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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래정씨 대구경북화수회 원문보기 글쓴이: 의재(毅齋)/정재홍
조상 묘(墓)에 대한 전래(傳來) 설화(說話)
호장(戶長)에 대하여
호장(戶長)이란 향직(鄕職)의 우두머리이다. 고려 태조 때 신라시대 이래로 지방에 세력을 펴고 있던 성주(城主)나 호족(豪族)을 그대로 포섭하여, 호장(戶長) 부호장(副戶長)의 향직을 주었고, 지방자치 면에서 많은 실적을 거두었다. 고려 성종2년(983)에 태조 당시의 당대등(堂大等)을 호장(戶長)으로 장대등(長大等)을 부호장으로 고쳤으며, 현종9년(1,018)에 정원을 각 주(州)에 따라 1,000정(丁) 이상은 8명, 500정(丁)이상은 5명, 100정(丁) 이하는 4명으로 하고, 그 권한은 수령이 매사에 호장과 의논하여 정치를 하도록 하였으며, 70세가 지난 호장은 안일호장(安逸戶長)에 속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와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중앙집권 체제의 발달로 수령(守令) 밑에 있는 아전으로 격(格)이 떨어졌다.
정묘(鄭墓)이야기
정묘(鄭墓)라 함은 부산 화지산(華池山)에 있는 2세조 휘(諱) 문도(文道) 공의 묘(墓)를 일반적으로 정묘(鄭墓)라 하지만, 예부터 용궁현(龍宮縣) 지금의 예천군 지보면에 소재한 13세(世) 직제학(直提學)공 휘(諱) 사(賜)의 묘와 두 묘(墓)를 함께 정묘(鄭墓)라 한다. 곧 양대 정묘라고도 함.
①화지산(華池山) 정묘(鄭墓)의 전설
화지산(華池山) 정묘(鄭墓)의 전설은 몇 가지로 대동소이한 전설을 이루고 있다. 청주고(高)씨(상당 고씨라고도 함) 시조로 고익공(高益恭)이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 수령(守令)으로 내려와서, 정문도(鄭文道) 공께서 호장으로 있을 무렵 두 사람이 공무(公務)로 만나 업무를 처리하고 의견을 나누던 사이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고익공(高益恭)이 화지산에 이르러 명산임을 암시하며, 달걀을 이곳에 묻어 부화 여부를 시험할 때, 문도(文道)공의 아들 목(穆)이 고의(故意)로 무정란(無精卵)을 묻어 부화하지 못하게 하여 후일에 그 아버지의 묘소로 잡았다는 설이 있고, 일설에는 고공익(高恭益)이 “명산 터인데…”라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을 익혀 두었다가 묘 터를 잡았다는 등의 이야기가 전한다. 하여튼 동래군지(東萊郡誌)의 기록에는 공(公)의 상여(喪輿)가 이 산에 이르니 호랑이가 앉아서 눈 녹은 자리가 있어 그 곳에 장사(葬事)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雪消虎距之地)
동래 수령으로 몇 년을 지나 임기가 만료되어, 고익공(高益恭)은 중앙관서로 진출하고, 문도(文道) 공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 아들 목(穆)과 아우 선조(先祚) 형제는 공익공(高益恭) 수령이 이 자리를 명산 터로 암시하던 곳임을 깨달아 화지산(華池山)에 상여를 메고 갔을 때 겨울인데 호랑이가 앉아 있던 자리가 눈이 녹아 있어 기이한 일이라 이 자리에 장사를 지냈다 한다.
문제는 그 이튿날 형제가 묘지에 가 보니 누구의 소행인지 묘지가 파헤쳐져서 관이 밖으로 나와 있었다. 형제는 다시 묘를 봉하고 그날 밤에 묘 부근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 한 밤 중에 이르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도깨비들이 모여들어 “여기가 어디라고 이 나무 관을 묻었어! 금관을 묻을 자리인데……” 하면서 묘를 파헤쳐 놓고 사라졌다. 두 형제는 금관이라는 말에 어이가 없는지라 당황하고 울고 있었다.
