때,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이 다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2. 원망은 없는 것을 크게 만들고, 있는 것을 작게 만듭니다. (4-6절)
이제 본문은 백성들의 원망이 얼마나 깊어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여기서 먼저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탐욕을 품으매"입니다.
문제는 배고픔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만나를 통해 충분히 먹이셨습니다.
생존에 필요한 양식을 부족함 없이 공급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고기가 먹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필요(need)의 문제가 아니라 욕망(greed)의 문제였습니다.
욕망은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것을 만족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욕망은 전염성이 있습니다.
본문은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라고 말합니다.
몇 사람의 불평이 공동체 전체의 불평이 되었습니다.
불평은 감기처럼 전염됩니다.
한 사람이 "힘들다"고 말하면 곧 다른 사람도 따라 말합니다.
한 사람이 원망을 시작하면 공동체의 분위기가 금세 무거워집니다.
반대로 감사도 전염됩니다.
감사하는 사람 곁에 있으면 감사의 이유가 보이고, 믿음의 고백이 들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말을 듣고, 어떤 말을 하는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어서 백성들은 애굽을 그리워하기 시작합니다.
5절입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난다."
이 말을 들으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정말 애굽이 그렇게 좋은 곳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애굽은 그들이 노예로 살던 곳입니다.
벽돌을 만들기 위해 강제노역을 했고, 채찍을 맞았으며, 아들들은 나일강에 던져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고통을 다 잊어버리고 음식만 기억합니다.
이것이 원망의 무서움입니다.
원망은 기억을 왜곡합니다.
은혜는 잊게 만들고, 욕망은 미화합니다.
과거의 고통은 작게 만들고, 과거의 즐거움만 크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은 현재에 불만이 많을수록 과거를 아름답게 포장합니다.
"예전이 좋았는데."
"그때가 행복했는데."
그러나 정말 그때가 행복했던 것입니까?
아닙니다.
현재의 불만이 과거를 미화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탄은 늘 이렇게 속입니다.
"하나님을 따라온 결과가 이것이냐?"
"세상에 있을 때가 더 좋지 않았느냐?"
이스라엘 백성도 그 거짓말에 속아 자유보다 음식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6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였으니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이 말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만나밖에는 없다."
얼핏 맞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전혀 다른 말이 됩니다.
'이 만나밖에는 없다'가 아니라 '이 만나라도 있다'가 맞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가 있다."입니다.
세상 어디에 매일 하늘에서 음식이 내려오는 민족이 있습니까?
광야에서 농사도 짓지 않았습니다.
시장을 갈 수도 없었습니다.
창고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도 굶지 않았습니다.
그 자체가 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원망은 기적을 평범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말을 자주 하지 않습니까?
"집이 이것밖에 안 돼."
"월급이 이것밖에 안 돼."
"교회가 이것밖에 안 돼."
"건강이 이것밖에 안 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정말 '이것밖에' 없느냐?"
생명이 있습니다.
가족이 있습니다.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배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숨 쉬며 살아 있습니다.
원망은 '없는 것 하나'를 크게 확대하여 '있는 것 아흔아홉'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반대로 감사는 '있는 것 하나'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합니다.
맥추감사절은 바로 시선을 바꾸는 절기입니다.
무엇이 부족한지를 세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이 채워 주셨는지를 세는 날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하나씩 기억하기 시작하면, 원망은 점점 설 자리를 잃습니다.
감사는 문제를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함이 없는 척하는 것도 아닙니다.
부족함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입술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왜 이것밖에 없습니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이것까지도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입니까?
감사는 환경이 만들어 내는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선택입니다.
맥추감사절을 맞아 원망의 언어를 내려놓고 감사의 언어를 회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3. 감사하는 사람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기적을 봅니다. (7-9절)
본문은 갑자기 분위기가 바뀝니다.
백성들의 원망을 기록하던 모세는 7절부터 만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합니다.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이어 8절에서는 백성들이 만나를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고 절구에 찧기도 하며,
냄비에 삶기도 하고 과자를 만들어 먹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맛은 기름 섞은 과자와 같았다고 말합니다.
9절에서는 밤에 이슬이 내릴 때 만나도 함께 내렸다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왜 성경은 갑자기 만나의 모양과 맛과 사용하는 방법까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하찮게 여기고 있는 만나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를 다시 보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눈에는 '지겨운 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매일 베푸시는 기적'이었습니다.
사람은 감사하지 않으면 기적도 일상이 됩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은 일상도 기적으로 봅니다.
첫째, 만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증거였습니다.
만나는 하루 이틀 내려온 것이 아닙니다.
광야 생활 내내 하나님께서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백성들이 잠들어 있는 밤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다음 날 먹을 양식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만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내가 오늘도 너를 버리지 않았다."
"오늘도 내가 너를 책임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한꺼번에 40년 치 양식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매일 하루 분량씩 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매일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일이 불안해서 많은 것을 쌓아 두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늘 필요한 은혜를 오늘 주십니다.
