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이서 1:1-6
찬송가 218장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
요한이서는 요한일서를 기록한 사도 요한이 지역 교회와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서로서 AD 90년경에 기록됐습니다. AD 90년경은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듣고 만졌던 사도들이 거의 다 사라지고, 간접적으로 예수님에 대해 듣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성도들이 주를 이뤘을 때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복음은 로마 제국의 박해에 굴하지 않고 그리스-로마 세계 전역에 널리 전해졌고, 가정 교회들도 두루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흥왕함과 동시에 거짓 교사들, 대표적으로 영지주의 이단도 세를 떨쳤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정하며 십자가와 부활을 믿지 않는 그들은 성도들을 미혹하여 실족시켰습니다.
당시 복음은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던 순회전도자들에 의해 여러 지역으로 퍼졌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순회전도자들을 영접하여 숙식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한 섬김 과제였습니다. 그러나 이단은 이를 교묘히 이용했습니다. 순회전도자로 위장한 거짓 교사들은 여러 교회를 다니며 거짓 교리를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순회전도자 중 어떤 이를 환영하며 강단에 세워야 하고, 어떤 이는 허락하지 말아야 할지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듣고 만졌던 사도 요한은 이런 상황 속에서 이단의 도전을 물리치고 교회를 지켜야 할 책임이 막중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요한은 펜을 들어 요한이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요한이서는 인사말-본론1-본론2-끝인사 크게 네 부분으로 이뤄져 있는데 오늘은 그 중 앞의 두 부분, 인사말과 본론1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인사말(1-3절)
1-3절은 요한이서의 첫 부분으로 인사말입니다.
(1) 장로인 나는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서신서답게 1절에는 발신자와 수신자가 등장합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의 이름을 적지 않고 자신을 ‘장로’로만 호칭하며 발신자를 밝히고 있습니다. ‘장로’라는 호칭만 이야기해도 그가 사도 요한임을 수신자들이 알아차릴 수 있었을만큼 사도 요한과 수신자가 가까운 관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신자로 언급된 ‘부녀와 그의 자녀들’은 특정 인물로 보는 의견과 부인으로 의인화된 지역 교회와 성도들로 보는 의견으로 나뉩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문맥, 성경 및 당시의 용례 등을 고려하여 수신자를 지역 교회와 성도들을 의인화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1절 하반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그들을 참으로 사랑했고, 자신뿐만 아니라 진리를 아는 자인 성도들도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즉, 교회 간, 성도 간에 사랑이 흘러넘쳤습니다. 그들의 교회 안에 이처럼 사랑이 흘러넘칠 수 있었던 이유를 2절이 밝히고 있습니다.
(2)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로 말미암음이로다
여기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교회 간, 성도 간에 사랑이 흘러넘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 거하시며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따라서 사랑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모시고 있는 사람에게서 안팎으로 사랑이 넘쳐흐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 또한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넘쳐흐르는 곳을 보면 그 가운데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안에 계시며,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모심으로 우리에게서 사랑이 넘쳐흐르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그런 우리가 모인 100주년기념교회가 본문 속 교회 공동체처럼 사랑으로 충만하기를 소망합니다. 이처럼 사랑으로 충만한 사도 요한은 3절과 같이 지역 교회와 성도들을 축복했습니다.
(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사도 요한은 지역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은혜, 긍휼, 평강 세 가지 복을 빌었습니다. 은혜는 복의 시작점이고, 긍휼은 복의 실제적 표현이고, 평강은 복의 결과입니다. 복은 죄인인 인간에게 조건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출발하여 우리에게 긍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은혜와 긍휼이 우리에게 임할 때 그 결과로서 평강 즉, 영적 측면을 포함한 전 영역에서의 온전함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처럼 사도 요한은 수신자에게 꼭 필요한 복을 사랑을 담아 빌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대부분의 서신서들과 달리 요한이서가 지닌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바로 축복의 대상이 ‘우리와 함께’라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서신서는 ‘너희에게’라며 수신자들을 축복하는데 요한이서는 ‘우리와 함께’라며 축복의 대상에 요한 자신을 포함시켰습니다. 이는 사도 요한과 수신자 교회 사이의 깊은 유대감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사도 요한은 교회 공동체가 반드시 지녀야 할 진리와 사랑을, 즉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서로 사랑하는 삶을 자신부터 몸소 실천했습니다.
이제 사도 요한은 사랑과 친밀함을 가득 담은 인사말을 매듭짓고,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본론 첫 번째 부분인 4-6절은 이단에 대응하는 첫 번째 수칙으로 진리를 굳게 붙잡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행함(4-6절)
(4)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사도 요한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를 지켜 행하는 성도들을 그가 봤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사도 요한의 기쁨은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며 그 말씀을 지켜 행할 때 기쁨을 감추지 못하십니다. 그러나 4절에는 노사도의 걱정도 담겨있습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있는 성도라면 마땅히 사랑의 계명을 지켜 행해야 하는데 ‘너의 자녀들 중’ 일부만이 사랑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체 교인 중 일부만이 진리 안에 거하고 행했던 것입니다. 앞선 서신 요한일서 2장 19절에 보면 교인 중 일부가 영지주의 이단을 좇아 교회 공동체를 떠난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비극이 되풀이 될 가능성이 보였기에 사도 요한의 내적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도할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 사도 요한은 기본을 권면합니다.