이 때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밤중에 어쩐 사람들인고 하며 사연을 묻는 게 아닌가? 형제는 급한 대로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기에 이르렀다. 노인은 “그것은 도깨비들의 장난인데, 도깨비 눈에는 보릿짚이 금빛으로 보일 터이니 보릿짚으로 잘 싸서 묻어두게” 하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튿날 형제는 보릿짚으로 관을 빈틈없이 싸서 다시 묻고 밤에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자정이 되자 도깨비가 또 나타나서 무덤을 파려고 하였으나, 달빛에 보릿짚이 황금빛으로 보였다.
도깨비들은 금관이 묻혔으니 이제야 묘 터 주인이 맞게 들었구나! 하며 사라졌다.
이튿날은 겨울인데 뇌성을 치며 벼락이 맞은 편 안산(案山)에 괴시암(怪視岩:속설에 도깨비 바위라 함)을 산산이 부숴 버렸다.
그 후에 목(穆)은 대감이 된 고익공(高益恭)을 찾아 개성으로 갔다. 오래간 만에 인사를 받은 대감은 아버지의 안부를 묻게 되고 화지산(華池山)에 묘를 드렸다고 하였더니, 안색이 변하면서 “당시에 아무런 일이 없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목(穆)은 묘(墓)를 쓰고 도깨비들의 이야기와 뇌성벼락이 괴시암(怪視岩)을 부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때서야 고대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가 동래에 있을 때 산세가 뛰어나서 선산명당이라고 보았지만 맞은 편 바위 때문에 자손 중 역적이 나올 터이라 그냥 버렸지! 그러나 하늘의 도움으로 바위가 깨어졌으니 이제는 묘소의 화근(禍根)은 없어진 명당(明堂)일세” 하였다.
그 다음 고대감은 목(穆)을 집안에서 거두어 가르쳐서, 과거에 응시(應試)시켜 급제하고, 관직으로 출사(出仕)하게하여 자기 딸과 혼인시켜 사위를 삼았다. 이후로 동래정씨가 개성의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되고, 자손이 번성하여 그야말로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한다. 전국의 명당이 서울 인근의 터는 왕릉(王陵)으로 몰수되고, 서울에서 먼 지방의 명당(明堂)은 왕자의 태실지(胎室地)로 흡수되었지만, 화지선산(華池先山) 만은 수많은 전란(戰亂)에도 온전히 보존되어 왔고, 전국에서 손꼽히는 명당으로 수많은 재상과 인물들을 배출하면서 의연하게 보존되고 있으며, 이 묘는 금계포란(金鷄抱卵)의 형국이라, 즉 암탉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자손이 융성하고 번창 할 명당이다. 자손 된 사람은 조상숭모(祖上崇慕)의 정신으로 받들어 모셔야 할 성지(聖地)이다.
②용궁(龍宮) 정묘(鄭墓)
용궁 지금 예천군 지보면 도장리에 있는 정묘(鄭墓)는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휘(諱) 사(賜)의 묘이다. 공은 예문관 직제학으로 있다가 진주(晉州) 목사(牧使)로 나아가 선정(善政)을 베풀다가 모친상을 당하여 돌아와서 단종(端宗) 계유(癸酉)년에 54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는데, 지관(풍수)이 명당을 찾는데, 이 자리에 도착해 보니 이미 차일이 쳐 있고 산역을 하는 중이었다. 지관은 서둘지 않고 구경이나 해 봅시다 하며 현장에 가 보니 먼저 온 사람들이 땅을 파 보니 물이 솟아나서 도저히 산소를 드릴 수 없어 다른 곳을 찾아 가게 되었다. 상주가 그쪽 상주와 인사를 나눈 다음 이왕 버리고 가는 곳이니 양도를 해 주시오 하고 양도를 받았다.