오늘의 힘을 주시고, 오늘의 건강을 주시고, 오늘의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오늘의 평안을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우리에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오늘 주신 은혜를 보며 내일도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을 믿습니다.
둘째, 만나는 평범한 일상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기적이라고 하면 병이 낫는 일이나 놀라운 사건을 떠올립니다.
물론 그것도 기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 다른 기적을 보여 줍니다.
매일 반복되는 하나님의 돌보심입니다.
매일 해가 뜨는 것. 매일 숨을 쉬는 것. 매일 가족과 함께 식사하는 것. 매주 예배의 자리로 나올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만나를 너무 자주 보았기 때문에 기적이라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자주 경험하기 때문에 은혜인 줄 모를 때가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건강을 잃어 보기 전에는 잘 모릅니다.
가족과 함께 밥을 먹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혼자가 되어 보기 전에는 잘 모릅니다.
교회에서 함께 예배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예배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보기 전에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감사는 평범한 것을 특별하게 보는 눈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을 믿음의 사람은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셋째, 감사는 하나님의 선물을 넘어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만나를 음식으로만 보았습니다.
그래서 금세 싫증이 났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만나는 단순한 음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선물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서 작은 선물을 받아도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물건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준 사람의 마음 때문입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그린 서툰 그림 한 장도 평생 간직하는 이유는
그림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아이의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만나는 단순한 양식이 아니라,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잊지 않았다."
"내가 오늘도 너와 함께한다." 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선물보다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그래서 환경이 조금 달라져도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맥추감사절은 특별한 기적이 있었는지를 묻는 날이 아닙니다.
오늘까지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지난 상반기를 돌아보십시오.
생각지 못한 어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은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는 문제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기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넘어질 때 붙들어 주셨고, 눈물 흘릴 때 위로해 주셨으며, 필요할 때 사람을 보내 주셨고, 매일의 삶을 책임져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만나'입니다.
기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예배할 수 있는 것이 기적입니다.
오늘도 생명을 주신 것이 기적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기적입니다.
감사는 특별한 날에만 드리는 예식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는 믿음의 삶입니다.
맥추감사절을 맞아 우리 모두가 "이것밖에 없다"는 원망의 눈을 거두고,
"이렇게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감사의 눈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일상은 다시 하나님의 기적으로 빛나게 될 것이며,
우리의 삶은 감사의 제사가 하나님께 올려지는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결론: 감사는 은혜를 완성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는 민수기 11장을 통해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배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는 만나가 부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감사를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감사를 잃자 원망이 들어왔고, 원망이 들어오자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광야보다 더 메마른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광야가 사람을 힘들게 한 것이 아니라, 감사 없는 마음이 그들을 무너지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지난 상반기 동안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까?
돌이켜 보면 우리의 삶도 만나의 연속이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가족을 지켜 주셨습니다.
일할 수 있는 건강을 주셨습니다.
교회에서 예배하게 하셨습니다.
기도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때마다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어려운 일이 없었던 것이 은혜가 아니라, 어려운 일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셨던 것이 은혜입니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한 번도 홀로 두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 "왜 이것이 없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되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주지 않은 것이 더 많으냐, 아니면 이미 준 것이 더 많으냐?"
이 질문 앞에 서면 우리는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감정이 아닙니다.
기분이 좋을 때만 하는 말도 아닙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환경이 좋아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하시기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정이 다 해결되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심을 믿기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감사로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순간마다 먼저 감사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도 떡을 들어 감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시면서도 떡과 잔을 들어 감사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 앞에는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배신이 기다리고 있었고,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고,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감사하셨습니다.
왜입니까?
감사는 현재의 상황보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더 신뢰하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감사는 결국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는 문제를 없애는 마법이 아닙니다.
그러나 감사는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감사는 현실을 바꾸기 전에 먼저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
우리의 마음이 바뀔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새롭게 이끌어 가십니다.
오늘 맥추감사절을 지키고 돌아가면서 한 가지를 결단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는 오늘 하루의 행사가 아니라, 내일부터 이어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하나님, 오늘도 생명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식탁 앞에서 "오늘도 먹을 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족을 바라보며 "부족하지만 함께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교회에 나올 때마다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오늘도 여기까지 인도하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감사가 쌓이면 우리의 신앙도 자랍니다.
감사가 있는 가정에는 평안이 자라고, 감사가 있는 교회에는 기쁨이 넘치며,
감사가 있는 성도는 어떤 형편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만나를 잃은 것이 아니라 감사를 잃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잃은 것이 아니라,
혹시 그 은혜를 기억하는 마음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맥추감사절은 단순히 상반기를 결산하는 절기가 아닙니다.
은혜를 다시 기억하고, 감사를 다시 회복하며,
앞으로도 신실하게 인도하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절기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이 예배를 통해 우리의 입술에서 원망이 사라지고 감사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눈이 부족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바라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남은 한 해도 매일 내려 주시는 '오늘의 만나'를 기쁨으로 받으며,
작은 일에도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고백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