(5)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한글 성경에는 교회를 부르는 말인 ‘부녀여’가 가장 먼저 언급됐지만 원문에는 ‘그리고’를 뜻하는 접속사 ‘카이’ 다음으로 ‘이제, 지금’을 뜻하는 시간 부사 ‘뉜’이 가장 먼저 나왔습니다. 시간 부사가 ‘뉜’이 문장 맨 앞에 쓰일 때는 이후 언급될 말을 강조하여 청중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효과를 줍니다. 게다가 사도 요한은 정중하게 구했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본 사도요, 교회의 연장자로서 권위를 지녔던 그였기에 교회와 성도들을 명령해도 됐지만 그는 구했습니다. 여기서 구하다로 쓰인 헬라어 ‘에로타오’는 상대를 존중하는 정중한 요청과 더불어 간절한 호소를 뜻하는 말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귀신들린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했을 때 ‘간청하다’로 번역된 단어가 ‘에로타오’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처럼 겸손하고도 간절하게 호소했을 때 수신자 교회와 성도들은 귀를 넘어 마음까지 기울여 들었을 것입니다. 모든 무게를 실어 구한 노사도의 권면은 단순했습니다. “서로 사랑하자”
초대교회 교부인 제롬은 사도 요한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연로하여 쇠약해짐으로 더 이상 설교를 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에베소 교인들 앞에 나가서 한 마디씩 권면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권면할 때마다 “어린 자녀들이여, 서로 사랑하시오.”하고 같은 말만 되풀이 했습니다. 매 번 같은 권면을 듣는 것이 식상했던 청중이 견디다 못해 사도 요한에게 왜 같은 말만 되풀이하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것만 잘 실천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처럼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제자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가 평생 새기고 실천하며 지냈던 그의 신앙의 정수였습니다. 그는 5절 하반절에서 이 계명이 새 계명이 아니라 신앙생활 시작할 때부터 들어온 기본임을 상기시켰습니다. 따라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더 이상 아느냐 모르느냐가 아니라 실천하느냐 실천하지 않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를 오늘날 우리의 신앙으로 치환해보면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교회학교 시절 ‘아름다운 마음들이 모여서’ 찬양을 부르며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버리고 우리 서로 사랑해’라고 고백할 때부터 듣고 배워온 신앙의 기본인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성도들이 자기 마음대로 사랑의 개념을 왜곡시키지 않도록 6절에서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6)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행함입니다. 즉 행함을 수반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몇 사람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과는 달리 모든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자 애쓰는 의지의 수고입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개인적 유익을 따지지 않고, 오직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도모하며 자기를 내어주는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상대를 사랑한다 치고 먼저 의지를 써서 행동하는 것이고, 그 후 진짜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행함이 수반된 아가페 사랑을 이단에 대한 첫 번째 대응책으로 제시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단들은 말로만 사랑을 외칠 뿐 행함이 결여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위대하고 고상한 일만 사랑의 행함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6절에 두 번 쓰인 ‘행하는 것’, ‘행하라 하심이라’에서의 ‘행하다’와 4절에 한 번 쓰인 ‘행하는 자’에서 ‘행하다’는 모두 헬라어 ‘페리파테오’가 쓰였습니다. ‘페리파테오’는 ‘이리저리 걷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걸음처럼 일상적 행함으로서의 사랑을 말한 것입니다. 한걸음씩 뗄 때마다 우리의 사랑도 같이 행해져야하는 것입니다. 걸음과 같이 평범하고 당연한 일상 속에서 사랑을 힘써 행하는 것이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진정 순종하는 것입니다.
추석명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첫 순간부터 지금까지 들어왔던 ‘서로 사랑하라’의 계명을 행함으로 나타낼 기회가 우리 눈앞에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감정과 호의를 넘어 의지로 먼저 사랑을 행할 때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사랑의 수고에 임하셔서 사랑의 역사를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렇게 온 가족을 사랑으로 물들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로 쓰임받는 이번 추석 명절 되시길 축복합니다.
기도
사랑이신 하나님 아버지, 죄인인 우리에게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들어왔던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앞에 행함으로 반응하기 원합니다. 이번 추석 명절에 행함의 사랑을 나타낼 때 우리를 통하여 사랑의 역사를 펼쳐주십시오. 그리하여 우리가 머무는 가족 공동체가 사랑으로 물들게 해주십시오. 정의와 공의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고, 영원까지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을 때 내 삶에 어떤 변화가 나타날지 묵상해 봅시다.
2. 내가 속한 교회 공동체에서 사랑을 보고 듣고 경험하고 있습니까? 이를 위해 나는 무엇을 실천할 수 있을지 묵상해 봅시다.
3. 내가 의지를 사용하여 아가페 사랑을 실천해야 할 사람들은 누구인지 묵상해 봅시다.
4. 사랑을 행하는 것이 나의 일상에서 어느 정도의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5. 이번 추석 명절에 가족에게 어떤 사랑의 행함을 실천할지 결단해 봅시다.
(작성 : 강동윤)