이쪽 지관은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지세를 살펴보더니 지관은 지보리와 삼태봉의 뒤편에 있는 해평동(海坪洞:속칭 부리기)과 구촌동(龜村洞) 들머리에 가각 우물을 파게 하였다. 그와 동시에 광중(壙中)에 샘솟던 물이 쭉 빠져 버리지 않는가. 하도 신기하여 왕겨를 뿌려 보았더니 그 왕겨가 새로 판 우물로 흘러 나왔다 한다. 그러나 문제는 또 있었다. 다른 분이 이 혈(穴)은 옥녀가 누워있는 형국(形局)인데 마주보는 안산(案山)의 장군봉이 옥녀의 지아비가 되지만 청룡등 뒤의 산이 또한 옥녀를 넘보고 있어 이 혈에 묘를 쓰면 화를 면할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관은 그것을 알고 이에 대한 방제를 했다고 한다. 시신의 향과 묘(墓) 봉분의 향(向)을 다르게 하여 화(禍)의 기운을 피하였다고 한다. 이 산소는 자좌오향(子坐午向)인데 그 앞에는 습지(濕地)가 있어 항상 물기가 질퍽하니 과연 격(格)을 갖춘 명산대지(名山大地)라 한다. 이 산소의 형세는 옥여측와형(玉女側臥形)으로 지보(知保)라는 지명(地名)의 연원(淵源)이며, 자손 중 정승이 13명이요, 영직인 대제학이 2명이고,판서 이하의 고관들은 헤아릴 수 없고, 속칭 회동(會洞) 정씨(鄭氏)들이 모두 이 자손들이다.
전서(典書)공 규(規)의 묘
전라북도 정읍시 옹동면 쌍산리(상두산)에는 12세(世)로 병부전서(兵符典書)를 지내신 휘(諱) 규(規)의 묘소가 있다. 공은 호(號)를 운학재(雲壑齋)라 하며 산소는 수구(水口)막이라는 들 가운데 돌을 모아 그 위에 비석을 세웠는데, 산소의 운기가 흘러 나가지 않도록 방비하였다는 설화가 있는 산소이며, 재실은 충남 천안시 성거읍 문덕리에 있고, 공의 증손자 청송(靑松) 휘(諱) 자당(子堂)이 홍문관 교리를 지내고, 연산 무오사화 와 갑자사화를 피하여 명인이 되고, 노년에 벼슬을 버리고 천안에 은거하여 세거지(世居地)를 이루고 있다.
설학재(雪壑齋)공 휘(諱) 구(矩)의 묘
경기도 의정부시 용현동에 설학재(雪壑齋)공 휘(諱) 구(矩)의 묘소가 있다. 공은 고려 우왕 3년(1377)에 문과에 급제하여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지냈고, 조선조에 의정부좌찬성보문각대제학(議政府左贊成寶文閣大提學) 및 여러 벼슬을 제수하고 저택과 분토산까지 하사하였으나 불취하고 송산(松山)에서 일생을 마쳤다. 공은 서예에도 뛰어나 태조대왕건원릉(太祖建元陵)의 제액(題額)을 전서(篆書)로 쓰셨다. 공이 돌아가시자 태종은 정절(靖節)이라 시호(諡號)하고 어치제문(御致祭文)까지 내렸다.
묘소가 양주(楊州) 어룡동(魚龍洞)에 있었으나 전란으로 실묘(失墓) 하였는데 8대손 기(耆)의 꿈에 계시(啓示)한 바 있어 찾아 재실도 지었으나 도시의 확장으로 1977년 이곳으로 산소를 옮겨 모시고, 2002년 새로 재실 송산재(松山齋)와 숭정사(崇靖祠)를 지어 공을 주벽으로 두 아드님 휘(諱) 선경(善卿)과 효경(孝卿)을 좌우로 모셨다.
부윤(府尹)공 휘(諱) 부(符) 문경(文景)공 휘(諱) 흠지(欽之)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 장현리에 부윤(府尹 諱: 부)공과 문경(文景)공 부자(父子)분의 묘소가 상하로 자리하고 있다. 특히 문경공 휘(諱) 흠지(欽之)께서 돌아가시자 세종께서 관곽(棺槨)과 석회70석을 하사하고 시호를 문경(文景)이라 하였으며, 풍양(豊壤)현 직동(直洞 : 지금의 광릉) 선친 휘(諱) 부(符)의 계하(階下)에 장례하고 세조 7년에 제4자 휘(諱) 창손(昌孫)의 귀(貴)로 의정부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되었다. 그러나 세조(世祖)가 승하하여 능침소(陵寢所)로 금표(禁標 : 지금의 수용령)에 의하여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 장현리 봉현(속칭 : 벌의재) 경좌(庚坐)에 이장하였다. 구전에 의하면 이장할 때 운구 도중에 겨울인데 벌 떼가 덥쳐 앞길을 막아 상여를 세웠고, 벌이 떼지어 앉은 곳이 명당인지라 거기에 묘소를 드렸다 한다. 이 묘역에는 부윤공과 문경공이 상하로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